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CF Guadalajara - 과달라하라교회

WCF Guadalajara - 과달라하라교회 이 페이지는 WCF Guadalajara 의 페이지입니다. WCF Guadalajara는 멕시코 과달라하? 이 페이지는 WCF Guadalajara 의 페이지입니다
WCF Guadalajara는 멕시코 과달라하라에 세워진 대한예수교장로회 대신측 소속의 건전한 정통보수 교단 교회입니다.

WCF Guadalajara는 목장교회입니다. WCF Guadalajara는 선교지향적 교회입니다. WCF Guadalajara는 가족교회입니다. WCF Guadalajara는 한 영혼에 관심을 가진 교회입니다. WCF Guadalajara는 끝까지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는 교회입니다.

29/03/2024

#새벽묵상 (20240329-금) 마 27:51-53 생명의 길을 보여 주신 예수님!

어제 말씀을 통해 목요일 예수님께서 가장 많은 활동을 하신 날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기로 작정한 산헤드린 공회는 이 불법적인 이루기 위해 거짓 증거와 거짓 증인을 찾습니다. 그 어느 곳보다 바르고 선한 결정을 하고 집행해야 할 산헤드린 공회가 가장 악한 일을 결정하고 가장 불법적인 일을 하는 공동체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누리던 기득권을 누리고, 그것을 보호하기 위한 욕심으로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 금요일-마지막 순종의 길을 가시는 예수님
오늘은 금요일입니다. 영어로는 ‘Good friday’라고 하고 에스파뇰로는 ‘Viernes Santo’라고 합니다. 사실 금요일 오늘은 하늘도 빛을 잃고 어둠이 내린 것처럼 슬픈 날입니다. 그런데 서양에서는 오늘을 ‘Good Friday’라고 합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예수님의 입장에서 설명한 날입니다. 비록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지만 마침내 하나님의 완전하신 사랑의 뜻을 이루시고, 믿는 모든 자를 구원하시는 십자가를 완성하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목요일 불법을 결정하고 거짓 증거와 거짓 증인을 찾았던 산헤드린 공회의 고발로 예수님이 잡히시고, 심문을 받고, 빌라도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마침내 십자가에 달리시고 무덤에 들어가신 날입니다.

■ 죽으심으로 승리하신 예수님
마 27:51-53절에 “(51) 이에 ①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②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52) ③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53)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불법을 결정하고 거짓 증거와 거짓 증인을 동원한 산헤드린 공회의 계략은 성공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예수님을 법정을 끌고 다니며 조롱하고 때리고 결국 빌라도 총독의 법정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소리치며, 예수님은 마침내 금요일 아침 9시에(유대시간 제3시) 십자가에 달리시고, 오후 3시에(유대시간 제9시) 마지막 말씀을 하시고 죽으시게 됩니다.

■ 마지막 시간에 일어난 일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오후 3시 경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마태는 이 시기에 일어난 일을 3가지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된 것, 두 번째는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진 것, 세 번째는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이 일이 있기 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마 27:45절에 “제육시(오후 12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오후 3시)까지 계속되더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기적적인 일들이 시간을 두고 오랜 기간 동안 띄엄 띄엄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루 동안에 3-4시간 사이에 모두 일어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기록이 짜깁기 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더욱 증명하는 것입니다.

■ 1. 성소의 휘장이 찢어져 둘로 나뉨
첫 번째 사건은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소의 휘장은 무엇입니까?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성소를 아무나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대속죄일에 대제사장만 유일하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 일어난 일이 바로 이 성소의 휘장이 찢어져 완전히 둘로 나뉘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하나님 앞에 나가는데 시간과 장소와 자격의 제약이 완전하게 무너진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 앞에 나가는데,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언제든지 누구나 나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이루고자 하신 일이었습니다. 사 1:18절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초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만나기 원하십니다. 우리의 상황이나 형편에 따라 초대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가 있어도 초대하시고 그것을 깨끗하게 씻으시며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의 피로 우리를 씻으셨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여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은 우리의 힘이나 공로가 아니라 바로 예수님의 은혜로만 온전히 나가는 것입니다.

■ 2. 큰 지진이 일어남
두 번째 사건은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누가봐도 지진이 일어난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2000년대 초 스티븐 오스틴(Steven A. Austin) 박사는 사해 퇴적층을 통해 기록된 지진의 흔적을 찾아 연구했습니다. 사해는 생물이 살 수 없기에 바닥에 쌓인 퇴적층은 해가 지나면서 고스란히 퇴적물이 누적되어 보존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사해 퇴적층에 기록된 신약 시대까지의 성경의 기록을 찾아 연관지어 발표를 했습니다.

① 창조주간의 셋째 날(창 1:9-10)
② 노아의 홍수(창 7:11)
③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창 19:24-28)
④ 시내산의 모세(출 19:18)
⑤ 광야에서 고라의 반역(민 16:1-40)
⑥ 여리고의 멸망(수 6장)
⑦ 기브아 근처의 블레셋 진영(삼상 14:15)
⑧ 시내산의 엘리야(왕상 19:11)
⑨ B.C 750년의 아모스 지진(규모 8.2, 암 1:1, 2:13, 3:14-15, 5:18-20,)
⑩ B.C 31년의 쿰란 지진(요세푸스의 기록)
⑪ A.D 33년 4월 3일,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규모 5.5, 마 27:51)
⑫ A.D 33년 4월 5일,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부활(마 28:2)
⑬ A.D 33년, 예루살렘의 기도모임(행 4:31)
⑭ 빌립보의 감옥, 바울과 실라(행 16:26)
(출처 : https://creation.kr/BiblenHistory/?idx=2645222&bmode=view)

그렇기 때문에 이 또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땅이 움직여 증거를 보여주시고, 많은 사람들이 놀라운 일을 실제로 목격한 것입니다.

■ 3. 죽은 자들의 부활
이어 세 번째 사건은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라고 기록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갑자기 무덤문이 열리며 자던 성도들이 부활했고, 이들은 53절에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시간순으로 따지자면 ① 예수님이 죽으신 순간 ② 지진으로 인해 ③ 무덤문이 열리고 ④ 그 안에 죽었던 성도들이 부활했고, ⑤ 이들이 예수님의 부활 때까지 기다렸다가 ⑥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예루살렘에 들어가 ⑦ 많은 사람에게 보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해는 잘못된 것이고, 부활의 사건을 이미 경험한 마태가 성도들의 부활의 사건을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연관하여 바로 기록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부활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아침에 일어났던 동 시간대의 사건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마태의 시간 편집 의도가 있었지만 성도들의 부활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임이 증명된 셈입니다. 무덤에서 일어난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들어가 많은 사람 앞에 보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의 부활 또한 예수님의 부활과 같이 부인할 수 없는 우리의 이성이나 상식 또는 의학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진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도 사실이고, 성서의 휘장이 둘로 나뉘어진 것도, 지진으로 온 성이 소란해진 것도, 죽은 자들이 부활한 것도 모두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의 부활이 예수님의 부활과 다른 점이라면 성도들의 부활은 성경에 기록된 다른 성도들의 부활과 같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부활의 기록(그래서 이 기록을 소생기록으로 말하는 이들도 있음)은 약 8가지입니다.

①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림(왕상17:17-24),
②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림(왕하4:32-39),
③ 죽은 엘리사의 뼈에 닿아 살아난 시체(왕하13:21),
④ 예수님이 죽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림(막8:35-43, 눅8:41-56),
⑤ 예수님이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림(눅7:11-17),
⑥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림(요11:17-44),
⑦ 베드로가 다비다를 살림(행9:36-43),
⑧ 바울이 유두고를 살림(행20:7-12) 등.

그러나 우리는 성도의 부활을 통해 앞으로 우리가 누리게 될 부활의 영광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출처 : https://mgblsori.tistory.com/4)

오늘 우리 모든 성도님들의 삶 가운데 우리에게 보여주신 생명의 자리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은혜의 역사가 늘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기도 제목
1. 세계를 품은 기도 - 제리 목사
2. 로뎀교회 세례 교육이 토요일까지 있는데, 모두 참석해서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만나고 고백하게 하시기를
3. 로뎀교회 계약과 증축이 순조로이 이루어지도록
4. 방과후 교실에 어린이들을 위한 책들이 순조로이 들어올 수 있도록
5.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여시고, 부활의 열매를 너무나도 정확하게 보여 주신 은혜를 누리고 전하는 통로가 되도록

세계를 품은 디아스포라 공동체-아메리카

26/03/2024

#새벽묵상 (20240326-화) 마 25:1-13 지혜가 능력입니다!

지난 주 말씀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에 반대되는 가룟 유다의 모습을 봤습니다. 가룟 유다의 틈을 통해 마귀가 들어와 벌써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넣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반하는 사랑은 어두움을 따릅니다. 거짓을 말합니다. 형제를 미워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잘못인줄도 모릅니다. 그래서 더 무서운 것입니다. 브레이크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가룟 유다는 마귀의 유혹에 잠식 당해 브레이크 없이 죄를 향해 달려가고 말았습니다.

■ 주일부터 화요일까지
이번 주간은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을 묵상하는 주간입니다.
지난 주일 예수님은 두 제자(베드로와 요한)를 통해 준비하게 하신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마 21:1-11).

그리고 월요일에는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에서 장사하던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책망하셨습니다(마 21:12-22).

그리고 오늘 화요일 예수님은 성전에서(마 21:23-23:39) 가르치시고, 거리에 나오셔서(마 24:1-2) 그 뒤에 다시 감람산에서 가르치십니다(마 24:3-24:51).

예수님은 실제로 마지막까지 제자들에게 본을 보이시고, 제자들을 가르치시는 일을 중단하지 않으셨고 그렇게 사셨습니다.

■ 지혜는 준비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여러 가지 주제 가운데 핵심은 ‘천국’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열처녀의 비유를 통해 천국에 대해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은 마 25:1절에서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라고 말씀하시면서 비유를 시작하십니다.

이 열 명의 처녀 가운데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가 있는 사람들이었다고 말씀하십니다(2절).

그런데 이 미련하고 슬기로움의 기준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준비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3-4절에 “(3)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지혜와 미련의 차이는 ‘준비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무슨 준비입니까?

저녁때 신랑을 맞으러 나가야 하기 때문에 신랑을 맞아야 하는 그 모든 상황에 맞는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준비한다’는 것은 총체적으로 본다는 말입니다. 눈 앞에 있는 것 뿐만 아니라 그 주변에 있는 것들까지도 보고 생각하고, 그래서 변수를 놓치지 않고 대비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총체적으로 보고 대비하는 것을 ‘지혜’라고 말씀합니다. 이 지혜는 상황에 따라 작용합니다. 그래서 문제를 해결하고, 문제를 뛰어넘는 힘이 됩니다.

■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 문제를 낳고
마 25:5-6절에 “(5)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6)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랑을 기다리던 10명의 처녀들에게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신랑이 더디 오는 것입니다. 밤이 늦도록 신랑을 기다렸지만 무슨 이유에서였는지는 모르지만 예상한 시간에 오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문제가 생겼습니다. 가지고 있던 등불의 기름이 다한 것입니다. 불을 밝힐 수가 없으면 신랑을 맞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총체적으로 생각한 지혜로운 처녀들은 밤 늦게 신랑이 오게 되는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도 기름을 따로 더 준비했기에 문제 앞에서 전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미련한 처녀들은 달랐습니다.

모든 처녀들이 신랑이 더디 오게 되자 모두 졸며 잤습니다. 그러다가 신랑이 온다는 소식도 모든 처녀들이 다 들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신랑을 맞으러 나가야 하는 상황인데 거기에서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됩니다.
마 25:7-8절에 “(7)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8)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문제가 다가오자 미련한 자들은 그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자들을 찾아갔지만 그들도 도울 수 없었습니다.

마 25:9-10절에 “(9)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10)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미련한 처녀들이 급하게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습니다. 그 사이에 혼인 잔치집의 문이 닫혔습니다. 이 또한 예상치 못한 일이지만 이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마 25:11-12절에 “(11)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12)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지혜가 능력입니다
지혜는 무엇입니까? ‘중요한 것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신랑이 올 것을 기대하는 설레임이 있었지만 그 일을 위해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을 때 진정 중요한 것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꿈이 있는 사람은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꿈을 이루는 능력이 바로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이 지혜는 어디로부터 옵니까? 지혜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렘 10:12절에 “여호와께서 그의 ‘권능’으로 땅을 지으셨고 그의 ‘지혜’로 세계를 세우셨고 그의 ‘명철’로 하늘을 펴셨으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명철로 이루셨습니다.

롬 16:27절에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혜를 하나님께 구하면 됩니다. 단 1:17절에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① 학문을 주시고 ② 모든 서적을 깨닫게 하시고 ③ 지혜를 주셨으니 다니엘은 또 모든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알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니엘과 그와 함께 포로로 잡혀온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에게 지혜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말미암아 적국의 포로로 잡혀간 상황이었음에도 오히려 적국의 지도자로 세우시는 역사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는 세상의 지혜와는 다릅니다. 고전 3:19절에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혜는 세상 지혜가 있고,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를 떠나지 말아야 하고, 늘 이 지혜로 보고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잠 3:21절에 “내 아들아 완전한 지혜와 근신을 지키고 이것들이 네 눈 앞에서 떠나지 말게 하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마 25:13절에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지혜로 미리 준비하고 깨어 있음으로 그 날과 그 때에 이뤄야할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지 말기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지혜는 학교에서 배운 것이 아니고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이 지혜로 하나님의 일을 준비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복을 누리는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기도 제목
1. 세계를 품은 기도 - 브링업 멕시코
2. 로뎀교회 세례 교육이 오늘부터 토요일까지 있는데, 모두 참석하고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고백하게 하시기를
3. 로뎀교회 집 주인을 만나게 되는데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뜻대로 잘 이루어지도록
4. 방과후 교실에 어린이들을 위한 책들이 순조로이 들어올 수 있도록
5.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늘 깨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놀라운 일을 이루도록

세계를 품은 디아스포라 공동체-아메리카

22/03/2024

#새벽묵상 (20240322-금) 요 13:2 틈을 노리는 마귀의 공격을 이겨라!

어제 말씀을 통해 우리는 사도 요한을 통해 목격한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은 아가파오(agapao)의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랑을 변함 없이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고, 그 사랑은 지식적이거나 비유적인 사랑이 아니라 실제로 요한과 제자들이 볼 수 있는 실체적인 사랑이었습니다. 마지막 십자가에서 사랑의 완성을 외치신 그 사랑을 우리가 값없이 받은 사람들입니다.

■ 그러나 요한이 목격한 변질된 사랑
이렇게 변함 없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사랑만 있으면 참 좋겠는데, 막상 우리 주변에는 그런 사랑이 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변을 보니까 오늘 본문 2절과 같은 수시로 변하고 배신하는 사랑이 난무하기 때문입니다.

요 13:2절에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영원하시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사랑(agapao)과는 대조적으로 환경을 따라 변하는 가룟 유다의 모습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서술 또한 요한복음의 저자 사도 요한의 서술입니다. 어제 예수님께서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기록한 것은 예수님의 사랑을 사도 요한이 목격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서술도 역시 사도 요한의 서술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비록 마귀가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넣었다는 내면의 서술 또한 가룟 유다의 삶을 통해 분명히 드러난 부분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는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기도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결국 사랑도 드러나지만 배신도 드러나고 사랑 아닌 것도 모두 드러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사탄이나 마귀는 우리를 속일 수 있을 것처럼 알고 있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성령님의 역사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 기록을 보면서 누구나 한번쯤은 나 자신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고 점검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변함없으신 사랑 앞에 우리의 연약하고 변질되고 쉽게 변해버리는 그런 사랑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예수님의 크신 사랑 앞에 우리의 사랑이 보잘 것 없다는 것을 깨닫기 보다는 그 보잘것 없는 사랑에도 이해하시고 받아주시는 예수님의 크신 사랑이 더욱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가진 사랑은 어떤 사랑이었습니까? 예수님의 사랑과 반대되는 사랑이었습니다. 쉽게 변하는 사랑이었습니다. 유통 기한이 있는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변함없으신 사랑인데, 가룟 유다의 사랑은 변하고 변질되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 되시고 끝까지 사랑을 보여 주시는 예수님 앞에 그 사랑을 배반하고 악한 생각을 품게 됩니다.

가룟 유다가 마귀에게 어떤 틈을 보였기에 이렇게 마귀가 다른 제자들에게는 반응하지 않았지만 유독 가룟 유다에게 반응하고 그를 공격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앞에서 나누었듯이 예수님의 사랑을 끝까지 보여 주신 그 사랑을 가룟 유다는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은 이런 가룟 유다의 틈을 향해 재빨리 움직여 공격했습니다. 가룟 유다의 틈을 놓치지 않고, ‘벌써(had already)’ 공격했습니다. 가룟 유다의 틈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예수님의 사랑과 반대되는 사랑, 예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 반대되는 사랑, 어둠에 거하는 사람의 인생
예수님의 사랑과 반하여 사는 인생의 삶은 어떻습니까?

① 어두움을 따라 다닙니다.
요 8:12절에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통 사람은 빛을 따라 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둠을 따르는 자들이 있습니다. 나는 무엇을 따르는데 익숙한가?를 보면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② 거짓을 말합니다.
요일 1:6절에는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거짓말을 하는 것이 너무나 마음에 찔리고 답답하고 죄스러운 마음이 드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을 즐기는 자들이 있고, 거짓을 오히려 자랑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요 8:44절에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거짓말쟁이가 되고 거짓을 즐기는 자들은 결국 그들이 거짓의 아비 마귀를 따르는 자들이라고 증명하는 것이고, 이런 거짓된 삶은 반드시 그들의 삶 가운데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③ 형제를 미워합니다.
요일 2:9-11절에는 “(9)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1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11)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분명 예수님의 사랑과 반대된 사랑은 우리 주변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우리의 형제를 미워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사랑과 반대되는 사랑은 우리 주변에서 이미 드러나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 삶이 예수님의 사랑 안에 있는지, 어둠 가운데 있는지를 분명하게 드러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그래서 예수님도 어둠의 삶에 대해 경고하셨습니다. 요 12:35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는 우리들을 빛 가운데 거하게 하려 하셨기 때문입니다. 요 12:46절에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빛 가운데 있다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 형제와 이웃들에게 우리 삶의 현장에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사랑이 드러나고 실현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고 미워하는 것이 바로 사탄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의 사랑이 지속되는 것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를 통해 예수님을 팔면 그 사랑이 중단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중단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그 어떤 것의 영향도 받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모든 것의 도전을 무너뜨리고 승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마귀의 도전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기자도 약 4:7절에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라고 선포했습니다.

베드로도 벧전 5:8-9절에 “(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라고 선포했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이미 이긴 싸움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악한 것들을 명령하여 이기며 예수님의 사랑이 더욱 풍성케 되는 삶의 현장을 사는 은혜가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기도 제목
1. 세계를 품은 기도 - 제리 목사(필리핀, 바세코)
2. 부활주일 세례식에 참석해야 하는 6명의 후보자들이 모든 과정을 잘 마치고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고백하고 영접하는 은혜가 넘치기를
3. 고난주간 방학을 맞게 될 사역들이 다시 준비하고 회복되는 시간이 되도록
4. 방과후 교실에 어린이들을 위한 책들이 순조로이 들어올 수 있도록
5. 로뎀교회 계약과 증축이 안전하고 순조로이 이루어지기를
6. 세계를 품은 디아스포라 공동체-아메리카를 통해 예배 받으시고, 생명의 사역을 온전히 이루시는 아름다운 믿음의 교제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7. 든든한 믿음과 변치 않는 사랑으로 마귀의 공격을 이기며 사랑과 축복과 생명의 통로가 되게 하소서

세계를 품은 디아스포라 공동체-아메리카

21/03/2024

#새벽묵상 (20240321-목) 요 13:1 끝까지 사랑을 보여 주신 예수님!

어제 말씀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예수님 때문에 사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무가치와 무능력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 삶의 가치가 얼마나 더 아름답고 귀하게 바뀌었는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인생, 그보다 행복한 인생은 없습니다. 그보다 더 가치있는 인생은 없습니다.

■ 끝까지 사랑을 보여주신 예수님
본문에서 요한은 예수님의 변함없으신 사랑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 13:1절에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의 곁을 떠나는 마지막 시기를 살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앞에 있는 불안과 두려움으로 인해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것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드는 것은 ‘끝까지 사랑하셨다’ 기록한 것은 예수님의 증언이 아니라 요한복음의 저자인 사도 요한의 증언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어떻게 예수님의 사랑이 끝까지 갔다고 기록할 수 있었을까요? 다른 번역 성경들에서 그 단서를 찾아보겠습니다.

본문을 다른 번역 성경에서는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는, 자기가 이 세상을 떠나서 아버지께로 가야 할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새번역),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야 할 자신의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바른), “유월절 직전, 예수께서는 이제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그들에게 다함없는 사랑을 끝까지 보여 주셨다.”(쉬운말),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실 때가 됐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우리말), “It was just before the Passover Festival. Jesus knew that the hour had come for him to leave this world and go to the Father. Having loved his own who were in the world, he loved them to the end.”(NIV, 2011), “It was just before the Passover Feast. Jesus knew that the time had come for him to leave this world and go to the Father. Having loved his own who were in the world, he now showed them the full extent of his love.”(NIV, 1984), “Now before the Feast of the Passover, Jesus knowing that His hour had come that He would depart out of this world to the Father, having loved His own who were in the world, He loved them to the end.”(NASB)라고 번역했습니다.

여러 번역들 가운데 눈에 띄는 번역이 두 가지가 있는데, 쉬운말 성경과 NIV 1984버전 성경입니다. 다른 성경들은 개역개정 성경과 같이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변함없으신 사랑을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쉬운말 성경에서는 그 표현을 “그들에게 다함없는 사랑을 끝까지 보여 주셨다.”라고 표현했고, NIV 1984버전 성경에서는 “he now showed them the full extent of his love.”라고 조금 다르게 번역했습니다.

물론 헬라어 성경에는 ‘보여주다’라고 번역할만한 직접적인 단어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두 가지 번역은 의역에 가까운 번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요한복음의 저자인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사랑이 끝까지 변함이 없으셨다는 것을 들어서 안 것이 아니라 실제 경험한 것을 기록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변함 없으신 사랑을 봤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데, 단순히 마음으로만 사랑을 가지고 계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 가운데 실제로 드러나 있다는 것을 요한도 제자들도 그리고 모든 사람들도 잘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사랑은 정적인 사랑이 아니라 동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지식적인 사랑이 아니라 실천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일시적인 사랑이 아니라 변함없이 진행되는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이 요 19:30절에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만약에 끝까지 사랑하신 사랑이 아니었다면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하실 수 없으셨을 것이고,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틀린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끝까지 사랑하셨기에, ‘다 이루었다’ 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인생의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 사랑을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아가파오)
그렇다면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이 예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헬라어 성경에 보면 본문에 사용된 ‘사랑’은 모두 ‘아가파오(agapao)’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헬라어로 사랑이라는 말을 표현할 때 여러 가지 단어가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남녀간의 사랑은 ‘에로스(Eros)’, 가족 구성원 간의 사랑은 ‘스테르고(stergo)’, 친구의 사랑은 ‘필레오(pileo)’, 그리고 하나님의 값없는 사랑이 ‘아가페(agape)’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끝까지 사랑하시는 사랑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랑의 종류, 사랑의 농도 또한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영원하신 예수님과 그분의 성품
이런 예수님의 끝까지 사랑하시는 사랑은 바로 예수님의 성품으로부터 출발한 사랑입니다.

요 6:35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먹고 마시는 사람은 순간 배고픔과 갈증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배부름과 영원한 갈증을 해소하는 은혜를 누린다고 하셨습니다.

엡 3:21절에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영광도 영원무궁합니다.

딤후 2:10절에 “그러므로 내가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이 영원하고 그분의 영광이 영원하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이 영원하다는 증거입니다. 영원하신 그분의 사랑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과 영광을 다시 취하지 않으시고 영원히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히 7:24절에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느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 13:8절에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사랑하심에는 유효기간이 없습니다. 우리는 사랑이 환경을 따라 변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에게서 나오는 호르몬의 유효기간이 사랑의 유효기간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의 감정이 사랑의 유효기간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신 예수님의 사랑은 출발 자체가 환경이나 조건이나 우리가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영원하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값없이 사랑을 받았고, 그 사랑이 우리를 영원히 하나님의 자리로까지 온전히 나갈 수 있도록 붙잡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모든 성도님들에게 끝까지 사랑을 보여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누리고 또 본받아 우리 삶 가운데 그 사랑을 실천하는 복이 넘치는 하루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기도 제목
1. 세계를 품은 기도 - 세계를 품은 디아스포라 공동체-아메리카
2. 방과후 교실에 어린이들을 위한 책들이 순조로이 들어올 수 있도록(리스트 확인 중)
3. 로뎀교회 계약과 증축이 안전하고 순조로이 이루어지기를(다음주 화요일 다시 만나기로)
4. 예배 받으시기 원하시고, 선교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세계를 품은 디아스포라 공동체를 통해 세워지도록
5. 현재 아픈 성도들을 위해. 살바도르(다리), 빠올라(발목), 브리따니(코피), 루삐따(독감)...
6.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 삶의 현장에도 누리며 간증케 되는 역사가 있도록

세계를 품은 디아스포라 공동체-아메리카

20/03/2024

#새벽묵상 (20240320-수) 요 12:46-47 세상을 구원하려!

어제 말씀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을 보는 것으로 하나님을 보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같이 나누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신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믿음의 삶의 현장을 통해, 형제를 사랑함으로, 선을 행함으로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게 됩니다.

■ 1.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시기 위해
이어 예수님은 본문 요 12:46절에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왜 오셨는지 그 이유에 대해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빛으로 이 땅에 오셔서 예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시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빛으로 받아들인 자들은 모두가 어둠과는 상관 없이 빛 가운데 살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우리의 통로가 되십니다. 믿음의 통로, 생명의 통로, 빛의 통로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결국 예수님 때문에 사는 인생이며, 예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인생입니다.

① 예수님 때문에 사는 인생
요 6:57절에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because of me) 살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먹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사는 인생입니다.

② 예수님을 통해 사는 인생
또 요 10:9절에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through me)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문이시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아버지께로, 구원으로 인도해 질 뿐만 아니라 그분 안에서 어디에 있든지 풍성한 꼴을 얻게 됩니다.

③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사는 인생
요 1:17절에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through Jesus) 온 것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주시는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와 진리를 누리며 사는 인생입니다.

우리는 어느 것 하나 예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인생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불편하고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을 통해 주시는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아름다운 것이고, 가장 좋은 것이고, 가장 영광스러운 것이고, 가장 영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 14:6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through me)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일하신 길을 우리에게 값없이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아버지께로 가는 것은 우리의 힘이나 능력이나 공로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을 통해 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사는 인생은 가장 복된 인생이며, 가장 행복한 인생입니다.

■ 2. 구원하시기 위해
이어 본문 요 12:47절에 예수님은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 가운데 오신 두 번째 이유는 심판하러 하심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위에 군림하시면서 우리에게 책임지라하시고, 우리의 잘잘못을 따지시고 책망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아마 책망하시고 책임을 물으시는 예수님이셨다면 우리는 아무도 온전히 존재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을 부담으로 여길 때가 있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믿음을 노력해서 얻는 줄 알기 때문이고, 구원이 우리의 공로 때문이라고 위로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잘못한다면 그에 대한 책임을 우리가 져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믿음을 부담스러워할 때가 있습니다. 열심히 노력하고 애쓰는 사람에게 믿음을 주시는 줄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얻기 위해서는 무언가 놀라운 일, 위대한 일을 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믿음은 그런 도구가 아닙니다. 믿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예수님을 통해 오는 은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은 짐이 아니라 축복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가 가진 그 무언가를 판단하고 책임지게 하고 우리를 힘들게 하시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믿음도 아니고, 그것은 은혜도 아니고, 그것은 구원도 아니고, 그것은 사랑도 아닙니다.

■ 심판은 하나님께
예수님은 우리를 심판하러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심판은 누구의 것입니까? 바로 아버지 하나님의 것입니다. 요 12:48절에 “나를 저버리고 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②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말을 통해 심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한글 성경은 ‘내 말’, ‘그 말’이라고 기록하며 ‘말’이라는 말이 두 번 반복되고 있는데, 한글은 같은 단어이지만 사실 원어로는 다른 단어입니다.

앞에 있는 ① ‘내 말’에서 ‘말’은 헬라어로 ‘레마(rema)’입니다. 레마(rema)는 단순히 말을 의미하는 것을 넘어 ‘살아있는 목소리에 의해 발설되는 것이나 선포된 것, 말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이미 예수님을 통해 열방에 선포된 말씀을 뜻합니다.

뒤에 있는 ② ‘그 말’에서 ‘말’은 헬라어로 ‘로고스(Logos)’입니다. 이 말은 ‘말’, ‘진술’, ‘연설’ 등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나 현상 또는 주제에 대해 설명하고 증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롬 2:16절에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뒤에 있는 ‘그 말’, ‘로고스’는 예수님께서 마지막 심판날 우리를 설명하시는 것, 우리에 대해 증명하시는 것, 우리를 변호하시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심판주의 자리에 계시고, 우리는 그분 앞에 서며, 예수님은 그 사이에서 우리를 변호하십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는 심판을, 믿음은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삶 가운데 주신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를 빛으로 인도할 뿐만 아니라 영원한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심을 믿고 나아가는 은혜가 넘치시기를 축복합니다!

☞ 기도 제목
1. 세계를 품은 기도 - 로뎀교회
2. 다시 시작하고 있는 해피스쿨과 방과후 교실을 통해 생명의 복음이 전해지도록(교사들 위해)
3. 방과후 교실에 어린이들을 위한 책들이 순조로이 들어올 수 있도록(리스트 조율 중)
4. 로뎀교회 계약과 증축이 안전하고 순조로이 이루어지기를
5. 현재 아픈 성도들이 많습니다. 살바도르(다리), 빠올라(발목), 브리따니(코피), 루삐따(독감)...
6. 예수님의 선포된 레마의 말씀을 따라 살다가 마지막 날 예수님께서 하나님 앞에 주시는 로고스의 말씀으로 인해 변호 받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은혜가 오늘 넘치기를

세계를 품은 디아스포라 공동체-아메리카

19/03/2024

#새벽묵상 (20240319-화) 요 12:44-45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보다!

■ 예수님께서 외치시다
오늘부터 사순절 말씀을 같이 나누고자합니다. 다음주부터는 고난주간이 시작되고, 이제 3월 마지막 주일이 바로 부활주일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본문 44절에 “예수께서 외쳐 이르시되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외치셨다(cried out)’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외칠 때는 언제입니까? 사람들이 집중하지 못할 때 주의를 집중하기 위해 외칩니다. 또는 정말 중요한 이야기를 할 때 힘이 들어가고 자신도 모르게 외치게 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바로 그런 상황이십니다.

유월절 5일 전인 지금의 주일에 모인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지를 확인시켜 주고 선포하고 계시는 장면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누구인지 밝히 말씀하고 싶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바로 알고 바로 믿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 나를 믿는 자와 보는 자는
예수님의 선포는 이것이었습니다. 44-45절에 “(44) 예수께서 외쳐 이르시되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45)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설명하시면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는 통로요, 하나님을 보는 통로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본다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본다는 것이고,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예수님을 친히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보는 것은 영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조차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하나님을 볼 수 있는 통로라고 하셨습니다.

■ 1.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봅니다
요 1:18절에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라고 요한을 통해 선포하셨습니다. 요한도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래서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을 보는 것이 중요합니까? 하나님은 우리 신앙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전부이시고, 만유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런 창조주 되신 하나님을 볼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큰 영광이 없을 것입니다.

■ 2.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을 봅니다
요일 4:12절에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보는 방법은 예수님을 통해서도 볼 수 있지만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그 사랑 안에 거하시고 그 사랑이 우리를 더욱 온전히 세운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일 4:20절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형제를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은 인간적인 사랑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요일 5:3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고, 그 결과 우리의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 3. 선을 행함으로 하나님을 봅니다
또 요삼 1:11절에는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선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께 속하였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보는 증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신비입니다.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을 본다니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고, 하나님을 누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사랑을 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 4.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 하나님을 봅니다
마 5:8절에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보는 사람은 마음이 청결한 사람입니다. 여기에서 ‘마음이 청결하다’는 말을 다른 번역에서는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새번역), “마음이 청결한 자들은 복되다.”(바른), “마음을 깨끗이 한 사람은 복이 있다.”(쉬운), “마음이 순결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한글킹), “Blessed are the pure in heart,”(NIV)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청결하다’는 말은 ‘마음이 순수하다’, ‘마음이 깨끗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깨끗하고 정결한 곳에 오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더럽다면 그곳에 하나님은 오실 수 없으십니다.

요 3:3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거듭남의 자리가 어떤 자리입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씻으시고 정결하게 하신 자리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물과 피로 씻으시고 용서하시고 정결하게 하신 자리입니다.

■ 하나님이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에게 임했습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힘을 힘입어 사는 현장에 있습니다.

눅 11:20절에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힘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시는 그 현장에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 안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눅 17:20-21절에 “(20)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으로 사는 현장에 계시며,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임재하심이 있는 그곳이 이미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 안에 이미 예수님이 계시고, 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시고,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누리게 되는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을 누리는 복이 모든 성도님들 위에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기도 제목
1. 세계를 품은 기도 - 브링업 멕시코
2. 2024년 달력을 전도지로 사용하고 있는데, 한 생명이라도 주께로 돌아오는 통로가 되도록
3. 어린이 도서관 책이 들어오는 과정을 선하게 인도하셔서 순조로이 진행되도록
4. 로뎀교회 주인과 지난 주에 만나 집을 팔겠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오늘 다시 만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계약을 할 것인지를 조율하기로 했습니다. 아무런 어려움 없이 잘 진행되도록
5. 현재 아픈 성도들이 많습니다. 살바도르(다리), 빠올라(발목), 브리따니(코피), 루삐따(독감)...
6.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보고 믿는 영광의 삶이 오늘 삶 가운데 풍성하게 하소서

세계를 품은 디아스포라 공동체-아메리카

 #목회칼럼 no. 541 하나님의 은혜로 지낸 시간!  지난 주 화요일 성탄절을 마치고 과달라하라 지역에 있는 선교사님들이 모여 함께 교제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래도 과달라하라에서 사역하고 있는 선교사님들은 자주...
04/01/2024

#목회칼럼 no. 541 하나님의 은혜로 지낸 시간!

지난 주 화요일 성탄절을 마치고 과달라하라 지역에 있는 선교사님들이 모여 함께 교제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래도 과달라하라에서 사역하고 있는 선교사님들은 자주 이렇게 모임을 가지고, 서로 섬기고 대접하는 귀한 마음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번 모임은 더 많이 풍성했습니다. 왜냐하면 지난 11월 말에 새로 들어오신 신선교사님 가정과 3월에 들어오기 위해서 미리 답사를 온 김선교사님이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올해까지 목회사역을 마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시는 김목사님 내외분도 같이 참석을 하셨습니다.

귀한 음식을 풍성하게 나누며 2023년 지났던 은혜와 사역의 이야기들을 나누며 교제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모든 식사의 교제를 마치고 함께 찬송하며 중보하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과달라하라에서 사역하고 계시는 선교사님들의 연수가 모두 다릅니다. 그래서 그런지 같이 교제를 하며 느끼는 것이 연수에 따라 보이는 것이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연수에 따라 보이는 넓이와 깊이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틀리고 누가 맞다는 개념이 아니라 현지에서 살다보니 삶의 현장이 한 층, 한 층 누적되어 그것이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사역의 밑거름과 저력이 된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여러 가지 삶의 층이 다른 동역자들이 함께 하면서 다른 분들의 삶의 두께도 더 두터워지게 하는 도움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더욱 다행인 것은 이렇게 자주 만남의 시간을 가지면서 모든 선교사님들이 서로 동역의 마음과 섬김의 마음으로 함께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제목을 나눌 때 늘 성공만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아픔과 실패도 나누며 함께 기도하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모습이 감사합니다.

2023년을 보내면서 또 느끼는 것은 한 해 동안 크고 작은 성공과 실패가 함께 공존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울고 웃고하는 시간들이 있었지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고, 그로 말미암아 실패도 아픔도 눈물도 모두 기쁨으로 소망으로 회복되는 것을 경험하는 한 해였습니다.

2024년에도 더욱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일하심이 우리 모든 현장에 임하시기를 기대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만나는 실패는 실패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 실패를 통해 지경을 넓히시고 고난 중에도 감사와 찬송이 흘러 넘치게 하십니다. 2024년을 기대합니다! 하나님이 주인공이십니다!

- 소리하나

세계를 품은 과달라하라교회

??? ????? ????

04/01/2024
 #목회칼럼 no. 540 쉼과 기대의 시간!  지난 화요일 사랑의 도시락 나눔을 하면서 준비한 선물들을 나누고, 봉사자들과 가족들과 함께 성탄 파티를 한 것을 끝으로 열심히 달려왔던 2023년의 사역을 마치고 남은...
26/12/2023

#목회칼럼 no. 540 쉼과 기대의 시간!
지난 화요일 사랑의 도시락 나눔을 하면서 준비한 선물들을 나누고, 봉사자들과 가족들과 함께 성탄 파티를 한 것을 끝으로 열심히 달려왔던 2023년의 사역을 마치고 남은 시간들은 오랜만에 집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왠지 집에만 있는다는 것이 어색하기도 하고, 몸은 일을 쉬면 좀 괜찮아질까 했는데, 더 쳐지고 더 무거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잠깐 쉼의 시간을 통해 한 해의 은혜를 기억하고, 새롭게 허락해 주실 2024년을 상상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동안 사역을 하면서 다음의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구체적으로 준비하며 사역한 적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을 시작했기에 하나님이 인도하시기를 간구하고, 열어 가시는 사역을 했고, 매년 새해를 준비하는 일은 지금 하고 있는 사역들을 어떻게 지속해 나갈 것인가? 그리고 좀 더 사역을 통해 어떻게 하면 복음을 더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을까?를 준비하는 것이 연말의 가장 중요한 사역입니다.

그래서 매번 느끼고 감사하는 것이 지금 하고 있는 사역을 지속하는 것도 감사한 것이고, 지속할 수 있는 사역이 있는 것 또한 감사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어떤 사역을 새롭게 해야 하나?의 의문보다는 어떻게 이 사역들을 지속하여 생명의 통로로 사용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내년에 기대하는 것은 좀 더 많은 장학생들을 섬기는 것이고, 우리 사역들이 더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동역자들과 기도의 후원자들이 더 많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년에는 예배도 사랑의 도시락 나눔도 방과후 학교도 조금 새로운 형식으로 전환하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해가 갈수록 동역자들과 사역 가운데 있는 미래의 꿈나무들인 아이들에 대한 책임과 기대가 커지는 것 같습니다.

한 해를 기다린다는 것은 그래서 늘 설레이는 것 같습니다. 지난 한 해가 어떤 해였는지는 두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한 해였고, 앞으로 올 한 해도 역시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할 한 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간의 사역들을 보면 변함없는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인도하심의 발자취들이었습니다. 그래서 2024년을 준비할 일이 많지만 걱정 보다는 기대가 큽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인도해 가시는 걸음에 순종하여 나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은혜를 기다림은 한없는 영광이자 축복입니다!

- 소리하나

세계를 품은 과달라하라교회

??? ????? ????

 #목회칼럼 no. 539 문제의 연속에서 여유를!  한 주가 어떻게 지났지는 모르게 한 주가 지났습니다. 이번 주에 있는 사역들이 마음에 부담이 되었었나 봅니다.   성탄절을 준비하며 나누어야 할 선물들도 준비해야...
18/12/2023

#목회칼럼 no. 539 문제의 연속에서 여유를!

한 주가 어떻게 지났지는 모르게 한 주가 지났습니다. 이번 주에 있는 사역들이 마음에 부담이 되었었나 봅니다.

성탄절을 준비하며 나누어야 할 선물들도 준비해야 하고, 어린이 도서관과 방과후 학교가 이번주에 엘바예에서 성탄 파티를 끝으로 방학에 들어가고, 15일 16일에는 태권도 16차 심사가 있었습니다. 또 11월 다니엘 기도회를 마치고, 개인적인 일정으로 쉬었던 새벽 시편 묵상도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태권도 심사에는 총 56명이 응시했습니다. 지난 7월에 15차 심사를 마치고 약 5개월여 만에 16차 심사를 갖게 되었습니다. 심사하기 전에 다 함께 예배를 드리고 심사를 하는데, 예배 준비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의자를 정리하고 앞에 컴퓨터와 TV를 옮겨놓고 전원을 연결하는데, 매번 화장실쪽 콘센트에서 전기를 연결해서 사용했었는데,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예배하는 곳에서 제일 가까운 곳이 화장실쪽이어서 연결을 했던건데, 갑자기 눈 앞에 캄캄했습니다. 엘바예가 방학에 들어가서 사무실에 사람들도 없고, 경비 아저씨에게 가서 문의를 하니 건물 열쇠가 없다고 하더니 조금 있다가 다른 교실 열쇠를 가지고 와서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부랴부랴 전원을 연결했는데, 아뿔싸. 이제는 전원 확장선이 문제였습니다. 또 엘바예 교실에 가서 라인을 가져다가 예배 드리는 방향도 다 바꾸고, 전기선도 다시 새걸로 연결하고 다 설치를 끝냈는데, 이제는 PPT 포인터가 문제였습니다.

매번 가지고 다니면서 사용하던 포인터라 아무런 의심 없이 가지고 왔는데 방전이 되어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 당연히 PPT를 넘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다른 포인터를 가져다가 연결해 간신히 예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정말 꼬리에 꼬리를 무는 문제였습니다. 12시에 예배를 드리고 심사를 하는 일정이어서 11시부터 준비를 했는데, 예배를 12:30분에 드릴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문제가 지속되면서 마음이 무너지지 않기를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예배를 앞두고 일어나는 이런 예상치 않은 일들이 마음을 흔들고, 그것은 얼굴에 드러날 것이고, 모든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문제를 넘어 모든 순서를 다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문제가 없는 곳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문제는 반드시 해결됩니다. 그러니 조급함으로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문제 앞에서 여유를 찾아야 합니다. 사역의 현장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사역의 중심은 영혼을 다루는 것이기에 우리가 실패하면 영혼에 상처를 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 소리하나

세계를 품은 과달라하라교회

??? ????? ????

Dirección

Tlajomulco De Zúñiga
45643

Horario de Apertura

Lunes 6am - 6:45am
Martes 6am - 6:45am
Miércoles 6am - 6:45am
8:30pm - 9:30pm
Jueves 6am - 6:45am
Viernes 6am - 6:45am
8:30pm - 9:30pm
Domingo 11am - 12pm
3pm - 5:30pm

Teléfono

+523315316373

Notificaciones

Sé el primero en enterarse y déjanos enviarle un correo electrónico cuando WCF Guadalajara - 과달라하라교회 publique noticias y promociones. Su dirección de correo electrónico no se utilizará para ningún otro fin, y puede darse de baja en cualquier momento.

Contacto El Lugar De Culto

Enviar un mensaje a WCF Guadalajara - 과달라하라교회:

Comparti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