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ford Lord of Glory Church

Buford Lord of Glory Church 영광의 달음질 예배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시애틀 영광 장로 교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06/10/2026

제 202회 영광의 달음질 칼럼 (Jun, 10, 2026)

하나님의 계획이 사람의 악함보다도
크다는 것을 아는 것이 행복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Work-Life Balance"이라는 말을 이야기합니다. 일과 삶의 균형이 중요하다는 말로 일과 쉼의 균형을 이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사역자로 부임을 받아 사역을 시작 했을 때는 쉼 없이 일하는 것이 미덕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사역을 하는 부교역자들은 일과 휴식이 조화를 이루어야 건강한 삶이라고 생각하며 사역을 합니다. 그러나 워라밸을 생각해보면 이것은 성경이 오래전부터 가르쳐 온 진리입니다. 세상은 새로운 개념처럼 말하지만, 하나님은 이미 창조 때부터 인간에게 안식의 원리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 쉬신 것은 하나님이 피곤하셔서가 아닙니다. 인간이 쉼의 존재로 창조되었음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안식이란 일을 하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안식은 하나님께 맡기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모든 것을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일하심을 믿고 맡기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워라밸은 시간의 균형이 아니라 신뢰의 균형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만이 쉴 수 있습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수많은 갈등을 보았습니다. 교회 안에도 갈등이 있고, 가정 안에도 갈등이 있으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갈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며 깨달은 사실은 갈등 자체보다 더 무서운 것이 갈등을 붙들고 놓지 못하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사람이 중요하다,"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그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는 한 가지 질문으로 알 수 있습니다. "원수도 사람입니까?"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내 편은 소중하지만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은 소중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원수까지 사랑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더 나아가 이렇게 권면합니다. "원수와 같이 생각 하지 말고 형제 같이 권면하라." 고 말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원수는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평생 만나지 못할 사람은 내 원수가 될 수 없습니다. 원수는 대부분 가까운 사람입니다. 함께 일했던 사람, 사랑했던 사람, 믿었던 사람 때문에 상처도 깊은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명령은 더욱 놀랍습니다. 원수를 형제처럼 여기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한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삶은 그 말씀의 실천이었습니다. 자신을 팔아넘길 것을 아시면서도 가룟 유다에게 떡을 건네셨고, 자신을 잡으러 온 무리 가운데서 귀가 잘린 종의 상처를 고쳐 주셨으며,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를 향해 다시 사랑으로 찾아가셨습니다. 주님은 원수를 원수로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하나님의 계획이 사람의 악함보다 크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 나를 방해할 수는 있습니다. 상처를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려는 복까지 빼앗을 수는 없습니다. 사람의 손은 하나님의 손보다 강할 수 없습니다. 이삭의 삶이 그것을 보여 줍니다. 그는 에섹 우물을 빼앗겼고, 싯나 우물도 빼앗겼습니다. 그러나 싸우지 않았습니다. 억울함을 붙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따라 계속 걸어갔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브엘세바에서 풍성한 물을 허락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빼앗은 우물보다 하나님이 주신 우물이 훨씬 더 컸습니다. 신앙은 이것을 믿는 것입니다. 사람이 막아도 하나님이 열어 주시면 되고. 사람이 빼앗아도 하나님이 채워 주시면 되고. 사람이 등을 돌려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 용서할 수 있습니다. 양보할 수 있습니다. 기다릴 수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또 "소확 행"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뜻입니다. 따뜻한 커피 한 잔, 갓 구운 빵 냄새, 창밖으로 들어오는 햇살, 사랑하는 사람과 나누는 짧은 대화 속에서 행복을 찾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 역시도 성경이 오래전부터 가르쳐 온 삶의 방식입니다. 주님은 내일을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고 하셨습니다.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행복은 먼 미래에 있지 않습니다. 승진한 다음에, 더 많이 가진 다음에, 모든 문제가 해결된 다음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지금 하나님이 주신 하루를 감사함으로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평범한 하루가 은혜입니다. 아무 일 없는 하루가 축복입니다. 가족과 함께 식사할 수 있는 저녁이 선물입니다. 건강하게 예배할 수 있는 주일이 기적입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결국 신앙생활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맡기는 사람이 원수를 형제처럼 대할 수 있습니다.

맡기는 사람이 갈등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맡기는 사람이 안식할 수 있습니다. 맡기는 사람이 작은 것에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저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욱 깨닫게 되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인생은 내가 붙들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길 때 풀리는 경우가 더 많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계산하고 염려하는 동안에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셨고, 내가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에도 하나님은 길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말씀 앞에 서 봅니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우리는 너무 무겁게 살아갑니다. 너무 많은 것을 책임지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짐을 지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맡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맡기고 살면 인생이 가벼워집니다. 맡기고 살면 갈등도 힘을 잃습니다. 맡기고 살면 감사가 회복됩니다. 맡기고 살면 안식이 찾아옵니다. 일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걸어가면 됩니다. 그러니 오늘도 주님께 맡기십시오. 그리고 조금은 쉽게 사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시고, 훨씬 더 선하게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Jun, 10, 2026, 노스케롤리아나 그린빌에서 수요일 아침 김병규 목사

06/03/2026

제 201회 영광의 달음질 칼럼 (Jun, 3, 2026)

거품이 제거된 자리에 더욱 깊은 은혜와
맑은 평안과 단단한 믿음이 남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마음속에 이런 질문이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나는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는가? 은혜라는 이름 아래 내 열심으로 버티고 있는가?” 겉으로 보기에는 둘 다 비슷해 보일 수 있습니다. 둘 다 기도하고, 봉사하고, 헌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차이가 드러납니다. 은혜로 사는 사람은 점점 자유로워지고 평안해집니다. 자기 열심으로 사는 사람은 점점 지치고 예민해집니다. 은혜는 사람을 살리지만, 열심은 사람을 소모시키기 때문입니다. 한국방문 중 한국 교회를 바라보며 마음이 무거워질 때가 있었습니다. 주일 예배는 많아졌고 프로그램도 다양해졌습니다. 음악도 화려해졌고 시스템도 세련되었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의 마음속에는 평안이 있는가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예배는 드리는데 안식이 없고, 봉사는 많은데 기쁨이 사라지고, 열심은 있는데 영혼은 메말라 갈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보다 는 은혜처럼 보이는 것들을 더 붙잡고 살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삼하 6장의 언약궤 사건을 통해 보여주십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싶은 마음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가까이 두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최선을 다해. 3만 명을 모으고. 새 수레를 준비하고. 온갖 악기를 동원했습니다. 국가적인 행사처럼 웅장하게 진행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감동적인 장면이기에. 누구도 “은혜롭다,”고 말할 수 있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웃사가 죽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를 당황하게 만듭니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까지 진노하셨을까? 웃사는 떨어지는 언약궤를 붙잡았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영적 원리를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뜻 자체를 거역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방법보다 사람의 방법을 앞세웠다는 것입니다. 원래 언약궤는 제사장들이 어깨에 메고 옮겨야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블레셋 사람들이 사용했던 새 수레를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신 방식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도 종종 하나님의 뜻을 이루겠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방법은 무시할 때가 있습니다. 기도보다 시스템을 의지하고, 말씀보다 경험을 의지하고, 순종보다 결과를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은혜”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거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거품은 커 보이고. 반짝거리고. 사람들의 눈을 끕니다. 그러나 오래가지는 못합니다. 실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인정으로 만들어진 은혜, 자기의 의로 포장된 헌신, 내 욕심이 섞여 있는 열심은 결국 무너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의 인생을 흔드십니다. 우리가 붙들고 있는 거품을 제거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생각하지 못했던 실패를 만나게 하시고, 풍랑 같은 시간을 지나게 하시고, 내 힘으로는 안 된다는 자리까지 데려가십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흔들림 속에서 비로소 진짜 은혜가 시작된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비행기를 탈 때마다 느끼는 것이 비행기가 난기류를 만나면 심하게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비행기는 흔들리면서도 추락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흔들림을 견디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흔들림 없는 사람으로 만드시지 않습니다. 흔들려도 무너지지 않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들리면 불안해하며. 당장 붙잡으려고 하고. 내 힘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웃사가 그랬습니다. 흔들리는 언약궤를 자기 손으로 붙잡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언약궤보다 먼저 그의 마음을 보셨던 것입니다. “네가 정말 나를 신뢰하느냐? 네 열심보다 내 말씀을 더 신뢰하느냐?”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기도가 막힐 때가 있습니다. 예배가 메마를 때가 있습니다. 말씀이 마음에 들어오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단순히 “더 열심히 해야겠다,”가 아니라 “혹시 내 안에 거품이 끼어 있지는 않은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신앙은 아니었는지? 내 자존심을 위한 충성이 아니었는지? 하나님보다 내 의가 더 커져 있지는 않았는지를 말입니다.

다윗이 두 번째로 언약궤를 옮길 때는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화려함보다 순종을 선택하여. 말씀대로 제사장들이 메게 했습니다. 여섯 걸음을 걸을 때마다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제는 자기 힘으로 하나님을 움직이려 하지 않겠다는 뜻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낮아지겠다는 고백이었습니다. 그때 비로소 다윗은 진짜 기쁨을 회복합니다. 왕의 체면도 내려놓고 에봇을 입은 채 하나님 앞에서 춤을 춥니다. 이제는 사람의 시선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진짜 은혜는 사람을 자유롭게 만듭니다. 진짜 은혜는 평안을 줍니다. 진짜 은혜는 안식을 회복시킵니다. 부활 신앙이란? “내가 더 잘해야 한다,”는 부담이 아닙니다. “이제는 주님이 살아 역사하신다”는 안식의 선언입니다. 그래서 참된 신앙은 더 많이 붙드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이 맡기는 것입니다. “주님, 이제는 제가 끌고 가지 않겠습니다. 제 힘으로 붙들지 않겠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살게 해 주옵소서.” 그때 우리의 영혼은 비로소 쉬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는 거품을 제거하기 원하십니다. 거품은 결국 사라지지만, 순전한 은혜는 끝까지 남기 때문이고. 고난과 시련을 지나며 거품이 제거된 사람은 강해지기 때문이고. 눈물과 한숨이 지나간 신앙은 깊어지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깨어진 사람은 다시 흔들리지 않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내재화의 자리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겉모습의 신앙이 아니라, 속사람이 단단해지는 신앙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의 인생이 흔들리고, 계획이 무너지고, 붙들고 있던 것들이 내려놓아지고 있나요?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지금 여러분을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거품을 제거하시는 중이실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품이 제거된 자리에는 더 깊은 은혜와, 더 맑은 평안과, 더 단단한 믿음이 남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불안은 평안으로 바뀌고, 긴장은 안식으로 바뀌며, 거품이 제거된 자리에 진짜 은혜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Jun, 3, 2026, 노스켈롤리아나 그린빌에서 수요일 아침 김병규 목사

05/27/2026

제 200회 영광의 달음질 칼럼 (May, 27, 2026)

편리함에 길들여진 시대속에서도
살아있는 예배를 회복해야 합니다

정기 검진을 받기 위해 잠시 애틀란타에 왔습니다, 요즘 Ai 시대를 맞이하다보니 저도 물론이고 사람들은 점점 더 “편한 것”을 찾는데 굉장히 빠른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더 빠르고, 더 쉬우며, 더 이상 부담 없는 것을 선호하는 경향이 많아졌습니다, 신앙생활도 예외가 아닌 것 같습니다, 힘들지 않은 예배, 부담이 없는 헌신, 움직이지 않아도 되는 신앙을 원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편안함이 지나치면 생명력을 잃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아있는 존재로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움직이지 않는 존재가 되려고 합니다. 식물은 스스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한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식물은 복잡한 판단 기관인 뇌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동물은 다릅니다. 끊임없이 움직이며 환경을 분별하고 반응해야 하기 때문에 뇌가 필요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아있는 신앙은 움직입니다. 기도로 움직이고, 예배로 움직이며, 순종으로 움직입니다. 사명이 있는 사람은 멈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계속 달려갑니다,

그런데 인간은 본능적으로 안정과 편리함을 추구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가능하면 움직이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다 보면 영적인 기능도 점점 둔해집니다. 기도가 줄어들고, 예배의 감격이 사라지고, 말씀의 떨림이 무뎌집니다. 몸은 예배당에 와 있지만, 영혼은 하나님 앞에 서 있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생물학 이야기 가운데 “멍게”이야기 입니다, 멍게는 어릴 때 유충 상태로 바다를 자유롭게 떠다닙니다. 그 시기에는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신경기관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바위에 붙어 정착하게 되면 더 이상 움직일 필요가 없어 진다 합니다, 그러자 자신의 신경기관을 스스로 흡수해 버린다고 합니다. 움직이지 않으니 더 이상 필요 없어진 것입니다. 이 모습은 오늘날 신앙인의 위험한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처음 예수 믿을 때는 뜨거웠습니다. 새벽기도도 달려가고, 말씀도 사모하고, 전도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 정도면 됐다”는 자리에 머물러 버린다는 것입니다, 편한 신앙, 익숙한 신앙, 움직이지 않는 신앙에 고착되어 버립니다. 그때부터 영적인 감각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노라.” 고 신앙은 달리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배를 향해 달려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향해 몸을 던지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예배는 구경하는 자리가 아니라 참여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현장 속으로 자신을 내어놓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멘의 하나님”이십니다. 응답하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부르짖기도 전에 먼저 다가오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여기 있노라” 말씀하시며 우리를 도우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끝까지 자기 벽을 허물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자아를 붙든 채 예배드리고, 자기 계산을 내려놓지 못한 채 찬양합니다. 그러니 예배를 드린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 신뢰하는 양다리 신앙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계속 문제 삼으셨던 것이 “산당 제사”였습니다. 멀리 예루살렘 성전까지 가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왕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산당을 제거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선한 왕으로 평가받는 왕들조차 산당 문제를 완전히 끊어내지 못했습니다. 편리함이 신앙의 타협으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상황에 따라 영상 예배가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문제는 편리함 자체가 목적이 될 때입니다. 몸을 드리지 않고, 시간을 드리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 신앙은 점점 생명력을 잃어갑니다. 하나님은 제단을 쌓을 때 “다듬지 않은 돌”을 사용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의도를 과하게 넣지 말라는 뜻입니다. 욕심과 계산으로 하나님을 포장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예배도 너무 사람의 계산 속에 갇히면 살아있는 임재를 잃게 됩니다. 순서도 준비도 중요하지만, 그 모든 것 위에는 성령의 흐름이 있어야 합니다. 현장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시는지를 따라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배는 점점 “잘 짜여진 종교 행사”는 될 수 있어도, 하늘의 능력이 임하는 생명의 예배는 되기 어렵습니다.

결국 살아있는 예배를 회복하는 힘은 성령의 기름부음입니다. 압도적인 기도입니다. 자기를 깨뜨리는 회개입니다. 내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갈망입니다. 사람의 의도가 녹아질 때, 계산된 종교성이 무너질 때, 편리함의 우상이 깨질 때, 그때 예배는 다시 살아나기 시작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우리는 다시 싱싱한 영혼이 될 것입니다, 성령의 숨결이 살아 움직이는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믿는 척하는 신앙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으로 회복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은 편한 예배보다 살아있는 예배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구경하는 신앙보다 달려가는 신앙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익숙함 속에 머무는 예배의 시대가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 앞에 자신을 던지는 예배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움직이는 예배자를 찾고 게십니다, 축복과 영광이 임하는 예배의 자리에 동참하는 모든 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026년 5월 27일 애틀란타에서 수요일 아침 김병규 목사

05/20/2026

제 199회 영광의 달음질 칼럼 (May, 20, 2026)

외로움은 더 이상 절망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의 자리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기를 가족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위로가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실제 삶은 그렇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같은 집 안에서 살아도 마음은 멀어지고, 함께 밥을 먹어도 서로의 마음은 닿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어떤 사람은 가족들 가운데 있으면서도 깊은 외로움을 느끼며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외로움은 혼자 사는 사람의 외로움과는 조금 다릅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으면서도 정서적으로는 홀로 남겨진 듯한 외로움이기 때문입니다. 말은 오가지만 마음은 닫혀 있고, 서로 곁에 있지만 진심으로 기대어 울 수 있는 자리는 사라진 상태일 때 입니다. 문제는 이런 외로움이 오래 지속될 때입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허전함처럼 시작되지만, 시간이 지나면 마음속 깊은 고독이 우울로 변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우울은 결국 짜증과 예민함, 날카로운 말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본인은 속으로 무너지고 있는데, 가족들의 눈에는 “왜 저렇게 예민하지?”라는 모습으로 비쳐질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순간 자신을 정죄합니다.“왜 나는 믿음이 부족하지? 왜 이렇게 약할까? 왜 나는 사소한 일에도 흔들릴까?” 그러나 성경은 이런 상태를 단순히 믿음 없는 모습으로만 몰아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외로움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나가는 영혼의 깊은 통로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 속 믿음의 사람들도 대부분 관계 속에서 깊은 외로움을 경험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 엘리야를 보십시오. 그는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450명과 맞섰던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는 놀라운 기적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강해 보였던 그 순간 이후, 그는 갑자기 무너져 내립니다. 이세벨의 위협 앞에서 광야로 도망친 엘리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이 말은 단순한 두려움의 표현이 아닙니다. 너무 오래 홀로 버텨 온 영혼의 탈진이었습니다. 엘리야의 문제는 상황만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가장 깊은 고통은 “나만 홀로 남았다,”는 외로움의 인식이었습니다.

다윗 역시 외로움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가족에게서도, 사울에게서도, 심지어 가까운 사람들에게서도 반복적으로 버림받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것은 시편 속 다윗은 위대한 왕의 모습보다, 외로움 속에서 밤을 지새우는 한 인간의 모습으로 더 많이 나타남에서 보게 됩니다. 그는 힘들고 외로울 때 하나님 “내가 어느 때까지 마음에 근심하리이까? 나를 아는 이도 없고 피난처도 없습니다.” 다윗의 외로움은 단순히 사람의 부재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맡길 사람이 없다는 데서 오는 고독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외로움을 하나님 앞에서 숨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저는 외롭습니다. 너무 오래 기다렸습니다. 왜 침묵하십니까?” 다윗의 기도는 정리된 신앙적인 문장이 아니라, 상처 입은 영혼의 솔직한 울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게 됩니다. 그는 외로움을 이겨낸 사람이 아니라, 외로움을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간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깊은 외로움을 경험하셨습니다. 예수님 곁에는 제자들도 있었고, 무리들도 따랐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마음은 점점 더 고독한 길로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을 가장 외롭게 했던 것은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아무도 그분의 길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현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반복해서 십자가를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자기 자리와 성공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하신 말씀은 단순한 두려움이 아니라. 영혼 깊은 곳까지 눌리는 정서적 고통의 표현입니다.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기를 원하셨지만, 그들은 잠들어 버렸습니다. 사람들 가운데 계셨지만 예수님은 혼자가 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도“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외침은 믿음의 포기가 아니라, 깊은 고립 속에서도 하나님을 붙들고 있는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은 외로움을 피하신 분이 아닌, 외로움의 가장 깊은 자리까지 내려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신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을 비롯한 위의 인물들에게도 외로움은 있었지만 그 외로움이 무조건 제거해야 할 적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외로움에 지친 엘리야에게는 교훈이 아니라 쉼과 회복임을 보여 주셨고. 외로움이 신앙 실패의 증거가 아니라, 너무 오래 혼자 견뎌 온 결과였다고 위로해 주셨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깊은 마음을 만지시는 통로가 되어주십니다. 그래서 가족 안에 있어도 외로워 짜증과 예민함으로 흘러나오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하나님은 너를 떠나지 않으셨다. 외로움의 끝에서 새로운 회복의 길을 준비하고 계신다.” 고 위로를 주십니다, 물론 외로움이 당장 사라지지 않을 수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외로움 속에 있는 사람을 홀로 버려두시는 분이 아니 라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 마음에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의 마음을 안다. 네가 느끼는 그 고독의 자리에 내가 먼저 와 있다.” 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외로움은 더 이상 절망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다시 깊이 만나는 은혜의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May, 20, 2026, 노스켈롤리나 그린빌에서 수요일 아침 김병규 목사

05/13/2026

제 198회 영광의 달음질 칼럼 (May, 13, 2026)

교회는 주님과 성령으로 살아 움직이는
거룩한 희생의 공동체 이어야 합니다,

저는 한국 방문을 마치고 그린빌장로교회에서 금주(17일)부터 새로운 목회의 여정을 시작하게 됩니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부족한 사람을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앞으로 교회와 함께 걸어갈 길을 생각할 때 마음 한편에 두려움과 기대가 함께 있습니다. 새로운 사역지로 나아가며 제 마음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교회는 무엇으로 세워지는가?” 오늘날 성도들이 교회를 건물이나 조직으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교회를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단순히 사람들이 모인 종교 단체가 아니라.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나눈 사람들의 공동체라 말씀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몸을 찢기시고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하나 된 영적 가족이라 말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성도들을 향하여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말씀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세상의 혈연보다 더 깊은 은혜의 관계로 묶인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화려한 건물보다 시설보다 믿음의 사람이 중요합니다. 예배당은 교회의 본질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과정 속에서 주어진 열매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짜 교회는 성도들의 삶 속에서 세워집니다. 19세기의 사상가 존 러스킨은 “교회를 세우는 재료가 철근과 시멘트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는 교회를 세우는 요소로 진리와 아름다움, 사랑과 희생, 순종과 땀, 그리고 꿈을 이야기했습니다. 참으로 깊은 통찰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사랑 없이 세워질 수 없습니다. 희생 없는 공동체는 오래갈 수 없습니다. 진리가 없는 교회는 방향을 잃게 됩니다. 성령의 역사가 없는 교회는 생명을 잃게 됩니다. 에베소서에서 사도 바울은 교회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졌다,”고 말했습니다. 교회는 시대의 유행이나 인간의 생각 위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목숨 걸고 붙들었던 복음 위에 세워진 곳이라는 것입니다.

그 중심에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가 계셨습니다. 또한 바울은 여기서 예수님을 “모퉁잇돌”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건물을 떠받치는 기초이면서, 동시에 건물을 완성하는 머릿돌이라는 뜻입니다. 결국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로 시작되고 예수 그리스도로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기도의 마음으로 그린빌에서 새로운 사역을 시작하며 무엇보다도 교회를 “교회답게, 성도는 성도다운 교회”로 세워가기를 간절히 원하며 기도 할 것입니다. 사람의 방법보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묻는 교회, 프로그램보다 예배와 기도를 소중히 여기는 교회, 세상의 성공보다 복음의 진실함을 붙드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원합니다. 교회는 성도들 끼리 서로 경쟁하는 곳이 아니라 서로의 짐을 지는 곳입니다. 상처 입은 영혼들이 위로를 받고, 지친 사람들이 쉼을 얻으며, 다음 세대가 믿음을 배우는 영적 가정이어야 합니다. 또한 살아있는 믿음의 고백이 있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런 교회를 원하는 것은 내 뜻과 생각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이런 교회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모이는 이유도 단순히 예배의 형식을 유지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복음을 함께 살아내기 위함입니다. 교회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지금도 계속 세워 가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도 계속 자라야 하고, 고백도 날마다 새로워져야 합니다. 주님 오시는 날까지 교회는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부족한 종이지만, 하나님께서 맡기신 자리에서 성도님들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아름답게 세워가기를 기도합니다.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함께 걸어갈 때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통해 영광 받으실 줄 믿습니다. 새로운 시작 앞에서 저 자신도 다시 마음에 새깁니다. 교회는 사람이 만드는 조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우시고 성령으로 살아 움직이게 하시는 거룩한 공동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May, 13, 2026, 애틀란타에서 수요일 아침 김병규 목사,

05/05/2026

제 197회 영광의 달음질 칼럼 (May, 6, 2026)

은혜를 붙든 사람은 고난 속에서도
끝까지 남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고난을 부정적으로 이해를 하기에, 계획이 어긋나고, 관계가 흔들리고, 환경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갈 때, 그것을 바로 “불리함”으로 해석을 합니다. 그래서 고난은 곧 위기이고, 위기는 곧 실패로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시선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개입된 고난은 단순한 붕괴가 아니라, 재편성의 과정이며, 무너짐이 아니라 방향 전환의 시작이기 때문 입니다. 겉으로는 손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더 깊은 유익을 준비하는 하나님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삶이 흔들리는 이유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고난 자체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가 드러남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무엇을 의지하고 있는가? 대한 문제인 것입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의지할 대상을 찾습니다. 경제적 기반과 인간관계, 사회적 지위와 경험과 능력 등, 눈에 보이는 것들에 기대어 자신을 안정시키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결코 절대적인 기반이 될 수 없기에. 시간이 지나면 드러나게 됩니다.

그것들은 마치 불탄 밧줄과 같아서 붙잡고 있을 때는 견고해 보이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힘을 잃고 끊어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지점을 다루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 붙잡고 있는 것을 그대로 두지 않으시고 그것을 제거하시는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그것을 상실로 받아들이고, 아픔으로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신앙은 그 제거의 의미를 다르게 해석합니다. 하나님은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잡기 위해 제거하시기 때문입니다. 무너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세우기 위해 허무시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붙들고 있던 “괜찮다고 여기는 것”이 오히려 “진짜 좋은 것”을 가로막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은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삶의 기반이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지고, 익숙했던 세계가 무너지는 경험으로 느끼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는 결코 비워진 채로 남지지 않고. 하나님은 반드시 그 자리에 새로운 생명을 심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싹”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미 끝났다고 생각했던 자리에, 더 이상 가능성이 없다고 여겼던 자리에서 다시 돋아나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싹”이 단순한 회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전 상태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전혀 다른 차원의 시작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흔히 더 많이 가지는 것을 회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욕망을 채우는 대신, 욕망의 방향을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게 하기보다는 진짜를 소유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반복되는 만족의 추구가 결국 중독으로 이어지는 세상의 흐름 속에서, 하나님은 단 하나의 참된 만족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싹”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존재가 아니라, 삶의 중심을 새롭게 세우시는 분이십니다. 문제는 그분이 중심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다른 것들로 자신을 채우려 하다가 지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가 중심이 되면, 완전히 바뀌지 않아도 삶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습니다. 외적인 조건이 아닌 내적인 중심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새롭게 시작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끝까지 남는 것입니다. 성경은 “남은 자”를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많은 사람이 시작하지만, 끝까지 남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더”를 요구합니다. 더 성취하고?, 더 누리고?, 더 올라가라? 말합니다. 그러나 그 끝은 공허와 소진입니다. 반면에 성경이 말 하는 믿음은 전혀 다른 방향을 가집니다. 히브리적 개념에서 믿음은 “에무나”, 곧 견고하게 서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감정의 고조나 일시적인 결단이 아니라, 흔들림 속에서도 자리를 지키는 지속적인 태도를 말합니다. 즉, 상황이 나아지지 않아도 포기하지 않는 것, 결과가 보이지 않아도 물러서지 않는 것, 이것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불이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것처럼 보일 때, 불순물이 제거되고 있는 것이기에. 금이 정금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불을 통과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통해 불필요한 것들을 태우시고, 본질만 남기십니다. 그래서 남은 자는 단순히 살아남은 사람이 아니라, 정결해진 사람이고.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본질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고난은 우리를 시험하는 동시에, 구별하는 도구가 됩니다. 무엇을 붙들고 있는지가 드러나고, 무엇이 진짜인지가 분명해집니다. 그 과정을 통과한 사람만 끝까지 남게 됩니다. 우리 삶에 고난이 있다면, 단순한 위기로만 해석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지금 무엇을 제거하고 계신가? 무엇을 새롭게 심고 계신가? 그리고 나를 어떤 사람으로 남기고 계신가? 을 질문해야 합니다, 고난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더 단단해지고, 더 선명해지고, 더 깊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상황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 중심이 바뀐 사람이고, 그 중심에 하나님이 계신 사람입니다. 고난은 누구에게나 오지만 모든 사람이 같은 결과에 이르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무너지고, 어떤 사람은 새로워집니다. 그 차이는 은혜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에 있습니다. 은혜를 붙든 사람이 혼란 속에서도 끝까지 남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May, 6, 2026, 대한민국 청주에서 수요일 아침 김병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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