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18/2026
0719 목회서신
김기대 목사의 목회 서신
20세기 초 아르헨티나는 1인당 소득을 기준으로 세계 최상위권에 속한 나라였습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화려한 건축과 문화 때문에 ‘남미의 파리’라 불렸습니다. 그러나 그 번영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토지는 소수 지주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철도와 냉동육 산업, 무역과 금융에서는 영국 자본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게다가 국내 지배층이 영국 중심의 질서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받아들이면서 아르헨티나의 가난이 시작되었습다.
그 균열 속에서 페론주의가 등장했습니다. 후안 페론과 에바 페론은 노동자와 빈민을 ‘셔츠 없는 사람들’이라 부르며 그들에게 정치적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1947년 여성참정권이 법제화되는 과정에서도 에바의 역할은 컸습니다. 오랫동안 목소리를 빼앗겼던 이들이 처음으로 대통령궁의 발코니에서 자기 이름이 불리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기억만으로 페론주의를 미화할 수는 없습니다. 페론은 선거로 집권하고 대중의 실제 지지를 받았지만, 언론을 억압하고 반대자들을 핍박했으며 사법부와 노동조합을 권력 아래 두려 했습니다. 에바 페론은 바로 그 모순의 한복판에 있었습니다. 그녀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준 도움과 존엄의 감각은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권력의 권위주의를 지워주는 면죄부가 될 수도 없습니다. 페론주의는 민중의 권리와 지도자 숭배가 뒤얽힌 아르헨티나 현대사의 복잡한 유산입니다.
아르헨티나의 가장 깊은 상처는 1976년부터 1983년까지의 군사독재였습니다. 군부는 국가를 구한다는 명분으로 노동자와 학생, 지식인과 성직자, 좌파 활동가와 무고한 시민들을 납치, 고문, 살해했습니다. 인권단체들은 약 3만 명이 사라졌다고 기억합니다. 잡혀간 자녀의 생사조차 알 수 없었던 어머니들은 1977년부터 대통령궁 앞 5월광장에 모였습니다. 흰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사라진 아이들의 이름과 사진을 들었습니다.
1982년 궁지에 몰린 군사정권은 말비나스(포클랜드 )제도를 무력으로 점령했습니다. 군부는 오랜 영유권 주장을 정권 연장의 수단으로 이용했고, 준비되지 않은 젊은 병사들을 전쟁터로 보냈습니다. 전쟁은 아르헨티나의 패배로 끝났고, 패전은 군부의 무능과 거짓을 폭로하여 1983년 민주주의 회복을 앞당겼습니다. 이 섬들은 지금도 유엔이 인정하는 영국과 아르헨티나 사이의 주권 분쟁 지역입니다. 영국은 현재 주민들의 자기결정권을 말하고, 아르헨티나는 1833년 영국의 점령과 식민주의의 역사를 말합니다. 주민들의 삶과 의사를 무시할 수 없듯이, 제국의 점령 역사와 남반구 사람들의 반식민주의적 기억도 지워서는 안 됩니다. 군부가 말비나스를 악용했다고 해서 말비나스의 영국 지배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
전쟁 4년 뒤인 1986년 월드컵 8강전에서 보여준 마라도나의 활약은 패배와 모욕을 경험한 많은 아르헨티나 사람들에게 경기 이상의 그 무엇을 각인시켰습니다. 마라도나의 몸에는 빈민가 소년의 기억과 패전국의 자존심이 함께 뛰고 있었습니다.
2026년 월드컵 준결승에서 아르헨티나는 다시 잉글랜드를 2대1로 이겼습니다. 경기 뒤 일부 선수들은 “말비나스는 아르헨티나의 것이다”라는 현수막을 들었고, 영국 정부와 포클랜드 제도 정부는 FIFA에 조사를 요구했습니다. 스포츠와 정치를 구분해서 봐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아르헨티나 사회에 아직 끝나지 않은 역사적 기억이라는 사실도 보아야 합니다.
물론 그들은 천문학적 연봉을 받는 세계적 스타이며, 축구산업 역시 자본과 권력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준결승 전에 앞서 장엄하게 국가를 부르는 아르헨티나 선수들과 거리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의 얼굴에는 돈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공동체의 기쁨이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