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W Community Church

VOW Community Church VOW (Voice of Wilderness ) Community Church는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대하며 복음을 선포하는 교회 입니다.

06/01/2026

060126 오늘도 주님 생각
고린도전서 11:1-16
‘다름’에서 오는 구분을 차별로 오해하고 틀렸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성경은 당시 문화와, 전통, 사회의 통념,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 안에서 남녀의 다름을 구분했다. 그리고 다름에서 오는 ‘서로 다른 사회적 행동양식’이 있었다. 예컨대 공예배에 남자는 머리에 무엇을 쓰지 않고, 여자는 무엇을 쓰는 양식과 같은 것이다.(4-7절) 다시 말하지만 이는 다름이요, 틀림이 아니고, 차별도 아니다. 바울이 본문에 기록하듯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이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음이라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11-12절)

언젠가부터 사회 안에 다름을 틀림이라 주장하며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이들이 있다. 다름에서 오는 구분이 곧 차별의 증거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그래서 이들은 마땅히 지켜져야 하는 양식이나, 개념, 이해나, 행동 양식, 법까지도 바꾸려고 한다.

일단 이렇게 접근해보자. 틀린 것들은 바꿔야 하는 것이 맞다. 차별하는 것이라면 바꾸는 것이 맞다. 불의고, 악이라면 정정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다름에서 오는, 창조의 질서에서 오는, 건강한 전통과, 옳은 전통에서 오는 구분은 바꿔야 하는 ‘사회악’이 아니다. 예컨대 남녀 평등을 위해서 남녀가 섞여서 모든 스포츠를 경쟁하지 않는다. 이것이 틀림이나 차별이 아닌 다름에서 오는 구분이라는 것 정도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 (물론 그마저도 차별이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성경은 남녀 차별을 주장하지 않는다. 성경은 남녀의 다름을 얘기한다. 머리에 수건을 쓰고 안 쓰고는 남녀를 차별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꼭 모두가 같아야만 평등한 것이 아니다. 그가 하는 것을 내가 해야만 평등한 것이 아니다. 수영장에서 남녀 불평등을 외치며 “여자도 남자처럼 topless를 허락하라!”가 정말 차별과 평등의 문제일까?
정말 모두가 같아야만 그것이 진짜 차별 없고 평등한 세상을 의미하는 것일까?
구분에 대한 병적인 오해, 자격지심에 기반한 오해, 뭐든지 다름과 분별은 틀렸다고 받아들이는 피해자적인 인식을 조심해야 한다.

차별이라면 바꾸되 건강한 구분, 다름에 대한 올바른 적용은 건강하게 수용하는 것이 지혜라 할 것이다. 무조건 싸우려 들 것도 아니고 논쟁하려 달려들 것도 아니다. 먼저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수용할 수 있고, 생각할 수 있고, 그리고 바꿀 수 있다!

05/31/2026

053126 오늘도 주님 생각
고전 10:23-33
1 합법이라고 다 해도 되는 것일까? 목회자로 살면서 꽤나 자주 고민하는 것이 바로 '덕을 세우는 행동'이다. 사실 법적으로 전혀 문제의 소지가 없는 일들이 있다. 개인의 권리적 측면에서 봤을 때도 마땅히 주장해도 되는 일들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한들 '이것이 덕을 세우는 것인가?' 하는 질문에서 자유롭지 못할 때가 많다. 해도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일이 유익과 덕을 만드는 일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유익과 권리 그리고 덕이라는 이 가치들이 충돌할 때가 많다. 무엇을 가장 우선적 기준으로 정하고 행동할 것인가? 참고로 덕을 세우기 위한 행동은 자주 양보를 필요로 하고, 희생을 필요로 하고, 손해를 요구한다. 당장 바울이 기록한 내용만 봐도 그렇다. "자기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묻지 말고 먹으라"(24-25절) 덕을 세우려다 보니 필연적으로 희생과 손해가 따라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덕을 세우는 인생'이 돼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삶의 태도이다. 우리의 기준은 합법도 아니고 율법도 아니고,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바로 우리의 삶의 기준이다. 사랑과 포기, 희생과 양보가 바로 그리스도의 언어이며, 그리스도가 덕을 세우는 방법이다.

2 바울은 아주 논쟁적인 말을 했다. "음식을 묻지 말고 먹으라! 그러나 그 음식이 제물밥인 것을 알았다면 먹지 말아라!"(25-28절) 이 말인즉슨 바울은 상황에 따라 행동을 바꿔도 된다는 것이다.
바울은 사람이 기준 없이 이랬다가 저랬다가 해도 된다고 말하는 것인가?

바울은 왜 이런 논쟁이 될 수도 있는 발언을 했을까? 예상했겠지만 바울이 이 말을 할 때 바울은 기준 없이 상황에 맡게 흔들려도 된다고 이 말을 한 것이 아니다. 바울은 오히려 명확한 한 가지 기준을 제시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환경에 따라 얼마든지 임기응변으로 반응해도 된다는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기준은 그리스도, 복음, 십자가, 그리고 한 영혼 구원이었다.
우리도 이를 위해서라면 바꿀 수 있어야 한다. 내 생각을 양보할 수도 있어야 하고, 내 계획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하고, 내 습관도 바꿀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죄인의 옷인 인간의 몸으로 내려오시기까지 하시는데 우리라고 바꾸지 못할 것 없고, 포기하지 못할 것 없다.

예수의 복음을 지키고 나의 방법을 바꾸라.
영혼 구원을 위해 나를 바꾸라.
결국 우리는 영혼 구원을 위해 사는 자들이다.

05/30/2026

053026 오늘도 주님 생각
고전10:14-22
'참여'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온다(16절).
참여는 참관과는 느낌이 다르다. 함께 뛰어드는 의미를 상기한다.

우리는 축구 경기를 관람하는 자들과 참여하는 자들의 차이를 안다.
크게 보면 두 부류의 사람이 모두 축구를 사랑하고, 한 팀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선수로 참여하는 자와 관중으로 참관하는 자는 다르다.

신앙은 참관이 아닌 참여를 의미한다. 신앙인은 자고로 십자가에 참여하는 자들이다.

간혹 이런 사람들을 본다. 축구를 관전한다. 참여는 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까 다른 팀이 더 잘하게 되면- 간혹이지만- 다른 팀을 응원하기 시작한다. 팀을 배신하는 것이다. 이 팀, 저 팀 전전하기 시작한다. 한 팀을 좋아하고 응원하면서 정작 다른 팀이나, 다른 팀의 선수를 복수 응원하는 일들도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선수로 뛰는 자들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들은 축구팬과는 다르게 자신의 팀을 위해 사력을 다한다. 경기 중에 상대 팀을 위해 뛰거나, 상대 선수를 추앙하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다.

참여가 가지는 힘이 있다.
방황하는 신앙인은 주로 '참관 신앙인'이다. 그들은 보는 자들이다. 곁에서 관찰하는 자들이다. 그러니 상황을 보다가 간혹 유리함을 위해 이익을 위해 '우상숭배'로 팀을 바꾼다. 그래서는 안 된다. 우리는 십자가에 참여해야 한다. 실제 필드 플레이어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참여하라. 당신도 당신의 포지션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뛰라. 지금 '우상숭배'할 시간도 없고, 여력도 없다. 그렇게 배신해서도 안 된다. 우상숭배가 웬 말인가?! 정신 바짝 차리고 오직 그리스도의 지시에 따라 발 빠르게 움직여야 할 때이다. 팬이 아니라 선수가 되라!

05/28/2026

052926 오늘도 주님 생각
고전 10:1-13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3-4절)
그런데도 이들은 악을 즐겨 행하는 자가 되었다.(6절)

'은혜가 충만한 중에도 죄를 지을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답은 "그렇다!"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하나님을 믿는다 한다. 그리고 실제 '만나의 은혜', '반석의 음료'의 기적들을 경험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완악한 마음과, 생각과, 행동들이 자동적으로 멈춰지지 않는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은혜 중에 죄짓는 자들을 기뻐하지 않는다(5절)
이번 휴가 중에 자녀들과 함께 여행하면서 웬만하면 다 들어주려고 노력했다. 먹고 싶은 것, 사고 싶은 것 최대한 들어주면서 자녀들에게 좋은 시간을 만들어 주고, 추억을 만들어 주려고 했다. 결과적으로 어린 시절 나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을 우리 두 딸은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계속 화내고, 짜증 내고, 불평하고, 힘들어했다. 웬만하면 다 들어주는데도 계속 불평만 하는 아이들을 참다 참다 결국에는 꾸중을 하고 말았다.
'은혜 중에 죄짓는 자'는 마냥 받아 줄 수 없다. 마냥 기뻐할 수 없다.

우리 모두는 은혜를 받은 자이다. 은혜를 받고 있는 자이다.
누리는 중에도 계속 불평하고, 불만하고, 짜증 내고, 화내고, 악을 행하는 나의 어린 딸들처럼,
광야에서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기적과, 만나와, 물을 얻고도 계속 죄를 저지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 앞에서 계속 그렇게 행동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바울이 내린 결론이 우리 모두가 마땅히 다 닿아야 하는 결론이다.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6절)
악을 행하는 자들을 본(?)받아 우리의 삶에서 모든 악을 제거하자. 은혜 중에 행하는 모든 악을 제거하자.
우리 모두는 은혜 받은 자이며, 은혜 받고 있는 자이다.

05/26/2026

052726 오늘도 주님 생각
고전 9:11–18
1.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13절)

사실 복음을 전하는 데는 많은 '장애'가 있다.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재정이 복음 전파에 방해 요소가 되기도 하고, 개인의 성격이 복음 전파에 방해 요소가 되기도 한다. 자칫 습관적인 언행이 복음 전파에 방해 요소가 되기도 하고, 나의 배경이나 평소 생각 등이 복음 전파에 방해 요소가 되기도 한다.

요즘 소위 연예인을 준비하는 10대 어린 학생들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조심 또 조심한다고 알려져 있다. 자신들의 평소 언행과 모든 영역들이 나중에 자신들이 연예인이 되는 데 장애가 되거나, 치명적 위기를 초래할 수 있음을 알기에 미리 조심하고 또 조심하는 것이다. 결국 연예인 한번 해 보겠다고 어려서부터 인생 전체를 정갈하게 조각하며 사는 노력을 하는 것이다.

다시 복음의 얘기로 돌아와 보자. 복음 전하기 위해, 장애 없는, 방해 없는 복음 전파를 위해 우리는 어떤 각고의 노력을 하고 있을까? 재정이 복음 전파에 걸림돌이 될 것 같으면 벌어서라도 그 위험 부담을 덜려 했던 바울처럼, 복음 전파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을까? 평소의 언행, 생각, 성격 등 뭐든 복음 전파에 방해가 안 되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하고 있을까?

복음을 전하는 데는 장애가 많다. 생각지도 못한 것들이 방해 요소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일상을 조심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배려하고 인내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절제하고, 질서를 세우고, 거룩을 만들어 가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이기심이 아닌 이타심으로 사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이것이 없으면 우리의 복음은 항상 장애를 만날 것이다. 어쩌면 이런 것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무턱대고 복음을 외치고만 있기 때문에 우리의 복음 전파가 바울의 그것처럼 강력한 영향력을 발산하거나, 결과를 만들어 내지 못하는 것인지 모른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복음의 장애 요소'를 제거하자!

2. 기독교인들에게 복음 전파는 자랑할 것이 아니다. (16절)

나 어릴 적만 해도 '전도왕'에게 교회에서 막 선물 주고, 광고하고, 엄청 칭찬하곤 했다. 사실 전도를 열심히 하는 것이니 칭찬해 주고 인정해 주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전도는 칭찬받을 일이 아니고 책임져야 하는 일이다. (너무 냉정하게 말하는 것 같지만 이것이 사실이다.)

전도는 책임이다. 바울은 이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16절)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결국 전도가 없는 성도의 인생은 무책임한 인생이다. 복음을 전하고, 전도하고 칭찬을 받을 것도 아니다. 다만 할 것을 했다 여기는 인식이 필요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복음 전파에 대한 사명의식이고, 실제적으로 전도를 시도하는것이다.

05/25/2026

052626 오늘도 주님 생각
1 고전 9:1-101 "나를 비판하는 자들에게 변명할 것이 이것이니…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 (4-6절)

바울의 선한 마음은 악이 되어 돌아왔다. 충분히 사례를 받으며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었지만, 바울은 스스로 일하고 재정을 만들어 복음을 전하는 데 사용했다. 누릴 권리가 없어서가 아니다. 사례를 받을 자격이 없어서가 아니다. 다만 선한 마음으로 성도들에게 재정의 짐을 지우지 않고, 스스로 더욱 헌신함으로 필요를 채워갔던 것이다. 그런데 고린도교회 어떤 성도들이 바울의 이러한 점을 지적한 것 같다. 하나님의 사역에 집중하지 않고 '이중직'으로 사는 것을 보며 바울의 사도직을 걸고 넘어진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바울의 선의는 악이 되어 돌아왔다.때로는 우리의 선의가 악의적인 자들, 비뚤어진 자들, 대적하는 자들에 의해서 곡해되고 결국 악으로 돌아오는 때가 있다. 모세가 선의를 가지고 지위와 권세를 아론과 미리암에게 나눌 때, 어느 순간 아론과 미리암은 자신의 권세와 지위를 모세 위에 두려고 하는 쿠데타를 자행했다.

선의로 곤경에 처한 사람을 구해줬더니 나중에 고소를 당했다는 얘기를 심심치 않게 전해 듣기도 한다. 예컨대 심폐소생술로 죽은 사람 살려줬더니, 나중에 갈비뼈 하나 부러졌다고 보상해 달라고 고소하는 격이다.

세상의 악의 때문에 선의가 위축되지 않기를 기도한다. 우리의 선의가 악의와 대적자와 싸워 이기게 되길 기도한다. 우리의 선의가 오해도 당하고, 공격도 당하고, 무시 당하고, 꿍꿍이가 있다며 온전히 수용되지 않아도 선의의 의지가 꺾이지 않아야 한다. 나의 선의적 행동 때문에 나의 지위, 권세, 권리가 조롱당하거나, 의심당하거나, 인정받지 못할 때도 겸손과 사랑 그리고 인내함으로 선의를 지켜야 한다.

이는 싸움이다. 선의로 악을 이기라. 선으로 증명되는 삶을 살라! 세상의 시선 앞에 인정받기보다는 하나님의 시선 아래 인정받는 인생에 집중하자.

2 세상의 많은 목회자가 '이중직' 혹은 '삼중직'을 하면서 목회를 하고 있다.

한국 여행 중인 어제도 카페를 하며 목회를 하는 곳을 보게 되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이중직으로라도 사명에 뛰어드는 세상의 모든 목회자들이 힘을 얻기를 기도한다. 개척 후 한때 사례가 없어 불안했던 시절도 떠오른다. 더 어릴 적에는 두세 개의 알바를 하며 사역하고, 번 돈으로 학생부 아이들을 먹였던 시절도 떠오른다.

여전히 이런 어려움에 처한 목회자들에게 하나님의 큰 위로와 공급이 임하고, 그들이 일하는 일터에서 필요한 재정들이 채워지길 중보한다. 또한 고린도 교인들처럼 이를 '목회자의 사명'을 공격하고 의심하는 데 쓸 것이 아니라, 그런 목회자들을 도와 그들이 사명에 올인할 수 있도록 하는 선의들이 여기저기서 행해지길 중보한다.

하나님이 모든 '이중직, 삼중직 사명자'들에게 환경으로, 사람으로 채워가시길 기도한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서로 도와가고 채워가며 일하는 것,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성도요 교회인가?! 이런 교회와 성도, 그리고 사명자가 가득하길 기도한다.

말씀묵상  #바우교회  #매일  #아침  #말씀  #묵상  #성경  #생명의삶  #두란노  #큐티
05/25/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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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5/2026

052526 오늘도 주님 생각
고린도전서 8:1-13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13절)

아내가 첫 아이를 임신했을 때 커피, 콜라 등은 당연히 먹지 못하게 했고, 그 외에도 아내가 정말 좋아하는데 먹지 못하는 회나 라면 같은 것들이 있었다. 그런 아내를 바라보는 나는 어떻게 했을까? 참고로 나는 라면 없이 못 사는 사람이다. 당연히 사랑하는 아내를 걱정하며… 옆에서 혼자 라면을 먹었다. 그때를 돌이켜 보면 참 철없고 나쁜 남편이었다.

둘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는 어땠을까? 둘째 임신 때 안타깝게도 아내가 임신성 당뇨를 진단받았다. 이는 삶에 엄청난 변화를 의미했다. 그냥 임신과 임신 당뇨는 완전 다른 식단이었다. 처절할 지경의 식단이었다. 거의 먹는 게 없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때 나는 어떻게 했을까? 거의 대부분의 음식을 '한입' 정도 먹는, 그마저도 맛없는 음식을 먹는 아내를 옆에 두고 나는 안타까워하며 혼자 라면을 먹었다. 나는 그때도 여전히 나쁜 남편이었다.

누군가를 위해서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참는다?! 마음은 있어도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타인을 위해 나의 즐거움을 포기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바울은 말한다. "내가 내 형제들을 위해서라면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습니다!"

당시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들 때문에 교회 안에서 충돌이 있었다. 바울은 이에 대해서 지식과 판단, 그리고 자기 권리를 주장하며 싸우는 그들에게 사랑에 기반한 희생과 배려를 해결책으로 제시한 것이다.

성도 간에 서로의 유익과 건강을 위해서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 심지어 평생 고기와 연을 끊는다? 할지라도 믿음의 형제자매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할 수 있어야 한다. 생각해 보라. 교회가 얼마나 서로 지적하며 싸우는가? 자신의 권리라고 주장하는 데 열정적이고, 상대의 다름을 틀림이라고 주장하는 데 열성적이다. 그러니 서로 시험 들고 분열된다.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내가 왜 포기해야 하는데? 내가 왜 양보해야 하는데?"라고 반문하지 말고, "형제를 위해서 평생이라도 고기를 먹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는 바울 같은 성도들이 될 때, 교회는 더욱 건강해질 것이고, 서로가 서로를 상처주고 시험 들게 하는 게 아니라 살리는 교회가 될 것이다.

도대체 언제까지 '나쁜 남편'으로 살겠는가? ㅋㅋ '좋은 남편'이 되어야 참 행복과 자유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05/23/2026

052426 오늘도 주님 생각
고전 7:25-40
"결혼하지 않는 것이 더 좋다!"(38절)

성경은 결혼을 권장한다고 하지 않았나? 부부가 하나님이 창조부터 만드신 가장 우선된 공동체라고 하지 않았나? 남자가 혼자 독처함이 좋지 않다고 하지 않았나? 결혼은 의무 같은 것 아닌가? 그런데 왜 바울은 결혼하지 않는 것이 더 좋다라고 말했을까? 이는 두 가지 중요한 이유 때문이다.

1. 결혼하지 않는 것이 더 좋다, 왜냐면 환난이 임박했기 때문이다 (26절)
상황이 특수하다. 핍박의 위협과 죽음의 위협이 가까이 있는 시대다. 크리스천들에게는 당시 시대 상황으로 비춰볼 때 매일이 '임박한 종말'이었다. 그러니 이런 상황에 결혼을 하는 것은 서로의 인생을 어려움에 빠뜨리는 일이었다. 책임지고 싶어도 책임질 수 없는 상황들에 언제든지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결혼을 했는데 잡혀가면? 결혼을 했는데 순교하면? 남겨진 사람의 마음과 상황이 고단해지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결혼은 일단 하기로 했다면 책임져야만 하는 공동체이다. 그러니 '임박한 환난' 속에서 결혼하는 것은 강력하게 권고할 만한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결혼하는 것은 잘하는 것이다. 그러나 안 하는 것이 더 잘하는 것이다!"(38절)라고 말한 것이다.

바울의 이 말을 일반 상황에 적용하지 말라. 마치 바울이 "결혼 안 하는 게 더 잘하는 것이다!"라고 모든 이에게, 모든 상황에 얘기하는 것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니다! 결혼하는 것은 잘하는 일이다. 이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리고 결혼했다면 성실하게 책임지는 남편과 아내가 되어야 한다.

2. 결혼하지 않는 것이 더 잘하는 것이다, 왜냐면 하나님께 올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32-35절)
바울은 비혼의 장점이 하나님께 올인된 인생이라고 설명한다.
요즘 많은 이들이 '비혼'을 외치는 이유는 개인의 행복, 만족, 유익, 평안을 위함이다. 혼자 사는 게 더 낫다는 것이다. 더 쉽다는 것이다. 맘 편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이유로 비혼을 권장한 게 아니다. 그가 비혼을 허락(?) 내지는 권고하고 있는 이유는 비혼자는 하나님께 올인된 인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생각하는 비혼자의 삶은 그래서 더욱 비장하다. 하나님을 위해 결연하다.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지고, 쏟아진 인생이고, 집중된 인생이다. 주변을 떠올려보면 결혼을 하지 않았다기보다는 결혼을 못 한 사람들이 꽤 있다. 하나님께 올인하다가 결혼한 기회들을 놓친 것이다. 그렇게 목회자로, 선교사로 여전히 주님을 위해 인생 전체가 드려진 선배들과 지인들이 있다.

결혼하면 가정에 성실하고 맡겨진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결혼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에 100% 이상 올인해야 한다. 편하려고, 쉬우려고 비혼이 아니다, 하나님께 올인되려고 비혼이다. 이미 결혼한 자들은 서로에게 충성과 성실과 책임으로, 아직 비혼인 자들은 하나님께 올인하거나, 결혼해서 가정과 하나님께 각각 최선으로 올인하는 것이 '더 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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