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urch of Peace 평화의교회

Church of Peace 평화의교회 We are a Korean American Presbyterian (PCUSA) Church in Los Angeles seeking a harmonius relationship

0614 예배
06/14/2026

0614 예배

열왕기상 17:8-14누가복음 6:31-38 #마이클센델 #공정하다는착각

06/13/2026

0614 목회서신
1863년 1월 1일 링컨은 노예해방을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텍사스 갤버스턴의 흑인들은 자신이 자유인이라는 사실을 2년 6개월이 지난 1865년 6월 19일에야 듣게 됩니다. 북군의 고든 그레인저 장군이 도시에 들어와 '일반명령 제3호'를 낭독하던 날, 명령서는 모든 노예가 자유이며 이제 옛 주인과 종의 관계는 고용주와 노동자의 관계가 되었다고 선포합니다. 들판의 사람들은 선포된 지 오래된 자유를 그제야 손에 쥐었습니다. 6월(June)과 열아홉째 날(nineteenth)을 붙여 '준틴스(Juneteenth)'라 부르는 이 날은 2021년 미국의 연방 공휴일이 되었습니다. 89세의 나이에 포트워스에서 워싱턴까지 걸어가며 이 날을 기억하자 호소했던 오팔 리 할머니의 오랜 걸음이 맺은 열매였습니다.
1926년 10월 7일 텍사스 마셜에서 태어난 오팔 리는 교사이자 상담사로 일했고, '준틴스의 할머니'로 불립니다. 올해로 99세입니다. 부모가 그녀가 아홉 살 무렵 포트워스로 이주했는데, 1939년 6월 19일, 500여 명의 백인 군중이 플레이크 가족의 집을 둘러싸고 불태웠습니다. 당시 열두 살이던 리와 형제들은 몇 블록 떨어진 친구 집으로 피신했고 부모는 어둠을 틈타 달아났습니다. 그 사건 이후 오팔 리는 자유를 기념하는 바로 그 날에 자유를 짓밟혔던 경험을 가슴에 새겼습니다.
2016년, 그녀는 준틴스를 국가 공휴일로 만들기 위해 포트워스에서 워싱턴 D.C.까지 여러 도시에서 하루 2.5마일씩 걸었습니다. 그 2.5마일은 노예해방선언과 일반명령 제3호 사이의 2년 반의 간격을 상징했습니다. 이 일을 시작한 것이 89세 때였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자녀와 손주, 증손주를 생각했다고 그녀는 말했고 온라인 청원은 160만 명의 서명을 모았습니다.
2021년 6월 17일, 조 바이든 대통령이 상원 법안 S.475에 서명하면서 준틴스는 미국의 열한 번째 연방 공휴일이 되었습니다. 고든 그레인저 소장이 갤버스턴에 도착해 늦은 자유를 알린 지 154년 만의 일이었습니다.자유가 선포되는 것과, 그 자유가 한 사람의 몸과 영혼에 도착하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그날 그녀가 남긴 말이 인상적입니다 — "이제 우리는 6월 19일부터 7월 4일까지 자유를 기념할 수 있게 됐다!" 2022년에는 노벨 평화상 후보로 지명되었으나 수상하지는 못했고, 2024년 바이든 대통령은 그녀에게 미국 최고의 민간 훈장인 대통령 자유 훈장을 수여했습니다.
“6월 19일부터 7월 4일까지 자유를 기념할 수 있게 됐다!"는 오팔 리의 말을 곱씹어 보십시오. 미국의 저력은 과거의 악행(미국 원주민 학살, 흑인 노예 제도)을 진솔하게 회개하고 다양성을 인정하는 데서 생겨납니다. 역사상 유례없이 대통령이 인종차별적 발언을 서슴지 않는 오늘의 미국이 암울하게 느껴지는 까닭입니다.

허먼 멜빌의 '모비딕'은 adventure story가 아니라 한편의 구원 드라마다. 칼뱅주의자였던 멜빌은 자신의 종교에서 숨막히는 경직성을 보았고 평판좋던 퀘이커에서는 위선을 보았다. 그가 발견한 구원받은 자의 이...
06/07/2026

허먼 멜빌의 '모비딕'은 adventure story가 아니라 한편의 구원 드라마다. 칼뱅주의자였던 멜빌은 자신의 종교에서 숨막히는 경직성을 보았고 평판좋던 퀘이커에서는 위선을 보았다. 그가 발견한 구원받은 자의 이름은 이스마엘이었다.

창세기 21: 11-20누가복음 18:9-14 #모비딕 #퀘이커

06/06/2026

0607 목회서신

독일에서 활동하는 철학자 한병철은 현대사회를 “피로사회”라고 부릅니다. 예전의 사회가 금지와 명령으로 사람을 억압했다면, 오늘의 사회는 자유와 성취라는 이름으로 우리 스스로를 끝없이 몰아붙이게 합니다. 우리는 누가 강제로 시키지 않아도 더 생산적이어야 하고, 더 매력적이어야 하고, 더 많은 정보를 알아야 하며, 더 빨리 반응해야 한다고 느낍니다. 그 결과 인간은 자유로운 주체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착취하는 성과주체가 됩니다.
그는 또 “리추얼의 종말”에서 현대인이 예식과 반복과 상징의 세계를 잃어버렸다고 말합니다. 리추얼(종교 의식)은 단순한 형식이 아닙니다. 예배, 기도, 절기, 침묵, 식탁, 인사, 애도와 축복의 언어는 인간을 자기중심성에서 꺼내어 공동체와 타자와 초월 앞에 세웁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모든 것을 정보와 효율과 표현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예식은 낡은 것이 되고, 침묵은 불편한 것이 되며, 기다림은 비효율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삶은 편리해졌지만 깊이를 잃었고, 소통은 많아졌지만 만남은 빈약해졌습니다.
시몬 베유는 20세기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신비주의적 사상가로, 노동자와 고통받는 이들의 삶 속으로 직접 들어가며 ‘주의’, ‘기다림’, ‘불행’, ‘은총’을 깊이 사유한 인물입니다. 최근 한병철은 “신에 관하여—시몬 베유와의 대화”에서 더욱 직접적으로 종교의 위기를 말합니다. 그는 종교의 위기를 단지 신앙 인구의 감소나 제도의 쇠퇴로만 보지 않습니다. 그보다 더 깊은 문제는 “주의(注意, 어떤 한 곳이나 일에 관심을 집중하여 기울임)의 위기”로 진단합니다. “종교의 위기는 주의의 위기이기도 하다. 보기와 듣기의 위기인 것이다. 신은 죽지 않았다. 과거에 신은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냈는데, 신의 드러남을 마주할 인간이 죽었다.”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듣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이 사라지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마주할 눈과 귀를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요? 성경은 반복해서 말합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깨어 있으라.” “주의하라.” 신앙은 단지 어떤 교리를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주의를 기울이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고통받는 이웃의 얼굴을 바라보고,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며, 내 안의 욕망과 두려움을 성찰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자주 정반대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보라고 하신 것은 외면하고, 보지 않아도 될 것에는 눈을 빼앗깁니다. 하나님이 들으라고 하신 탄식과 부르짖음에는 무심하면서 세상의 부동산에 주의합니다. 하나님이 기억하라 하신 은혜와 약속은 잊어버리고, 하찮게 여기라 하신 허영과 비교와 평판에는 마음을 빼앗깁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회복은 주의의 회복에서 시작됩니다. 예배는 우리의 흩어진 주의를 하나님께 다시 모으는 시간입니다. 기도는 소음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마음의 방향을 돌리는 일입니다. 안식은 생산성의 노예가 된 우리에게 “너는 성과가 아니라 은혜로 사는 존재”라고 선언하는 거룩한 멈춤입니다.
우리는 신, 곧 하나님이 주의하라고 명령하신 것을 외면하고, 하찮게 여기라고 말씀하신 것들에 너무나 많은 주의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0531예배
05/31/2026

0531예배

고린도 후서 13:5-13요한복음 17:17-24

0524설교
05/29/2026

0524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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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9/2026

0531 목회서신

지난 5월 25일 레오 14세 교황은 첫 번째 사목 회칙 『마니피카 후마니타스(Magnifica Humanitas)』를 발표했습니다. 우리말로 옮기면 '위대한 인류'입니다. 부제는 「인공지능의 시대, 인간 존재를 수호함에 관하여(On Safeguarding the Human Person in the Time of Artificial Intelligence)」로 교황청에서 발표된 첫번째 AI입장문이라는 점에서 신구교를 막론하고 교회의 입장을 정리한 시의적절한 회칙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문서가 발표된 날짜가 우연이 아닙니다. 교황은 이 회칙을 5월 15일에 서명했는데, 정확히 135년 전 바로 그날 레오 13세 교황의 회칙 『레룸 노바룸(Rerum Novarum)』이 발표되었습니다. 산업혁명이 인간의 노동과 존엄을 위협하던 시대, 교회는 「레룸 노바룸」을 통해 노동자의 존엄을 변호했습니다. 레오 13세의 업적을 잇고자 하는 뜻에서 현재 교황은 레오 14세로 자신의 공식 명칭을 정했습니다. 13세가 산업혁명 앞에서 회칙을 발표했듯이 이번 교황은 인공지능을 새로운 산업혁명이라고 파악하고 있습니다.
"인공지능의 시대에, 우리에게는 깊이 인간으로 머물러야 할 절박한 의무가 있습니다." 이번 회칙에 들어 있는 내용입니다.
최근 고품격 드라마로 막을 내린 ‘모두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에서는 인간을 영어로 말할 때 human being이라고 하지 human doing이라 하지 않는다는 대사가 나옵니다. Doing은 행위, 기능, 성과, 산출물입니다. 한 사람이 무엇을 하는가, 얼마나 효율적으로 처리하는가, 시간당 얼마의 가치를 생산하는가에 관한 언어입니다. 반면 Being은 존재 그 자체입니다. 무엇을 하기 이전에, 무엇을 할 수 있기 이전에, 그저 있음으로써 이미 거룩한 존재의 차원을 가리킵니다.
레오 14세는 분명히 말합니다. "도전은 기술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학적(anthropological)인 것입니다." 즉, AI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AI 앞에서 우리가 인간을 무엇이라 정의할 것이냐의 문제라는 뜻입니다.
인간을 Being이 아니라 Doing으로 보는 시선, 인간을 존재가 아니라 성능으로 측정하는 시선, 인간을 형상이 아니라 데이터로 환산하는 시선 — 이것이 바로 마니피카 후마니타스 회칙이 우려하는 "반인간적 비전(anti-human vision)"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알고리즘에 묶여 있습니다. "당신은 오늘 얼마나 생산적이었습니까? 몇 걸음 걸었습니까? 몇 시간 집중했습니까? 몇 개의 과제를 완수했습니까?" 이 질문들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질문들만 남고, "당신은 오늘 누구로 살았습니까?" 라는 질문이 사라질 때, 우리는 human being에서 human doing으로 전락합니다.

이 시대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인공지능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기술의 진보 자체가 악이 아니라, 지혜와 책임과 도덕적 윤리 없는 지능이 악입니다. 이 놀라운 AI발전의 시대에 성과물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 존재를 돌아볼 때 AI 시대가 주는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0517 예배
05/17/2026

0517 예배

창세기 4:2-12누가복음 10:17-20

05/16/2026

김기대 목사의 목회 서신

1980년 5월 광주에 침투한 북한군 특수부대 수백 명이 시민으로 위장하여 봉기를 일으켰다는 주장은 해마다 반복됩니다. 사진 속 야윈 얼굴들에 번호를 매겨 '1광수', '43광수'라 부르는 그 기괴한 호명말입니다. 이런 주장에 반박을 시도하는 일은 헛수고에 가깝습니다. 그것을 끊임없이 주장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다른 곳에 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북한군 특수부대 수백 명이 휴전선을 넘어 전라남도까지 내려와, 군을 무장 해제시키고 도청을 점령했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이것은 단군 이래 최악의 안보 참사입니다. 그 시각, 전방 경계와 작전 지휘를 맡았어야 할 군 수뇌부는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정권을 찬탈하기 위해 서울로 병력을 빼돌리고, 별을 달고, 부대를 사조직처럼 굴리던 그 정치군인들에게 가장 먼저 책임을 물어야 마땅합니다. 이것이 그들의 북한군 개입설을 끝까지 밀고 갈 때 정직하게 얻어지는 결론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결론에 결코 도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결론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미워하고 싶지만 드러내 놓고 미워할 수는 없는 대상이 있을 때, 사람은 그 미움을 다른 표적에 옮겨 싣습니다. 호남 사람들은 마음 놓고 미워할 수 없지만, 북한군은 마음 놓고 미워해도 되는 공공의 적이라고 생각한 거죠. 그래서 그들은 광주 시민의 얼굴 위에 북한군의 군복을 덧씌웁니다. 미움을 사회적으로 정당한 자리에 옮겨 두는 일입니다. 르네 지라르가 말한 ‘희생양 이론’입니다.
그들이 '43광수'라 번호를 붙인 야윈 얼굴의 청년이 있었습니다. 어느 다큐멘터리 감독이 그 얼굴의 주인을 찾아 길을 나섰을 때, 끝내 드러난 것은 북한 공작원이 아니었습니다. 이름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그저 '김군'이라 불리던 한 청년이었습니다. 넝마주이였는지 일용직이었는지도 분명치 않은, 어쩌면 그날 도청에서 또는 어느 골목에서 스러져 이름 한 줄 남기지 못한 무명의 시민. 그 무명의 얼굴에 그들은 '북괴 간첩'이라는 가장 무거운 낙인을 찍었습니다. 죽은 자에게서 이름을 빼앗고, 그 자리에 자신들의 미움을 새겨 넣은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민주화 운동의 희생자로 기억하는 것은 초등학교 졸업학력으로 검정고시를 거쳐 대통령이 된 사람을 인정하는 것보다 더 싫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 죄가 결코 새것이 아님을 증언합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인 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하고 책임을 떠넘겼고, 군중은 자신들의 죄를 한 사람의 어깨에 얹어 성문 밖으로 끌어내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핵심은 바로 그 희생양의 무죄가 만천하에 드러났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십자가는 모든 시대의 가인들에게 더 이상 동생의 피를 흙으로 덮을 수 없음을 선포한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5월 광주를 신앙의 눈으로 본다는 것은, 그것을 어느 지역, 어느 정파의 비극으로 기억하는 데서 그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누구를 희생양으로 삼아 우리 마음의 평화를 사고 있었는지를 정직하게 돌아보는 일입니다.
우리는 누구의 이름을 지웠습니까. 우리는 누구의 얼굴 위에 북한 군복을 덧씌웠습니까. 회개는 거기서 시작됩니다. 80년 광주를 위한 진정한 추모는 한 다발의 꽃이 아니라 그 정직한 돌아봄입니다.

0510 예배
05/10/2026

0510 예배

누가복음 1:46-55룻기 4:16-17갈라디아서 3:2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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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0 Cordova Street
Los Angeles, CA
9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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