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04/2026
[부활 제5주 설교문_양화교회]
제목 : 버린 돌들의 노래, 산 돌로 지어지는 생명의 나라
본문 : 베드로전서 2:2~10
(병행 : 요한복음 14:1~14, 사도행전 7:55~60, 시편 31:1~5, 15~16)
[들어가며: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리고 현실의 무게]
사랑하는 양화교회 성도 여러분, 주님의 평화가 가득한 복된 주일입니다. 특히 오늘은 한국교회가 어린이 주일로 지키는 날이고, 모레면 우리 아이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어린이날입니다. 최근 자녀나 손주들과 안부를 나누셨나요? 영상 통화 너머로 들려오는 손주들의 옹알이 하나에, 또 마당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우리 마음이 봄볕처럼 환하게 밝아지는 것 같습니다. 이 아이들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가장 빛나는 '산 돌'이자 생명의 선물입니다.
만물이 생동하는 눈부신 5월, 우리 양화리 들녘도 모내기 준비로 활기가 넘칩니다. 산천은 연둣빛 생명으로 가득 차 있고, 우리 교우님들의 일손도 그만큼 바빠지는 축복의 계절입니다. 그러나 이토록 화창하고 기쁜 계절에, 한편으로 우리의 마음은 마냥 가볍지만은 않습니다.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현실의 무게가 결코 녹록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이 세상 한복판에, 여전히 '죽음의 문화'가 짙게 드리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강원도 홍천의 깊은 숲에서는 양수발전소 계획으로 인해 11만 2,000여 그루의 나무가 잘려 나갈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효율과 이윤이라는 거대한 신전을 짓기 위해, 수십 년을 버텨온 생명들이 '지워져야 할 숫자'로 취급받고 있습니다. 일터에서는 또 어떻습니까? 최근 CU 진주 유통물류센터에서 정당한 노동의 대가와 존엄을 요구하며 외치던 한 노동자가, 출차를 강행하던 물류 차량에 치여 우리 곁을 떠나는 참혹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자본의 속도와 이윤을 지키려는 무리한 시도가 한 노동자의 귀한 생명을 앗아간 것입니다. 불안과 근심이 안개처럼 깔린 이 시대를 향해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 14:1). 주님이 약속하신 '거처'는 화려한 콘크리트 건물이 아닙니다. 자본의 논리에 밀려 거처를 잃어버린 존재들, 세상에서 '버린 돌' 취급받는 모든 생명이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하나님의 품'입니다
[펼치기 1 : 건축자가 버린 돌, 하나님이 택한 보배]
오늘 베드로전서 본문은 우리에게 놀라운 역설을 들려줍니다. 세상의 건축자들, 즉 이 사회의 권력과 자본은 자신들의 집을 짓는 데 방해가 되거나 이익이 되지 않으면 서슴없이 그 돌을 버립니다.
홍천의 나무들은 그들에게 '버린 돌'입니다. 물류센터에서 생존권을 지키려던 노동자의 생명도 그들에게는 물류 흐름을 방해하는 '버린 돌'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선언합니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벧전 2:4).
인간이 쓸모없다며 던져버린 그 돌을 가져다가, 하나님께서는 당신 나라의 가장 중심인 '모퉁잇돌'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이 부활의 신비입니다. 세상이 실패라고 부른 십자가가 구원의 길이 되었듯, 자본이 외면한 노동자의 권리와 사라질 위기의 나무 한 그루가 하나님 나라의 가장 귀한 기초가 됩니다.
[펼치기 2 : 5월의 기념일이 가르쳐주는 '산 돌'의 존엄]
이번 주간 우리는 노동절(5월 1일)을 지냈고, 이제 어린이날(5월 5일)을 앞두고 있습니다. 이 날들이 왜 제정되었는지를 묵상해 봅니다.
노동절은 노동자가 자본의 부속품이나 소모품(Dead Stone)이 아니라, 자기 삶의 주인이며 사회를 지탱하는 '산 돌(Living Stone)'임을 선언하기 위해 피와 눈물로 만들어진 날입니다. 노동은 이윤의 도구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을 실현하는 신성한 활동입니다.
어린이날은 또 어떻습니까? 과거 연령주의(Ageism)가 지배하던 시대에 어린이는 '미성숙한 존재' 혹은 '가문의 소유물'로 여겨지며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습니다. 소파 방정환 선생이 어린이를 '버린 돌'처럼 여기던 시대에 그들을 귀히 여긴 이유는, 가장 작고 연약한 아이들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며 존중받아야 할 독립된 인격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도, 어떤 생명도 '버린 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테크노빌에서 땀 흘리는 이주노동자도, 양화리의 논밭을 일구는 우리 성도님들도 모두가 하나님의 집을 짓는 보배로운 '산 돌'입니다.
[펼기치 3 : 서 계신 주님을 보는 증언]
사도행전 7:55-56의 스테반은 돌에 맞아 죽어가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하늘 문이 열리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보좌에 앉아 계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예수님을 목격합니다.
주님은 왜 서 계셨을까요? 세상에서 '버린 돌'이 되어 고통받는 당신의 자녀를 응원하고 환영하기 위해 일어나신 것입니다. 우리가 평화의 현장에서 나무를 안고 기도할 때, 우리가 부당하게 희생된 노동자의 죽음을 애도하며 진실을 외칠 때, 주님은 보좌에서 일어나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스테반은 자신을 향해 돌을 던지는 자들을 향해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행 7:60)라고 기도했습니다. 이것은 패배가 아닙니다. 죽음의 문화를 향해 던지는 가장 강력한 사랑의 저항입니다. 부활의 생명을 가진 자만이 할 수 있는 용서이며, 이것이 바로 세상을 이기는 '산 돌'들의 방식입니다.
나가며] 죽음의 문화를 넘어, 생명의 집을 짓는 사람들
사랑하는 양화교회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죽음의 문화'를 받아들이라고 강요합니다. "나무 11만 그루보다 전기가 더 중요하다", "물류 차량의 속도가 노동자의 안전보다 우선이다", "어린이는 미래의 자원일 뿐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죽음의 문화입니다. 이 문화는 생명을 '산 돌'이 아니라 '숫자'와 '도구'로만 봅니다.
하지만 부활을 사는 우리는 다르게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죽음의 문화를 생명의 문화로 바꾼다"는 것은 거창한 구호가 아닙니다. 그것은 아주 구체적인 선택입니다.
● 숫자보다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11만 2,000여 그루의 나무를 '제거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숨결을 불어넣으신 '생명'으로 안아주는 것입니다. 테크노빌의 이주노동자를 '인력'이 아니라 우리의 '형제와 자매'로 부르는 것입니다.
● 속도보다 존엄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죽음을 딛고 달려가는 편리함보다는, 조금 늦더라도 함께 안전하게 걷는 불편함을 기꺼이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CU 물류센터에서 희생된 노동자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는 길입니다.
● 고립보다 연대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나 혼자 살아남는 '죽은 돌'이 아니라, 서로의 아픔에 기대어 함께 자라가는 '산 돌'이 되어 거대한 생명의 집을 짓는 것입니다.
양화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가 아름다운 봄날 농사를 준비하며 흙을 만지듯, 하나님 나라의 생명을 이 땅에 심읍시다. 우리의 일터와 들녘, 그리고 소외된 이들이 머무는 그 골목길이 바로 우리가 생명의 문화를 일구는 성소입니다.
우리가 죽음의 문화에 저항하며 생명의 길을 선택할 때, 스테반이 보았던 저 하늘의 주님은 보좌에서 일어나 우리를 향해 환호하며 박수치실 것입니다. "잘했다, 나의 착하고 충성된 산 돌들아!" 그 응원 소리를 들으며,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생명의 꽃을 피워내는 거룩한 제사장의 삶을 살아갑시다. 우리 양화교회가 이 시대의 가장 따뜻하고 단단한 '생명의 거처'가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