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선교교회 - Coram Deo Church of Virginia

생활선교교회 - Coram Deo Church of Virginia 크리스천 카운셀링
Midwest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전남대학교 가정관리학과
조선대학교 부속여자고등학교

12/09/2024

기도하는 그리스도인 입니까?

성경 본문: 요한계시록 8장 3-4절

"또 다른 천사가 와서, 금 향로를 들고 제단에 섰습니다. 그는 모든 성도의 기도에 향을 더해서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리려고 많은 향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향의 연기가 성도들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갔습니다."(새번역성경)

2024년 12월 9일 새벽 기도회 이경희 목사(생활선교교회/코람데오교회)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천사들이 받아서 하나님의 보좌 앞 제단으로 올라갑니다.
그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합한 기도여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생각과 뜻으로 중언부언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합한 기도라고 볼 수 없습니다.

요한일서 5장 14절은 "무엇이든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청을 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합니다.

요즘 한국의 정치 상황과 관련,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 줄 압니다. 그 기도가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실 만한 기도가 될 수 있으려면, 여러분의 생각과 여러분이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드러내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리의 말씀이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 요한계시록 8장 5절은 "그 천사가 (성도의 기도가 담긴) 향로를 가져다가 거기에 제단 불을 가득 채워서 땅에 던지니, 천둥과 요란한 소리와 번개와 지진이 일어났다" 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시면 그 응답의 결과가 어떠하다는 것을 증거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새벽을 깨우는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시는 여러분들이, 이런 능력 있는 기도를 드리시는 담대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1/20/2024

2024년 11월 셋째 주일 설교 요약
제목: “발람의 꾀”
성경 본문: 민수기 22장 12절

“하나님이 발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니라”

1. “발람의 꾀”를 통해 우리가 바른 신앙인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내가 섬기는 교회가 주님의 뜻대로 거룩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지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2. 오늘 본문 말씀의 배경은 광야에서의 38년을 보낸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바라보고 여리고 맞은편 모압 평지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3.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숫자는 2백만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는데, 여기까지 오면서 하나님의 심판 대상이었던(창세기 15장) 아모리 족속을 쳐서 내쫓고 바산까지 점령했습니다. 모압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후손인 국가(창세기 19장)이기에 이스라엘은 모압을 치려는 생각은 아예 없었습니다. 그런데 모압은 아모리 족속과의 전쟁에서 져서 땅을 빼앗긴 상황이기에 그런 아모리를 모두 내쫓고 바산까지 전멸시킨 이스라엘이 자기 영토에 진을 치고 있는 것을 보면서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4. 모압의 왕 발락(“짓밟는 자”)이 미디안 장로들과 상의하여 발람을 초청합니다. 미디안 사람도 이스라엘과 먼 친족이어서(창세기 25장) 이스라엘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두려움은 사단이 주는 거라 분별력이 없는 사람들은 다 속습니다.

5. 주술사 또는 예언자로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발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도 꽤 많이 알고 있고 하나님의 음성도 듣는 자였습니다. 그는 메소포타미아 브돌 사람입니다. 브돌에서 모압까지의 거리는 약 650km(400Mile)정도로 추산됩니다. 현대와 달리 당시 교통편으로 본다면 상당히 먼 거리인데, 발락이 그 먼 곳까지 그를 데리러 보낸 것은 발람이 국제적으로 유명한 주술사였던 것으로 보이며, 그만큼 발락이 이스라엘을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6. 그러나 발람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면서도 자신의 주인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해서 세상적인 부와 명예를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발락이 보낸 사람들과 함께 가지 말라. 이스라엘은 복 받은 자들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려는 발락의 계획을 미리 꺾으려고 하신 것입니다. 발람이 그 음성을 처음 들었을 때 “이스라엘은 복 받은 자들이다”는 말을 발락이 보낸 사자들에게 하지 않고 돌려 보냅니다. 발락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메시지를 보낸 것입니다.

7. 발락은 더 크고 좋은 조건을 제시합니다. 발람은 그 말을 듣고 발락의 사자들을 따라 나섭니다. 세상의 재물과 명예를 하나님 보다 더 크게 여긴 것입니다.

8. 하나님은 결국 발람이 가도록 허락하십니다(20절).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이르는 말만 하라는 조건부 허락입니다. 이 구절은 발락과 발람의 행위를 인정한 것이 아니라 “네 맘대로 해 봐라” 라고 제멋대로 하게 내버려 두신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자녀가 너무 원할 때 부모가 그것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어려움을 직접 경험하고 깨닫게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로마서 1:25-26 말씀처럼 사람들이 마음의 욕정대로 하도록 더러움에 그대로 내버려 두셔서 그 잘못에 대한 대가를 스스로 받고 깨닫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9. 여호와의 사자가 발람이 탄 나귀를 막아선 것(22)은 하나님의 분노가 최고조에 달했음을 보여줍니다. 명백하게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그 마음은 발락이 제시한 재물과 높은 지위에 마음이 팔려 있어서 나귀가 보는 것을 예언자인 그가 보지 못합니다. 자기 생각으로 가득차 있어 나귀가 말하는 것도 알아채지 못합니다. 이것을 베드로후서 2장 15-16절은 “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자기의 불법으로 말미암아 책망을 받되 말하지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행동을 저지하였느니라” 라고 표현합니다. 발람이 불의의 삯을 사랑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자기 욕심을 위해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10. 발람은 모압 왕 발락으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습니다(민 22:36-40). 그 환대를 받으며 발람은 자신을 위해 제단을 쌓아달라고 요청합니다(민 23:1).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장소가 제단인데, 자신을 위해 제단을 쌓아달라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자리에 피조물인 자신이 서겠다는 것입니다. 세상 권력으로부터 받는 환영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라면 재앙입니다.

11. 발락은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 네 번이나 제단을 쌓았으나 하나님은 발람의 입술을 강권적으로 주장하심으로 이스라엘을 축복하였습니다. 이 일로 발락은 발람을 불러온 것을 실패한 것처럼 보입니다. 발락과 발람은 각각 자기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민수기 25장에서 모압에 머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 창기를 앞세운 모압의 풍요와 음란의 신 바알브올과 음행을 시작합니다.

12. 하나님이 이 모습을 보시며 진노합니다. 아론의 손자인 제사장 비느하스가 그 음란의 현장에 있던 남녀를 창으로 꿰뚫어 죽임으로 하나님께서 염병을 그칩니다. 이 음행 사건은 단순히 도덕적 타락이 아니라 바알브올을 섬기는 영적인 배교로서 하나님과의 언약을 정면으로 위반한 사건입니다.이 죄로 인해 염병이 발생해 2만4천명이 죽었습니다(민 25:8-9). 죄에는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 있습니다.

13. 발람의 꼬임에 빠져 이스라엘 백성을 음행에 빠지게 한 미디안은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직면했고 다섯 왕이 죽임을 당하는 참사를 당했습니다(민 31:1-2). 발람이 발락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음행에 빠뜨리도록 계략을 알려주었다는 직접적인 구절은 없습니다. 그러나 발람과 발락이 각각 자신들이 살던 곳으로 돌아갔다는 언급 직후, 민수기 25장 1-3절은 이스라엘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을 시작하고 그들의 제사에 참석해 그들의 신 바알브올에 절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민수기 31장 16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발람의 꾀를 따라 브올의 사건에서 여호와 앞에 범죄하게 하여 여호와의 회중 가운데에 염병이 일어나게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 14절은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하고 또 음행하게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발람은 모압 왕이 주는 재물과 명예를 받고도 하나님의 강권적인 개입으로 직접 저주는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음행과 우상숭배의 죄에 빠뜨리는 방식으로 발락의 소원을 들어주었습니다.

14. 발람은 그 죄의 댓가로 이스라엘과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죽임을 당합니다(민31:8). 유프라테스 강 근처 브돌로 돌아간 발람이 650 킬로미터 떨어진 미디안에서 죽었다는 것은
그가 모압에서의 음행과 우상숭배 사건을 위해 미디안과 모압을 도왔다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평안히 음부로 보내시지 않은 것입니다.

15. 이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세상과 타협하여 하나님보다 재물과 명예를 더 사랑했던 자는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물질만능 시대에서의 성공 여부는 재물과 명예로 판단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거룩함과 경건을 가르치고 본을 보여야 합니다. 세상과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을 하고 보기 좋아하는 것을 보여주는 교회가 된다면 그 교회에는 거룩하신 예수님이 임재하실 수 없습니다. 세상과 타협해 버린 버가모 교회에는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었습니다(계2:14-15). 니골라 당은 은혜의 시대이기에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고 육신은 본래 악한 것이어서 육신으로 무엇을 하든지 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보호를 받는다고 가르칩니다.

16. 여러분의 몸은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고(고전 6:19-20), 여러분이 예수님의 몸의 지체입니다(고전 12:27). 여러분들이 모여서 하나님의 거룩한 처소인 교회가 됩니다(엡 2:21-22).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복을 받은 사람으로서 거룩합니까? 여러분의 가정 공동체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섬기는 일터와 사회에서 여러분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고 있습니까?

10/28/2024

생활선교교회(Coram Deo Church of Virginia, 이경희 목사)
2024년 10월 27일
종교개혁주일 설교 요약

제목: 성전의 두 기둥
성경 본문: 열왕기상 7장 21절

“이 두 기둥을 성전의 주랑 앞에 세우되, 오른쪽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야긴이라 하고, 왼쪽의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보아스라 하였으며”

1. 10월 마지막 주일은 1517년 10월 31일 시작된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주일로 지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고, 교회의 지체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모습속에 비치는 교회의 진정한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지에 관해, 솔로몬 성전을 통해 알아봅니다.

2. 솔로몬 성전은 예루살렘 모리아 산의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위치합니다(역대하 3장1절). 역대상 21장은 다윗이 주변국들과 전쟁을 계속하면서 군인으로 징집될 수 있는 이스라엘의 인구 조사를 했는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뻐하지 않으셔서 심판을 시작하셨다는 것을 기록합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갓을 다윗에게 보내 그것을 말씀하셨고, 다윗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심판을 자신에게 내려달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심판을 이행하는 천사에게 심판을 중단하라고 명령합니다. 그 천사는 심판을 멈추고,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심판 중단을 명령 받았던 그 자리에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으라고 갓에게 말합니다. 다윗은 갓의 말을 듣고 오르난으로부터 그 땅을 금 육백 세겔을 주고 사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고, 하나님은 하늘에서부터 번제단 위에 불을 내려 응답하셨고, 천사에게 명령하시자 천사가 칼을 칼집에 꽂았습니다. 다윗은 그곳을 성전 터로 잡아놓았던 것입니다. 모리아 산의 성전이 가진 첫 번째 의미는 죄사함을 위한 희생 제사와 헌신이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3.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기 위해 독자 이삭의 목숨을 걸고 순종하였고 이삭도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순종적이었습니다. 솔로몬이 모리아 산의 오르난의 타작 마당을 성전 터로 삼고 성전 건축을 시작한 것도 그의 아버지 다윗의 뜻을 따른 것이었습니다.모리아 산의 성전을 통해 “순종”은 성전된 우리가 지켜야 할 두 번째 덕목임을 알 수 있습니다.

4. 모리아 산의 영적인 의미는 하나님께 대한 그리스도의 순종을 의미합니다. 솔로몬과 이삭의 순종과 같이,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흠없는 제물이 되심으로 많은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모리아 산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장소였고 하나님의 불꽃이 임하는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였습니다. 그리고 오르난의 타작마당에서 불로 응답하시며 진노를 멈추었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진노의 불길 속에서 죄인들을 건지셨던 심판과 자비의 장소였으며, 다윗의 실패를 통한 회개가 은혜의 자리로 변화되는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그 자리에 세워지는 성전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였습니다. 교회는 결코 그냥 세워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섭리 가운데 그리스도의 성육신적 사랑과 희생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세워졌던 것입니다.

5. 솔로몬 성전 입구에 세워진 두 기둥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살펴봅시다. 두 기둥의 제조자는 히람 (왕상7:14)입니다. 그는 납달리 지파의 과부의 아들이었으며, 그의 아버지는 두로 사람 놋쇠 대장장이였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재능을 이어받아 놋 일에 대해서는 지혜와 총명을 구비한 놋 제조 분야 최고의 조형예술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 과부의 아들이고 이방인 두로 사람의 아들이어서 가난하고 소외된 자로 사회의 차별과 무시를 받았지만 성전의 두 기둥을 세우는데 부르심을 받았다. 마치 모세가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불러 성막을 짓듯이 성전을 세우는데 동원된 최고의 기술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는 순전한 하나님의 은혜이고 이방인도 성전 건축에 합류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사역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이 없음을 나타냅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께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우리의 최고를 드려야 한다는 뜻이고, 신분이나 부에 관계없이 하나님이 주신 우리의 달란트가 그대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6. 두 기둥의 재료는 불변함, 튼튼함, 부강을 뜻하는 놋이었습니다. 다니엘이 예언한 헬라 제국이 놋으로 되어 있었다는 것을 보면, 당시 놋은 불변하고 튼튼하고 부강함을 상징하는 물질의 대명사였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놋 성벽이라 묘사했다(렘1:18)는 것은, 놋은 하나님을 따르는 성도에게 주어진 무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두 기둥이 놋으로 만들어진 이유는 교회의 영원성, 불변성, 경건성을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

7. 두 기둥의 장식은 석류(17-18,20절)와 백합화(19절)입니다. 석류는 겉모습과는 달리 그 속은 정결한 흰색과 열정적인 빨강색의 열매와 같은 꽃들이 그물처럼 촘촘히 엮여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 생명력, 율법의 완전성, 회복과 구원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은혜의 사슬로 엮어져 하나님의 집으로 모으는 성전의 기본적 임무를 상징합니다. 또 백합화는 그리스도의 순결, 향기, 거룩함,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묘사됩니다.

8. 두 기둥은 성전의 주랑(현관) 앞 양쪽에 세워졌는데, 출입문보다 훨씬 낮아서 건축물을 지탱하기 위한 기둥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과 생명력, 율법의 완전성과 사랑, 그리스도의 순결과 거룩함을 보여주는 상징물입니다.

9. 두 기둥의 이름은 오른쪽 기둥이 ‘야긴’으로 ‘그가 세우실 것이다’는 의미입니다. 왼쪽 기둥은 ‘보아스’인데 ‘그분 안에 능력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야긴은 다윗 시대의 제사장 중의 한 명이었고, 보아스는 룻의 남편으로 다윗의 증조부의 이름이지만, 그들을 기념한다기 보다는 단순하게 그들의 이름이 가진 히브리어의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해석됩니다. 이 두 기둥의 이름을 야긴과 보아스라고 부른 것은 이 성전을 견고히 붙드시고 다윗 왕조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솔로몬의 신앙 고백같습니다. 성막에는 이 기둥이 없고 솔로몬의 성전에만 있다는 것은, 솔로몬은 이 성전에 들어오는 사람 모두가 이 기둥들을 보면서 이 성전이 하나님의 도움심과 능력으로 세워졌음을 잊지 말고 온맘 다해 충성되게 섬기기를 바랐다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10. 이 솔로몬 성전의 두 기둥을 살펴보면서, 오늘날의 교회의 모습은 어떠해야 할까요? 교회는 그냥 세워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에 의해 그 터가 선택된 곳이 바로 모리아 산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과 헌신, 희생제사를 통해 세워진 것이 교회입니다. 즉 십자가의 기초 위에 세워진 것이 교회입니다. 목사의 능력이나 프로그램 또는 열심있는 성도들에 의해 운행되는 것이 아니라, 야긴의 의미처럼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이고, 보아스의 이름처럼 하나님의 능력으로 운행되는 곳이 교회입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교회를 통치하시므로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교회는 야긴과 보아스의 두 믿음의 신앙고백이 기둥이 되어 세워져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는 교회, 성령님이 강하게 운행하시는 교회가 되도록 나를 주님께 내어 드리고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마음껏 통치 하시도록 주님만을 높이고 주님께만 영광돌리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에스겔서 10장에서 인간의 우상숭배로 인해 성전에 더 이상 머무르지 못하시고 떠나셨던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돌아오실 것입니다.

10/23/2024

생활선교교회(Coram Deo Church of Virginia) 이경희 목사의 2024년 10월 20일 주일 설교 내용을 요약합니다.

제목: 선택의 기준

성경 본문: 창세기 13장 14-15절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1. 최상의 선택, 후회없는 선택은 우리 모두에게 가장 큰 소망이고 도전입니다. 오늘 주제는 이 선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 창세기 13장의 이야기는 12장에서 아브람이 그의 나이 75세에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서 자신의 고향을 떠나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가나안의 세겜 땅에 들어가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목적지도 모르고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날 때의 아브람의 첫 선택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창세기 12장 1절).

2. 그 땅에는 가나안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곳에 들어간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내가 너의 자손에게 이 땅을 주겠다."(12장 7절)고 말씀하셨고, 그는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그곳에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벧엘의 동쪽 산간지방으로 옮겨 가서 거주할 곳을 만들고 거기에서도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아브람은 그렇게 가는 곳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제단을 쌓는 사람이었습니다.

3. 그런데 복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과 달리, 아브람은 가나안에서 고난을 겪기 시작합니다.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벧엘에 장막을 쳤는데 벧엘과 아이 사이는 그다지 넉넉한 곳이 아닙니다. 척박한 광야 지역인 남쪽의 네겝으로 내려갔습니다. 성경은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지만, 그곳에 먼저 터를 잡고 살고 있던 사람들과 좁은 지역에서 함께 사는 것이 쉽지 않았다고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가나안과 애굽(이집트)의 경계를 이루는 네겝 지역은 본래 비가 거의 오지 않는 광야인데 거기에 기근이 더욱 심해지자, 그는 가나안을 벗어나 더욱 남쪽인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내려갔다는 말이 반복되는 것은 지형적으로 남쪽으로 계속 내려갔다는 표현이지만, 내려갔다는 말이 반복되는 것은 영적으로 어려워지고 있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마치 사무엘상 3장 2절의 “어느 날 밤, 엘리가 잠자리에 누워 있을 때였다. 그는 이미 눈이 어두워져서 잘 볼 수가 없었다.”(새번역 성경)라는 말씀의 의미가 엘리 제사장의 영적인 눈이 어두워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가나안에 들어선 후 그 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들었지만, 원주민들의 텃세로 함께 살기 힘들어지자 하나님의 말씀 없이 네겝으로 내려갔고, 척박한 네겝에 기근이 더욱 심해지자 하나님의 말씀 없이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 대가로 아브람과 사래는 혹독한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4. 영적으로 어려워진 사람의 공통점은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대신에 사람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애굽으로 내려간 아브람은 애굽 사람들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태어나고 자라난 아버지의 집을 떠나 자신도 알지 못하는 곳, 하나님께서 보여 주는 땅으로 향하는 것에도 두려움이 없었던 것에 비교하면 그 차이를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 2절은 말씀의 빛이 없는 상황을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브람은 애굽 사람들을 두려워해 자신의 아내 사래를 “누이”라고 속였고, 애굽 왕 바로는 사래를 자신의 궁으로 불러들였습니다.

5. 바로는 사래를 인하여 아브람에게 수많은 가축과 종들을 하사했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사래를 궁으로 불러들인 일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집안에 무서운 재앙을 받고, 사래를 아브람에게 돌려보냈습니다. 거짓은 사탄의 아비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잘못은 아브람이 거짓말을 하면서 시작되었는데,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약속하신 복의 근원, 큰 민족을 이룰 열국의 아비,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시고 그 이름을 창대하게 하시겠다는 자신의 약속을 기억하시고 장차 약속의 자녀를 낳을 아브람의 아내 사래 또한 초자연적인 역사로 지키시고 보호하신 것입니다.

6. 바로가 당한 “큰 재앙”이 무엇인지는 성경이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바로는 자신이 아브람에게 주었던 모든 재물을 가지고 애굽을 떠나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 아브람과 사래로 하여금 하나님의 보호하시고 지키시는 것을 경험하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람과 사래의 거짓말과 속임수는 그들의 대를 아들 이삭과 손자 야곱에게로 대대로 전해지면서 그로 인해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것을 성경은 여과없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부부가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서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고 믿음의 동역자가 되는 것의 중요함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7. 아브람은 애굽을 떠나 벧엘로 올라갑니다(창 13:1-4). 가나안에 들어와 처음 단을 쌓았던 곳, 하나님과의 첫 사랑과 언약의 기억이 있는 곳으로 올라가 다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신앙을 회복합니다. 명백하게 자신의 잘못임에도 자신과 아내를 안전하게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 아브람은 감사의 제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올라가는 믿음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면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8. 부자가 되어 가나안으로 돌아온 아브람은 새로운 상황에 직면합니다. 아들과 같이 여기고 데리고 다니던 롯과의 갈등 때문입니다. 그들이 가진 더 많은 가축을 키우기에 그들의 앞에 있는 벧엘과 아이 사이의 목초지는 턱없이 좁고, 그들의 목자들은 다투기 시작합니다. 아브람은 자신과 조카들은 물론 주변에 살고 있는 가나안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로서의 자긍심을 지키기 위해 떠남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이 떠남은 더이상 내려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네가 오른쪽을 택하면 나는 왼쪽으로 가고, 네가 위로 가면 나는 아래로 가겠다”고 , 조카 롯에게 선택권을 줍니다.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은혜를 경험한 아브람에게 눈에 보이는 땅은 더 이상 유혹의 대상이 되지 못했습니다.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께서 그와 동행하시고 지키신다는 믿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잃어버린 것에 대한 회복의 시작이고 믿음의 자녀로서 모든 것에 대해 관대하고 모든 관계에서 온유함을 드러내는 삶의 첫 걸음이 됩니다.

9. 반면에 롯의 선택은 아브람의 것과 달랐습니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간에 하나님의 역사와 은혜를 경험하면서도 그에 대한 해석과 반응은 자기 눈에 보기 좋은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을 친아들처럼 챙겨주는 삼촌에게 우선권을 양보하는 것이 당연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3장 10절에서 롯이 “눈을 들어 요단지역을 바라보니 여호와의 (에덴)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다”고 말합니다. 이어지는 13절은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롯에게는 아직도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이 중요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육체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세상 살림에 대한 자랑”(요한일서 2:16)이라고 말합니다. 롯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그는 소돔 성이 망할 때 아내를 잃고 모든 소유물을 잃습니다. 그리고 두 딸과 함께 수치스런 관계로 모압과 암몬의 조상이 되어 하나님의 백성들을 힘들게 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10. 아들처럼 데리고 다녔던 롯이 아름답고 풍부하게 보이는 요단 지역을 선택해서 떠난 후, 아브람의 마음은 허전하고 쓸쓸했을 것입니다. 그런 아브람에게 하나님은 나타나셔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영원히 주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영원히” 그 땅을 그와 그의 후손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생각하면 이스라엘의 운명은 지금 어려운 형편에 있어도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주로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될 것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11. 우리는 눈에 보이는 현상을 넘어서 영적인 눈으로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아브람이 했던 선택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그 땅을 종횡으로 바라보라고 했습니다. 그가 바라보는 모든 땅을 그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땅을 바라보는 대신에 헤브론의 마므레로 가서 거주하며 여호와를 위한 제단을 쌓았습니다. ‘헤브론’은 교제의 자리란 뜻이고 ‘마므레’는 열렬하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아브람도 고난에 맞닥뜨렸을 때 우리와 동일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놓치고 세상을 바라보며 사람들을 두려워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어떤 분이신지를 애굽에서 경험한 후, 더 이상 눈에 보이는 땅을 바라보며 내려가지 않고, 그 눈을 하나님께 고정하고 하나님과 열렬하게 교제하고 예배 드리는 일에 충실했습니다.

12. 신명기 8:7-10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을 데리고 가시는 땅은 좋은 땅입니다. 골짜기와 산에서 지하수가 흐르고 샘물이 나고 시냇물이 흐르는 땅이며, 밀과 보리가 자라고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가 나는 땅이며, 올리브 기름과 꿀이 생산되는 땅이며, 먹을 것이 모자라지 않고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돌에서는 쇠를 얻고 산에서는 구리를 캐낼 수 있는 땅입니다.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주신 옥토에서, 당신들은 배불리 먹고 주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여호수아 24:13 “너희가 일구지 아니한 땅과 너희가 세우지 아니한 성읍을 내가 너희에게 주어서, 너희가 그 안에서 살고 있다. 너희는 너희가 심지도 아니한 포도밭과 올리브 밭에서 열매를 따먹고 있는 것이다.”
이사야 45:2-3 “내가 너보다 앞서 가서 산들을 평지로 만들고, 놋쇠 성문을 부수며, 쇠빗장을 부러뜨리겠다. 안보이는 곳에 간직된 보화와 감추어 둔 보물을 너에게 주겠다. 그 때에 너는, 내가 주인 줄을 알게 될 것이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에게 땅에 대해 주신 약속의 말씀은 이 외에도 무수히 많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처럼 해석과 선택의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고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게 되는 삶을 선택할 때 아브람처럼 언약 백성들을 위한 믿음의 족장, 믿음의 가장, 믿음의 지도자가 되는 축복이 여러분의 삶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13. 비록 아브람은 인간적으로 연약하여서 고난이 올 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떨어지고 사람을 두려워하고 거짓말을 하면서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지만, 성자 예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스스로 육신을 입고 나와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나와 우리들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피흘려 돌아가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 만에 살아나심으로 그를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매일 매순간 우리의 삶에서 선택하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적 사랑과 섬김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게 되는 축복이 나와 우리 모두와 함께 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0/23/2024

생활선교교회(Coram Deo Church of Virginia) 이경희 목사의 2024년 10월 20일 주일 설교 내용을 요약합니다.

제목: 선택의 기준

성경 본문: 창세기 13장 14-15절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1. 최상의 선택, 후회없는 선택은 우리 모두에게 가장 큰 소망이고 도전입니다. 오늘 주제는 이 선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 창세기 13장의 이야기는 12장에서 아브람이 그의 나이 75세에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서 자신의 고향을 떠나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가나안의 세겜 땅에 들어가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목적지도 모르고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날 때의 아브람의 첫 선택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창세기 12장 1절).

2. 그 땅에는 가나안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곳에 들어간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내가 너의 자손에게 이 땅을 주겠다."(12장 7절)고 말씀하셨고, 그는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그곳에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벧엘의 동쪽 산간지방으로 옮겨 가서 거주할 곳을 만들고 거기에서도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아브람은 그렇게 가는 곳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제단을 쌓는 사람이었습니다.

3. 그런데 복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과 달리, 아브람은 가나안에서 고난을 겪기 시작합니다.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벧엘에 장막을 쳤는데 벧엘과 아이 사이는 그다지 넉넉한 곳이 아닙니다. 척박한 광야 지역인 남쪽의 네겝으로 내려갔습니다. 성경은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지만, 그곳에 먼저 터를 잡고 살고 있던 사람들과 좁은 지역에서 함께 사는 것이 쉽지 않았다고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가나안과 애굽(이집트)의 경계를 이루는 네겝 지역은 본래 비가 거의 오지 않는 광야인데 거기에 기근이 더욱 심해지자, 그는 가나안을 벗어나 더욱 남쪽인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내려갔다는 말이 반복되는 것은 지형적으로 남쪽으로 계속 내려갔다는 표현이지만, 내려갔다는 말이 반복되는 것은 영적으로 어려워지고 있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마치 사무엘상 3장 2절의 “어느 날 밤, 엘리가 잠자리에 누워 있을 때였다. 그는 이미 눈이 어두워져서 잘 볼 수가 없었다.”(새번역 성경)라는 말씀의 의미가 엘리 제사장의 영적인 눈이 어두워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가나안에 들어선 후 그 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들었지만, 원주민들의 텃세로 함께 살기 힘들어지자 하나님의 말씀 없이 네겝으로 내려갔고, 척박한 네겝에 기근이 더욱 심해지자 하나님의 말씀 없이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 대가로 아브람과 사래는 혹독한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4. 영적으로 어려워진 사람의 공통점은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대신에 사람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애굽으로 내려간 아브람은 애굽 사람들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태어나고 자라난 아버지의 집을 떠나 자신도 알지 못하는 곳, 하나님께서 보여 주는 땅으로 향하는 것에도 두려움이 없었던 것에 비교하면 그 차이를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 2절은 말씀의 빛이 없는 상황을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브람은 애굽 사람들을 두려워해 자신의 아내 사래를 “누이”라고 속였고, 애굽 왕 바로는 사래를 자신의 궁으로 불러들였습니다.

5. 바로는 사래를 인하여 아브람에게 수많은 가축과 종들을 하사했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사래를 궁으로 불러들인 일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집안에 무서운 재앙을 받고, 사래를 아브람에게 돌려보냈습니다. 거짓은 사탄의 아비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잘못은 아브람이 거짓말을 하면서 시작되었는데,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약속하신 복의 근원, 큰 민족을 이룰 열국의 아비,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시고 그 이름을 창대하게 하시겠다는 자신의 약속을 기억하시고 장차 약속의 자녀를 낳을 아브람의 아내 사래 또한 초자연적인 역사로 지키시고 보호하신 것입니다.

6. 바로가 당한 “큰 재앙”이 무엇인지는 성경이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바로는 자신이 아브람에게 주었던 모든 재물을 가지고 애굽을 떠나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 아브람과 사래로 하여금 하나님의 보호하시고 지키시는 것을 경험하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람과 사래의 거짓말과 속임수는 그들의 대를 아들 이삭과 손자 야곱에게로 대대로 전해지면서 그로 인해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것을 성경은 여과없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부부가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서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고 믿음의 동역자가 되는 것의 중요함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7. 아브람은 애굽을 떠나 벧엘로 올라갑니다(창 13:1-4). 가나안에 들어와 처음 단을 쌓았던 곳, 하나님과의 첫 사랑과 언약의 기억이 있는 곳으로 올라가 다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신앙을 회복합니다. 명백하게 자신의 잘못임에도 자신과 아내를 안전하게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 아브람은 감사의 제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올라가는 믿음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면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8. 부자가 되어 가나안으로 돌아온 아브람은 새로운 상황에 직면합니다. 아들과 같이 여기고 데리고 다니던 롯과의 갈등 때문입니다. 그들이 가진 더 많은 가축을 키우기에 그들의 앞에 있는 벧엘과 아이 사이의 목초지는 턱없이 좁고, 그들의 목자들은 다투기 시작합니다. 아브람은 자신과 조카들은 물론 주변에 살고 있는 가나안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로서의 자긍심을 지키기 위해 떠남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이 떠남은 더이상 내려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네가 오른쪽을 택하면 나는 왼쪽으로 가고, 네가 위로 가면 나는 아래로 가겠다”고 , 조카 롯에게 선택권을 줍니다.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은혜를 경험한 아브람에게 눈에 보이는 땅은 더 이상 유혹의 대상이 되지 못했습니다.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께서 그와 동행하시고 지키신다는 믿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잃어버린 것에 대한 회복의 시작이고 믿음의 자녀로서 모든 것에 대해 관대하고 모든 관계에서 온유함을 드러내는 삶의 첫 걸음이 됩니다.

9. 반면에 롯의 선택은 아브람의 것과 달랐습니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간에 하나님의 역사와 은혜를 경험하면서도 그에 대한 해석과 반응은 자기 눈에 보기 좋은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을 친아들처럼 챙겨주는 삼촌에게 우선권을 양보하는 것이 당연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3장 10절에서 롯이 “눈을 들어 요단지역을 바라보니 여호와의 (에덴)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다”고 말합니다. 이어지는 13절은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롯에게는 아직도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이 중요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육체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세상 살림에 대한 자랑”(요한일서 2:16)이라고 말합니다. 롯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그는 소돔 성이 망할 때 아내를 잃고 모든 소유물을 잃습니다. 그리고 두 딸과 함께 수치스런 관계로 모압과 암몬의 조상이 되어 하나님의 백성들을 힘들게 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10. 아들처럼 데리고 다녔던 롯이 아름답고 풍부하게 보이는 요단 지역을 선택해서 떠난 후, 아브람의 마음은 허전하고 쓸쓸했을 것입니다. 그런 아브람에게 하나님은 나타나셔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영원히 주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영원히” 그 땅을 그와 그의 후손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생각하면 이스라엘의 운명은 지금 어려운 형편에 있어도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주로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될 것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11. 우리는 눈에 보이는 현상을 넘어서 영적인 눈으로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아브람이 했던 선택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그 땅을 종횡으로 바라보라고 했습니다. 그가 바라보는 모든 땅을 그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땅을 바라보는 대신에 헤브론의 마므레로 가서 거주하며 여호와를 위한 제단을 쌓았습니다. ‘헤브론’은 교제의 자리란 뜻이고 ‘마므레’는 열렬하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아브람도 고난에 맞닥뜨렸을 때 우리와 동일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놓치고 세상을 바라보며 사람들을 두려워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어떤 분이신지를 애굽에서 경험한 후, 더 이상 눈에 보이는 땅을 바라보며 내려가지 않고, 그 눈을 하나님께 고정하고 하나님과 열렬하게 교제하고 예배 드리는 일에 충실했습니다.

12. 신명기 8:7-10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을 데리고 가시는 땅은 좋은 땅입니다. 골짜기와 산에서 지하수가 흐르고 샘물이 나고 시냇물이 흐르는 땅이며, 밀과 보리가 자라고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가 나는 땅이며, 올리브 기름과 꿀이 생산되는 땅이며, 먹을 것이 모자라지 않고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돌에서는 쇠를 얻고 산에서는 구리를 캐낼 수 있는 땅입니다.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주신 옥토에서, 당신들은 배불리 먹고 주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여호수아 24:13 “너희가 일구지 아니한 땅과 너희가 세우지 아니한 성읍을 내가 너희에게 주어서, 너희가 그 안에서 살고 있다. 너희는 너희가 심지도 아니한 포도밭과 올리브 밭에서 열매를 따먹고 있는 것이다.”
이사야 45:2-3 “내가 너보다 앞서 가서 산들을 평지로 만들고, 놋쇠 성문을 부수며, 쇠빗장을 부러뜨리겠다. 안보이는 곳에 간직된 보화와 감추어 둔 보물을 너에게 주겠다. 그 때에 너는, 내가 주인 줄을 알게 될 것이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에게 땅에 대해 주신 약속의 말씀은 이 외에도 무수히 많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처럼 해석과 선택의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고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게 되는 삶을 선택할 때 아브람처럼 언약 백성들을 위한 믿음의 족장, 믿음의 가장, 믿음의 지도자가 되는 축복이 여러분의 삶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13. 비록 아브람은 인간적으로 연약하여서 고난이 올 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떨어지고 사람을 두려워하고 거짓말을 하면서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지만, 성자 예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스스로 육신을 입고 나와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나와 우리들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피흘려 돌아가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 만에 살아나심으로 그를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매일 매순간 우리의 삶에서 선택하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적 사랑과 섬김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게 되는 축복이 나와 우리 모두와 함께 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순절을 지나면서뜬금없이 "모세야" 부르시는 음성을 들었습니다가정사역을 함께 섬기시는 형제자매님들이 기도 가운데 지어주었는데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던 모세를 응원하는 마음과 서운함으로 기꺼이 받아들이지 못했던 이름입니...
04/01/2024

사순절을 지나면서
뜬금없이 "모세야" 부르시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가정사역을 함께 섬기시는 형제자매님들이 기도 가운데 지어주었는데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던 모세를 응원하는 마음과 서운함으로
기꺼이 받아들이지 못했던 이름입니다

그 음성을 들으면서
나를 부르시는 분의 마음을 묵상하​며
존 맥아더 목사님의 책 한 권을 붙들고 씨름을 했습니다

순종적인 자녀를 두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못할 수 있기에
목회의 길을 가서는 안된다는 단호한 말씀이었습니다

가정은 다음 세대를 위한 사람을 만들어내는 공장이라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공장에서 생산하는 제품들의 순도는 어느 정도여야 하는가

지금은 정제 기술이 발달해
쌀에 돌멩이가 거의 없지만
제가 어렸을 때에는
벼를 추수해 건조시키는 수작업 과정에서
잔 돌이 들어가는 것을 피할 수 없었고
쌀을 씻으면서 돌을 가려내지만
미처 발견하지 못한 돌은
결국 밥을 씹을 때 발견되기도 하고
최악의 경우는 그대로 삼켜지는 것이었습니다

'쌀밥'과 '돌밥'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제조 공장에서 제품을 생산할 때
순도 1%를 끌어 올릴 때 들어가는 비용은
거의 두 배가 된다고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한계로는 100% 순도의 완제품을 만들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도 합니다

가정이라는 공장에서 만드는 다음 세대
자녀들의 순도가 어느 정도 되어
교회로
공동체로
보내야 할까요

나는 어느 정도의 순도에서
교회로
공동체로 보내졌었을까요

아내가 먼저 목회자의 길을 시작했습니다
나는 과연 목회자로 아내와 손을 잡고 갈 수 있는 준비가 되었는지 자문합니다

IRS로부터 개척교회의 세금 면제 기관 허가에 대한 마지막 질문을 받고 답변을 준비중입니다
사회와 국가에서 요구하는 것은 법이 정하는 형식이지만
하나님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를 먼저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독생자를 십자가에 피흘려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던 하나님

나의 가는 길은 너희를 위한 길이지만
그 길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길이라는 예수님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자문합니다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켜 세우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과 뜻을
얼마나 깨닫고 있는지 자문합니다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위해
세상의 철학과 과학의 발전을 이끌었던 계몽주의와
진화론과 심리학에 기반을 둔 자유주의 교육의 영향력 아래 자란
나와 내 자녀들의 순도는 어느 정도일까 자문합니다

하나님을 떠났던 죄인이
60 넘어 겨우 깨닫기 시작한 삶의 방향을
자녀들은 얼마나 이해하고 따라올 수 있을까
자문합니다

그래서 더욱 기도합니다
그래서 더욱 주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십자가에 피흘려 죽은 예수를 다시 살리시고
나를 구원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에 기대어
하나님의 생명력이
나를 통해
내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공동체에 정결하게 흘러가
우리 모두 함께 변화되기를 구합니다

다시 사신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죽음에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를 바라봅니다
성령님의 능력으로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
공동체를 섬길 수 있는 은혜 주시기를 구합니다

03/09/2024

"당신의 일에 전념하라.
당신의 목표를 별처럼 변함없게 하라.
공격을 받을 수도 있고 부당한 취급을 받을 수도 있다.
모욕을 당할 수 있고 비방을 받을 수도 있다.
상처를 입을 수 있고 거절을 당할 수도 있다.
오해를 받고 불순한 동기를 가진 사람으로 취급받을 수도 있다.
적에 의해 학대를 받을 수 있고 친구들에게 버림받을 수도 있다.
비난을 당할 수 있고 사람들에게 거절당할 수 있다.

하지만 마침내
"당신께서 제게 하라고 주신 일을 마쳤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당신의 삶의 위대한 목적과 당신 존재의 목적을 지속적인 결심과 흔들리지 않는 열심을 갖고 추구하라."

미국 서부에서 성경적 상담을 자신이 섬기는 교회의 기본 사역으로 정착시키신 존 맥아더 목사님이 이 시대의 목회자들에게 당부하는 말씀을 나눕니다.

디모데 목회훈련원(원장 이용걸 목사)의 '버지니아 목회자 세미나'가 2024년 3월 4-5일(월-화) 이틀간 센터빌 소재 코이노스 영생장로교회(담임 오건 목사)에서 은혜 가운데 열렸습니다. 이 세미나에는 1백 여명의...
03/06/2024

디모데 목회훈련원(원장 이용걸 목사)의 '버지니아 목회자 세미나'가 2024년 3월 4-5일(월-화) 이틀간 센터빌 소재 코이노스 영생장로교회(담임 오건 목사)에서 은혜 가운데 열렸습니다. 이 세미나에는 1백 여명의 목회자들이 참가했고, 생활선교교회에서는 이경희 목사님과 이승수 전도사님 두 분이 참가했습니다.
이용걸 목사님은 , , , 등의 주제를 자신의 목회에 바탕으로 진솔하고도 심도있게 전달, 감동적인 목회의 본보기를 제시했습니다. 이목사님은 목회의 기본을 성경적인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인가 묻고 연구하고 기도하며 섬기는 것이었다면서, 목회자들이 먼저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하며, 교회는 전도와 선교에 온 교인이 참여하는 정기적인 행사이자 축제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세미나에는 디모데목회훈련원 스태프로 동행한 우장환 장로님의 , 김요셉 장로님의 , 김경원 장로님의 , 박안수 장로님의 강의가 함께 진행되었는데, 필라 영생장로교회의 성장 비결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코이노스 영생장로교회 섬김팀과 교역자들의 정성을 다한 풍성한 섬김, 워싱톤한인교회협의회와 워싱톤한인목회자협회의 후원에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02/20/2024

생활선교교회(Coram Deo Church of Virginia, 담임 이경희 목사)의 2024년 2월 18일 주일 예배 설교 내용을 요약합니다.
제목은 , 성경 본문은 마가복음 14:36 입니다.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1.
사순절이 2월 14일 시작되었습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 예수님의 마음을 더 잘 알아가고 그분에 대한 사랑이 더 깊어지기를 원합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대제사장들과 그들의 무리들에게 잡히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리셨던 기도에 대해서 알아보고 이것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2.
겟세마네 동산은 예루살렘의 동쪽 기드론 계곡 건너 감람산의 서쪽 기슭에 있습니다. 겟세마네란 이름은 기름을 짜는 틀을 의미합니다. 감람산에는 감람나무가 많이 있어서 감람유를 짜는 틀이 그곳에 많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늘 습관적으로 기도하러 감람산에 가셨습니다(눅 2:39). 예수님의 기도가 감람유를 짜듯 진액을 다 쥐어짜내는 기도였다는 뜻입니다.

3.
마가복음 14:32에서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기도하라고 부탁하는 대신에 앉아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중보기도를 부탁하지 못할 정도로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이었임을 알 수 있습니다. 33-34절에서는 그의 제자들 가운데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따로 데리고 가셔서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라고 하십니다. 깨어 있으라는 말의 의미는 단순히 잠을 자지 말라는 것을 넘어서 경계하고 조심하고 주의깊게 관찰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영적으로 깨어 있으라’ 라고 하면 기도하며 늘 말씀을 가까이 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라는 뜻으로 풀이하면 무난합니다.

4.
34절의 “내 마음”은 ‘영’(spirit)입니다. 예수님의 영이 심히 놀라고 슬퍼하여 거의 죽을 지경이라는 뜻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을 아시는 예수님이 이렇게 죽을만큼 고민하며 슬퍼하고 계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믿음이 좋은 그리스도인들은 핍박으로 죽을 때에도 환하게 웃으며 죽음을 맞이한다는 얘기를 우리는 종종 듣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평안히 자는 얼굴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자원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죽음을 두려워 하신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5.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이 죽을만큼 고민하며 슬퍼하신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와 영원한 이별을 두려워 하셨기 때문입니다. 온 인류의 죄를 한 몸에 다 짊어지고 지옥에 간다는 뜻은 하나님 아버지와 영원히 이별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두렵고 힘든 일이었을 것입니다.

6.
모세가 출애굽기 32:32절에서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라고 중보기도를 드립니다. 주께서 기록하신 책이란 생명책을 말합니다. 생명책이란 보좌에 있는 책으로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그 책에 기록된 대로 심판의 기준이 되는 책이며, 그 책에 기록된 자들만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는 책입니다(계 20:12, 21:27). 그러한 생명책에서 자신의 이름을 지워달라고 간구하는 모세의 뜻은 자신이 지옥에 갈테니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해 달라고 지금 하나님과 밀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보기도하는 자들의 영혼을 사랑하는 태도입니다. 피조물이 자기 민족을 위해 중보기도하는 마음이 이 정도인데 하물며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위해 중보하시는 마음은 어떠하셨을지요.

7.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 기도를 드릴 때 예수님은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눅22:44) 기도하셨습니다. 이 표현은 의사였던 누가의 기록에만 있는데 이를 의학적 용어로는 혈한증(Hematohidrosis)이라고 합니다. 이 현상은 땀샘 주위에 그물과 같은 많은 혈관들이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수축된 상태로 있다가 이 스트레스가 풀릴 때 급격히 팽창하게 되는데 이때 피가 땀샘으로 들어가게 되어 피부 표면으로 땀과 함께 핏방울이 맺히게 되는 현상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땀이 핏방울 같이 되었다는 것은 죽을 각오로 기도를 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 기도를 통해 십자가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기도해야 할 이유입니다.

8.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드린 기도는 또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기도(35-36절 )였습니다. 자신의 뜻은 아버지와 헤어지는 것이 너무 힘들어 이 때가 그냥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를 통해 결국 자신의 뜻을 접고 아버지의 뜻이 이뤄지길 구했습니다. 누구나 힘들고 어려운 일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자신의 인간적인 힘으로는 이것을 극복하지 못합니다. 오직 기도를 통해 주님 앞에 나올 때 이 문제가 자신의 생각이 아닌 주인이신 주님의 뜻이라는 생각을 할 때 나를 포기하고 주님 뜻대로 하시도록 나를 내어 드릴 수 있습니다. 그 때 천사가 돕습니다(눅22:43).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께 순종한다고 말하고, 성경은 순종함으로 완전에 이른다고 합니다(창17:1). 완전하다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완벽하게 해내는 것이 아니라 내 뜻을 접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하나님은 그것을 보시고 완전하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저 또한 불과 며칠 전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이 순종에 대한 요구를 받았습니다.

9.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드렸던 기도는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서 기도하는 기도였습니다(37-38). 열두 제자들에게는 따로 남아 있으라고 하셨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명에게는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셋이 다같이 잤는데 예수님은 왜 유독 베드로만을 불러 직접 말씀하시는 것은, 베드로가 시험을 이기지 못하고 그 날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할 것을 미리 아시고 그에게 경고해 주신 것입니다(막 14:30). 인간의 의지는 갈대와 같이 여려서 인간의 의지로는 이겨낼 수 있는 일에 한계가 있습니다. 오직 기도로 힘과 용기를 갖고 두려움에 맞설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10.
마가복음 4:72절은 닭이 곧 두번째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울었다고 표현합니다. 누가복음 22:61은 베드로가 그냥 우는 것이 아니라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했다고 표현합니다. 헬라어 원어 표현으로는 온 몸을 땅바닥에 구르며 쥐어짜듯 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의지와 장담은 믿을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회개를 통해서만 다시 주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회개를 통해 다시 주님 앞에 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 후 베드로를 만나 마음의 무거운 짐을 내려주시고 치료하신 후 양떼를 맡겨 주셨습니다. 완전한 회복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만난 자들의 삶이 가룟 유다와 비교가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는 베드로는 언제나 닭이 울면 무릎을 꿇고 회개했다는 말이 전설로 내려온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기억나고 회개의 기도를 드릴 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경험하신다면 감사한 일입니다.

11.
나의 기도는 무엇을 구하고 있는지,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를 통해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 보길 원합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두려워 하고 있습니까? 내가 드리는 기도는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고 있습니까?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 늘 말씀을 붙들고 기도에 힘쓰고 있습니까?

02/19/2024

생활선교교회(Coram Deo Church of Virginia, 이경희 목사)의 2024년 2월 11일 주일예배 설교 내용을 요약합니다.
제목은 , 성경 본문은 마가복음 14:3 입니다.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1.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말하는 사람의 의도와 뜻과 파악하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자신들이 듣기 원하는 말만을 듣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동안 예수님에게 가장 아름답고 순전한 감동을 주었던 한 여인과 다른 한 편에 기록되어 있는 가룟 유다 이야기를 통해 이 말의 뜻을 온전히 이해함으로써 주님과 더욱 친밀한 관계로 나아가기를 소망합니다.

2.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사건은 4복음서에 다 나와있는데, 마태, 마가, 요한복음에 나오는 사건은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동일한 하나의 사건이고, 누가복음 7장의 사건은 가버나움에 있는 한 바리새인의 집에서 그 동네의 죄인인 한 여인이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고 입을 맞추고 향유를 바른 사건입니다. 지리적으로도 베다니는 예루살렘 동남쪽,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수 북쪽에 위치해 완전히 다릅니다.

3.
이제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사건에 대해 예수님은 “온 세상 어디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사람들이 이 여자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막 14:9)라고 말씀합니다. 왜 예수님은 이 사건을 이렇게 중요하게 말씀하셨을까요?

4.
마르다는 예수님과 일행을 접대하는 일로 부엌에서 분주합니다. 그 바쁜 시간에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곁에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길을 선택했습니다(눅 10:39). 또 오빠 나사로가 죽은 후 예수님이 동네 어귀에 오셨을 때도 달려 나가서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서 예수님과 이야기 했습니다(눅11:32). 마리아는 항상 예수님과 가까이 있었고 그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5.
나드 향나무는 시리아나 히말라야 산맥, 인도 등지에서 자라는 값진 향으로 신분이 높은 왕이나 부자들이 화장품이나 의약품 결혼식 장례식에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반인들은 여유가 생길 때 한두 방울 씩 사서 옥합에 담아 모았다고 합니다. 마리아가 살던 베다니는 성 밖의 빈민가 중 하나였습니다. 그곳에 살던 마리아는 어렵게 모은 나드 한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5절을 보면, 그 당시 나드 향 옥합 한 병의 가격이 삼백 데나리온입니다. 마태복음 20장 포도원 품꾼 비유를 통해 우리는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 한 사람의 하루 품삯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리아는 가난한 동네에 살면서 어렵게 모은 자신의 일 년치 임금에 상당한 옥합 한 병을 아무런 조건없이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것입니다. 그것은 생명의 말씀을 들려주는 예수님께 대한 감사와 은혜와 존경의 마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6.
요한복음 12:3은 같은 사건을 설명하면서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부었다고 기록합니다. 마리아는 머리에 부었고 그리고 발에도 부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맨발에 샌달만 신었기에 발이 더러웠고, 손님의 발을 씻기는 것은 종들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여자가 자신의 머리털로 손님의 발을 씻는 것은 종으로서도 하기 어려운 수치스러운 일이었음에도 마리아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말씀을 먹여주시는 분에 대한 겸손함의 표현이었고, 오빠인 나사로를 살려 주신 것에 대한 무한한 감사의 표현으로 자신의 몸을 드린 것이었다고 밖에 해석할 수 밖에 없습니다.

7.
마리아는 늘 예수님의 발치에서 주님의 말씀을 청종했기에 앞으로 있게 될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값비싼 나드 향 한 병을 모두 예수님의 몸에 부어드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자신을 위한 장례를 준비하는 것이었다고 받아들였습니다.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8-9절).

8.
마리아는 이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것을 가장 좋아하는 여인이었고, 겸손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리는 사람이었고, 예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고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이처럼 대단한 칭찬을 받은 자는 성경을 통틀어 마리아 뿐입니다. 부활의 기적의 주인공이 된 나사로와 예수님의 극진한 칭찬을 들은 마리아, 그리고 예수님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음식을 준비한 마르다, 이 세 가족은 참으로 특별히 예수님의 사랑을 듬뿍 받았습니다.

9.
이제 가룟 유다에 대해 알아봅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가룟이라는 이름은 남부 유대의 한 동네 이름이기도 하고 ‘암살자, 가짜, 위선자, 거짓말쟁이, 단검’ 등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가룟 유다는 유다라는 이름을 가진 다른 사람과 구별하기 위해 출신지를 밝히면서 그가 가짜 사도이고 위선자임을 은연 중에 드러낸 것으로 보입니다. 재정과 세법에 뛰어난 세리 마태가 있었음에도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따르는 사도들의 모임의 회계를 맡았다는 것은 가룟 유다가 셈에 그만큼 뛰어났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10.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에게 예수님을 팔아 넘긴 이유를 성경은 명확히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재리에 밝은 만큼 세상 유혹에도 강했으리라 짐작해 봅니다. 말씀으로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바다 위를 걸으시고 풍랑을 잠잠케 하시며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예수님의 능력과 말씀의 권위를 곁에서 지켜보면서, 로마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구해 주는 이스라엘의 왕을 따른다는 정치적 야심도 있었을 것입니다.

11.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께서 갑자기 청천벽력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이틀 후 유월절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팔리시고 십자가에서 죽을 것이라는 것입니다(마 26:2). 가룟 유다는 이 말씀을 듣고 좌절했고 자기의 꿈과 계획이 다 무너지면서 돈을 받고 스승이신 예수님을 대제사장에게 고발했으나 절망감 속에 자살을 하게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12.
요한복음 12:6은 가룟 유다를 물질숭배와 황금만능주의에 빠져 돈궤를 맡아 훔쳐간 도둑이라고 말합니다. 은 삼십 냥에 예수님을 판 가롯유다를 통해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요한복음 저자는 13장 2절에서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다고 말합니다. 21절에서는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배반할 것이다,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가룟 유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인간적 욕망과 자기 생각으로 가득차 미혹되어 있는 가룟 유다에게는 더 이상 예수님의 말씀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13.
예수님으로부터 동일한 말씀을 같이 들었는데, 베다니의 마리아는 자신이 가장 아끼는 것을 드림으로 예수님을 기쁘게 해 드린 반면에, 가룟 유다는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에도 반응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팝니다.

14.
하나님을 떠나 굳어진 마음이 되면 우리도 언제든지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죄는 누구나 지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회개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베드로처럼 눈물로 회개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총을 경험하며 기쁨으로 주 안에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인이라 해도 사탄은 언제든지 우리를 공격할 수 있고 우리 안에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베다니의 마리아와 같이 늘 말씀을 사모하고 예수님과 친밀해야 사탄이 틈을 타지 못합니다. 우리에게는 가룟 유다처럼 굳어진 마음은 없는가 돌아보십시다.

02/06/2024

생활선교교회(Coram Deo Church of Virginia, 이경희 목사)의 2024년 2월 4일 주일 예배 설교를 요약합니다.
성경 본문은 마가복음 11:14, 제목은 입니다. 본문의 배경은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듣더라”

1.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무화과 나무의 저주사건은 이해하기 쉽지 않은 비유 중 하나입니다. 아직 열매 맺을 때가 아닌데 열매를 찾으시고, 시장하신 예수님이 열매없는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것을 궁금해 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이야기에 이어 성전 정화 사건이 나오고, 다시 무화과 나무의 저주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분노가 느껴지는 무화과 나무 저주 사건과 성전 정화 사건은 무슨 연관성이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이 두 가지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고 싶어하는 말씀은 무엇일까요?

2.
마태복음 21장에는 본문과 동일한 성전 정화 사건이 먼저 나오고 바로 뒤에 무화과 나무가 예수님의 저주를 받고 바로 말라버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인 마가복음은 무화과 나무 저주 사건이 먼저 나오고 성전 정화 사건 후 하루의 시차를 두고 무화과 나무가 마른 순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같은 사건을 기록했지만 그 내용이 다른 것은 서로의 관점이 한 사람은 사건 자체만을 중시한 것이고, 또 한 사람은 그 사건을 시작부터 끝까지 구체적으로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전 정화 사건이나 무화과 나무 저주 사건은 분명 어떤 연관이 있어 보입니다. 오늘 설교는 그 차이와 연관성을 살펴보면서, 이 두 사건을 통해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것을 찾아가려는 것입니다.

4.
과일 나무의 의무는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무화과는 겉으로 꽃이 보이지 않아서 무화과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열매 껍질이 꽃받침이고 열매 속의 먹는 부분이 꽃이라고 합니다. 이런 무화과 나무는 한국에서는 날씨가 따뜻한 지역에서 가을에 한 번 열매를 먹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는 일 년에 두세 번 열매를 맺습니다. 첫 무화과는 3월에 잎사귀가 나고 4월에 잎이 무성해져서 5월에 열매가 열리고 6월에 수확합니다.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 수확은 9월과 12월 경입니다.

5.
오늘 본문의 계절적 배경은 부활절을 한 주 앞둔 종려 주일입니다. 그렇다면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무화과는 잎사귀가 나서 잎만 무성한 상황이고 열매는 아직 열릴 때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에서 나고 자란 예수님이 그것을 모를리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이유를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종려 주일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다음 날 베다니를 떠나갈 때에 시장하셨고, 멀리서 잎이 무성한 무화과 나무를 보시고 혹시 그 나무에 열매가 있을까 하여 가까이 가서 보셨는데, 아직 무화과가 맺힐 철이 아니어서 잎사귀 밖에 없었다고 설명합니다.

6.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누가복음 13:6-9의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 나무 비유를 보면, 포도밭에 무화과 나무를 심었는데 3년동안 열매가 없다는 보고를 들은 주인이 그 무화과 나무를 찍어버리라 합니다. 그러자 포도원지기가 올해 다시 거름을 주고 다음 해에도 열매가 열리지 않으면 찍어 버리자고 요청합니다.

7.
이사야 5:7 은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라고 선포합니다. 성경에서는 포도나무나 무화과나무 밭을 이스라엘 나라로 표현하고, 그 나무들의 열매는 유대인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바라시는 것은 정의인데,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유대인들이 입술로는 율법을 잘 외우지만 정의로운 삶은 보여주지 않는 것을 꾸짖고 있는 것입니다.

8.
누가복음 13장의 열매맺지 못하는 무화과 나무 비유와 이사야서 5장의 여호와의 포도원 내용을 종합하면, 개인적으로 율법은 잘 지키지만 공동체를 위한 정의라는 열매가 없는 자들은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마가복음 11장의 무화과 나무 저주 사건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유대인들에게 시청각 교육 교재로 보여준 경고라고 볼 수 있습니다.

9.
성전 정화 사건도 유대인들의 현재의 신앙과 믿음의 상태를 잘 설명해 주고 있는 예화입니다. 성전에서 돈 바꾸는 자들과 비둘기 파는 자들을 둘러 엎었습니다. 멀리에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제사를 드리기 위해 오는 자들이 제물로 사용될 양이나 소를 끌고 오면서 제물이 상하게 되거나 오가는 시간이 더 소요되게 하기 보다는 성전에서 그것을 구입하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이기에 성전에서 제물로 사용될 가축을 매매하는 행위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제사장들이 이런 상행위를 통해 폭리를 취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환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 시대 화폐단위는 데나리온인데, 성전세를 내려면 데나리온을 성전에서 사용하는 세겔로 바꿔야 합니다. 그런데 이 환전을 하면서 폭리를 취했습니다. 이것을 아신 예수님이 화를 내시며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어야 할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꾸짖으신 것입니다. 당시 성전을 관리하던 대제사장은 안나스입니다. 가장 거룩해야 할 제사장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이용해 장사를 하고 있었고, 장사를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닌 장사를 하는 제사장을 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의 현주소는 열매 맺지 못한 나무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성전 정화 사건도 유대인들이 위선과 아집을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는 교훈을 보여주기 위한 시청각 교육인 셈입니다.

10.
예수님께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다음 날 그 앞을 지나던 베드로가 그 무화과 나무가 뿌리째 말라 버린 것을 보고 전날 일이 생각나서 예수님께 그 무화과 나무가 말라 버렸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전혀 엉뚱하게 “하나님을 믿으라. 누구든지 이 산더러 번쩍 들려서 바다에 빠져라 하고 말하고 마음에 의심하지 않고 말한 대로 될 것을 믿으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산’은 장애물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유대인 속담에 ‘이 산더러 저 바다에 빠져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을 의미하고, ‘산을 옮기는 자’란 아주 힘든 일을 해결한 랍비를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방해가 되는 큰 장애물이나 어떤 어려움도 기도와 믿음의 능력으로 다 해결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함의는 말씀을 믿는 능력이 제자들에게 없기 때문에 무화과나무가 말씀 한 마디로 말라버리는 사건을 경험하지 못하고 산이 들려 바다에 던져지는 것도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포함한 유대인들이 입술로만 하나님을 믿을 뿐 실제로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11.
기도한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을 구할 때 다 받는다는 것입니다.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한 것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당시 성전에서 행해진 일이 바로 정욕으로 구한 예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뜻과 전혀 관계없는 일을 하다가 결국 선민임에도 불구하고 주후 70년에 로마 군대에 의해 완전히 멸망해 버렸습니다. 유대인들이 그토록 우상시 했던 성전, 성전안에 있으면 절대로 안전하다는 사상을 뒤업고 완전히 짓밟혀지고 예루살렘은 멸망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의 사상이 잘못되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성전 정화 사건을 일으키셨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12.
야고보서 5:15 은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믿음이 없어서 치료가 안되고 죄사함을 받았는데도 믿지 못하고 불안에 떨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러분 스스로를 위한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까? 내가 나의 주인이라면 나의 일이 우선이 되고 내가 책임져야 할 일이기에 불안해서 내 기도가 우선이 됩니다.

13.
내 가족, 내 직장, 내 교회를 위한 기도도 물론 필요합니다. 나의 필요가 채워져야 심적 안정이 되어 중보기도도 할 수 있고 하나님 나라에 눈을 돌릴 여지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라면 종으로써 주인의 뜻을 따라 살아가기 때문에 이런 기도는 우리에게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주님이 진짜 내 삶의 주인이라면 나에게 일어나는 일은 주인되신 주님이 허락하신 일이고 어떻게 일이 진행되든지 그건 주인의 뜻대로 결론지어질 것이니까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아직도 근심과 걱정가운데 있다면 주인이 주님으로 바뀌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4.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믿음의 기도는 다 응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도는 할 필요가 있나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은 우리의 기도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 8:3-4의 금향로가 바로 우리의 기도이고 이 기도가 하나님께 올라가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요한계시록 6:11 말씀처럼 순교자의 숫자가 차기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을 책임지십니다. 그것이 공의의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15.
용서는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해집니다. 예수님은 저주 받은 무화과 나무의 비유에 대한 마지막 설명으로 기도할 때에 어떤 사람과 서로 등진 일이 있으면 용서해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실 것이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용서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감히 누구를 용서할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내 힘으로는 누구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용서하지 못한 마음이 있을 때 기도가 막히고 하나님과의 영적 교감이 잘 풀리지 않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은 교만에서 옵니다. 내가 나의 주인이라는 특별한 존재의식을 갖고 있기에 누군가로부터 무시당했다고 생각되면 분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스로가 주인이 되어 사는 인간의 본성이고 죄성입니다. 그렇기에 스스로의 힘으로는 용서가 안됩니다.
내가 내 의지로 용서했다고 해서 나를 아프게 한 그 사건 자체가 내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약화되어 가는 것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 깊이 가라앉은 그 기억은 언젠라도 비슷한 상황이 발생하면 불 같이 다시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나의 주인되신 주님께 내가 당한 억울함을 맡기고 나를 아프게 한 사람에게 믿음으로 용서를 선포하면 그 다음은 하나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그 일을 행하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처럼 용서 자체도 하나님의 은혜 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의 주인되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라면 나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하실 것을 믿고 행할 때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믿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16.
나는 지금 어떤 열매를 맺어 가고 있습니까? 전혀 의심없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고 있습니까? 용서하며 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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