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하나님이 일하시는 교회 New York Ha-Il Global Methodist Church

뉴욕 하나님이 일하시는 교회 New York Ha-Il Global Methodist Church 39-50 Douglaston Parkway, Douglaston NY 11363
담임목사 박영관 (Rev.

Young Gwan Park)

주일예배 1:30 PM (예배실)
토요새벽예배 6:00 AM (예배실)
성경공부: 매주일 식사 친교 후 (친교실)
말씀묵상나눔 매주 목요 8:00 PM (Zoom)

09/05/2026

[서로의 시간을 기다려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9-6-26 겨자씨 한알 149번째
박영관 목사 (뉴욕 하나님이 일하시는 교회)

코넬대학교에서 심리학을 가르친 로버트 스턴버그(Robert Sternberg) 교수는 사랑을 정의할 때 ‘사랑의 삼각이론’을 통해 설명합니다. 친밀감, 열정, 헌신이라는 세 가지 요소가 균형 있게 합쳐져야 비로소 ‘완전한 사랑’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세 요소가 모이는 것도 어렵지만, 이를 지속해서 유지하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그래서 스턴버그는 완전한 사랑이란 ‘얻는 것’에 목적을 두기보다 ‘어떻게 유지하고 관리하느냐’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이 세 가지 요소를 온전히 조화시키기 어려운 결정적인 이유는 ‘각 요소마다 자라나는 속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열정은 불처럼 빠르게 타오르고, 친밀감은 느리지만 꾸준히 쌓이며, 헌신은 결단이 설 때 급격히 형성됩니다.
우리는 종종 이 속도 차이 때문에 관계에서 오해와 갈등을 겪습니다. 나는 아직 친밀감이 충분하지 않은데 상대방이 헌신을 요구하면 부담이 되고, 나는 열정으로 앞서 달려가는데 상대방은 이제 막 친밀감을 쌓아가고 있다면 엇박자가 납니다. 따라서 온전한 사랑과 성숙한 관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서로의 속도가 다름을 먼저 인정하고 기다려줄 줄 알아야 합니다.
3년 전,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 기도하며 준비하던 때가 떠오릅니다. 개척 소식을 들은 한 지인으로부터 첫 예배부터 함께하겠다는 가슴 벅찬 연락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저의 앞선 열정과 그분들이 느끼는 친밀감 사이에 큰 간격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저는 너무 기쁜 나머지 11월 첫 주에 있을 찬양제에 함께 가자며 이것저것을 서둘러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그분들과 저 사이에는 아직 충분한 친밀감이 쌓이지 않은 상태였고, 결국 부담을 느낀 그분들은 연락을 끊고 말았습니다. 저의 넘치는 열정이 그분들에게는 무리한 헌신의 강요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에서 공동체의 지체들이 서로 사랑하는 원리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롬 12:4-6a)
우리가 서로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결국 ‘서로의 다름과 각자의 속도를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 기준과 속도에 맞추어 상대를 바꾸려 하고 쉽게 지적하려 듭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고전 13:4)라고 권면합니다. “저 사람은 왜 저럴까?”라며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지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때로 내 마음에 차지 않고 답답할지라도 그의 속도를 기다려주며 묵묵히 기도해주고 부족한 부분을 함께 채워가는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가 서로의 다름을 품고, 서로의 걸음걸이를 기다려주는 성숙한 사랑으로 깊어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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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29/2026

[혼돈의 파도를 딛고, 주님과 걷는 길]

8-30-26 겨자씨 한알 148번째
박영관 목사 (뉴욕 하나님이 일하시는 교회)

지난주에 발생한 네팔 산사태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흙탕물을 잔뜩 머금고 쏟아져 내린 급류는 모든 것을 집어삼켰고, 사람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현재까지 희생자만 700여 명에 달하고 실종자는 3천여 명에 이르고 있으며, 한국인 9명도 실종자 명단에 포함되었습니다.
네팔 산사태 영상 중, 거센 물결이 모든 것을 휩쓸고 갈 때 유독 집 한 채만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있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집 안에 갇힌 사람들은 오도 가도 못한 채 그저 무사하기만을 바라며 창밖의 급류를 지켜보고 있었고, 높은 층수였음에도 턱밑까지 차오른 물 위로 자동차들이 둥둥 떠다녔습니다.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맹렬하던 자연의 위력도, 반석 위에 튼튼히 지은 집 앞에서는 어찌하지 못하고 비켜 가는 모습이었습니다.
성경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처럼 물 위를 걷게 해달라고 청한 후 실제로 물 위를 걸었습니다 (마 14:29). 구약의 세계관에서 ‘바다’와 ‘깊은 물’은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혼돈(Chaos), 흑암, 악의 세력, 그리고 죽음의 영역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다는 것은 단순히 물 위를 디딘 것이 아니라, 혼돈을 억제하고 죽음의 세력을 발로 밟아 다스렸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는 거센 ‘바람을 보고 무서워’ 물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는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절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외침은 단순한 물에 빠져 살려달라는 애원이 아니라, 혼돈과 흑암, 죽음의 역습 앞에서 터져 나온 절체절명의 구원 요청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낸 이 사건은 단순한 기적을 넘어섭니다. 창조 신학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수님은 혼돈을 굴복시키고 발아래 둠으로써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온전히 증명하셨습니다(마 14:33).
오늘 우리 교는 ‘예수님과 해변을 걸어요’라는 주제로 바닷가에서 야외예배를 드립니다. 비록 예수님처럼 물 위를 걷지는 못하더라도, 해변을 따라 걸으며 혼돈을 발아래 복종시키신 하나님의 아들의 승리를 묵상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삶에는 언제나 혼돈과 흑암, 두려움의 파도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이미 승리하셨다는 점입니다. 이 승리의 기쁨과 확신을 품고, 오늘 주님과 함께 해변을 걸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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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22/2026

[베드로는 다 알고 고백했을까?]

8-23-26 겨자씨 한알 147번째
박영관 목사 (뉴욕 하나님이 일하시는 교회)

일상에서 어떤 일이 기막히게 맞아떨어질 때 흔히 ‘아다리가 맞는다’는 표현을 쓰곤 합니다. 원래 ‘아다리’는 바둑에서 상대 돌을 따내기 직전의 상태(단수)를 뜻하는 일본어 ‘아타리(当たり)’에서 유래했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발음하다 보니 ‘아다리’가 되었고, 일상에서는 ‘적중하다’, ‘딱 맞아떨어지다’라는 뜻의 은어로 굳어졌습니다. 국립국어원에서는 ‘단수’, ‘딱 맞아떨어짐’, ‘적중’, ‘맞춤’ 등으로 순화해 쓰기를 권하지만, 입에 익은 표현은 하루아침에 고치기가 쉽지 않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가을, 친할머니께서 돌아가셨습니다. 그 시절에는 집에서 장례를 치렀기에 온 집안이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가족과 친척, 조문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고, 많은 음식과 음료가 손님들을 맞이했습니다. 그중 제 눈에 유리병에 담긴 ‘델몬트 오렌지 주스’가 쏙 들어왔습니다. 당시 제법 귀하고 인기 있던 음료였습니다.
제가 수많은 음료수 중 ‘델몬트’를 단번에 알아본 건 순전히 TV 광고 덕분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초등학교 5학년이면 아직 영어를 잘 읽지 못하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빨간 바탕에 흰색 글씨로 쓰인 ‘Del Monte’ 상표는 영어 까막눈이었던 제 눈에도 익숙했습니다. 부엌에 있던 주스 병을 보고 제가 “어, 델몬트다!”라고 외치자, 옆에 있던 큰누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워했습니다. ABC도 모르는 5학년짜리 남동생이 영어를 읽어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실은 글자를 읽은 게 아니었지만, 저는 시치미를 뚝 떼고 큰누나의 칭찬을 즐겼습니다.
이런 상황을 두고 ‘딱 맞아떨어졌다(아다리가 맞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겉으로는 완벽히 적중했지만, 사실 저는 영어를 읽은 것이 아니라 눈치껏 얼버무리며 아는 체했을 뿐입니다.
성경에서 베드로는 역사에 길이 남을 고백을 남깁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그런데 베드로가 정말 모든 것을 100% 확신하고 온전히 깨달아서 이 고백을 했을까요? 이어지는 본문을 보면 의문이 남습니다. 예수님께 엄청난 칭찬과 축복을 받은 지 불과 몇 구절 지나지 않아, 베드로는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마 16:23)는 매서운 책망을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고백은 모든 것을 완벽히 알기 때문에 터져 나오는 것만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베드로의 고백을 두고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밝혀주셨습니다. 바로 이 점이 은혜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직분을 받고 30년, 40년 신앙생활을 했다 해도 내 의(義)나 지식을 자랑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던지신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질문 앞에 주눅 들 필요가 없습니다. 비록 내 삶의 성숙도가 고백의 깊이를 온전히 따라가지 못할지라도,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과 중심을 너무나 잘 아십니다.
베드로가 깊은 확신으로 고백했든, 아니면 자신도 모르게 은혜로 ‘딱 맞아떨어진’ 고백을 뱉었든, 하나님은 그 고백 자체를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우리의 찬양과 기도, 예배와 헌신 역시 100% 온전해서 드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삶이 고백을 다 따라가지 못해 부끄러울 때가 많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의 서툰 고백을 받으시고 그 고백 위에 은혜로 응답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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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15/2026

[우리 인생에 마침표를 찍지 마세요]

8-16-26 겨자씨 한알 146번째
박영관 목사 (뉴욕 하나님이 일하시는 교회)

우리가 하는 말에는 ‘닫게 하는 말’이 있고, ‘열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닫게 하는 말은 결정적이고 단정적입니다. “아이고, 끝났네.” “이제는 다 소용없다.” “더 이상 해 봤자 가망 없다.”와 같은 말들입니다. 닫게 하는 말은 자포자기하는 행동보다 먼저 마음의 문을 닫아버립니다. 사실, 무너져 있는 현실 그 자체보다 더 위험합니다. ‘닫게 하는 말’은 무너진 것을 다시 일으켜 세울 힘마저 잃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반면, ‘열게 하는 말’은 묻고 질문하는 말입니다. 아무리 가망이 없어 보이는 상황이라도, 질문은 닫힌 문을 여는 작은 틈바구니가 되어 줍니다. 질문은 닫힌 문을 여는 열쇠와 같고, 막힌 벽을 허물어 길을 내는 해머와 같습니다.
기도는 닫힌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기도가 힘겨우신 분들은 먼저 하나님께 묻는 훈련부터 시작해 보십시오. 그러려면 우선 내 입술에 닫게 하는 말이 얼마나 배어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단정적인 말, 부정적인 말, 남을 비하하는 말, 성적인 농담 모두 마음을 닫아버리는 말입니다. “나는 안 돼. 난 못할 거야. 내 인생은 이렇게 끝날 거야.” 무너짐과 절망의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마침표가 아니라 물음표입니다. 절대로 마침표를 찍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느 산골 아낙네가 매일 물지게를 지고 우물에서 집까지 물을 날랐습니다. 지게 양쪽에는 양동이가 하나씩 걸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 양동이는 달랐습니다. 한쪽은 단단해서 물이 전혀 새지 않는 좋은 양동이였지만, 다른 쪽은 길게 금이 가고 군데군데 구멍이 나 있었습니다. 구멍 난 양동이는 우물에서 찰랑거리게 물을 가득 채워도, 집에 도착하면 늘 절반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구멍 난 양동이는 날마다 괴로웠습니다. 단단하고 온전한 양동이를 부러워하며, 구멍 난 자신을 한없이 초라하게 여겼습니다.
어느 날 구멍 난 양동이는 주인에게 자신을 버리고 새 양동이를 쓰라고 간청했습니다. 주인이 힘들게 지게질을 하는데, 자기는 물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는 쓸모없는 존재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지만 주인은 다정하게 구멍 난 양동이를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내일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렴. 그러면 네가 왜 소중한지 알게 될 거란다.”라고 말했습니다. 다음 날도 주인은 두 양동이에 물을 채우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문득 주인의 말이 떠오른 구멍 난 양동이가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깜짝 놀랐습니다. 빈틈없는 양동이가 지나온 길은 흙먼지만 풀풀 날리는 황무지 같았지만, 자신이 지나온 길에는 아름다운 들꽃들이 활짝 피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인은 구멍 난 양동이에게 말했습니다. “네가 쓸모없는 존재가 아닌 이유는, 네가 흘린 물을 먹고 생명들이 자라났기 때문이란다. 너는 구멍이 났다며 자책했지만, 그 틈으로 흘러내린 물이 들풀을 자라게 하고 들꽃을 피워 냈단다. 너는 참 소중한 존재란다.”
우리의 언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닫게 하는 말’은 관계를 끊어버리지만, ‘열게 하는 말’은 막힌 담을 헐고 새로운 길을 내며 생명을 움트게 합니다.
절망의 자리에서 마침표 대신 기도의 물음표를 던지십시오. 우리의 입술에서 감사와 찬양이 떠나지 않을 때, 그 고백은 어떤 닫힌 문도 활짝 여는 기도의 열쇠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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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8/2026

[머리로 아는 칼, 몸에 익은 물매돌]

8-9-26 겨자씨 한알 145번째
박영관 목사 (뉴욕 하나님이 일하시는 교회)

제가 졸업한 초등학교의 연례 행사 중에는 '단오 민속 행사'가 있었습니다. 차전놀이, 그네타기, 창포물에 머리 감기 등 다양한 민속놀이를 통해 한국 문화를 알리고자 하신 교장 선생님의 깊은 뜻이 담긴 행사였습니다.
저는 그중 씨름대회에 참가했습니다. 토너먼트 방식으로 우승자를 가렸는데, 입상자에게 상품도 주어져 많은 학생이 참가했습니다. 저의 첫 상대는 저보다 키가 작고 왜소한 학생이었습니다. 저는 내심 손쉽게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경기 전날 동네 형들에게 웬만한 씨름 기술을 전수받았기 때문에, 간단한 손기술만으로도 쉽게 이길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첫 판에 보기 좋게 졌습니다. 시작을 알리는 호각 소리와 동시에, 키 작은 상대방이 저를 모래판에 꽂아 넣었습니다. 너무 창피했습니다. 상대방을 너무 만만하게 본 탓도 있었지만, 패배의 가장 큰 요인은 동네 형들에게 말로만 전수받았던 기술을 그날 처음 사용해 보았기 때문입니다. 들었을 때는 그럴싸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연습해 본 적이 없었기에, 그 기술을 현장에서 어떻게 써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 싸움에서 패하는 이유 역시 무기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능히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말씀을 내 삶의 현장에서 제대로 사용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린 다윗이 하나님을 모욕하는 골리앗을 목격합니다. 사울 왕은 자신의 갑옷과 칼을 다윗에게 내어주었지만, 다윗은 익숙하지 않다며 이를 거부했습니다. 대신 자신이 평소에 늘 사용하던 ‘물매’와 ‘돌’을 가지고 나아가 골리앗을 쓰러뜨렸습니다. 다윗은 양을 칠 때 수없이 물매를 던져 들짐승들을 물리쳤습니다. 남들이 보기엔 보잘것없는 물매돌이었을지 몰라도, 어린 다윗에게는 들짐승을 제압할 수 있을 만큼 몸에 푹 익은 최적의 도구였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취될 약속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으로 영적 싸움에서 이길 수 있고, 그 약속으로 영적 도전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과연 그 강력한 무기를 평소에 얼마나 임상적으로 사용해 보았는가’하는 점입니다.
심리학, 특히 ‘인지행동치료(CBT)’에서는 정신 건강을 위한 중요한 치료 기법으로 ‘일단 움직이라’고 조언합니다. 이를 ‘행동 활성화(Behavioral Activation)’라고 부릅니다. 우울함이나 무기력감이 밀려올 때, 사람들은 보통 '기분이 좋아지거나 의욕이 생기면 움직여야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행동을 먼저 시작할 때 뇌가 반응하여 감정과 동기가 뒤따라온다고 합니다. 행동하지 않으면 활동이 줄어들고, 성취감과 즐거움이 사라져 결국 더 깊은 우울의 늪으로 빠지게 됩니다. 작은 설거지나 집안 정돈 하나조차도, 뇌의 입장에서는 하나의 분명한 목표를 달성한 '성공 경험'으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이와 같습니다. 야고보서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고 분명히 정의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머리로만 아는 데 그치지 않고 삶에서 '일단 행하기' 시작할 때, 승리도 자연스럽게 뒤따라올 것입니다. 주저하지 마십시오. 작은 말씀 하나라도 일단 삶으로 옮겨 행할 때, 비로소 말씀이 삶에서 살아 움직이고 하나님의 약속이 실제로 성취되는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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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1/2026

[무엇이 당신을 웃게 합니까? — 세상의 소리와 거듭난 영혼의 반응]

8-2-26 겨자씨 한알 144번째
박영관 목사 (뉴욕 하나님이 일하시는 교회)

영국의 아마존 광고 한 장면입니다. 인적이 거의 없는 시골길. 한 여자가 멈춰 선 차의 보닛을 여는데, 순간 차에서 연기가 피어오릅니다. 누구나 당황스럽고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할 그때, 여자는 웃음을 터뜨립니다. 물론 어이가 없는 상황이라 웃음이 나올 법합니다. 이후 견인 회사에 전화를 걸려고 주머니를 뒤지는데, 그만 열쇠가 주머니에서 빠져 진흙구덩이 속으로 쳐박힙니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때도 여인은 다시 웃음을 터뜨립니다.
이윽고 여인은 진흙구덩이에 깊이 박혀 있는 자동차 열쇠 꾸러미를 겨우 찾았습니다. 팔 한쪽은 이미 시커먼 진흙과 각종 지푸라기로 덕지덕지 더러워졌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지나가던 큰 트럭 한 대가 여인의 차 문을 부수며 지나갑니다. 그 광경을 본 여인은 다시 웃음을 터뜨립니다. 기다리던 견인차가 도착해서 고장 난 자동차를 싣고 있었습니다. 여인은 다시 ‘크크큭’ 웃음을 터뜨립니다. 동시에 번개가 견인되는 차를 내리쳐 불이 납니다. 그래도 여인은 웃습니다.
광고의 마지막은 이 여인이 이토록 심각한 상황 속에서도 웃고 있었던 이유를 보여 줍니다. 여인이 진흙이 잔뜩 묻은 손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귀 뒤로 넘길 때, 이어폰이 귀에 꽂혀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결국 여인은 아마존 코미디 오디오를 들으며 어떤 상황 속에서도 웃고 있었던 것입니다. 광고는 마지막 내레이션과 함께 끝납니다.
“Whatever life throws at you, laugh through it with comedy on Audible.” (인생이 어떤 어려움을 주더라도 오디블의 코미디와 함께 웃어넘기세요.)
저 정도는 아니어도 자동차가 퍼져서 길 한가운데 멈춰 선 경험이 있습니다. 20여 년 전에 주일 예배를 가던 길에 자동차가 떡 하니 섰습니다. 다행히 로컬 길이었지만 주일 예배까지 한 시간 정도 남은 시간이라 머리가 하얗게 되었습니다. 뉴저지에 와서 겨우 2,000달러짜리 중고차를 사고 얼마 안 되었을 때였습니다. 차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우선 보닛을 열었습니다. 다행히 지나던 미국인 노부부가 차를 세우더니 저희 사정을 듣고, 예배 반주를 해야 하는 제 아내를 교회까지 태워다 주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견인차가 와서 정비소까지 가져다주었고, 저는 택시를 타고 교회까지 갔습니다.
처음 겪는 일이기도 했지만, 저희 부부는 그런 상황에서 웃지 못했습니다. 주일이라 교회에서 맡은 사역들이 있었기 때문에 전전긍긍했습니다. 목이 타들었습니다. 지금도 그 노부부를 잊지 못합니다. 그분들이 아니었으면 더 큰 낭패를 봤을 것입니다. 성함이라도 여쭤봤어야 하는데, 아직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그분들 덕분에 웃을 수 있습니다. 참 고마운 분들 때문에 웃을 수 있습니다.
A. W. 아서 핑크의 말입니다. “죄인이 왜 죄악 된 방탕의 삶을 선택할까요? 그것을 더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본성에 따르는 것을 선택하므로, 신성하고 영적인 것을 선택하거나 선호하기에 앞서 반드시 새로운 본성을 부여받아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 그는 반드시 거듭나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 본성대로 사는 사람들 때문에 얼굴을 찌푸리기도 하지만, 반면 거듭나서 죄된 본성을 이기며 하늘에서 이룬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어 가는 사람들 때문에 우리는 웃을 수 있습니다. 그들의 섬김, 헌신, 사랑, 희생은 웃지 못할 어이없는 세상 속에서 우리를 미소 짓게 합니다.
우리도 세상에 웃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옛 본성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희생, 사랑, 섬김, 그리고 헌신은 이미 하늘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이기에, 반드시 우리도 이 땅에서 이루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베네수엘라 지진 긴급 구호 헌금에 많은 성도님이 동참해 주셨습니다. 큰 금액은 아니어도 이 헌금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베네수엘라 지진 피해자들에게 미소 지을 수 있는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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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5/2026

[혼자만의 조명을 끄고, 거룩한 거울을 비추다]

7-26-26 겨자씨 한알 143번째
박영관 목사 (뉴욕 하나님이 일하시는 교회)

모기 한 마리가 황소 뿔에 앉았습니다.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쉬던 모기는 떠날 시간이 되자 황소에게 미안해하며 인사했습니다. “황소님, 제가 하루 종일 뿔에 앉아 있어서 너무 무거우셨죠?” 황소는 덤덤하게 대답했습니다. “무슨 말이냐. 나는 네가 내 뿔에 앉아 있었는지도 몰랐다.”
우리는 때로 인간관계에서 내가 한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의 신경을 거스르지는 않았을까 고심하곤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전혀 개의치 않거나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조명효과(Spotlight Effect)’라고 합니다. 정작 남들은 신경조차 쓰지 않는데, 밤새 침대에서 이를 곱씹으며 스스로 마음의 짐을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는 이처럼 자신만의 조명 아래 갇혀 착각 속에 살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하루 동안 만난 사람들과 나눈 대화 중 기억나는 말이 얼마나 되시나요?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말과 행동을 오랫동안 기억하지 않습니다. 남의 시선이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못하거나, 반대로 시선을 의식해 억지로 무언가를 하려는 것은 쓸데없는 에너지 낭비일 뿐입니다.
사탄은 우리가 과거의 말과 행동에 갇혀 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더 넓고 건강한 관계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차단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만든 어두운 조명 안에만 갇혀 지내기를 바라며, 그 안에서 관계를 왜곡하고 이간질합니다.
어느 과학자가 UFO 사진의 허점을 지적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인터넷이나 책에서 보는 유명한 UFO 모습은 늘 단 한 장의 사진으로만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UFO를 촬영할 정도의 상황이었다면, 다른 누군가의 기록에도 포착되었어야 맞습니다. 가령 뉴스에 나올 만한 혜성이 떨어지면 휴대폰, CCTV, 블랙박스 등 복수의 기록들이 앞다투어 등장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유독 UFO만이 ‘단 하나의 사진’으로만 존재하는 결정적인 단점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의 말과 생각, 삶의 기록이 나 혼자만의 영역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함께 나누고 서로 교정해주어야 합니다. 교회의 존재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혼자만의 조명 아래 있으면 자칫 삶의 중심이 자신이 되고, 눈앞의 ‘땅의 보물’과 자기만족에 매이기 쉽기 때문입니다.
서로를 지적하고 정죄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의 따뜻한 거울이 되어 ‘거룩한 반영(Holy Reflecting)’을 이룰 때 우리는 함께 성장할 수 있습니다. 혼자서만 조명 아래 서 있으면, 사탄은 영원한 ‘천국’을 사모하는 마음조차 빼앗아 갑니다. 시선이 천국보다 나 자신에게로 더 향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내 자신, 내 성과, 내 감정에 매여 있던 시선을 영원한 ‘천국’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전환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이 진리를 명확히 정리해 주셨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마태복음 6: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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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18/2026

[5 달러짜리 은쟁반과 십자가의 가치]

7-19-26 겨자씨 한알 142번째
박영관 목사 (뉴욕 하나님이 일하시는 교회)

내슈빌에 사는 ‘린다 그레이브스’(Linda Graves)라는 여인은 벼룩시장에서 5달러짜리 낡은 은쟁반 하나를 구입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린다는 세제로 정성껏 은쟁반을 닦았습니다. 이윽고 깨끗해진 은쟁반에서 묘한 문양을 발견한 그녀는 즉시 전당포로 향했습니다. 전당포 주인은 허둥지둥하며 2,000달러를 줄 테니 자기에게 팔라고 제안했습니다. 린다는 아무래도 뭔가 있다는 느낌이 들어 전당포를 나와 전문 감정사를 찾았습니다. 감정 결과, 그 은쟁반은 1820년대 보스턴의 유명 은세공업자가 만든 ‘코인 실버’ 제품으로 수십만 달러의 가치가 있다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결국 린다는 은쟁반을 경매에 부쳐 무려 110만 달러에 낙찰받았습니다. 그녀는 그 돈으로 자기 집 모기지도 갚고, 딸에게 집도 사주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당장 우리도 벼룩시장으로 달려가 무언가를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그런데 반전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최근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가짜 이야기’입니다. 만약 이런 일이 실제로 있었다면 대형 언론사들이 앞다투어 기사로 다루었겠지만, 관련 보도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소더비나 크리스티 같은 유명 경매소의 기록에도 이 은쟁반의 낙찰 내역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토록 거짓이 정교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요즘 AI가 만든 영상을 보면, 이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전문가조차 구분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세상은 이처럼 본질이 아닌 껍데기로 우리의 눈을 현혹하곤 합니다.
우리가 산에 가는 이유는 산을 정복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거대한 자연 속에서 내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확인하기 위함입니다. 바다에 가는 이유는 셀 수 없이 많은 모래알 가운데 나 역시 한 알의 모래와 같은 존재임을 느끼기 위해서입니다.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이유도 광활한 우주 속에서 나의 작음을 겸손히 마주하기 위함입니다. 이는 결코 우리가 무가치한 존재라는 뜻이 아닙니다. 큰 것 속에서 나의 작음을 깨달을 때, 비로소 그 거대한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의 위대함 안으로 우리가 온전히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유독 무가치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망각한 채 자기 자신을 계속 키우려고 애쓰고 있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우리 삶 가운데 십자가에서 피 흘려 희생하신 주님을 믿고 따르는 이유는, 우리의 가치를 세상에 증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찬양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위대하신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고자, 저희 GMC 한미연회 전 교회가 베네수엘라 지진 구호를 위한 헌금을 모금합니다. 지난 6월 24일 발생한 대지진으로 현지의 수많은 이웃이 인명 및 재산 피해를 보고 고통 속에 있습니다. 이에 저희 교회도 7월 마지막 주일에 특별헌금을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가 드린 소중한 정성은 연회 내 다른 교회들의 헌금과 합쳐져 베네수엘라 현지로 신속하게 전달될 것입니다.
세상은 거짓을 진짜처럼 포장하여 끊임없이 우리를 속이려 하지만, 우리는 오직 진리이신 주님의 말씀을 따라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아직 작고 연약한 교회일지라도, 주님의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교회, 주님의 사랑을 세상에 아낌없이 전하는 교회, 그리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을 높이는 복된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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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11/2026

[비교의 중력을 이기는 은혜의 양력]

7-12-26 겨자씨 한알 141번째
박영관 목사 (뉴욕 하나님이 일하시는 교회)

결혼 전 총각 시절, 경남 김해에서 전도사로 사역했었습니다. 당시 사역하던 교회에는 저보다 두 살 많은, 정말 신실한 집사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전도사인 저보다 더 전도사 같고 믿음도 참 좋으신 분이었습니다. 그분도 그때는 결혼 전이라, 가끔 새벽기도회 차량 운전 봉사를 하실 때면 저희 집에서 같이 지내곤 했습니다. 그 집사님은 대한항공 연구원이었고, 학부에서 물리학과 항공 관련 공부를 하셨기 때문에 틈틈이 저에게 물리학과 비행 원리를 설명해 주시곤 했습니다. 솔직히 다른 건 기억에 없고, 비행기가 뜨는 양력의 원리만큼은 또렷하게 설명해 주신 것이 기억납니다.
비행기가 날 수 있는 원리는 ‘베르누이 정리(Bernoulli’s theorem)’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비행기 날개 부근 좌석에 타 보신 분들은 보셨을 겁니다. 비행기가 이륙하기 전, 기계음을 내며 양쪽 날개 폭이 넓어집니다. 그리고 보통 시속 250~300km의 속도로 활주로를 달립니다. 그렇게 달려야 비로소 ‘양력’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비행기 날개의 아랫부분은 평평하고 윗부분은 둥근 곡선 모양이라, 빠른 속도로 달리면 날개 아랫부분은 압력이 높아지고 윗부분은 압력이 낮아져 비행기가 위로 떠오른다는 설명이었습니다. 지금도 완벽히 이해되지는 않지만, 여하튼 하늘로 날아오르는 비행기는 양력으로 중력을 이겨낸 결과입니다. 그것이 양력이든 베르누이의 법칙이든, 펼친 날개를 가지고 빠른 속도로 달리면 창공을 날게 된다는 사실 자체가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지구에는 우리가 알든 모르든 수많은 물리적 법칙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비단 물리적인 힘뿐만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법칙과 원리들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죄와 사망의 법’과 이를 극복하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바로 그것입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여 죄가 무엇인지 알게 하지만, 결국 인간은 그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해 죄인이 되고 맙니다. 이것이 죄와 사망의 법에 지배받는 인생의 한계입니다. 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받고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뿐입니다.
최근 친구 목사가 보낸 짧은 글 하나가 느슨해진 제 마음을 단단히 동여매게 합니다. “나는 신발이 없음을 원망했는데, 길에서 발이 없는 사람을 만났다.” (데일 카네기)
끝을 알 수 없는 비교의 우물에 우리의 얼굴을 비추어 보며, 나를 증명하려는 유혹이 날마다 우리를 넘어뜨립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은 신발이 있느냐 없느냐로 인간을 평가하는 세상의 시선 자체를 깨뜨려 버립니다. 세상에는 끊임없이 우리를 끌어내리려는 비교의 중력이 존재합니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신발이 없다는 원망의 마음도, 발이 없는 사람을 보며 안도하는 부끄러운 위안도 아닙니다. 오직 내 영혼의 빈 우물을 가득 채우시는, 압도적인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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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4/2026

[유다 카우와 겨릿소]

7-5-26 겨자씨 한알 140번째
박영관 목사 (뉴욕 하나님이 일하시는 교회)

‘유다 카우’(Judas Cow)라는 소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했던 가룟 유다의 이름에서 착안한 듯합니다. 유다 카우는 다른 가축들을 도살장으로 유인하는 소입니다. 가축들은 도살장 같은 낯선 장소로 이동할 때 본능적으로 경계하며 말을 듣지 않습니다. 이때 나이 많고 노련하게 훈련된 ‘유다 카우’를 무리의 맨 앞에 세웁니다. 그러면 경계심으로 예민해진 소들이 경계심을 풀고 유다 카우의 뒤를 졸졸 따라갑니다. 결국, 도살장을 직감하고 예민해졌던 소들은 노련하고 경륜 있어 보이는 유다 카우를 믿다가 경계심을 풀고 맙니다. 흥미로운 점은, 유다 카우가 도살장으로 들어 가기 직전 옆으로 난 비밀 통로로 쏙 빠져나간다는 사실입니다. 유다 카우만 탈출할 수 있는 문을 따로 만들어 둔 것입니다. 유다 카우를 따르던 소들은 그렇게 도살장에 갇히게 되고, 비밀 통로로 빠져나간 유다 카우는 주인이 주는 신선한 사료로 보상을 받습니다. 억지로 끌고 간 것이 아닙니다. 그저 나이 많고 경륜 있어 보이는 유다 카우를 신뢰하고 따랐을 뿐입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과거 농경 사회나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의 농경 문화에는 ‘겨릿소’가 있었습니다. 소 두 마리를 한 멍에로 묶어 함께 일하게 하는 방식입니다. 한 마리보다는 두 마리가 함께 멍에를 멜 때 훨씬 큰 힘을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농부들은 아무 소나 두 마리를 택하지 않고, 특별한 방식으로 멍에를 지웁니다. 우선 노련하고 힘 좋은 어른 소와, 아직 일할 줄 모르는 신참내기 어린 소를 한 짝으로 묶습니다. 어린 소는 일해 본 경험이 없어 힘을 어떻게 써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릅니다. 반면 고참 소는 민첩성은 조금 떨어질지 몰라도, 어떻게 힘을 쓰고 어떻게 방향을 잡아야 하는지 잘 압니다. 농부들은 혈기왕성하지만 서툰 어린 소가 노련한 고참 소 곁에서 일을 배울 수 있도록 짝을 지어 줍니다. 덕분에 어린 소는 힘을 과하게 쓸 필요도, 복잡하게 머리를 쓸 필요도 없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멍에'란 무엇일까요? 당시 랍비(스승) 밑에서 학문과 도를 배우는 것을 가리켜 ‘그 랍비의 멍에를 멘다’고 표현했습니다. 따라서 멍에를 메라는 것은 주님의 희생을 기억하며 그분의 가르침을 받으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친히 다 짊어지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하든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메고 가면 주님이 이끄실 테니, 염려하지 말고 주님 곁에서 안식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과 발을 맞추며 배우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섬기신 방식은 ‘온유와 겸손’이었습니다. 우리가 주님 곁에 있을 때 참된 쉼을 얻는 이유는, 주님이 모든 힘을 다 쓰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저 주님 옆에 꼭 붙어 있기만 하면 됩니다.
지난 주일부터 수요일까지 열린 한미연회 동북부 지방 청소년 연합수련회에 참석하여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보호자이자 인솔자 자격으로 가는 것이니 '그저 쉬다 오면 되겠다'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3박 4일 동안 여섯 번의 집회를 통해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는 상상 이상으로 컸습니다. 무엇보다 수련회를 준비하고 인도하신 각 교회 교육부 목사님, 전도사님, 그리고 교사들의 헌신을 보며 더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분들이 하나님께 기꺼이 헌신하여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메고 일하니, 수련회에 참석한 수많은 청소년이 영적인 안식과 쉼을 누릴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은혜를 받은 아이들은 펄쩍펄쩍 뛰며 주님을 찬양했고,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는 세상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말씀을 받아 적었습니다. 아이들이 이토록 은혜의 바다에 흠뻑 젖을 수 있었던 것은, 주님과 기꺼이 멍에를 같이 메고자 했던 헌신된 주님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 아름다운 동역이 있었기에 더욱 은혜 넘치는 수련회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그 아름다운 주님과의 동행에 기꺼이 헌신하고자 합니다. 내가 하는게 아닙니다. 주님의 멍에를 메고 가면 주님이 다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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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1am - 5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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