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자스뉴비전교회 Kansas New Vision Church of the Nazarene

캔자스뉴비전교회 Kansas New Vision Church of the Nazarene 캔자스뉴비전교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Welcome to Kansas New Vision Church of the Nazarene.
주일예배시간(Sunday Worship): 11:30 am

11/08/2021

태국 권동환 선교사님으로 부터 온 기도 편지
1. 긴급기도제목! 캄보디아는 최근에 나사렛교회가 있는 여러지역에서 극심한 홍수를 겪고 있습니다. 교인과 주민들의 삶의 터전인 논밭이 망가져서 식량과 식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또한 목회자들을 포함해서 많은 교인들이 코로나에 걸려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 캄보디아 전국에서는 4-5명 이상이 모일 수가 없습니다. 교회가 함께 이러한 어려운 시기를 잘 이겨낼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2. 미얀마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계속해서 기도합니다. 전국이 혼란스러운 가운데에서도 지치지 않고 헌신하는 주의 종들이 있어 감사합니다. 이번 달 여러 교회의 목회보고에서 세례식, 새로운 예배처소, 부흥회 등의 기쁜 소식을 나누었습니다. 주님께서 계속해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교회가 고난 당하는 이들에게 피난처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 태국 방콕 오이코스 교회에서 이번달 4명의 새신도가 세례를 받았습니다!
태국 연회에서 전도 훈련을 실시하고 있고, 목회자 연합기도회가 지속되고 있어 감사합니다. 반자이디라는 어린이선교센터를 섬기고 있는 두안 전도사님이 최근 오토바이 사고를 당해서 입원 치료 중입니다. 빠른 회복을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 앞으로 준비 중인 연회 모임, 성탄절 행사 준비, 리더십 훈련을 위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오늘 집사직분자 임명식이 있었습니다.집사 직분을 받으신 임경순 집사님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Today we had a Ceremony of Deaconess Appointment. Congratulations ou...
09/20/2021

오늘 집사직분자 임명식이 있었습니다.
집사 직분을 받으신 임경순 집사님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Today we had a Ceremony of Deaconess Appointment. Congratulations our Deaconess Kyungsoon Lim!

제자훈련 1단계 과정인 BS 101(Intensive Course)을 수료하신 두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The third BS101(Intensive Course), the Disciple Training Pro...
07/26/2021

제자훈련 1단계 과정인 BS 101(Intensive Course)을 수료하신 두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The third BS101(Intensive Course), the Disciple Training Program, completion ceremony was held today. Congratulations to Jinsu Lim and Kyungsoon Lim.

오늘은 우리교회와 미국교회가 1년 3개월만에 연합예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함께 동역하는 아름다운 주님의 공동체 입니다!Today, we had a wonderful combined service wi...
07/12/2021

오늘은 우리교회와 미국교회가 1년 3개월만에 연합예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함께 동역하는 아름다운 주님의 공동체 입니다!
Today, we had a wonderful combined service with FBC in over 15 month. We are the one in Christ, the HolyBody of Christ. Thank God and all the glory to God

12/21/2020

어제 있었던 예배 파일을 편집한 후에 재업로드 하였습니다. 90도 회전되었던 화면을 다시 원래대로 되돌리고 배경 잡음을 제거하였습니다. 볼륨을 최대치로 올리셔도 큰 잡음 없이 음성을 들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마이크가 제대로 연결되지 않았던 탓에 제 앞에 있던 마이크가 아닌 휴대폰 자체의 마이크를 통해 예배가 녹음된 듯 합니다. 그래서 목소리 음성이 잘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좋지 않습니다.

혹시라도 어제 인터넷 예배를 제대로 드리시지 못하신 분 중에 원하시는 분은 제가 밑에 첨부한 설교 본문을 읽으시면서 들으시면 웬만큼 이해하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컴퓨터에서 보시는 분들은 동영상의 오른쪽 하단에 있는 화면을 크게 하는 버튼을 누르시면 커진 화면 오른쪽에서 설교 본문을 동시에 읽으실 수 있습니다.

담임목사님이 출타 중에 계신데 제가 예배를 인도하는 일을 그르친 것 같아 마음이 많이 안 좋습니다. 어제 온라인 예배를 드리려고 준비하셨던 분들께 불편을 끼쳐 드려 다시 한 번 죄송하다는 사과를 드립니다. 이하는 어제 전한 설교 본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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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성탄주일입니다. 대림절 마지막 주일을 맞아 오늘은 성탄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합니다. 성탄절은 일년에 한 번만 있는 아주 특별한 날입니다. 그런데 다른 관점에서 보면 성탄절은 매년 반복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떤 것이 주기적으로 계속 반복되면 점점 그것에 익숙해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점점 그 가치를 잊어버리고 살게 됩니다.

대표적인 예로 우리가 매일 얼굴을 마주보고 사는 가족들이 그렇습니다. 매일 같이 붙어 살다 보면 서로에 대해서 너무 익숙해져서 가족이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잊고 살게 됩니다.

한국에서 우스갯 소리로 유부남들이 가장 원하는게 뭔지를 물어보면 와이프가 아이들 데리고 딱 2주만 친정에 가는게 소원이라네요. 그런데 막상 그렇게 데리고 가면 며칠 못 가서 가족들 보고 싶어서 못 견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뭐가 익숙해지기 쉽나요? 제가 보기엔 성경이 그렇습니다.
요즘엔 성경책 들고 다닐 필요도 없지 않습니까? 스마트폰만 열면 다 성경앱 하나씩 있지 않나요?
문제는 성경을 쉽게 읽을 수 있는 만큼 많이 읽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이 너무 흔해지다 보니까 성경이 더 이상 그렇게 소중하지 않게 됩니다.

제 생각엔 성탄절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성탄절도 매년 지키고 매년 반복하다 보니까 점점 익숙해지는 것 같습니다. 성탄절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고 우리가 무엇을 기념하는지 크게 신경쓰지 않게 되는 것 같습니다. 늘 드리는 거니까 그냥 드리는 거죠.

그래서 오늘은 성탄절의 깊은 의미에 대해서 조금 다른 관점에서 한 번 살펴보려고 합니다. 많은 분들이 성탄절을 절기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시는데요. 저는 성탄절을 복음의 좋은 소식이라는 관점에서 죄와 연관 지어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성탄절은 죄하고는 잘 어울리지 않잖아요? 왜 성탄절에 기뻐해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기뻐해야 하는지 제가 죄의 관점에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머리 속으로 여러분들이 바다 한가운데서 배를 타고 항해 하는 중이라고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바다에서 항해할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목적지에 가능한 한 빠른 시간 안에 도착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려면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번째로 나침반이 필요하구요. 그리고 엔진이 필요합니다. 나침반은 우리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정확한 방향을 알기 위해서 필요하구요. 엔진은 배를 움직이는 힘이 필요하기 때문에 없어서는 안 되는 아주 중요한 물건입니다.

사람들이 보통 인생을 항해에 비유하지 않습니까? 인생에도 나침반과 엔진 이 두 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인생의 항해에 필요한 나침반과 엔진은 조금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것이 목적과 수단이라고 불린다고 생각합니다. 목적과 수단은 인생이라는 항해에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여러분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인생의 목적과 수단이 분명하면 성공적이고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내가 뭘 원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를 분명히 알고 또 그것을 이룰 수 있는 적절한 수단을 갖고 있으면요, 인생을 낭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이 한정적인 시간과 자원을 적재적소에 잘 사용할 수 있게 되니까 인생을 낭비 하지 않게 되구요 그러다보면 어느새 성공이 여러분 눈앞에 찾아와 있을 겁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목적과 수단을 찾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면서 살아갑니다. 특히 젊은 청년들은 내가 앞으로 뭘 먹고 살아야 하지? 내가 뭘 하고 싶지? 내가 뭘 잘하지?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지? 이런 걸 늘 고민하며 살아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인생의 목적과 수단을 찾으려고 하다가 아주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를 때가 있습니다. 바로 목적과 수단을 헷갈리는 것입니다.

목적과 수단을 헷갈리면요 목적과 수단이 뒤바뀌어 버립니다.
목적이 수단이 되고 수단이 목적이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다들 아시다시피 수단이 목적이 되어버리면 굉장히 무섭고 비참한 결과로 이어지게 됩니다.

예를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수단이 목적이 되어버리는 가장 큰 예가 바로 돈입니다.
여러분 돈은 수단일까요? 목적일까요?
당연히 돈은 수단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인생의 목표는 행복 아닙니까? 돈은 행복을 가져오는 중요한 수단 중에 하나입니다.

제가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이 행복에 대한 리포트를 쓴 적이 있는데요. 그 때 참고했던 자료 중에 하나가 EBS 에서 만든 마음이라는 다큐멘터리입니다. 4부작짜리 였던 것 같은데요. 그 중에 하나가 마음과 돈의 상관관계를 연구한 실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을 실험을 해보니까 내가 한달에 버는 돈이 많아질 수록 내 마음의 행복감이 올라가더랍니다.

100만원 벌 때보다 200만원 벌 때가 더 행복하구요
200만원 벌 때보다 300만원 벌 때가 더 행복하더랍니다.

그런데 재밌는 건요 어느 수준을 넘어가면 더 이상 올라가지 않더랍니다. 올라가는 경우도 있고 오히려 떨어지는 경우도 있고 뒤죽박죽이었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그 기준이 400만원 이었던 것 같은데요. 그 당시가 2001년도였으니까 벌써 20년 전이네요. 그 때 400만원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죠.

400만원 까지는 돈과 행복이 비례했는데 그 이후로는 비례하지 않더랍니다. 지금은 20년이 지났으니까 그 기준이 아마도 600만원은 되지 않을까요?

만약에 여러분들 중에 한화로 600만원 정도를 못 버시는 분들이 있으시면 그 분들은 끝나고 남으시면 제가 특별히 축복기도를 해드리겠습니다.
인간이 행복하려면 그 정도는 벌어야 돼요.
예수님도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내 행복감이 만족할 만한 최소 수준까지 월급이 올라가도록 기도하는 건요
너무 당연한 일이고 하나님도 원하시는 겁니다.

아무튼 이게 뭘 의미할까요? 돈과 행복감이 비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돈은 행복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돈은 행복을 추구하는 여러 도구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그것도 딱 어느 수준까지만 행복을 보장해줍니다.
그 수준이 넘어가면 더 이상 돈은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에게 돈이 더 이상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돈이 많은 사람이 있는데요. 이 사람이 가지지 못한 딱 한 가지가 있답니다. 그게 뭔지 아십니까? 세상에서 가장 돈이 많은 사람도 이것 하나를 가지지 못했어요. 그래서 정말 이것을 가지고 싶어합니다. 이게 뭐냐면요, 바로 더 많은 돈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돈이 많은 사람이 원하는 건 바로 더 많은 돈입니다.
죽을 때까지 써도 다 못 쓰는 돈이 있는데 여전히 더 많은 이익을 내려고, 더 많은 돈을 벌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여러분 현재 세계에서 제일 부자는 아마존 CEO 잖아요? 이 회사가 어떤 짓을 했는 줄 아십니까? 필라델피아에 있는 한 아마존 물류창고에 에어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여름에는 내부 온도가 115도까지 올라간답니다. 그러니까 일하는 사람들이 일하다가 픽픽 쓰러지죠. 직원들이 너무 자주 쓰러지니까 이 회사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에어컨을 설치해야 되겠죠. 그런데 이 회사가 어떻게 했냐면 주차장에 응급차를 대기시켜 놓았답니다.

아니 응급차를 대기시킬 여유가 있으면 먼저 에어컨을 설치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에어컨은 설치를 안 하고 응급차를 대기시켜 놓았답니다. 쓰러지면 빨리 병원에 데려다 줄려고. 그리고 이 사실이 언론에서 대서특필되니까 그제서야 부랴부랴 에어컨을 달았다네요.

왜 이럴까요? 답은 분명하죠. 전기세 아낄려고. 사람 목숨보다 전기세 아끼는게 더 중요해진 겁니다. 사람 목숨보다 수익 조금 더 내는게 더 중요해지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큰 비극입니까?
목적이 수단이 되고 수단이 목적이 되어버리면 이런 비극이 발생합니다.

제 생각에는 성탄절에도 이런 비극이 발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성탄절은 수단일까요? 목적일까요?
성탄절은 수단입니다.

성찬식을 한 번 생각해보시죠.
성찬식은 예수님의 고난을 기념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우리가 빵을 먹을 때는 우리를 위해 찢기신 예수님의 몸을 기념하구요. 우리가 포도주를 마실 때는 우리를 위해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를 기념합니다.

세례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 역시 기념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무엇을 기념하기 위한 수단입니까? 우리가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다는 사실을 기념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세례를 안 받고 죽으면 구원을 받냐 못 받냐 이런 논쟁들이 있지 않습니까? 이런 건 목적과 수단을 혼동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논쟁인 것 같애요.

성탄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성탄절 역시 무언가 중요한 것을 기억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성찬이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기 위한 것이고
세례가 우리의 거듭남을 기억하기 위함인 것처럼
성탄절 역시 무언가를 기억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성탄절이라는 행사에 익숙해지다 보니까 요즘은 성탄절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린 것 같아요. 성탄절에 무엇인가를 기억해서 기쁜게 아니라 그냥 성탄절이니까 행복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목적없이 수단에만 매달리는 건 쓸모 없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위험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 없이 세례만 받는다고 어떤 효력이 있습니까? 아무리 세례를 많이 받아두요 믿음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성찬도 믿음이 없이 행하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믿음이 없이 성찬을 행하는 것이 위험하다고 경고합니다.

마찬가지로 성탄절에 아무 이유 없이 행복한 건요 아무 의미도 없을 뿐더러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를 위험에 빠트릴 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성탄절에 행복하지 말자 이런 건 아니구요. 성탄절에 왜 행복해야 하는지 그 분명한 이유를 알고 행복하자 이겁니다.

하나님이 세례를 통해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성찬을 통해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성탄절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탄절의 목적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성탄절에 기념해야 하는 건 무엇일까요?

많은 분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마치 교회에 누군가가 아기를 낳았다고 하면 기쁘지 않습니까? 마치 그런 것처럼 그저 생일파티 하는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 같애요. 그런데 저는 그게 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좀 다른 입장에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제가 이렇게 질문을 한 번 드려볼게요.
여러분들은 왜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여러분들은 왜 힘들게 주일마다 일어나서 교회에 나오시고 헌금을 내시고 예수님이 말씀한 대로 살려고 노력하십니까?

어떤 분들은 그냥 예수님을 사랑하시는 분도 있구요. 어떤 분들은 예수님이 유일하신 진짜 하나님이니까 예수님을 사랑하구요 어떤 분들은 예수님이 전지전능하신 분이니까 예수님을 따르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성경에도 예수님을 사랑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참 많이 나옵니다. 그러데 이렇게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읽다보면 재미있는 특징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냥 가볍게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사람들 말구요. 진심으로 예수님을 사랑했던 사람들만 딱 모아놓고 보면 두 그룹으로 나뉩니다.

첫 번째 그룹은요 예수님으로부터 칭찬받은 그룹입니다. 이 그룹에 속한 사람들은요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또 예수님으로부터 그 사랑을 인정을 받습니다. 그래서 칭찬도 받습니다.

반대로 다른 그룹에 속한 사람들은요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했는데도 불구하고 책망을 들어요. 책망만 들으면 다행이게요. 정말 열심히 예수님을 죽자 살자 따라다니는데도 어쩔 때는 저주를 받아버립니다. 여러분들이라면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먼저 이 억울한 사람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마태복음 16장을 보니까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직전 상황입니다. 그 당시에는 예수님에 대한 명성이 높았구요 그러다 보니까 정통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예수님을 향한 반감이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피해서 예수님이 예루살렘 밖에서 활동을 하셨죠. 그러다가 이제 예루살렘 입성을 직전에 두고 있는 상황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제 내가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고통을 당하고 결국엔 죽게 될 것이다. 하지만 세번째 되는 날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라고 선포하시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가 예수님을 말립니다. 죽지 마시라고 예수님을 붙잡습니다. 베드로가 왜 그랬을까요? 꿈에 사탄이 나타나서 예수님 죽지 못하게 막으라고 지령을 받았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예수님이 죽는 꼴을 못 보겠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뜯어 말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을 사랑하고 이렇게 예수님을 좋아했던 제자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사탄아 물러가라 라고 하십니다.

가족이고 직장이고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해서 사랑의 감정을 좀 표현을 했는데 예수님이 도리어 책망을 하시는 겁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모든 성경을 통틀어서 이게 가장 심한 책망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예수님을 향해서 사랑을 표현했는데요 그 사랑이 예수님께 인정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오늘 다른 본문 말씀인 마태복음 26장입니다.

한 여자가 굉장히 비싼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는 그것을 예수님의 머리에 붓습니다. 그 시대에 향유라는 건 굉장히 귀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여자는 주저 하지 않고 그걸 예수님의 머리에 붓습니다.

그리고 그건 분명히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 비싸고 귀한 향유를 사용하는데에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 옆에 있던 제자들이 이게 웬 낭비냐면서 이 여자에게 막 뭐라고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도리어 제자들을 말리시면서 이 여자를 칭찬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칭찬이 정말 놀라울 정도로 대단합니다.

얼마나 대단하냐면요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라고 하십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성경에서 예수님이 하신 모든 칭찬 중에 가장 큰 칭찬이 바로 이 여자가 받은 칭찬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상하지 않습니까? 둘 다 예수님을 너무 사랑해서 그 사랑을 표현한 것 뿐인데 한 쪽은 최고의 책망을 듣고 한 쪽은 최고의 칭찬을 들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을 위해 포기한 걸로만 치면 베드로가 훨씬 많이 포기했죠. 베드로는 자기 인생을 포기했고 이 여자는 값비싼 향유를 포기했으니까요. 그런데 베드로에게는 책망이 돌아갔고, 이 여자에게는 칭찬이 돌아갔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었던 걸까요?

한 가지 분명한 것은요 예수님은 인기에 연연하는 분은 아니셨습니다. 사람의 평가에 좌지우지 되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예수님한테 예수님 사랑합니다 라고 고백한다고 해서 다 예수님께 사랑 받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전부 사랑해주셨다면 베드로가 책망 받는 일은 없었겠죠.

또 예수님 주변에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거대한 군중들이 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요 이 사람들을 좋아하신 게 아니라 오히려 피해 다니셨습니다. 그 사람들을 피해서 산속으로 가셔서 혼자 기도하시곤 하셨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이렇게 자신들을 따라다니는 사람들을 좋아하셨으면 아마 이 사람들을 기반으로 해서 지지 세력을 넓히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좋아하시고 예수님이 칭찬하시는 사람은 따로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구분하는 기준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기준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그럼 그 기준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어떤 사람을 사랑하시고 어떤 사람을 칭찬하실까요?

제가 한국에서 학원 강사 시절에 있었던 일을 잠깐 들려드리겠습니다. 아이들을 상대하다 보면 유독 이쁜 짓을 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만날 때마다 90도로 인사하는 애도 있구요, 또 어떤 애는 만날 때마다 살갑게 뛰어와서 팔짱 끼는 아이도 있었구요. 쉬는 시간 마다 와서 말 걸어주는 애들도 있었구요. 저한테 장난치는 애들, 캔커피 사오는 애들도 있었고 또 어떤 애는 자기 저금통을 털어서 믹스 커피 한 봉지를 사오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들이 제가 가장 예뻐했던 아이들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가장 예뻐했던 아이들은 따로 있었습니다. 그게 누군지 아십니까? 바로 제 강의를 이해하는 친구들이었습니다.

어느 날 한 친구가 제 강의를 듣다가 아~ 선생님 이제 이해가 가네 요, 선생님 설명을 들으니까 이제 좀 이해가 되네요 라고 하는데요. 순간 제 몸에 소름이 쫙 돋았습니다. 단순히 기분이 좋은게 아니라 마치 제 존재를 인정받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친구는 저랑 별로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구요. 그렇게 살가운 친구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부터 이 친구가 그렇게 사랑스럽게 보이더라구요. 제 강의를 이해해주는 친구가 저한테 살갑고 친절하게 구는 친구들보다 훨씬 더 사랑스러워 보였습니다. 왜냐면 저는 연예인이 아니라 선생이었으니까요.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도 자신의 의지와 목적이 있으신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과 더 맞는 사람이 있고 예수님과 덜 맞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살갑게 구는 사람은 예수님과 잘 맞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무작정 떠받드는 사람도 예수님과 잘 맞는 사람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무조건 따라다니는 사람도 예수님이 칭찬하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칭찬하시고,, 예수님이 사랑하시고,, 예수님과 잘 맞는 사람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이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잃어버린 조각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이빨 빠진 원 이야기 다들 들어보셨죠? 어느 날 원이 자기한테 한 조각이 없는 것을 알고 그 잃어버린 조각을 찾아서 여행을 떠납니다.

그런데 그 조각이 정확히 맞아야 돼요. 대충 비슷하게 생겼다고 들어맞지 않습니다. 삼각형도 아니고 사각형도 아니고 부채꼴 모양이어야 합니다. 그것도 각도가 정확히 일치해야 합니다. 각도가 조금만 커도 안되고 조금만 작아도 들어맞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원처럼 하나님은 아무 조각이나 다 칭찬해주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칭찬하시는 조각은 정확한 각도와 정확한 모양을 가진 조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랑 딱 들어맞는 조각을 찾고 계십니다.

몇몇 분들은 이게 좀 불공평하게 들리실 수도 있을 것 같애요. 하지만 예수님의 의도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의도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사람을 찾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께 죽지 마시라고 간청하는 베드로는 예수님과 잘 맞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26장에서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께 부어서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한 이 여자는 예수님과 잘 맞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둘의 차이가 뭐였을까요?
뭐가 달랐길래 한 쪽은 칭찬을 받고 한 쪽은 책망을 들었을까요?
어떤 사람이 예수님이랑 잘 맞는 사람일까요?

예수님이랑 잘 맞는 사람은요 간단합니다. 바로 죄인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이랑 참 잘 맞으십니다. 정확히 말하면 예수님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걸 깨달은 사람과 찰떡궁합이십니다.

그리고 반대로 자기가 죄인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 나 정도면 괜찮지, 나 정도면 착한 사람이지, 나 정도 살았으면 오늘 죽어도 천국 들어갈만 하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요 예수님이랑 궁합이 좋지 않습니다. 예수님이랑 잘 맞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요 예수님이랑 같이 먹고 마신 사람들이 누구였습니까? 그 당시의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반대로 의인이라고 여겨졌던 바리새인들과는 아주 날을 세우셨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이 죄인에도 두 가지 부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걸 아는 죄인이 있구요, 자기가 죄인이라는 걸 모르는 죄인이 있습니다.

이 중에 예수님이랑 특히 잘 맞는 사람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걸 잘 아는 사람들이었습다. 하도 주변에서 너희는 죄인이야 라고 하니까 자기가 죄인이라는 모를 수가 없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친구들이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잃어버린 조각은 바로 자기가 죄인이라는 걸 아는 사람들이구요, 그래서 예수님이 찾고 계신 그 조각도 바로 자기가 죄인이라는 걸 아는 사람들입니다.

누가복음 5장 31절에서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예수님이 이 땅에 왜 오셨습니까?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딱 맞는 사람은 죄로부터의 구원을 갈망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다른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에게서 가난에서의 구원을 찾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예수님에게서 질병에서의 구원을 찾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외롭고 고독해서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려고 하시는 구원은 어떤 구원입니까? 바로 죄에서의 구원입니다.
가난, 질병, 잘못된 관계 이런 것들로부터 받는 구원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것, 그래서 이런 저런 수단들을 동원해서라도 잊어버리지 않게 자꾸 기념해야 하는 그것은요 다름아닌 바로 죄로부터의 구원입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죄로부터의 구원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죄로부터의 구원을 더 이상 갈급해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죄에 무뎌지기 때문입니다. 죄에 무뎌지면 죄로부터의 구원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죄로부터의 구원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요 예수님이 이 땅에 왜 오셨는지를 절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이해하는게 아니라 자꾸 다른 모습으로 이해합니다. 위대한 리더나 도덕적인 성인 군자, 혹은 선지자로 이해하게 됩니다.

바로 이 점이 마태복음 16장의 베드로와 마태복음 26장에 나오는 여자와의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이 때 베드로는 자기 안에 있는 죄에 대해서 그렇게 크게 문제 삼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서 죄로부터의 구원을 그렇게 갈급해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 되어서 유대인의 리더가 되어서 이스라엘을 더 강하게 만들고 그래서 로마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길 바랬습니다.

반면에 26장의 이 여자는 제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기름을 부음으로써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했습니다. 그걸로 봐서는 평소에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잘 이해를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에게 죄가 있고 예수님이 그 죄를 사해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분이라는 사실을 잘 이해한 것 같습니다.

여기서 향유를 붓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12절에 보면 예수님이 이건 나의 장례를 위하여 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제게는 이 여자가 한 행동이 예수님의 죽음을 축복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여인에게는 예수님의 죽음이 비참한 저주가 아니라 축복으로 이해된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죽음이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고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이 가져오는 결과 역시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라는 것을 기념하는 것 같습니다.

반면에 베드로에게 예수님의 죽음은 저주였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앞으로 할 일이 많은 분이시거든요. 우리를 위해서 중요하고 위대한 일을 많이 해주셔야 되는데 지금 죽으신다고 하니까 베드로는 이 일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이 여자는 이 사실을 잘 이해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칭찬을 듣게 됩니다.

결국 내 안에 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요 예수님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천지차이가 나게 됩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사람한테는 예수님은 그저 대단한 사람입니다. 어 저 사람 뭔가 있다. 뭔가 특별해. 그러니까 저 사람 따라다니면 뭐가 나올 것 같애. 이런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특별하고 대단한 사람이 이제 곧 죽는다고 하니까 얼마나 청천벽력입니까. 이게 바로 마태복음 16장의 베드로의 시각입니다.

그런데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은요 예수님이 내 안에 있는 이 죄 때문에 이 땅에 오셨구나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삶의 목적이 이 땅에서 권력을 갖고 영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난과 죽음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희생이 아 알고보니까 저주를 받아서 불쌍해지신게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대신에 고난받으시는 거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예수님의 고난이 사랑이었구나. 그래서 그것이 오히려 우리에게 축복이 되는 구나 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을 이해한 사람들은 함께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태복음 26장에 나오는 이 여자의 시각입니다.

이 두 차이가 이해가 가시나요?
제가 좀 더 쉽게 다른 관점에서 설명을 드려보겠습니다.

자기 죄를 깨달은 사람은요 예수님의 상태보다 자기의 상태가 더 중요해집니다. 예수님이 지금 어떤 상태이신지 보다는 내가 지금 죄인이구나, 내가 지금 죽게 생겼구나, 내가 지금 벼랑 끝에 서 있구나 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자기 상태에 더 신경을 쓰게 됩니다.

반면에 자기 죄를 깨닫지 못한 사람은요 자기의 상태보다 예수님의 상태가 더 중요해집니다. 자기가 어떤 상태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모르니까요. 그냥 목이 빠져라 예수님만 바라봅니다.

예수님은 이 두 가지 중에 우리에게 어떤 것을 더 원하실까요?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기를 원하실까요? 아니면 우리가 자신보다는 예수님을 쳐다보기를 더 원하실까요?

그 대답이 누가복음 23장에 나옵니다.

누가복음 23장을 보시면 예수님이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시고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무리들 중에는 예수님을 사랑했던 여자들이 예수님이 고난당하시는 장면을 보고 슬피 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우는 여자들을 보시고 뜬금없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의 자녀를 위하여 울라. 그리고 마지막 때에 심판이 임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저한테는 이렇게 들립니다.
“너희들 내가 지금 고난받고 있으니까 내가 불쌍하게 여겨지니? 아니다. 진짜 불쌍한 건 내가 아니라 너희다. 너희가 죄를 지었고 심판날이 다가오고 있어. 그런데 너희는 그것도 모르고 내가 불쌍하다고 생각하니? 아니야. 실제로 불쌍한 건 너희들이야. 그러니 나를 위해서 울지말고 너희를 위해서 울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 장면을 잘 보시면 예수님 곁에서 울던 여자들은 고난 당하시는 예수님에게 온 정신이 팔려 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자기 안에 있는 자기 죄를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내 눈 바로 앞에서 고난당하고 계신 예수님만 보이게 됩니다.

반면에 마태복음 26장에 나오는 다른 여인은요, 예수님이 죽기 바로 직전이심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죽음에만 정신이 팔리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마도 이 여인이 평상시에 죄인 취급을 많이 받았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어찌됐든 이 여자는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예수님이 앞으로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는지 그 계획을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녀가 한 일이 예수님의 앞으로의 계획과 아주 잘 맞아 떨어졌습니다.

그럼 이제 이것을 그대로 가져다가 성탄절에 적용해 보겠습니다.

내 속에 있는 죄를 깨닫지 못한 사람과 반대로 내 속에 있는 죄를 깨달은 사람은 성탄절을 완전히 반대로 이해하게 될 겁니다.

내 속에 있는 죄를 깨닫지 못한 사람은 성탄절에서 예수님의 탄생에만 정신이 팔릴 겁니다. 마치 우는 여인들이 예수님의 고난에만 정신 팔렸던 것처럼 성탄절을 기념할 때 예수님의 탄생에만 정신이 팔릴 겁니다.

반대로 내 속에 있는 죄를 깨달은 사람은요 성탄절을 기념할 때 예수님의 탄생 뿐만 아니라예수님의 탄생으로 인해서 내 속죄가 시작되는 것이 보이기 시작할 겁니다.

그래서 자기 죄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에게 성탄절에 행복한 이유를 물어보면 그냥 성탄절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대답할 겁니다. 수단이 목적이 되어버린 거죠.

그런데 자기 죄를 깨닫고 그 죄 때문에 고민하고 애통하던 힘들어했던 사람에게 왜 성탄절에 행복하냐고 물어보면 바로 내 속죄가 시작된 날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딱 맞는 예수님이 찾으시는 조각 같은 사람입니다.

얼마 전에 코로나 백신 첫 접종이 영국에서 있었습니다. 어떤 할머니가 처음으로 백신을 맞으셨는데 그 할머니를 다루는 기사 제목이 너무 멋있었습니다.

뭐였냐면요. 인류 반격의 시작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에게는 성탄절이 마치 이와 같을 것 같습니다. 지난 주가 코로나 바이러스를 향한 인류의 반격이 시작된 날이라면 성탄절은 우리 안에 있는 죄를 향한 하나님의 반격의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전 세계가 완전 코로나에 점령 당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처럼 우리 인류가 죄에 완전이 점령을 당했는데요. 마치 백신이 만들어지듯이 성탄절에 한 아이가 태어나서 이 죄를 향한 반격이 시작되는 날이 바로 성탄절입니다.

이렇게 내 안에 죄를 인지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성탄절에 무엇을 기념하는지가 크게 달라지게 됩니다. 내 안에 죄를 인지하지 못하면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고 내 안에 죄를 인지하게 되면 우리의 속죄를 기억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성탄절에는 예수님을 축하하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탄생하신 날에 예수님을 축하하고 기념하는게 뭐가 그렇게 잘못된 건가 라고 생각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이 부분에 대해서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을 드려보겠습니다.

첫 번 째는요, 제 개인적인 생각인데요, 신학적으로 문제 삼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고난을 당하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특히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신 이유는 그 육체를 통해 죽임을 당하심으로써 죄의 값을 치루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만약에 이 땅에 안 태어나셨으면 하늘 보좌에 계실 분인데 왜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까? 고생하려고 내려오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방법으로 죽임당하시려고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과연 이게 축하할 일인가요?

우리가 군대를 들어가면 고생할 게 너무 뻔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군대 영장 받은 사람한테 와 너무 축하해 이러면 기분 나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도 고생하러 이 땅에 내려오셨는데 그것을 축하하는게 맞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에 다메섹 동산에서 피를 흘리며 기도하시던 장면 기억하십니까? 얼마나 힘드셨으면 비켜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을까요? 그 정도로 힘든 일을 당하러 이 땅에 오셨는데 그 시작을 축하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성탄절은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이라기보다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반격이 시작된 날이라고 보는게 맞는 것 같습니다.

두 번째는요
여러분들이 강도에게 인질로 잡혀있다고 한 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 때 마침 여러분들 중에 한 명이 강도들 몰래 전화기로 경찰에 신고를 했습니다.

그런데 한 시간이 지나도 경찰이 코빼기도 안 비치면 여러분 어떻겠습니까? 굉장히 불안하겠지요? 그런데 결국 한 시간이 지나니까 결국 경찰이 도착을 했고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인질 협상을 하고 구출작전을 시작한다고 하면,,, 기뻐해야 하는 사람이 경찰인가요? 아니면 인질인가요? 당연히 인질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구출 작전이 성공적으로 잘 이뤄져서 모든 인질이 무사히 구출됐다고 하면 축하받아야 하는 사람이 경찰인가요? 인질인가요?

당연히 인질입니다. 왜냐면 죽을 위기에서 살아 돌아온 것은 경찰이 아니라 인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질이었던 사람들이 기뻐하고 인질이었던 사람들이 참 다행이다 이렇게 축하를 받아야 합니다.

물론 경찰도 성공적으로 일을 잘 마무리 했으니까 기쁠 수 있고 축하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의 본질은 경찰의 능력을 확인하는게 아니라 인질을 무사히 구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질이 무사히 탈출했을 때 가장 큰 축하와 가장 큰 기쁨은 당연히 인질의 몫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어떤 사람이 본인은 인질로 잡혀있는데 자기를 구하러 온 경찰한테 아이고 축하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정신이 나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엉뚱하게 말하는 이유는 딱 두 가지 입니다. 정말 정신이 나갔거나 아니면 자기가 인질이라는 걸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지금 누군가한테 인질로 잡혔고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이라는 걸 모를 경우에는 제 3자가 보기에 엉뚱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다들 이해하셨겠지만 여기서 강도는 죄를 의미하고요 강도에게 잡힌 인질은 죄에게 사로 잡힌 우리 인간을 의미하겠죠. 그리고 인질을 구하러 온 경찰은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성탄절은 아마 경찰이 사건 현장에 도착한 날을 의미할 것입니다.

경찰이 오지 않아서 조마조마하다가 경찰이 도착한 다음에 안도하고 기뻐하는 것이 인질이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를 잊어버리신 것은 아니지 조마조마 하다가 예수님이 이 땅에 구원자로 태어나신 것을 보고 안도하고 기뻐하는 것은 우리 인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신 것을 보고 안도하고 기뻐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축하를 건네는 이런 엉뚱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요, 자기가 인질이라는 것을 몰랐던 사람처럼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일 가능성이 큽니다.

자기가 인질이라는 사실 조차 모르는 사람이 자기를 구하러 온 경찰에게 축하한다고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처럼 자기 죄를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기를 구하러 온 예수님에게 축하한다고 말하는 이상한 행동을 하게 될 겁니다.

설교를 정리하겠습니다.

제가 설교 초반에 성탄절은 일종의 수단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성탄절 그 자체가 기쁘고 즐거운 날인 것이 아니라 무언가 기쁘고 즐거운 것을 기념하는 일종의 수단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기념합니까?

바로 하나님이 죄에 물들어버린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기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마치 경찰을 보내듯이 누군가를 보내셨다는 사실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탄절에 안도하고 기뻐해야 하는 건 바로 우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자꾸 성탄절의 주인공이 예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탄절이 예수님을 위한 날이라고 생각하고 자꾸 예수님께 축하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믿음입니다. 성탄절은 예수님을 위한 날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날입니다. 성탄절은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이 아니라 우리의 속죄의 시작을 축하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위하여 우는 여인들에게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를 위하여 울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 향해 있는 시선을 우리 쪽으로 돌리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성탄절에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는 사람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실까요? 마찬가지로 예수님에게 향해 있는 시선을 저희 쪽으로 돌리지 않으시겠습니까? 저는 이렇게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나의 탄생을 기뻐하지 말고 너의 거듭남을 기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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