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W Community Church

VOW Community Church VOW (Voice of Wilderness ) Community Church는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대하며 복음을 선포하는 교회 입니다.

06/23/2026

062326 오늘도 주님 생각
요나 3:1-10
'문제적 아이들'에 대한 사회적 걱정이 날로 커지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도무지 교정이 안 됩니다. 잘못을 알려 주고, 잘못에 따른 처벌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도 합니다. 그런데 이 소위 말하는 '문제적 아이들'은 변할 기색이 없습니다. 결국 회개를 거부하는 이 아이들은 망할 수밖에 없는 길을 걷게 됩니다.

잘못을 지적받고, 잘못에 대한 처벌이 명시될 때 잘못을 멈추고 회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요나와 니느웨 이야기가 보여 주는 메시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니느웨는 심판받을 만큼 죄가 만연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 심판이 선언되자 지체함 없이 왕으로부터 모든 백성에 이르기까지 회개를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니느웨에 내리려고 하셨던 재앙을 내리시지 않으셨습니다. (10절)

우리 주변에도 성경이라는 요나가 있고, 법이라는 요나가 있고, 부모라는 요나가 있고, 믿음의 형제/자매라는 요나가 있습니다. 이들은 우리의 잘못을 드러나게 하고, 잘못이 가져다줄 심판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많은 성도가 '니느웨' 같지 않고 변하지 않는 '문제적 학생들' 같은 입장을 취한다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습니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죄를 멈추지 않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재앙이 임할 뿐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를 보내셔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분명히 선언하셨습니다. "세상에 의인이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고 말씀하시며 우리 모두가 다 죄인 됨도 명확하게 알려 주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모든 죄를 회개하고, 악에서 돌이키는 '니느웨' 같은 삶을 결정해야 합니다. 죄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06/22/2026

062226 오늘도 주님 생각
요나 1:17–2:10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9절)

결국 그 한마디가 정답일 때가 있습니다. 갑자기 여자친구가 삐집니다. 무언가에 단단히 화가 났습니다. 어떤 말을 해도 대답해 주지 않고 눈길도 주지 않습니다. 남자친구는 어쩔 줄을 모릅니다. 빠져나갈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입니다! 점점 상황은 급해지고 '이러다가 정말 끝나는 거 아니야?' 하는 위기의식에 사로잡힙니다. 그 와중에 입은 멈추지 않고 계속 미안하다는 말을 합니다. 자기가 떠올릴 수 있는 모든 잘못(?)들을 나열하며 사과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일이 생깁니다! 어느 순간입니다. 다만 어느 순간인지, 어떤 말인지 모릅니다. 여자친구가 갑자기 풀렸습니다. 등 돌리고 있는 그녀가 조금씩 몸을 돌리기 시작합니다. 조금씩 말의 톤도 풀립니다. 도대체 왜? 어디서 어떤 포인트로 풀렸는지 남자친구는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뱉은 말이 너무 많습니다. 그중에 뭐가 여자친구의 마음을 풀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여자친구 입장에서는 사실 딱 한마디 기다립니다. 자기가 기다리는 말이 있습니다. 남자친구가 서운하게 한 게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남자친구가 자꾸 다른 얘기를 합니다. 관련도 없는 얘기를 합니다. 헛다리만 짚습니다. 그러니 화를 풀어 주고 싶어도 풀어 줄 수가 없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자신이 기다리던 한마디가 들립니다. '그래! 이 녀석도 아는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기도 그게 잘못인 줄 아는구나!' 그 생각이 들면서 몸을 좀 돌려 앉습니다. 그리고 용서의 시동을 겁니다.

여호와께서 요나에게서 찾으시는 그 한마디는 무엇입니까?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9절)

결국 이 모든 일이 니느웨를 구원하려는 하나님을 거부하면서 일어난 일입니다. 요나는 계속 말합니다. 그리고 그 끝에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라는, 하나님께서 찾으시던 그 한마디를 그제야 던집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며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10절) — 하나님이 몸을 돌려 앉으시며 요나를 용서하는 시동을 거시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구원은 주께 속해 있습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권한입니다. 우리가 이걸 잊어서 교회 안에서도 차별하고, 교회 밖에서도 차별합니다. 영혼을 대하는 데 있어서 차별을 둡니다. 어제도 같은 묵상을 했지만 복음을 가지고 자꾸 차별합니다.

복음 가지고 차별하면 하나님은 화내십니다. 온유하신 하나님도 복음 가지고 차별했던 요나를 강하게 때리셨습니다. 교회가 차별한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성도가 사람을 대할 때 더 많이 재고, 가늠한다는 얘기들도 들립니다.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만약 교회가 복음을 가지고 차별한다면 '물고기 배 속에 갇힌 요나'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죽음에 이른 것과 같은 교회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여호와께 속하였으니, 구원에 이르게 하는 복음을 차별 없이 전해야 할 것입니다.

06/21/2026

062126 오늘도 주님 생각
요나 1:11-16
1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12절)
그는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도망가는 중이 아닙니다. 그랬다면 폭풍 중에 끝까지 자신의 정체를 숨기며 숨어 있었을지 모릅니다. 오늘 사건 속에서 드러나는 요나는 희생할 줄 아는 사람이고,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이고, 배에 있는 사람들을 살리려는 노력으로 보았을 때 사람을 살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선지자가 맞습니다. 그런데도(어제 묵상에서도 나눴지만)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하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온전한 신앙인이라고 언제나 바른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홉 가지 바른 선택을 해도 한 가지 치명적인 실수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건강한 신앙인이라면 자만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자신의 마음과 생각, 그리고 행동을 점검합니다. 모세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출애굽시켰고, 온유함 가운데 하나님의 일을 감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러는 와중에 분노를 참지 못하고 돌을 두 번 때려 물이 터지게 하는 실수를 범하기도 했습니다. 다윗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사는 와중에 간음과 살인교사의 죄를 지었습니다. 엘리야는 위대한 사명 중에 절망하여 죽고 싶어 하는 때가 있었고, 노아 같은 의로운 사람도 방주 사건 이후에 술 취해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매일이 치열한 영적 싸움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언행이 언제나 전쟁터 한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항복하는 마음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자칫 잘(?) 살다가도 갑자기 '다시스행'을 선택하는 치명적 실수를 할 수도 있습니다. 매사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항복합시다.

2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하니…나를 바다에 던지라" (11-12절)
요나는 뱃사람을 살리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니느웨 사람을 살리려고 하십니다. 거기에 대해서 요나는 거절 의사를 명확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뱃사람들은 살리려고 합니다. 그들을 위해 자신이 배에서 떨어지려고 합니다.

누구를 살리고, 누구를 죽게 내버려 둘 것인가?

우리는 선택하지 않습니다. 누구를 살리고, 누구를 죽게 내버려 둘 것인가를 선택하지 않습니다. 전도는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 복음은 그 대상을 가리지 않습니다. 내가 복음을 들었다고 해서 내가 좋아하고 내가 인정하는 사람에게만 복음을 전하고, 내가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복음은 모두에게 공평합니다!

'뱃사람'을 구하기 위해 희생할 준비가 됐다면 '니느웨 사람'을 구하기 위해 희생할 준비도 되어 있어야 합니다. 복음으로 차별하지 마십시오. 복음으로 사람을 가리지 마십시오. 내가 먼저 판단하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 유대뿐만 아니라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라!"
복음은 차별하지 않습니다!

06/20/2026

062026 오늘도 주님 생각
요나 1:1-10
"요나가...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3절)

우리도 안 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해야 되는 건 알지만 웬만해서는 안 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어릴 때를 생각해 보면 선생님이 "나와서 풀어볼 사람!" 물으면 고개부터 숙이고 보는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군대에서도 주말에 내무반 방문이 열리며 간부가 "영내 청소를 위해 지원자 3명을 찾는다!"라고 하면 모든 병사들이 어떻게든 눈을 마주치지 않고,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지 않게 하기 위해 몸을 숨겼습니다. 그러다가 혹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면 어떻게 할까요? 못 들은 척하는 사람, 칠판까지 느릿하게 걸어가는 사람, 아프다고 하는 사람, 못한다고 대놓고 말하는 사람, 현장까지 가서도 일을 안 하는 사람 등이 나타납니다.

안 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요나가 다시스를 가서 하나님의 긴급한 회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은 요나로서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원수 같은 나라에 가서 그들이 살 수 있는 길을 전하는 것을 감당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국민정서로 보았을 때 민족이 알면 배신감 느낄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예언자로서 어찌 이런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예언자가 어디 나 혼자뿐인가? 다른 이가 가면 된다! 아무리 하나님이 말씀하셔도 이 일은 좀 아닌 거 같다!' 이런저런 변명을 앞세워 요나는 하나님을 피해 다시스로 도망하려고 욥바로 갔습니다.

그러나 안 하고 싶은 일도 해야 합니다!

성인이 되어서 회사를 다니면 하루 만에 알게 되는 사실이 바로 이것입니다. '안 하고 싶은 일도 해야 한다!' 우리의 생각, 우리의 논리, 우리의 성향 같은 것을 생각하면 절대 안 하고 싶은 일도 회사 가면 해야 합니다. 일례로 혼자 일하기 좋아하는 사람도 같이 일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몸 움직이기 귀찮아하는 사람도 필요한 심부름은 해내야 합니다. 나의 전공을 살려 들어갔는데 전공과 상관없는 일을 시킵니까? 그래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때로는 원하지 않는 일, 내키지 않는 일, 내 생각과 다르고 심지어 충돌하는 일도 해야 합니다. 원하지 않아도 출애굽시키라면 해야 하고, 내키지 않지만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해야 하고, 내 경험이나 지식이랑은 다르지만 그물을 배 반대편에도 내리기도 해야 합니다. 내 경우, 모든 것이 평안한 뉴저지를 떠나 오스틴으로 가 교회를 개척하라고 하면 그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시키신 일을 하십시오. 피하고 싶고, 하고 싶지 않고, 내키지 않고,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더라도 하나님이 시키시면 감당하십시오. 변명하고, 핑계 대고, 눈 피하고, 모른 척하고, 못 들은 척하고, 못하는 척하기보다는 순종하여 하나님의 뜻을 감당하십시오. 회사에서도 하는 일인데 하나님을 위해서 못한다는 게 말도 안 됩니다!

하나님이 시키시면 하기 싫은 일도 감당하십시오! '다시스'로 가지 말고 '니느웨'로 가십시오!

06/19/2026

061926 오늘도 주님 생각
고전16:13-24
깨어 믿음에 굳게 서십시오(13절)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십시오(14절)
수고하는 모든 사람에게 순종하십시오(16절)
이런 사람들을 알아주십시오(18절)
서로 문안하십시오(19-21절)

건강을 논할 때 체크리스트가 있습니다. 기본적인 건강 체크리스트만 잘 챙기고 건강 가이드대로만 잘 움직여도 최소한의 건강이 유지됩니다. 예컨대 하루 권장 섭취 칼로리를 과도하게 넘지 않게 먹습니다. 식단에서 과도하게 짜고 단 것, 그리고 튀긴 것을 배제합니다. 일정 시간을 꼭 운동합니다 등입니다. 막상 해 보면 별것 아닌 것 같은데도 몸이 달라지는 것을 느낍니다. 느낌뿐만 아니라 실제 건강 수치들도 바뀝니다. 몸무게가 바뀌고, 혈액 안에 나쁜 수치와 성분들도 바뀝니다.

교회가 건강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울은 몇 가지 체크리스트를 주었습니다. 깨어 있습니까? 믿음 안에 굳건합니까?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합니까? 사랑하고 있습니까? 수고하는 자에게 서로 순종합니까? 서로의 수고와 노력을 알아주고 인정하고 있습니까? 서로에게 사랑과 관심으로 문안하고 있습니까? 교회 안에서 이런 행동들이 실천될 때 교회는 건강하게 됩니다. 교회가 위대한 성취를 하고, 거대한 행사를 하고, 많은 사람이 모이고, 유명한 사람들이 모여서 건강한 교회가 되는 게 아닙니다. 교회의 건강은 이러한 '건강 체크리스트'를 잘 실천하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병든 이유는 '건강 리스트'대로 지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사랑이 없습니다. 믿음이 흔들립니다. 사랑과 겸손으로 섬기지 않고 교만과 인정 욕구로 섬깁니다. 서로를 인정하지 않고 경쟁합니다. 경계합니다. 순종은 거절하고 오히려 가스라이팅하고 조종하려고 합니다. 결국 조그맣지만 잘못된 습관들이 건강을 해치는 것처럼 이러한 조그만 행동들이 교회를 흔들고 있습니다.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결국 모든 성도들이 다시 건강 체크리스트를 봐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건강 가이드에 따라 움직여야 합니다. 깨어 있는 믿음, 사랑의 동기와 실천, 수고함과 순종함, 인정과 격려, 칭찬, 그리고 문안함! 성도들이 교회에서 이러한 신앙을 실천할 때 아픈 교회들이 회복될 것입니다. 더욱 건강한 교회가 될 것입니다.

06/18/2026

061826 오늘도 주님 생각
고전 16:1-12
"매주 첫날에 여러분 각자가 수입에 따라 저축해서" (2절)

고린도 교회를 향해 바울은 명령 같은 부탁을 합니다. 그것은 매주 미리미리 각자의 수입에 맞게 '구제헌금'을 저축해 두라는 것입니다. 때가 되면 바울이 가서 교회가 정한 믿을 만한 사람을 통해 그 헌금을 예루살렘교회와 성도를 구제하는 데 사용하겠다는 것입니다.

적용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당신도 매주 첫날에 각자의 수입에 따라 구제헌금을 저축하십시오!!"
어떤가요? 왠지 이런 명령 같은 부탁을 들으면 기분이 좀 언짢고 돈 내라는 것 같아서 반감이 생기나요?

지난 4년간 바우교회는 어떻게 세워져 갈 수 있었을까요? 적어도 4개 교회 이상, 2000명도 넘는 교회 밖의 성도들, 즉 우리의 믿음의 형제자매들이 각자의 수입에 따라 모아 둔 구제헌금이 있어서 가능했습니다. 그들 중에는 나와 일면식도 없고, 바우교회와 관계적으로 전혀 상관없고, 우리 교회 성도들과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우교회가 마주하는 재정의 무게를 같이 책임져 주었습니다. 바울의 말처럼 매주, 매월 재정을 구분하여 보내 주는 사람이 있었고, 매월 구분하던 것을 한 번에 모아 한 해에 한 번씩 헌금을 보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교회들도 그랬습니다. 일 년에 한 번씩 '비전헌금'이라는 명목으로 교회를 돕는 헌금을 보내 주곤 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바울이 말하는 이 '헌금'의 수혜자입니다. 그래서 1년 반 전에 달라스에 교회가 개척될 때 우리도 힘을 다해 재정을 모아 그 교회에 헌금함으로 그들의 개척에 마음을 보탰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때로는 '예루살렘교회'로, 때로는 '고린도교회'로 서로 돕고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당신도 매주 첫날에 각자의 수입에 따라 구제헌금을 저축하십시오!! 아까운거 아닙니다. 우리만 주는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이미 받은 자들입니다. 애초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으니 아까운거 아닙니다. 또한 헌금이란 거창하고 대단하고 부담될 일이 아닙니다. 각자의 상황에 따라 하면 되는 것입니다. 부담될 것 같으면 매주 첫날에 조금씩 저축하십시오. 이처럼 헌금을 습관화해야 쉬워집니다. 건강하게 헌금하는 것, 그리고 그 헌금이 건강하게 쓰이는 것은 성도의 책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06/17/2026

061726 오늘도 주님 생각
고전 15:50-58
법을 어겼고 죄를 지었습니다. 이는 죄지은 자에게 치명적인 기소 사유가 됩니다.
"사망의 독침은 죄요, 죄의 권세는 율법입니다"(56절)

죄를 지은 사람은 죄가 명시되고, 그 죄가 어떤 헌법을 어긴 것인지 기명될 때 위축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간혹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특별한 사면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닉슨 대통령은 과거 재임 기간 동안 죄와 불법의 의혹 혹은 확신 속에서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의 연방 범죄 가능성에 대한 완전 사면'을 받았습니다. 일종의 '완전한 사면권'입니다. 흔하지 않지만 이런 일들이 있습니다.

사망은 죄를 내세워 우리를 공격합니다.
사망은 율법을 내세워 우리가 죄인임을 드러냅니다. (56절)
결국 우리는 이 고발 앞에서 자유할 수 없습니다. 괜찮을 리 없습니다. 넘어갈 수 없고, 무마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 정죄되고, 다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완전한 사면권'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57절)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완전한 사면권'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사망의 쏘는 것을 무마시키고, 사망의 승리를 무너뜨리셨습니다. (55-56)

결국 우리의 승리는 우리가 죄가 없어서도 아니고, 우리가 불법을 행하지 않아서도 아닙니다. 우리가 승리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리스도 때문에 정죄가 아닌 구원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을 통해 우리가 살았습니다. 그러니 주어진 새 삶을 그리스도를 위해 수고하며 사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므로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수고해야 합니다. 주를 위해 더욱 힘쓰는 사람이 되십시오."(58절)

06/16/2026

061626 오늘도 주님 생각
고전15:35-49
씨는 주로 타원형의 모양을 띤 아주 작은 형태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막상 심어 보면 일정 기간이 지나 심긴 씨가 썩고(?) 나면 싹이 나고, 곧 자라나 각기 다른 형태로 자라고 또 각기 다른 형태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씨와 나무가 다르다고 해서 그 둘이 다른 것은 아닙니다. 씨가 땅에 묻혀 죽었(?)다고 해서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죽은 자가 어떻게 살아나는가?"
"죽었다 살아나면 나는 나인가?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되는가?"
"죽었다가 살아난다는 것은 몸의 부활인가? 영의 부활인가?"

영원한 부활이라는 것이 경험된 후 사람들에게 전달되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활'이 뭔지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그때 바울은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영적 통찰을 가지고 부활을 설명합니다.

부활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을 향한 재창조와도 같습니다. 썩고 죽어질 몸에서 영원한 신령의 몸으로 살리시는 일입니다. 이는 선뜻 우리의 지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고 확인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사실 부활은 '이해'의 영역이 아닌 '믿음'의 영역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부활에 대해서 어떤 정보들을 주고 있는가?

부활은 우리가 다시 사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능합니다! 살림의 주체가 우리가 아닙니다. 창조자, 전능자,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을 만드시고 생령을 불어넣어 살리신" 하나님이 부활의 주체이십니다. 그러니 부활은 응당 당연합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부활은 마치 씨와 나무 같습니다. 같은데 다릅니다. 육체로 사는 우리는 부활하며 신령한 몸이 됩니다. 육도 몸이고 부활 후 신령한 것도 몸입니다.(44절) 결국 우리는 '몸'으로 부활합니다. 다만 육의 다스림이 아닌 성령의 다스림으로 사는 몸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부활 후에 만져지는 육신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다만 그 몸이 부활 전 '육신'과는 확연히 다른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씨와 나무는 다르지만 하나입니다. 부활한 예수님이 다른 사람이던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도 때가 이르면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있는 모든 이는 결국 부활할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한 자는 하늘에 속한 자로, 그리스도께 속한 자로 영원히 주님과 교제하고, 찬양하는 삶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은 지성인의 당연한 행동일까요? 아닙니다. 지성의 그릇은 신비를 담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성을 뛰어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지성 안에 갇히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부활은 우리의 지성으로 증명되지 않는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부활을 기대하십시오. 하나님과의 영원한 교제로 들어가는 그날을 꿈꾸십시오!

06/15/2026

061526 오늘도 주님 생각
고린도전서 15:29-34
"나는 날마다 죽노라"(31절)
바울은 매일 죽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 이야기를 하는 문맥의 주제는 무엇입니까? 부활입니다.
즉 그가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말할 때, 이는 "나는 날마다 죽고 다시 살아난다"라는 말입니다.그는 죄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났습니다. 이를 매일 반복했습니다.

죽고 살 때 사람은 변합니다. 죽고 살아야만 변합니다.
결국 세례도 그런 의미입니다. 과거의 나, 죄 된 나는 죽고, 물로 깨끗이 씻기고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과거의 죄악에서 죽지 않으면 새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중요한 사실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중생(born again)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내 의지로 중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내 의지로 중생한다면 그것은 삶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지언정, 심판에서 영생으로 옮기는 중생을 가져다주지는 못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시고, 우리를 심판에서 영원한 구원으로 옮기십니다. 결국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인생을 새롭게 하십니다. 우리를 부활시키십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부활의 그리스도를 믿고, 그 그리스도께서 나를 부활시키심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부활을 믿기 때문에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34절)
죄에 대하여 매일 죽고, 부활의 그리스도와 함께 매일 다시 살아나십시오!
매일을 새롭게, 매일을 거룩하게, 매일을 새사람으로 살아내십시오! 그것이 부활을 믿는 자가 마땅히 살아내야 할 삶의 모습입니다.

06/14/2026

061426 오늘도 주님 생각
고린도전서 15:20-28
1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22절)
영생도 그리스도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고, 새 삶도 그리스도를 통해 얻어지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비로소 새로운 삶을 맞이합니다. 예수와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내가 삶을 얻었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고아들을 생각해 보면, 입양되면서 정말 좋은 부모를 만날 때 그들은 새로운 차원의 삶을 살게 됩니다. 고아원의 삶이 아무리 좋았다고 한들, 입양되어서 만난 부모가 자신을 온전히 받아 주고 사랑해 줄 때 경험하게 되는 삶은 차원이 다른 삶입니다. 예수가 우리에게 바로 그런 분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없는 우리의 삶은 방황에 가깝습니다. 지치고 힘듭니다. 그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살았으나 죽은 것 같은 인생이 많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영원한 구원을 못 얻은 인생이니 죽은 인생이 맞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면, 예수님을 믿으면 새 삶을 경험하게 됩니다. 영원한 삶을 약속받게 됩니다. 결국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모든 이가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22절)

2 "그가 강림하실 때에"(23절)
예수님은 돌아오십니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부활의 믿음만큼 중요한 것이 재림의 믿음입니다.
재림을 얘기할 때 중요한 사실 세 가지는 이것입니다.
1) 예수님은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반드시!
2) 반드시 오시는데 언제 오시는지 모릅니다.
3) 다시 오시는 예수님은 처음 오신 예수님과는 다르게(?) 심판자, 만유의 통치자, 영원한 승리자, 천국의 문을 여시는 자로 오십니다.
결국 '예수재림신앙'은 우리를 깨어 있게 합니다. 경건과 거룩을 사모하게 합니다. 매일을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살게 만들어 줍니다. 하늘나라를 사모하게 합니다. 미리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살게 하는 동력이 됩니다.
언제 다시 오실지 모르는 그 예수님을 기대하며 매일을 마치 마지막인 것처럼, 그 날인 것처럼 살 때 우리의 삶이 더욱 질서 있고, 절제하고, 거룩하고, 성화에 이르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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