Buford Lord of Glory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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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3/2026

제 198회 영광의 달음질 칼럼 (May, 13, 2026)

교회는 주님과 성령으로 살아 움직이는
거룩한 희생의 공동체 이어야 합니다,

저는 한국 방문을 마치고 그린빌장로교회에서 금주(17일)부터 새로운 목회의 여정을 시작하게 됩니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부족한 사람을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앞으로 교회와 함께 걸어갈 길을 생각할 때 마음 한편에 두려움과 기대가 함께 있습니다. 새로운 사역지로 나아가며 제 마음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교회는 무엇으로 세워지는가?” 오늘날 성도들이 교회를 건물이나 조직으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교회를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단순히 사람들이 모인 종교 단체가 아니라.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나눈 사람들의 공동체라 말씀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몸을 찢기시고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하나 된 영적 가족이라 말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성도들을 향하여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말씀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세상의 혈연보다 더 깊은 은혜의 관계로 묶인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화려한 건물보다 시설보다 믿음의 사람이 중요합니다. 예배당은 교회의 본질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과정 속에서 주어진 열매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짜 교회는 성도들의 삶 속에서 세워집니다. 19세기의 사상가 존 러스킨은 “교회를 세우는 재료가 철근과 시멘트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는 교회를 세우는 요소로 진리와 아름다움, 사랑과 희생, 순종과 땀, 그리고 꿈을 이야기했습니다. 참으로 깊은 통찰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사랑 없이 세워질 수 없습니다. 희생 없는 공동체는 오래갈 수 없습니다. 진리가 없는 교회는 방향을 잃게 됩니다. 성령의 역사가 없는 교회는 생명을 잃게 됩니다. 에베소서에서 사도 바울은 교회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졌다,”고 말했습니다. 교회는 시대의 유행이나 인간의 생각 위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목숨 걸고 붙들었던 복음 위에 세워진 곳이라는 것입니다.

그 중심에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가 계셨습니다. 또한 바울은 여기서 예수님을 “모퉁잇돌”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건물을 떠받치는 기초이면서, 동시에 건물을 완성하는 머릿돌이라는 뜻입니다. 결국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로 시작되고 예수 그리스도로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기도의 마음으로 그린빌에서 새로운 사역을 시작하며 무엇보다도 교회를 “교회답게, 성도는 성도다운 교회”로 세워가기를 간절히 원하며 기도 할 것입니다. 사람의 방법보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묻는 교회, 프로그램보다 예배와 기도를 소중히 여기는 교회, 세상의 성공보다 복음의 진실함을 붙드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원합니다. 교회는 성도들 끼리 서로 경쟁하는 곳이 아니라 서로의 짐을 지는 곳입니다. 상처 입은 영혼들이 위로를 받고, 지친 사람들이 쉼을 얻으며, 다음 세대가 믿음을 배우는 영적 가정이어야 합니다. 또한 살아있는 믿음의 고백이 있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런 교회를 원하는 것은 내 뜻과 생각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이런 교회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모이는 이유도 단순히 예배의 형식을 유지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복음을 함께 살아내기 위함입니다. 교회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지금도 계속 세워 가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도 계속 자라야 하고, 고백도 날마다 새로워져야 합니다. 주님 오시는 날까지 교회는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부족한 종이지만, 하나님께서 맡기신 자리에서 성도님들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아름답게 세워가기를 기도합니다.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함께 걸어갈 때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통해 영광 받으실 줄 믿습니다. 새로운 시작 앞에서 저 자신도 다시 마음에 새깁니다. 교회는 사람이 만드는 조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우시고 성령으로 살아 움직이게 하시는 거룩한 공동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May, 13, 2026, 애틀란타에서 수요일 아침 김병규 목사,

05/05/2026

제 197회 영광의 달음질 칼럼 (May, 6, 2026)

은혜를 붙든 사람은 고난 속에서도
끝까지 남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고난을 부정적으로 이해를 하기에, 계획이 어긋나고, 관계가 흔들리고, 환경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갈 때, 그것을 바로 “불리함”으로 해석을 합니다. 그래서 고난은 곧 위기이고, 위기는 곧 실패로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시선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개입된 고난은 단순한 붕괴가 아니라, 재편성의 과정이며, 무너짐이 아니라 방향 전환의 시작이기 때문 입니다. 겉으로는 손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더 깊은 유익을 준비하는 하나님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삶이 흔들리는 이유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고난 자체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가 드러남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무엇을 의지하고 있는가? 대한 문제인 것입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의지할 대상을 찾습니다. 경제적 기반과 인간관계, 사회적 지위와 경험과 능력 등, 눈에 보이는 것들에 기대어 자신을 안정시키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결코 절대적인 기반이 될 수 없기에. 시간이 지나면 드러나게 됩니다.

그것들은 마치 불탄 밧줄과 같아서 붙잡고 있을 때는 견고해 보이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힘을 잃고 끊어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지점을 다루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 붙잡고 있는 것을 그대로 두지 않으시고 그것을 제거하시는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그것을 상실로 받아들이고, 아픔으로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신앙은 그 제거의 의미를 다르게 해석합니다. 하나님은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잡기 위해 제거하시기 때문입니다. 무너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세우기 위해 허무시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붙들고 있던 “괜찮다고 여기는 것”이 오히려 “진짜 좋은 것”을 가로막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은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삶의 기반이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지고, 익숙했던 세계가 무너지는 경험으로 느끼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는 결코 비워진 채로 남지지 않고. 하나님은 반드시 그 자리에 새로운 생명을 심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싹”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미 끝났다고 생각했던 자리에, 더 이상 가능성이 없다고 여겼던 자리에서 다시 돋아나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싹”이 단순한 회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전 상태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전혀 다른 차원의 시작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흔히 더 많이 가지는 것을 회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욕망을 채우는 대신, 욕망의 방향을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게 하기보다는 진짜를 소유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반복되는 만족의 추구가 결국 중독으로 이어지는 세상의 흐름 속에서, 하나님은 단 하나의 참된 만족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싹”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존재가 아니라, 삶의 중심을 새롭게 세우시는 분이십니다. 문제는 그분이 중심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다른 것들로 자신을 채우려 하다가 지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가 중심이 되면, 완전히 바뀌지 않아도 삶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습니다. 외적인 조건이 아닌 내적인 중심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새롭게 시작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끝까지 남는 것입니다. 성경은 “남은 자”를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많은 사람이 시작하지만, 끝까지 남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더”를 요구합니다. 더 성취하고?, 더 누리고?, 더 올라가라? 말합니다. 그러나 그 끝은 공허와 소진입니다. 반면에 성경이 말 하는 믿음은 전혀 다른 방향을 가집니다. 히브리적 개념에서 믿음은 “에무나”, 곧 견고하게 서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감정의 고조나 일시적인 결단이 아니라, 흔들림 속에서도 자리를 지키는 지속적인 태도를 말합니다. 즉, 상황이 나아지지 않아도 포기하지 않는 것, 결과가 보이지 않아도 물러서지 않는 것, 이것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불이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것처럼 보일 때, 불순물이 제거되고 있는 것이기에. 금이 정금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불을 통과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통해 불필요한 것들을 태우시고, 본질만 남기십니다. 그래서 남은 자는 단순히 살아남은 사람이 아니라, 정결해진 사람이고.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본질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고난은 우리를 시험하는 동시에, 구별하는 도구가 됩니다. 무엇을 붙들고 있는지가 드러나고, 무엇이 진짜인지가 분명해집니다. 그 과정을 통과한 사람만 끝까지 남게 됩니다. 우리 삶에 고난이 있다면, 단순한 위기로만 해석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지금 무엇을 제거하고 계신가? 무엇을 새롭게 심고 계신가? 그리고 나를 어떤 사람으로 남기고 계신가? 을 질문해야 합니다, 고난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더 단단해지고, 더 선명해지고, 더 깊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상황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 중심이 바뀐 사람이고, 그 중심에 하나님이 계신 사람입니다. 고난은 누구에게나 오지만 모든 사람이 같은 결과에 이르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무너지고, 어떤 사람은 새로워집니다. 그 차이는 은혜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에 있습니다. 은혜를 붙든 사람이 혼란 속에서도 끝까지 남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May, 6, 2026, 대한민국 청주에서 수요일 아침 김병규 목사

04/28/2026

제 196회 영광의 달음질 칼럼 (Apr, 29, 2026)

안전한 통제를 선택 할 것인가?,
책임 있는 자유를 선택할 것인가?

인간의 삶은 본질적으로 선택과 책임 위에 세워진 자율의 여정입니다.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며, 그 결과를 감당하는 과정 속에서 인간은 비로소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국가나 기관이 개인의 삶 깊숙이 개입하여 “이것은 하라, 저것은 하지 말라”고 지속적으로 강제적 강조를 한다면, 그 사회는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까요? 물론 자율이 억압된 사회는 겉으로는 질서가 있는 듯 보일 수 있습니다. 규칙이 명확하고, 통제가 강력하며, 일사불란한 움직임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질서의 이면에는 점점 깊어지는 침묵과 위축이 자리 잡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스스로 생각하기보다 지시에 익숙해지고, 책임 있는 선택보다는 안전한 복종을 택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생각하는 인간”이 아니라 “반응하는 인간”으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고속도로를 주행하다 보면 반복적으로 들려오는 음성과 글이 있습니다. “졸리면 쉬어가십시오, 안전운전 하십시오.” 또 지하철에 탑승하면 “창밖에 쓰레기를 버리지 마십시오,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행위를 삼가십시오,” 와 같은 안내 방송이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이런 메시지들은 분명 공공의 안전과 질서를 위한 선의에서 출발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반복”과 “방식”에 있습니다. 이러한 안내가 지속적으로 반복될 때, 사람들은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될까요? 처음에는 도움이 되는 정보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신뢰받지 못한다,” 는 감각으로 변질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스스로 판단할 능력이 부족한 존재로 취급받는 듯한 느낌, 끊임없이 감시받고 있다는 무의식적 압박감이 형성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율이 억압된 사회는 겉으로는 질서가 있는 듯 보일 수가 있습니다. 규칙이 명확하고, 통제가 강력하며, 일사불란한 움직임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 질서의 이면에는 깊어지는 침묵과 위축이 자리를 잡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스스로 생각하기보다 지시에 익숙해지고, 책임 있는 선택보다는 안전한 복종을 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생각하는 인간”이 아니라 “반응하는 인간”이 될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환경이 지속되면 창의성과 도전 정신은 급격히 쇠퇴 할 수가 있습니다. 새로운 시도는 실패의 위험을 동반하는데, 통제 사회에서는 실패가 용납되지 않거나 처벌의 대상이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도전 자체를 포기하게 되고, 사회는 점점 정체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겉으로는 안정되어 보이지만, 생명력을 잃어가는 구조가 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변화는 “책임의 이동”입니다. 자율이 사라진 자리에는 책임도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내가 결정한 것이 아니다,” 라는 생각 속에서 스스로의 행동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회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공동체 전체의 윤리 수준을 약화시키며, 결국 문제 발생 시,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 낼수 있다는 것입니다. 명령은 위에서 내려오지만, 책임은 공중에 떠버리는 구조가 형성이 될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통제는 인간 내면의 갈등을 심화시킵니다. 겉으로는 순응하지만, 내면에서는 억압된 욕구와 불만이 쌓이게 됩니다. 이 긴장은 어느 순간 폭발하거나, 냉소와 무기력으로 변질됩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사회에 대한 기대를 갖지 않게 되고, 참여보다는 거리 두기를 선택합니다. 결국 공동체는 결속력을 잃고, 신뢰는 무너집니다.

역설적으로, 지나친 통제는 오히려 더 큰 혼란을 초래할 가능성도 있다는 것입니다. 억눌린 자유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형태를 바꾸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음성적인 저항은 물론, 편법과 불법적인 방식들이 증가하면서 사회는 이중 구조를 가지게 될수 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질서가 유지되지만, 실제로는 보이지 않는 균열이 계속 확장되는 상태가 될수 있다는 것입니다. 건강한 사회는 통제보다 신뢰를, 강제보다 책임을 기반으로 세워짐을 잘 압니다. 어느 나라, 어느 사회든지 법과 제도는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인간의 자율성을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오히려 개인의 선택과 책임을 존중하면서, 공동체의 질서를 조화롭게 유지하는 균형이 중요합니다. 결국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안전한 통제를 원하는가, 아니면 책임 있는 자유를 선택할 것인가?” 이 선택에 따라 사회의 미래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Apr, 29, 2026, 대한민국 속초에서 수요일 아침 김병규 목사

04/21/2026

제 195회 영광의 달음질 칼럼 (Apr, 22, 2026)

행복의 근원은 상대적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하심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정작 삶의 현장을 깊이 들여다보면,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누리기보다 행복을 잃지 않으려 애쓰며 살아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우리가 붙들고 있는 행복이 대부분 상대적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가지면 행복할 것 같고, 조금 더 인정받으면 만족할 것 같지만, 막상 그것을 얻고 나면 또 다른 비교가 시작이 됩니다. 그것은 나보다 더 가진 사람, 더 성공한 사람, 더 인정받는 사람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이전에 느꼈던 만족은 힘없이 무너지고 맙니다. 이런 면에서 상대적 행복이라는 것은 비교 위에 세워진 모래성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모습을 가장 솔직하게 드러내는 말씀이 바로 하박국 3장 말씀입니다. 선지자 하박국이 처한 상황은 결코 평안하지 않았습니다. 나라의 운명은 기울고 있었고, 전쟁의 공포는 현실이었습니다. 하박국이 그때의 상황을 표현하기를 “창자가 흔들리고, 입술이 떨리며, 뼈가 썩는 것 같은, 극도의 두려움 속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와 밭에 소출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로다.”라고 말입니다, 이 고백은 단순한 긍정의 언어가 아닙니다. 현실을 외면한 낙관주의도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것이 무너진 자리에서 드러난 신앙의 본질적인 선언인 것입니다. 하박국은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았고,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기쁨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절대적 행복은 조건에서 오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온다는 것을 말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더 가지라고 말하고. 더 높아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끝에는 만족이 아니라 또 다른 결핍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욕심은 채워질수록 더 커지고, 비교는 할수록 더 깊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많은 것을 가지고도 불행할 수 있고, 부족한 가운데서도 참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비밀을 깨달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풍부함과 궁핍을 모두 경험했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환경이 안정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삶의 중심이 하나님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날 우리의 신앙도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세상의 기준으로 행복을 판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조금만 상황이 흔들리면 기쁨이 사라지고, 비교 속에서 스스로를 작게 여기며, 염려 속에서 현재를 잃어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박국의 고백이 우리에게 분명한 방향을 제시합니다. 행복은 더 가지는 데 있지 않고. 행복은 더 비교하지 않는 데 있고, 참된 행복은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는 데 있다고 말입니다. 이렇듯 신앙은 현실을 없애주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이기게 하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으로, 우리는 무너진 자리에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고. 아무것도 없는 자리에서도 “나는 늘 기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행복은 선택의 문제입니다. 무엇을 더 가질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기준으로 살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상대적 행복은 언제나 더 가진 사람 앞에서 무너집니다. 그러나 절대적 행복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 기쁨의 근원이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모든 것이 무너진 자리에서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로다,”를 붙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의 삶이 이렇게 바뀌어야 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가 올라올 때, 하나님을 바라 봐야 하고, 염려가 밀려올 때, 하나님께 맡겨 야 하고, 부족함이 느껴질 때, 하나님으로 만족 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한 분이면 충분합니다.”라고, 그러나 환경은 여전히 흔들릴 것입니다. 상황은 여전히 우리를 시험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면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바라기는 하나님으로 기뻐하는 삶,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삶, 절대적 행복을 누리는 삶이 다시 회복되기를 소망합니다.

Apr, 22, 2026, 한국의 군포에서 수요일 아침에 김병규 목사

04/14/2026

제 194회 영광의 달음질 칼럼, (Apr, 15, 2026)

진정한 승리자는 창과 칼을 든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서 손을 들어 주시는 사람입니다,

한국방문 중에 가장 많은 질문이 “한국이 어떠세요?”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이 저에게는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한국 사회의 정서와 문화가 담긴 의미 있는 질문인 것 같습니다. 동시에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먼저 질문 속에 담긴 기대와 부담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 질문이 겉으로는 친절하고 따뜻한 관심처럼 보이지만 다른 부담으로 다가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보이지 않는 기대, “좋다고 말해주길 바라는 마음과 긍정적으로 평가해주길 원하는 마음”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을 받았을 때 솔직한 평가보다는 듣기 좋아할 답을 선택하게 됩니다. 다음은 진짜 질문이 아닌 확인 질문으로, 자기 확인의 성격을 띠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대화를 깊게 만들기보다는 짧고 형식적인 대답으로 끝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하나는 이 질문을 통해서 한국 사회의 한 단면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외부의 평가에 민감한 모습과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과 비교 속에서 자신을 확인하려는 태도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단순히 문화적인 특징을 넘어서서 내면의 상태를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신앙인들이 하는 신앙적인 질문 중에도 “창이 강한가, 하나님이 강한가?” 라는 질문을 합니다, 그런데 이 질문도 단순한 신앙적 수사가 아니라, 우리의 삶의 중심과 방향을 드러내는 질문이 되기도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입술로는 “하나님이 강하시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실제 삶의 현장에서는 하나님보다 ‘창’을 더 의지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위기 앞에 서면 하나님보다 현실적인 조건을 먼저 붙잡으려는 마음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창”은 단순한 무기가 아닙니다.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 믿는 모든 것을 상징합니다. 재물과 학벌, 인맥과 지위, 경력과 종교적 성취까지도“창”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말합니다. “더 강한 창을 가지면 이긴다.” 고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긴 창, 더 많은 창, 더 강한 갑옷을 준비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성경은 창의 크기나 숫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와 함께하시는가가 승패를 결정한다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세상은 보이는 무기를 의지하지만, 믿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을 붙든다는 것입니다.

저에게도 인생의 중요한 갈림길이 있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전자 기술자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학을 공부하면서는 사회복지사가 되는 길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군 복무 중 몸을 다친 이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신학의 길로 나아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제 마음속에는 솔직히 갈등은 있었습니다. 저희 가족 중에 목회와 근접한 길을 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로 전기 기술자나 복자사가 아니라 목회자의 길을 걷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자격증을 가진 목회자가 된다면 더 안정적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것이 합리적이고 지혜로운 선택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긴 창을 의지하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붙드는 길로 인도 하셨습니다, 즉, 창을 내려놓고 하나님만 붙들도록 말입니다. 그때의 결단은 지금까지도 제 삶의 방향을 지탱해 주는 중심이 되었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창을 자랑합니다. 더 높은 학위, 더 넉넉한 재산, 더 탄탄한 인맥, 더 화려한 경력, 그것이 안전과 승리를 보장해 준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전혀 다른 기준을 제시합니다.“전쟁은 여호와께 속하였다.”고 말입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신앙 고백이 아니라, 인생의 근본 원리를 드러내는 선언입니다. 전쟁의 승패는 창의 길이, 군사의 수, 자원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승리는 하나님이 손들어 주시는 사람에게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골리앗은 하나님을 조롱하며 다윗을 위협했습니다. 그는 갑옷을 입고, 창과 칼과 단창으로 중무장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겉으로는 강해 보였지만, 그 내면에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없는 사람은 결코 두려움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강한 무기와 더 단단한 갑옷을 찾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달랐습니다. 그는 무기도, 갑옷도 없었지만 당당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믿음의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전쟁은 여호와께 속하였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 고백은 허세가 아니라 확신이었습니다. 다윗은 무기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길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창을 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승리는 다윗의 것이 되었음을 보았습니다.

우리도 종종 우리의 능력과 조건, 경험과 자원을 의지 하려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강한 창을 들어도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으시면 무너지고 맙니다. 반대로 가진 것이 없어도 하나님이 손들어 주시면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 됩니다. 고후 6: 9-10절 말씀에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이 말씀은 믿음의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분명히 보여줍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지금 나는 무엇을 붙들고 있는가? 창인가, 하나님인가?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창을 내려놓고, 내 손을 붙들라.”고 말입니다, 인생의 진정한 승리는 창을 든 사람에게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손들어 주시는 사람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을 붙들고, 하나님께 붙들린 인생을 살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Apr, 15, 2026, 한국의 군포에서 수요일 아침에 김병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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