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W Community Church

VOW Community Church VOW (Voice of Wilderness ) Community Church는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대하며 복음을 선포하는 교회 입니다.

09/06/2026

2026년 9월 6일 일요일
시편119:73-88
"나의 말이 주께서 언제나 나를 안위하실까 하면서 내 눈이 주의 말씀을 바라기에 피곤하니이다. 내가 연기 속의 가죽부대 같이 되었으나 주의 율례들을 잊지 아니하나이다."(82-83절)

생각해보면 상처 없는 크리스천이 잘 없습니다. 고난 없는 크리스천이 잘 없습니다. 개개인의 삶을 들여다보면 다들 아픔 속에 있는데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가고 있습니다.

언젠가 한 성도님이 연락이 와서 대뜸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최근에 한참 동안 저 하나님께 삐져 있습니다." 말을 들어보니 인생이 생각처럼, 기도처럼 너무 풀리지 않아 꽤 오랫동안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삐져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 말미에 그는 이런 말을 덧붙였습니다. "그런데 결국 저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이렇게 새벽예배 나와서 기도하고 가네요. 목사님, 해가 뜨는 게 참 예뻐 보입니다!"

그는 말 그대로 '상처받은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상처를 받았을지언정, 고난 중에 있을지언정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시편 기자는 말합니다. 내 눈이... 피곤합니다. 내가 연기 속 가죽부대같이 말라비틀어지고 상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말씀을 바라고, 주의 율례를 잊지 않습니다.(82-83절)

상처 속에서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고난 중에도 붙드는 것이 믿음입니다. 신앙은 '나이스한 사교파티' 같은 모습이 아닙니다. 서로 화려하게 입고, 웃으면서, 맛있는 음식 먹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천로역정'입니다. 세상은 완악하고 불의 합니다. 그래서 인생은 고단합니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은 고난과 상처를 인내하는 믿음입니다. 그 와중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입니다. 그 와중에도 하나님만 바라보는 믿음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를 부르짖는 순간조차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는 이 믿음이 필요합니다.

기도합니다. 주여, 고난 중에 있는, 그러나 믿음을 지키고 말씀 안에 살아내는 인내하며 신뢰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피할 길을 주시고, 힘을 주시고, 고난을 통과하는 축복과 은혜를 더하여 주옵소서. 무엇보다 주님, 끝까지 믿음을 놓지 않게 하옵소서. 아멘

09/05/2026

2026년 9월 5일 토요일
시편119:65-72 (한절묵상)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67절)

어릴 적 아직 '사랑의 매'가 허용되던 시절, 자주 맞는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집안에서건 학교에서건 매를 부르는 아이들이 있었고, 절대 매 맞지 않는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차이는 단순합니다. 매 맞지 않는 아이는 하라는 대로 하고, 하지 말라는 것은 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지키며 삽니다. 그러나 매 맞는 아이는 아무것도 지키지 않습니다. 중구난방으로 삽니다. 그러니 결국 매를 맞습니다. 많이 맞습니다. 그렇게 고난(?)을 당한 후에야 아이는 점점 말씀을 지키기 시작합니다.

"고난은 하나님의 확성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을 너무나 안 듣는 이들에게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일종의 마이크인 것입니다. 그렇게 고난을 만난 사람들은 그제야 자신들이 잘못한 것을 깨닫고,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깨닫고, 지켜야 하는 말씀을 깨닫게 됩니다.

어릴 적 저는 제법 부모님의 말씀을, 선생님의 말씀을 잘 지키는 아이였습니다. 그래서 거의 맞은 기억이 없고, 큰 사건 사고의 기억이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지키지 않았을 때는 여지없이 이런저런 사고들을 당하기도 하고, 매를 맞기도 했습니다. 돌이켜보면 하나님과의 동행도 비슷했던 듯싶습니다. 어릴 적부터 꿈이 목사였던 저는 나름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는 아이였습니다. 교회와 집밖에 모르던 아이였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저의 욕심을 따라, 저의 악한 욕망을 따라 움직이곤 했고, 그때마다 여지없이 '고난'이라는 하나님의 확성기를 만나곤 했습니다.

굳이 어렵게 배울 필요가 없습니다. 굳이 맞아가며 배울 필요 없습니다. 듣고 잘 지키면 됩니다. 애초부터 잘 지키면 됩니다. 매를 부르는 인생을 살지 않으면 됩니다. 영어 표현 중에 "I learned it the hard way"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후회가 담긴 말이고, 씁쓸한 말입니다. 굳이 고생하며 배울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좋게 말씀하실 때 지키십시오. 하나님이 좋게 말씀하실 때 하지 말라는 것을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고난'을 만났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지금부터라도 주의 말씀을 지키십시오. 기억하십시오! 방종 중에 만난 고난은 하나님이 아직 나를 사랑하신다는 의미이고,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좌절하거나 더 비뚤어지지 말고 말씀으로 돌아오십시오. 회개하고 말씀을 지키는 삶으로 돌아오십시오.

09/04/2026

2026년 9월 4일 금요일
시편119:49-64 (한절묵상)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50절)

마션이라는 영화를 굉장히 인상 깊게 본 기억이 있습니다. 화성에서 불의의 사고를 당해 혼자 남겨진 사람의 생존 이야기입니다. 영화는 절망의 순간을 그립니다. 화성에 홀로 남겨진 주인공은 딱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입니다. 그러나 그는 불굴의 의지와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하루하루 생존해 갑니다. 수많은 역경을 뒤로하고 그가 지구로 귀환하고 나서 교수로서 첫 수업에 들어가서 이런 말을 합니다.

"잘 들으세요. 정말로 잘 들으세요. 지금 이 말들이 당신을 살릴 수 있을지 모릅니다"

실제로 영화상에서 주인공은 그가 알고 있는 지식에 기반하여 절망의 순간을 돌파합니다. 수업에서 들었던 말씀들, 훈련 중에 들었던 말씀들이 고난에 처한 그에게 위로이고, 절망적 상황에 처한 그에게 구원의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예컨대 그가 그런 지식이 없었다면 화성에서 감자를 키운다거나, 잃어버린 통신을 회복하여 지구와 소통한다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의 머리에 남은 지식/말씀은 구원의 실체가 되어주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말씀이 고난 중에 위로가 되고, 구원이 되는 것'을 시각적으로 잘 보여준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식에만 멈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지성을 넘어 우리의 마음과 삶에 녹아져 들어올 때 우리는 그 말씀의 지혜와 통찰로 인해 삶의 고난을 돌파하는 기적들을 경험합니다. 그 말씀이 느닷없이 상한 나의 마음과 생각을 위로하는 것을 경험합니다. 예수님이 마치 말씀으로 시험을 이기시듯 우리 안에 기억된 말씀, 우리가 읽고 묵상한 말씀, 우리가 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위로와 격려와 평안을 얻기도 합니다.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 절망의 순간에도 불현듯 말씀이 찾아와 그런 나의 발작을 잠잠케 하며 형언할 수 없는 평안과 삶의 확신을 주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말씀'이 나의 고난 중에 위로이며 나의 구원이 되는 이유는
"그 말씀이 육신이 돼 우리 가운데 계셨기에... 그것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었습니다"(요1:14)

이 말씀의 선언처럼 예수님이 곧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의심의 여지가 없이 고난 중에 위로자 되시며 나를 살리는 구원자이십니다.

"잘 들으세요. 정말로 잘 들으세요. 이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을 위로하고, 구원할 것입니다"

09/03/2026

2026년 9월 3일 목요일
시편119:33-48 (한절묵상)
"내가 주의 법도들을 구하였사오니 자유롭게 걸어갈 것이오며"(45절)

얼마 전에 웃긴 영상을 보았습니다. 로봇들의 달리기 대회였습니다. 최근 로봇이 우사인 볼트의 달리기 기록을 깼다는 기사도 본 적이 있어서 영상을 흥미롭게 보았습니다. 한 로봇이 정말로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다만 그 로봇이 뛰는 모습이 너무 자유(?)로워서 보면서 실소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 와중에도 그렇게나 빨리 달린다는 게 너무 신기했습니다. 한편 결과는 다소 싱거웠습니다. 그 로봇이 실격 처리가 된 것입니다. 이유는 그 로봇이 트랙을 지키지 못하고 이리저리 트랙을 넘나들었기 때문입니다. 자유로워도 너무 자유로웠던 것입니다.

UFC 경기를 보면 선수들은 거침없이 몸을 사용합니다. 손, 발은 물론이고, 팔꿈치도 사용합니다. 머리를 차고, 숨통을 조여 오기도 합니다. 팔을 꺾기도 하고, 다리를 걷어차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UFC 경기에도 당연히 규칙이 있습니다. 그 규칙을 어기면 심판의 제지가 들어가고, 벌점을 얻게 되고, 심하면 실격 처리됩니다. 머리로 받거나, 이로 물어뜯거나, 급소를 차거나 하는 일은 아무리 UFC라지만 허락되지 않습니다. 결국 자유로워 보이지만, 뭐든 다 해도 되는 듯 보이지만 규칙 안에서 해야 영광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의 말씀 안에서 자유해야 합니다.
"내가 주의 법도들을 구하였사오니 자유롭게 걸어갈 것이오며"(45절)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자유는 방종입니다. 많은 이들이 구속 속에는 절대 자유가 없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러나 구속이 있기에 안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교통법규라는 구속이 없다면 운전이라는 자유는 한 시간도 안 돼서 빈번한 사고로 인해 막을 내릴 것입니다.

우리가 자유롭게 걸어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을 때입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걸어야 안전하고, 즐겁습니다. 성취하고, 완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규칙을 따라, 말씀을 따라, 그 안에서 자유롭게 걸읍시다.

고린도전서 10:23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다."

말씀을 따르는 삶이 참 자유의 삶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라 살 때 비로소 우리는 참 자유의 길을 걷게 됩니다.

09/02/2026

2026년9월2일 수요일
시편119:17-32 (한절묵상)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18절)

책을 읽다 보면, 노래를 듣다 보면, 영화를 보다 보면 특별한 경험의 순간들이 있습니다. 새로운 이해와 통찰이 다가오는 순간입니다. 책을 몇 번 보는 동안 몰랐던 부분이 어느 날 다시 읽는데 전혀 다르게, 새롭게, 깊이 있게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항상 듣고 흥얼대던 노래 가사인데 어느 날 그 가사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오면서 눈물이 흐르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좋아해서 몇 번을 본 영화인데도 다시 보는 중에 그 영화에 감춰져 있던 의미와 복선들이 깨달아지면서 소름이 돋을 때가 있습니다.

같은 것을 보아도 통찰이 다르면 이해의 깊이가 달라집니다.
이해의 깊이가 다르면 깨달음과 감동, 삶의 변화와 성장도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같은 것을 보아도 통찰이 다르면(?) 그 작품의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보아도 그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조롱하거나, 거절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깊이를 다 알 수 없고, 그 아름다움을 다 형언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지성을 다 담지만 논리를 초월하고,
우리의 감성을 다 담지만 동시에 형언할 수 없는 영성의 세계를 담고 있고,
세상의 물리를 담고 있지만 동시에 물리를 초월하는 신비를 담고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에서 '놀라운 것'을 보기 위해 도움이 필요합니다. 시편 기자는 기도합니다.
"내 눈을 열어서... 보게 하소서"(18절)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성령의 조명이 필요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의 도우심이 임하는 것을 자주 경험합니다. 저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것들이 깨달아지는 순간들을 경험합니다. 성경이 또 다른 성경으로 연결되고 해석되고 깨달아지는 순간들을 경험합니다. 이를 위해 오랜 시간 말씀을 붙들고 기다립니다.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고민하고 기도하며 계속 말씀을 붙듭니다.

누구나 가능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말씀의 통찰을 놓고 기도하십시오. 깨달아지게 기도하십시오. 이해되도록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눈을 열어 하나님의 말씀에 감추인 '놀라운 것'을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 성경 속에 담긴 보석들을 캐내어 깨닫고 감동하고 적용하고 변하고 성장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기도합니다.

큐티 합시다! ^^

09/01/2026

2026년 9월 1일 화요일
시편119:1-16 (한절묵상)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음이여"(1절)

오늘 본문 말씀의 시작을 보면서 다른 성경의 구절이 생각났습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 갈라디아서 3:24, 개역개정

바울의 가르침을 보면 율법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가는 인도자가 됩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어떻게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가게 합니까? 방법은 간단합니다. 율법을 지켜 의로움에 이르려고 하는 모든 자는 그 노력이 참으로 숭고하지만, 그 과정에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율법으로는 완벽히 의로워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율법을 지키다 보면, 더욱 지키다 보면 완벽하게 의로워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나의 악함이 발견되고, 나의 부족함이 발견됩니다. 그래서 결국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율법이 있기에, 율법을 따르기에 은혜를 주시는 그리스도께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습니다!

결국 율법을 지키는 것, 율법의 기준을 따라 의를 사모하는 것은 필요한 자세입니다. 더욱 온전해지는 삶의 태도입니다. 그러나 참된 복은 율법에서 완성되는 게 아니라 율법이 인도하여 우리로 만나게 한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됩니다.

율법을 지키십시오, 그리고 은혜의 그리스도께 나아오십시오. 이것이 참으로 복된 삶입니다.

참고로 "[갈3:25, 우리말성경] 그러나 이제는 믿음이 왔으므로 우리는 더 이상 율법이라는 선생 아래 있지 않습니다." 율법주의에는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의 이 말씀처럼 '믿음이 온 후로는 더 이상 율법에만 매여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율법을 지키십시오. 율법 속에서 나의 불의함과 불완전함을 깨닫고, 나를 온전히 의롭게 하시는 그리스도께로 나아오십시오. 그리스도의 은혜를 붙드십시오. 이것이 참으로 복을 누리는 삶입니다.

08/31/2026

2026년 8월 31일 월요일
에스겔48:23-35
"이것은 너희가 제비 뽑아 이스라엘 지파에게 나누어 주어 기업이 되게 할 땅이요 또 이것들은 그들의 몫이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9절)

제비를 왜 뽑을까요? 이미 지경도 정해졌고, 땅의 순서도 정해졌습니다. 뽑는다 해도 이것은 말이 뽑는 것이지 실제로는 큰 의미가 없는 뽑기가 아닐까요? 그들이 뽑았다기보다는 이미 정해져 배분받은 느낌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느낄 때가 많습니다. 이미 다 정해져 있는 것 같은 느낌 말입니다. 굳이 기도할 필요 없고, 목멜 필요가 없는 게, 이미 하나님이 다 정하셨고 나는 이미 정해져 있는 일에 숟가락만 얹는 그런 느낌 말입니다. 이런 경우 우리는 이 모든 과정을 '불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대도 없고, 소망도 없고, 감사도 잃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히려 불만을 가지기도 하고, 아쉬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으로 땅이 분배된다 해도 제비뽑기는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개입, 사랑, 은혜, 주권이라는 메시지를 우리가 깨닫고 배우기 원하십니다. 제비 뽑는 과정을 통해 우리 삶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직접 경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정해져 있는데도 제비를 뽑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우리의 순종의 태도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끝내 내 손으로 수령하는 축복의 순간입니다. "다 아시는 하나님이 이미 다 정해 놓으셨으니 내 삶이 무슨 의미인가?" 말하며 비판적 시각으로, 포기하는 자세로 살고 있다면 그 태도를 버리고 제비를 뽑으십시오. 제비를 뽑아야 받을 땅을 받는 것이고, 제비를 뽑고 나서 땅을 받으면 그때부터 할 일이 더 많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제비를 뽑읍시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합시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은혜를 받읍시다!

08/30/2026

2026년 8월30일 주일
에스겔48:15-22
"....이 이만 오천 척 다음으로 너비 오천 척은 속된 땅으로 구분하여 성읍을 세우며 거주하는 곳과 전원을 삼되"(15절)

예물로 드려진 땅 안에는 '속된 땅'으로 구분된 성읍과 도시의 땅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는 경작을 해야 합니다(19절). 거룩하게 구분되어 하나님께 드려진 땅에서 살며 먹고 살기 위해 한편에서는 경작을 하는 이들의 삶이 오늘날 신앙인들의 모습과 꼭 닮았습니다.

신앙인은 하나님을 인생 한가운데 모시고 삽니다. 삶의 예배자로 삽니다. 구분되어 하나님께 드려진 인생으로 삽니다. 그런데 동시에 그들은 '경작'하는 인생을 삽니다. 회사에 출근하고, 사업을 하고, 생존을 위해 각양의 일을 합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경작해야 한다고 명령된 것처럼(19절) 모든 인생에게 이 부르심은 적용됩니다.

이 두 가지를 다 놓칠 수 없습니다. '구분되어 예물로 드려진 땅'이라고 해서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우리는 '경작'을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 그들이 그 땅에서 경작하며 살지 않았다면 구분된 땅에서 마땅히 드려져야 할 예배가 제대로 세워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삶을 구분하여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그리고 삶의 터전에서 일하는 삶을 게을리하지 마십시오. '예배'와 '경작'이 멈추지 않는 인생이 되십시오. 삶의 책임, 신앙인의 책임을 모두 성실히 감당해야 합니다.

08/29/2026

2026년 8월 29일 토요일
에스겔 48:1-14
1. 땅을 분배하시는 하나님은 중앙의 땅은 자신에게 예물로 바치라고 말씀하십니다. (8-9절)
표현이 다소 거칠(?)게 느껴질수있는데, 하나님은 주셨다가 다시 빼앗으시는 분이십니다. 예컨대 오늘 본문의 사건을 살펴보아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땅을 분배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중앙의 땅을 예물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애초부터 그냥 가운데 땅을 빼고 분배하시면 될 일입니다. 어차피 하나님께서 성전의 땅으로 쓰실 것이라면 애초부터 안 주시면 될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분배하시고 나서 그 땅을 '예물'로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주 주셨다가 다시 빼앗으시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중심에 하나님을 모셨는지를 확인하십니다.

우리는 자주 받은 것보다 드려야 하는 것에 집착해서 불편해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예로 들자면 그들은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다시 땅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 중 누군가는 받은 땅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중앙의 땅을 예물로 바쳐야 한다는 사실에 집중해서 그 사실을 불편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아담의 이야기를 보면서도 먹어도 되는 모든 과실에 집중하고 감사하기보다는 먹지 못하게 한 선악과 하나에 집중해서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받은 것에 충분히, 진심으로 감사하는 사람들이 '예물'을 기쁨 가운데 내어 드립니다.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을 인정하는 자들이 기쁨으로 '예물'을 드립니다. 그렇다면 예물을 내어드린 자들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예물로 내어드린 그 '중앙의 땅'에 하나님이 거하십니다. 결국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좋은 일입니다.

받은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신앙,
감사하기에 가장 귀한 것으로 하나님께 드릴 줄 아는 신앙,
그렇게 인생 중앙에 하나님을 모시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2. "그들은 그 땅을 팔아도 안 되며 교환해서도 안 됩니다. 또 가장 좋은 땅인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서도 안 됩니다."(14절)
그 어떤 이유로라도 이 땅을 팔 수 없습니다. 즉 그 어떤 이유로라도 '하나님의 다스림'을 팔 수 없습니다. 신앙을 떠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버릴 수 없고, 떠나보낼 수 없습니다.

삶이 급하면 이것저것 중요한 것을 내다팝니다. 생존을 위함입니다. 그렇게 금도, 보석도, 결혼예물도 팔아넘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드려진 이 땅은 팔 수 없습니다. 예배의 땅입니다. 신앙의 땅입니다. 생존을 위함이라고 신앙을 버릴 수 없고,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을 몰아낼 수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라도 내 안에 계시는, 내 중심에 계시는 '하나님의 땅'을 팔지 마십시오. 성전의 땅을 팔지 마십시오. 예배의 땅, 신앙의 땅을 건드리지 마십시오.

08/28/2026

2026년 8월 28일 금요일
에스겔 47:13-23
"...너희는 공평하게 나누어 기업을 삼으라 이 땅이 너희의 기업이 되리라"(14절)

하나님은 땅의 배분을 말씀하시며 "공평"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어떻게 나누는 것이 공평한 것일까요?

세상은 공평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논쟁이 시작되고, 눈치 싸움이 시작됩니다. 조금이라도 남의 것이 커 보이면 참지 않습니다. 서로 '공평'이라는 말 뒤에 숨어서 조금이라도 더 좋은 것을 차지하고,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 기를 씁니다. 실제로 그래서 '공평'을 실현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모두가 동의하는 공평의 기준 자체를 정하는 데 애를 먹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평을 말씀하시면서 당신의 주권대로 경계선을 긋고, 각 땅을 지파에게 배분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말미에 나오는 '제비뽑기'도(22절) 무작위 뽑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미 정해 놓으신 땅을 각 지파가 할당받으라는 의미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스스로 공평의 기준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이 공평을 만드셨습니다.

세상은 공평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모두가 만족하는 공평은 없습니다. 누군가는 실망하고, 누군가는 불의하다고 하고, 누군가는 분노합니다. 만약 내가 실망과 불만 없이 만족했다면, 이는 다른 이가 실망과 불만과 분노를 느끼고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세상은 공평을 만들어 내는 데 애를 먹습니다. 공평을 논하며 실망과 분노와 불만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상황이 이쯤 되다 보니 신앙인도 세상의 기준을 따라 공평을 논하면 이 굴레를 피하기 어렵습니다. 계속 실망하거나 분노하게 됩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주어지지 않으니 실망과 불만과 분노를 피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불공평한 세상 가운데 살고 계십니까? 실망과 불만과 분노 속에 살고 계십니까?

신앙은 세상이 말하는 '공평'이 아니라, 하나님을 '공평'의 기준으로 삼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삶에 공평의 기준이 되심을 인정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이 공평한 땅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땅이 공평한 땅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여전히 크고 작음, 유용하고 그렇지 않음을 따지며 실망과 분노와 불만의 늪으로 빠질 수 있습니다. 태생부터 금수저, 흙수저를 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의 공평의 기준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의 공평의 기준이 되실 때, 받은 것에 감사하고 만족하고 인정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공평은 '똑같이 나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누시는 것'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하고 믿는 것이 건강합니다.

주시는 이도 하나님이시고, 가져가시는 이도 하나님이십니다.
아침 9시에 온 자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시는 분도, 오후 5시에 온 자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주시는 분도 예수님이십니다.
이렇게 놓고 보니 '하나님의 공평'은 은혜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자격 없는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실망과 분노와 불만은 접고 만족과 감사로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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