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수기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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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살전 5:16-18제목. 감사의 사람, 바울설교자. 길자연목사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 21절 말씀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
15/11/2015


본문. 살전 5:16-18
제목. 감사의 사람, 바울
설교자. 길자연목사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 21절 말씀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살던 시대가 어떤 시대인가를 영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영화롭게 한다고 하는 이 말은 명사나 동사에 있어서 사람에게 적용했을 때에 풍채가 아름답고 풍성해서 다름 사람보다 두드러진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영화롭게 한다는 이 말을 하나님께 적용해 볼 때는 총체적으로 뛰어난 하나님의 품성을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한편 감사라는 말은 ‘유카리스테오’, 즉 받은 은혜와 축복에 대해 감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 시대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지금 감사가 없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감사가 없는 시대는 감사할 줄 모르는 시대입니다. 감사가 없다는 것, 감사할 줄을 모른다는 것, 감사가 메말랐다고 하는 것은 자신이 받은 바 은혜를 은혜로 깨닫지 못하는데서 생긴 현상입니다. 현대인들은 부모의 은혜를 가슴 깊이 깨닫지를 못합니다. 형제 간의 우애도 깨닫지 못합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다보니 많은 현대인들이 자신의 능력을 의지해서 세상을 산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살던 그 시대가 그랬습니다. 롬 1:21-31까지 언급한대로 당대의 사람들은 자신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살면서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면서 여자는 여자대로 성적인 죄를 범하고, 남자는 남자대로 남자와 더불어 성적인 범죄를 행함으로써 온갖 죄악을 저지르며 살았습니다. 그렇게 전혀 감사할 줄 모르고 사는 무자비한 시대가 사도 바울이 살던 시대였다는 말입니다.

이런 시대 속에서도 사도 바울만큼은 달랐습니다. 사도 바울은 감사의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감사의 생활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고후 2: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후 9:15,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딤후 1:3,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오늘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바울이 로마서부터 그가 쓴 서신 13편의 말씀들을 상고해 보니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내용의 말이 자그만치 20회 가까이 사용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렇게 바울은 감사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감사의 조건이 있어 감사했는가? 그가 돈 많이 벌고, 잘 살아서 감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원망, 불평할 조건이 더 많았습니다. 그만큼 바울은 고난의 사람, 고통의 사람이었습니다. 고후 11:23 이하,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오직 복음을 위하여 이렇게 매를 맞고 고통을 받던 바울이었습니다. 일례로 빌립보에서 그는 무진장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가는 곳마다 그를 쫓아오는 유대인들이 바울을 괴롭혔습니다. 유라굴로 광풍을 만나서 열나흘동안에 생사의 갈림길에서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당하였습니다. 때로는 은장색 데메드리오가 바울을 감옥에 가두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선동하는 괴로움을 당하였습니다. 이렇게 바울의 일생을 살펴보면 감사의 조건보다 고난과 고통의 조건이 더 많았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고난과 고통의 조건 속에서 살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 수 있었던 것은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고난과 고통 속에서 자신이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고전 15:9 이하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사도 바울이 그렇게 어려운 시련과 고통을 당했어도 감사하며 살 수 있었던 것은 그는 그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리 육신의 고통과 재정의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내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엡 2:8에서 사도 바울은 고백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바울을 감사하게 만들었던 하나님의 은혜는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은혜는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46년의 목회를 마치고 돌아보니까 목회 중에 몰랐던 것이 있었습니다. 다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것을 참으로 뼈 깊이 살 깊이 깨닫지 못했습니다. 남보다 열심히 기도하고, 남보다 성경을 열심히 읽고, 남보다 열심히 목회를 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던 잘못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육신의 병마를 극복하는 것, 가정적인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 사업이 어려움 당하다가 그 위기에서 벗어나 제 자리를 잡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고난과 역경, 고통과 어려움의 시간 가운데 살아간다 할지라도 이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특별히 어떤 은혜를 우리에게 주셨기에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까?

1. 사죄의 은혜 때문에 감사해야 합니다.

롬 17,18,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롬 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예수가 나를 위해 보혈을 흘리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나를 구원해 주신 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하고 고달픈 일을 당해도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 된 것이 감사하다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요나서 2장을 보면 물고기 뱃 속에서 요나가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 속에서 감사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온갖 환란과 시련을 당하고 죽임의 위기에 놓이기도 했지만 자신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다메섹 도상에 찾아오셔서 만나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감사했습니다. 자신을 구원하기로 계획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했습니다.

2. 승리의 은혜 때문에 감사해야 합니다.

고전 15:55-57,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고후 2: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인간적으로는 약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죄의 유혹에 쓰러지기도 하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죄의 문제를 이기게 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해야 합니다.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에 보면 신앙의 사람이라면 모두가 다 예수의 보혈로 승리했습니다. 불의를 이기고, 질병을 이기고, 마귀를 이기는 역사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 우리는 마땅한 감사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3. 은사를 주신 은혜 때문에 감사해야 합니다.

고후 9:15,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신령한 은사를 하나님께서 주신 것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방언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내 부족을 하나님이 채우시고 내게 방언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할 수 있도록 해 주신, 기도가 깊어지게 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해야 합니다. 또한 성경을 보면 깨달아지는 은사가 있습니다. 성경을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성경 속에서 알게 하시니 그 놀라운 은혜를 감사해야 합니다.

삼손은 힘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 힘을 가지고 블레셋 사람 일천 명을 죽이고,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데 쓰임 받았는데, 그 은사를 남용하고, 잘못 쓰다가 망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 잘 버는 은사가 있어서 돈을 많이 벌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자랑하며 다닙니다. 그런데 그 은사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 줄 알고,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건강도 은사입니다. 이 은사 주신 것도 감사해야 합니다. 골 3장에서는 평강의 은사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평강의 은사를 받으면 참 기쁨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강의 은사를 받은 것도 감사해야 합니다.

4. 복음이 전해지는 은혜 때문에 감사해야 합니다.

롬 1:8,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사도 바울은 복음이 증거 되는 것을 감사했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를 다른 사람이 알게 되어서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받고, 예수로 말미암아 은혜 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감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 문장이 다른 것 같지만 다 같은 내용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감사한다는 이 말은 헬라어의 문법상 아주 강력하게 권고하는 말씀으로 기록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어떠한 일을 당하든지, 어떠한 일을 만나든지, 어느 때이든지,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모든 일에 감사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쉬지 말고 기도할 때도 감사의 기도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빌 4:6,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사도 바울을 말했습니다.

감사하면 병이 낫습니다. 감사하면 은혜가 넘치게 됩니다. 범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잘되나 안되나 감사하는 성도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본문. 창 37:5-11제목. 요셉의 일생설교자. 길자연목사 오늘을 사는 우리 시대 사람들에게 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꿈이 없이 산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우리나라 청소년 3,8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08/11/2015


본문. 창 37:5-11
제목. 요셉의 일생
설교자. 길자연목사

오늘을 사는 우리 시대 사람들에게 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꿈이 없이 산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우리나라 청소년 3,8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이중 83%의 청소들이 꿈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미래에 대한 꿈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꿈이 없습니다. 아니. 꿈을 꾸지 않습니다. 그저 그날 그날을 먹고 사는 데만 급급할 뿐입니다. 이렇게 현실에 급급한 사람들은 돈이 없고, 생활 환경이 어렵고, 병들고 고통스러우면 그것이 인생의 삶에 큰 문젯거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상 그런 것들은 우리가 세상을 사는데 있어서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우리에게 일시적인 고통을 안겨 주지만 모두 하나하나가 극복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사는데 있어 진정한 문제가 되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꿈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 시대에 꿈이 없다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문제인가?

미국의 시인 칼 샌드버그는 “꿈꾸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꿈이 없는 사람에겐 창조적인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꿈은 우리 인생을 풍요롭게 만들고, 우리의 삶에 원동력이 되기 때문에 꿈이 없이 산다는 자체가 살지만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도토리 한 알 속에 미래의 원대한 참나무가 들어있는 것처럼 우리의 꿈 속에 우리의 미래, 행복, 성공이 들어있습니다.

미국의 한 교육잡지에 한 어린아이가 우주선이 발사되는 모습을 바라보는 그림 밑에 이러한 글이 쓰여져 있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꿈만큼 성공할 수 있다. 정신이 가리키는 곳으로 성장은 따라가기 마련이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당장의 돈이 중요합니까? 아니면 우리의 마음 속에 내일에 대한, 미래에 대한 무엇이 되고 싶은 그런 꿈이 아직도 들어있습니까?

와트는 끓는 물주전자를 보다가 증기기관에 대한 꿈을 꾸었고 그것을 만들어냈습니다. 뉴턴은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에 대한 꿈을 꾸었고 그 이론을 만들어냈습니다. 하늘을 나는 꿈을 꾸었던 라이트 형제는 비행기를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꾸는 꿈은 위대한 업적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무엇인가를 꿈꾸는 사람이 역사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꿈을 꾸어야 합니다. 꿈을 안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요셉은 꿈의 사람이었습니다. 형들의 시기와 질투 속에서 그를 힘들게 하는 어린 시절 어느 날, 그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의 나이 17살, 밭에서 추수하는 꿈을 꾸는데 자기 곡식단에 형들의 곡식단이 절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몇 일이 지나지 않아 해와 달과 11별이 자기를 향해 절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냥 스쳐지나갈 수 있는 꿈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말씀은 두 번씩이나 요셉이 꿈을 꾸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꿈을 꾸었다는 것을 아주 강조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 꿈은 무엇이었습니까? 5절과 9절에 연거푸 꿈을 꾼 것에 대해서 학자들은 족장 시대의 꿈은 계시의 방편이라는 말로 해석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살던 족장 시대에는 꿈이 하나님이 보여주고자 하는 계시의 방편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민 12:6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비방하는 아론과 미리암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이 말씀과 같이 꿈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의지를 알려주는 계시의 방편으로 구약 시대에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인 성경이 기록되기 전에 개개인에게 꿈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계획을 가지고, 어떠한 방편으로 인간에게 찾아오시는가에 대한 계시를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요셉이 꾼 꿈은 개꿈이 아니었습니다. 그 꿈을 통해서 형들보다 그저 성공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입지전적인 인물이 되는 그런 개꿈이 아닌 하나님께서 요셉을 사용하여 장차 어떻게 당신의 백성들에게 큰 일을 하실 것인가를 보여주는 꿈이었습니다. 히브리 말에 꿈은 ‘할론’입니다. 꿈은 히브리 시대에 잠을 자는 가운데 어떠한 광경과 영상을 바라보는 그런 일반적인 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주시는 계시를 꿈을 통해 나타내셨습니다. 이것을 ‘할론’이라 부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요셉이 두 번씩이나 꾼 꿈이 바로 그런 꿈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하나님이 생각하시고, 하나님이 나타내 보여주시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보여주는 것이 요셉이 17살 때 꾼 꿈이었습니다. 요셉은 꿈을 꾸고 또 꾸었습니다. 오늘 두 번씩이나 꿈을 꾸었다고 하는 말은 얼마나 잊을 수 없는 꿈을 꾸었는가 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셉 당시에 애굽을 다스리던 바로 왕은 어느 날 두 번이나 꿈을 꾸었습니다. 나일강 하수에 살찐 7 암소가 나일강에서 풀을 뜯어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약하고 흉악하고 파리한 7 암소가 나타나서 살찌고 아름다운 7 암소를 잡아 먹었습니다. 바로 왕은 식은 땀을 흘리고 잠깐 깨었다가 다시 잠에 들었는데 아주 무성하고 충실한 열매가 달린 벼 이삭이 올라오는데 파리하고 동풍에 바짝 말라 비틀어진 7 이삭이 나오더니 잡아 먹었습니다. 바로 왕은 심상치 않은 꿈을 꾸고 아침에 일어나 점성술사들을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를 물었습니다. 아무도 그 꿈을 해석하지 못할 때에 감옥에 갇혀 있는 요셉을 불러 속이 시원한 해석을 듣게 되었습니다. 창 41:28부터 요셉은 바로왕의 꿈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 왕에게 보이셨습니다 7 마리의 살진 암소가 7가닥의 충실한 그 곡식은 앞으로 이 애굽 나라에 7년동안 풍년이 찾아올 것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주 메마르고 파리한 암소 7 마리와 7 가닥의 아주 메마른 곡식은 7년 흉년이 연거푸 오게 될 것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후에 찾아오는 흉년이 너무 심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7년 풍년을 기억하지 못할 것입니다. 바로 왕이 두 번이나 꿈을 겹쳐 꾸신 것은 하나님이 그 일을 정하셨고, 그 일을 속히 행하실 것이니 대비하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 중에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다고 하는 것은 7년 풍년과 7년 흉년의 놀라운 일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작정하셨다고 하는 것을 바로 왕의 꿈을 통해서 계시해 주셨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왕에게 보여주신 이 꿈은 애굽의 통치자를 통해 장차 네가 다스리는 애굽과 주변에 흉년이 곧 올 것이니 대비하라는 하나님의 계시였습니다. 마찬가지로 17살의 나이에 꿈을 두 번이나 겹쳐 꾼 것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요셉을 통해서 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신적 계획을 꿈을 통해서 계시하신 것입니다.

요셉은 꿈 꾸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말은 그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던 계시의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사람이란 하나님의 말씀의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오늘 본문을 해석하면서 큰 오류를 범하면서 성도들을 가르칩니다. “꿈을 꾸세요. 성공의 꿈을 꾸세요. 요셉과 같이 성공의 꿈을 구어야 요셉처럼 총리가 될 수 있습니다. 꿈을 꾸세요.” 이렇게 해석합니다. 그러나 요셉의 꿈은 그런 꿈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에게 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뜻을 요셉의 꿈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인생의 말년에까지 아내 사라가 아이를 낳지 못하니까 포기했습니다. ‘그래.. 십 수 년 전에 데려온 엘리에셀이 얼마나 똑똑한 종이야. 그에게 내 전재산을 주고 나의 양아들을 삼아야겠다.’ 생각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찾아오십니다. “아브라함아...” “예...” “네 몸에서 장차 아들이 생길 거야. 네 아내 사라가 아들을 낳을 거야. 이 다메섹의 종 엘리에셀은 네 상속자가 아니야.” “하나님, 제가 어떻게 아들을 낳습니까? 제 나이가 100세가 가깝습니다. 엘리에셀을 양아들로 삼겠습니다.” “아니다. 그는 네 아들이 될 수 없다. 내년 이맘때 내가 다시 찾아올 때 사라가 아이를 낳을거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캄캄한 밤에 밖으로 데리고 나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아.. 하늘의 뭇 별을 셀 수 있나 봐라... 네 후손이 저렇게 많을거야...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을거야... 아브라함아. 내년 이 맘 때에 아내가 아들을 낳을거야.” 그러면서 말씀하십니다. “3년 된 암염소 한 마리, 3년 된 숫양 한 마리, 산비둘기 , 집비둘기 새끼로 피를 흘려 제단을 쌓아라.” 이튿날 제단을 쌓을 때 솔개들이 피 냄새를 맡고 날아와서 짐승들을 채 가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몽둥이를 가지고 쫓아냈습니다. 그러다가 너무 피곤해서 자기도 모르게 깜빡 조는데 또 소리가 들립니다. “아브라함아.... 너는 반드시 알아라. 네 자손이 이방의 나그네가 되어 그들을 섬기고 400년 동안 이방사람들이 너의 후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4대만에 큰 재물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돌아올 것이다. 왜냐하면 아모리 사람들의 죄악이 아직 관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을 통해서 장차 하나님이 이루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 대한 구원과 구속의 계획을 아브라함에게 가지고 계셨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어 언약의 백성을 삼으시고, 가나안 땅에 살게 하신 하나님은 아모리 족속이 죄악이 많기 때문에 함께 살게 되면 음란하고 우상을 섬기게 될 것을 아시고, 아브라함과 그의 모든 가정을 가나안에 머물게 하지 않으시고, 저 남쪽의 애굽 나라에서 430년 동안 살게 하시다가 때가 되어 아모리 족속의 죄를 다 징취하신 다음 언약 백성들을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하시려는 원대한 계획을 하나님은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신적인 계획을 완성하시려고 아브라함의 증손자 중에서 요셉을 딱 빼 내어서 17살 때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의 계획을 이루시려고 요셉에게 꿈을 통해 계시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은 그 꿈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꿈 때문에 형들에게 미움을 받고 보디발의 가정으로 팔려가 11년 동안 노예생활하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 2년 동안을 감옥 생활을 했습니다.

저같은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안팎으로 욕을 많이 먹습니다. 가만 있어도 욕하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정말 가슴 속에서 열받고 화가 날 때도 있지만 ‘욕 속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겠지.. 고통 속에도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가 있겠지.. 오해 중에도 하나님의 무슨 뜻이 있겠지...’ 이렇게 세월을 보내다가 하나님의 뜻이 조금조금조금 나타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하나님은 비상한 계획을 가지고 당신의 백성의 삶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결국 72 명의 야곱의 가족 식구들이 흉년을 피하여 애굽으로 내려가서 430년 동안 살게 됩니다. 놀랍게도 야곱의 후손들은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 같이 많아졌고, 애굽 사람들의 학대 속에서 430년 동안 머물러 있던 곳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속에서 하나님은 요셉이 필요했습니다. 이 요셉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정착하게 하시고, 성장하고 번성하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은 요셉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오늘도 왕성교회를 위해서 여러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나 같은 것이.. 내가 뭐 힘이 있나 돈이 있나.. 내가 뭐 기도를 많이 하나.. 나같은 것은 없어도 돼...’ 이런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하시고자 하는 계획이 있는데 단지 내가 알지 못한다고 그 계획을 그르치지 말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래서 요셉은 홀로 외톨이일 때 두 번이나 걸쳐 꿈을 꾸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성공케 하시는구나. 나는 11번째 아들인데 어떻게 나를 이렇게 크게 사용하시려고 하는가’ 생각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신적 계획을 생각하면서 ‘혹시나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시려는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은 20냥에 애굽으로 팔려가면서 ‘내가 이렇게 애굽으로 노예로 팔려가는구나.. 이게 뭔가...’ ‘억울하게 감옥생활을 내가 하게 되는구나... 여기에 무슨 뜻이 있지 않겠는가’ 그러면서 20년 정도의 세월이 지났는데 바로 왕의 꿈을 해석하게 되면서 하나님의 계획을 바로 왕에게 알려주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하룻밤 사이에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 7년 농사가 잘 되기 시작하는데 그때의 모든 곡식을 수십개의 창고에 가득가득 채웠고 정말 7년 흉년이 찾아왔습니다. 그러자 어느 날 형들이 자기에게 찾아와 자기에게 절하는 것이 아닙니까. 요셉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창 42:9, “요셉은 꿈을 생각하고” 영어로는 ‘remembers the dream’, 히브리어 동사로는 “기억하다”를 의미하는 ‘자카르’를 사용했습니다. 이 동사는 오랫동안 곰곰이 생각하다, 주목하다, 기억하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요셉은 그 동안의 세월에서 자신의 꿈을 잊지 않고 기억했다는 의미로, 하나님이 계시한 뜻이 무엇인지 또는 어떻게 이루어질지 기억하며, 하나님을 의지했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요셉은 일평생 동안 하나님이 주신 꿈을 잊어버리지 않았습니다. 한 순간도, 단 한 번도 하나님의 꿈을 잃어버린 적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큰 축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경 말씀 속에 하나님의 꿈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은혜의 계획,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계획과 뜻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이제 꿈을 기대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성경 속에 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으세요. 성경 말씀을 들으세요.

성경 말씀을 듣고, 읽고, 쓰고, 묵상하면서 그 가운데서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피 흘려 주셨구나. 하나님이 이렇게 나를 사랑하셨구나.. 이 성경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 마음의 눈에 환히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기 전에는 누가 나를 괴롭게 하고, 욕을 할 때 가슴 속에 불끈불끈 올라오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고, 은혜를 받고,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고, 예수의 보혈로 구속받은 내가 아프다고, 외롭다고, 힘들다고 쭈그려 있으면 안 되지 하면서 성경 말씀 속에서 저는 힘을 얻었습니다. 이 성경이 쭈그려있는 저의 등을 폈습니다. 외로울 때도, 아플 때도, 욕을 먹을 때도, 오해를 당할 때도, 우울할 때도, 성경은 나의 모든 움츠려 있는 것을 펴 주었습니다. 성경이 힘이요, 능력이요, 은혜요, 축복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계획과 뜻이 모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설교 듣고, 말씀 듣고, 성경 읽고, 성경 쓰고, 말씀 묵상하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17살의 요셉이 꿈을 두 번 겹쳐 꾸었는데 그 꿈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평생동안을 꿈의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꿈을 꾼 다음부터 고난이 찾아왔습니다. 형들의 미움과 시기 속에서 은 20 냥에 팔려갔고, 보디발의 가정에서 노예 생활하고, 2년 동안 감옥 생활을 했습니다.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고난과 고통은 죄값으로 오는 징벌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맛보아야 하는 고난이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요셉이 꿈을 꾼 다음에 떨어질 때로 떨어진 고난을 예수 그리스도가 맛본 고난의 그림자로 생각합니다. 바울은 빌 2장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요셉이 애굽으로 내려가서 보디발의 가정에서 종이 되었다가 감옥에 갇힌 것은 요셉의 비하를 보여줍니다. 이것은 떨어지고, 떨어지고, 또 떨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셉이 감옥에서 나와 총리 대신이 된 것은 예수가 부활하시고 승귀한, 존귀한 승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셉의 고난은 예수의 고난이었고, 요셉이 총리가 된 것은 예수의 부활과 승귀를 보여주었다는 말입니다. 요셉은 고난 중에 하나님을 단 한번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향하여 단 한마디의 원망과 불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꿈이 있는 사람은, 즉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마음에 품고 기대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는 것입니다.

요셉이 고난을 인내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살 수 있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인내가 죄와 사망으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게 된 것입니다. 요셉은 꿈을 통해 자기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의 계시를 깨달았습니다. ‘아... 내가 애굽의 노예로 갔고, 내가 이런 감옥의 고통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계획을 이루려고 하시는 것이구나..’ 그러다 보니 요셉의 마음 속에 하나님이 꽉 차 있었습니다. 요셉은 입만 열면 하나님이 하셨다는 말을 했습니다. 두 자녀의 이름의 뜻에서도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므낫세는 ‘하나님이 내 지난 날의 고통을 잊어버리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에브라임은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번성하게 하셨다’라는 뜻입니다. 형들이 찾아왔을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입만 열면 원망과 불평하는데 그러지 마시기 바랍니다. 입만 열면 “하나님이 하셨다”라고 말하시기 바랍니다.

요셉이 꾼 꿈은 하나님의 계획을 알려주는 계시였습니다. 우리의 꿈은 이 성경 속에 다 있습니다. 연말을 맞이해서 성경 많이 읽으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사 6:1-13제목. 하나님의 세계설교자. 길자연목사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사도바울만큼 고난을 당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자신이 당한 고난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후 11:23-27...
03/11/2015

본문. 사 6:1-13
제목. 하나님의 세계
설교자. 길자연목사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사도바울만큼 고난을 당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자신이 당한 고난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후 11:23-27,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하지만 그는 고후 12장에서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하는 고난을 오히려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급기야 그는 로마의 저작거리에서 복음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도 바울은 그러한 고난을 감수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은혜의 힘이었습니다.

약 1:17,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원래 복음을 핍박하던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들려오는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거기서 예수님을 만나고 아라비아 사막으로 가게 됩니다. 그는 거기서 엎드려서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 사명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놀라운 은혜를 사도 바울은 체험하게 됩니다.

고후 12:2-4,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그는 셋째 하늘을 경험하기에 이릅니다. 바울 사도의 이 고백 속에서 자신은 하나님이 계시는 셋째 하늘로 올라갔는데 그곳에 자신의 힘으로 올라간 것이 아니라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힘에 붙들어 올라갔음을 이야기했습니다. 거기서 놀랍고 신비스러운 하나님의 은사를 체험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셋째 하늘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가는 곳으로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 사람만이 가는 장소입니다.

고난과 은혜는 정비례합니다.

고난은 은혜의 체험만으로 이길 수 있습니다. 큰 은혜를 받으면 큰 고난을 이길 수 있습니다. 작은 은혜를 받으면 작은 고난밖에 이길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온갖 고난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의 힘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고전 12장에서 그는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은혜와 은사의 체험이 바울 사도만의 체험은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선지자 이사야에게도 주어졌던 체험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선지자 이사야가 처해있던 암울한 시대를 그는 어떻게 극복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오늘날 우리가 이 암울한 세상을 어떻게 극복하고 살아갈 수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이사야는 원래 이름의 뜻이 ‘여호와는 나의 구원이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주전 680년 경 웃시야 왕이 통치하던 시대에 활동하던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오직 구원은 하나님께 있다라는 사실을 유다 백성들에게 증거하기 위해 이사야서를 기록했습니다. 이사야가 활동하던 시대에 전세계 강대국들이 이스라엘과 유다를 압박하고 있었습니다. 남으로는 애굽, 북으로는 앗수르, 다음으로 앗수르를 대신한 바벨론이 약소 국가들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강대한 국가들의 압박 속에서 참으로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었던 유다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다윗 이후에 가장 유명한 왕이 등장하는데 그 이름은 웃시야였습니다. 그는 52년 동안 나라를 통치했고, 그 당시 나라는 전성기였습니다. 나라가 이렇게 번영해 갈 때에 하나님을 믿는 정신은 점점 약하여져 갔습니다. 유대백성들의 신앙이 변질되어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바로 그때 1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웃시야 왕이 죽던 해는 바로 52년 동안 계속된 유다의 번영이 마치는, 다시 말해 온 유다가 국가적인 위기에 봉착했던 시기였습니다. 게다가 형식적인 신앙생활과 함께 사치와 향락 속에 빠져 있던 유다 국가는 강대국들 사이에서 흥하느냐 망하느냐의 절대절명의 시기에 봉착했던 것입니다. 매우 불안한 가운데 이사야 선지자는 예루살렘 성전에 찾아 나가서 엎드렸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정이든 국가든 위기가 찾아올 때 유일한 소망은 교회에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기도하고 말씀 전하는 영적인 장소가 될 때에 가정과 국가와 사회에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위기 속에 유일한 희망이다’

오늘날 한국은 굉장한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중국과 일본의 사이에서 첨예한 갈등 속에 있고, 미국과 러시아와의 관계도 썩 좋은 형편은 아닌 것을 보게 됩니다. 국내에도 온갖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가뭄이 중부 지방을 강타했습니다. 가정과 사업과 직장, 그리고 사회가 절망적인 상황에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교회가 교회다워야 합니다. 문제는 오늘날 한국의 교회가 이러한 위기 속에서 얼마나 교회다운가에 있습니다.

이사야는 지금 강대한 국가들을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성전을 찾아갔습니다. 부부의 애정이 시들해지고, 자녀에게 어려움이, 사업과 직장에 어려움이 찾아오면 하나님의 성전을 찾아 나와야 할 줄 믿습니다.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의 성전으로 찾아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왜 성전으로 나와야 합니까?

합 2:20, “오직 여호와는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하나님은 성전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성전에 나와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하고 찬양하고 말씀을 의지하는 하나님 중심의 생활을 해야 나라도, 가정도, 사회도 평안해 질 줄 믿습니다.

저는 어느날 기도하는데 이사야가 하나님을 찾아 나와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나도 그렇게 해야겠다 다짐했습니다. 그래서 왕성교회에 나와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제가 교회를 올 때마다 성도들이 교회에 기도하러 모여 있었습니다.

어떤 위기와 문제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해결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편재하시는 하나님, 어디나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 중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성전을 정해놓으시고, 자신이 임재하시는 장소로 정해 놓았습니다. 영으로, 보이지 아니하시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오늘도 왕성교회에 임재해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속상한 일이 있고, 고달픈 일이, 괴로운 일이 있을 때 하나님을 찾아 나와 엎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있는 대로 믿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가 일상에 있을 때 왕성교회 성전을 향해서 나의 문제, 자식의 문제, 남편의 문제, 아내의 문제, 이 나라와 민족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강남, 분당, 수원, 일산에 계신 분들도 기도하십시오. 저도 십자수기도원에서 왕성교회를 향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병들었을 때, 답답할 때, 사업이 망했을 때에도 하나님의 성전을 찾아 나오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성도들이 가져야 할 마음의 자세 세 가지를 오늘 본문 말씀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1. 열린 눈을 가져야 한다

사 6: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육신의 눈으로 영적 세계를 본 것이 아닌 속사람의 눈으로 지금 하늘의 계신 하나님을 봤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신령한 눈이 열려야 한다고 하는 사실을 오늘 본문 말씀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서 신령한 눈을 열어서 보았습니다. 그는 계시록에서 반복적으로 “내가 볼 때에”, “내가 보니”라고 말했습니다. 신령한 눈을 가져야 신령한 세계가 보이는 줄 믿습니다. 마 18장에서 보면, 변화산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엘리야와 모세와 이야기하는 것을 신령한 눈으로 보았습니다. 엘리사도 신령한 눈으로 불말과 불병거를 보았습니다.

이사야는 두 가지를 보았는데 주님을 보았습니다. 그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한 것을 보았습니다. 지금 이사야는 성전에 앉아서 기도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옷자락이 예루살렘 성전 안에까지 가득한 것을 보았습니다. 이 하나님의 옷자락은 위엄과 통치를 말합니다. 하늘의 세계에서 하나님이 입고 계신 옷자락이 예루살렘 성전에까지 가득한 것은 오늘 지상 교회도 하나님이 통치하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하나님의 위엄과 통치가 성전에 가득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싸우는 행위는 하나님의 위엄과 통치를 모독하는 행위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이사야는 스랍을 보았습니다. 이 스랍들이 하나님을 모셔 섰는데 두 날개로 얼굴을, 두 날개로 몸을, 두 날개로 발을 가리운 것을 보았습니다. 발을 가리웠다는 말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가 감히 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발을 가린 것은 나는 죄인이고, 더러운 존재라는 고백이 담겨있는 행위입니다. 이런 하나님과 스랍을 보았던 이사야처럼 신령한 눈이 열려서 자신의 죄와 허물을 보고, 하나님의 신령한 세계를 보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2. 듣는 귀가 있어야 합니다(3-4절)

이사야는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고 하나님께 찬양하고 있습니다. 문지방이 요동하고, 연기가 가득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배를 흠향하시기 위해 가득히 임재하셔서 역사하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설교 듣다가 은혜 받고, 병 낫는 일이 일어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셨다라는 증거입니다. 마음의 귀가 열려야 하나님의 말씀이 들릴 수 있습니다.

3. 말하는 입이 있어야 합니다(5절)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이사야가 자신의 죄를 고백한 것을 말합니다. 죄를 고백할 수 있는 회개의 역사를 체험해야 합니다. 교회는 수십년 나와도 아무런 죄를 고백하는 생활은 없습니다. 은혜를 받았다 하면서도 자신의 죄를 고백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신의 죄가 고백되어지는 은혜받기를 축원드립니다. 숯을 이사야의 입에 대니 그의 죄가 사하여 졌다는 선포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예수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의 죄가 사하여 진다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주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이때 이사야가 말합니다.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보내주옵소서.” 그는 사명을 깨달았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마음이 둔하고 귀가 막히고 눈이 감겨진 이스라엘 유다백성에게 가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신령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줄 믿습니다.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는 절간의 도사같은 사람이 신령한 사람이 아닙니다. 먹고 마시고 세상을 살아가지만 신령한 세계가 보이는 사람, 신령한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고, 신령한 말을 하는 사람이 신령한 사람입니다.

롬 8:5-8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신령한 하나님의 사람은 육신에 속해 살지만 하나님의 영의 일을 생각하면서 생명과 평안의 영적 세계를 추구하고 사람입니다.

웃시야 왕이 죽는 것처럼 국가의 위기가 찾아오고 절망적인 위기에 처해있을 때 성전을 찾아 나온 사람은 이사야 한 사람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위기가 왔을 때 성전을 찾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교회는 사회와 국가와 가정에 위기가 찾아 왔을 때 유일한 소망입니다.

성전은 교회를 세우고, 가정을 세우고, 국가를 세우는 유일한 장소입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를 사랑합시다.

성전을 사랑합시다.

22/10/2015


본문. 수 6:1-11
제목. 문을 열어라!
설교자. 길자연목사

솔로몬은 말했습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보라”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인생을 사는데 따라오는 어려움과 힘든 일을 극복해 나가기 위해서는 이에 상응하는 적절한 삶의 철학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인생을 사는데 진정한 어려움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시련과 역경과, 가난 같은 것들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가난이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질병과 역경이 견디기 힘든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가장 힘든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을 살면서 가장 힘든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소통의 부재에서 오는 어려움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정부추산 2013년 기준 125만명이 독거노인입니다. 그 중 고독사 위험군에 속한 분들이 30만 명 정도 됩니다. 오늘날 많은 노인들이 홀로 외로움과 고분분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회가 얼마나 소통의 부재인 상태인가를 잘 보여주는 통계입니다.

어떤 사람이 손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속으로 생각한 노래를 연주한다 칩시다. 연주를 듣는 사람들은 얼마나 그 곡을 알아맞힐 수 있을까요? 연주자는 듣는 사람들의 50% 이상이 쉽게 맞힐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실제로 곡을 맞힌 사람은 극소구인 2.5%뿐이었습니다. 스탠포드대학 엘리자베스 뉴튼 교수가 행했던 ‘두드리는 자와 듣는 자’라는 유명한 실험 결과입니다. 이 실험의 핵심은 ‘착각의 소통’이 얼마나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지를 일깨워준데 있습니다. 자신은 상대에게 제대로 메시지를 전달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공감과 교감을 이루어내지 못하는 경우는 너무나 많습니다. 이 실험도 이 사회의 소통의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동탁에게 쫓겨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인 여백사의 집으로 숨어든 조조. 그런 조조를 대접하기 위해 여백사는 술을 받으러 나가고 하인들은 음식을 준비합니다. 그러나 숨어있던 조조는 쓱싹쓱싹 칸 가는 소리와 “그냥 잡을까 묶어놓고 잡을까” 고민하는 하인들의 말을 듣고 자기를 죽이겠다는 것으로 생각해 여백사의 식솔 8명을 모조리 죽이고 맙니다. 나중에 돼지가 밧줄에 묶여 있는 것을 보고 실수를 깨달은 조조는 황급히 그곳을 떠나지만 술을 받으러 갔던 어백사를 도중에 만납니다. 조조는 오백사가 관아에 밀고를 하고 오는 것으로 오해해 결국 그마저도 죽입니다. 이 이야기는 조조의 인간됨을 보여주기 위한 대목이지만 소통부재와 착각이 얼마나 비극적인 상황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소통의 단절은 결국 화를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소통이 안 되는 것 때문에 오늘날 얼마나 많은 불행스러운 일들이 우리 사회에 일어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 간에 소통이 안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개와 고양이가 만나면 흔히 으르렁대고 싸우기 일쑤입니다. 그 이유는 천적이라서가 아니라 서로 신호가 달라서 싸우는 것입니다. 개는 입으로 웃는 법이 없습니다. 꼬리로 웃습니다. 기분이 좋으면 꼬리를 들고 흔드는 것입니다. 기분이 나쁘면 꼬리를 낮춥니다. 겁이 나면 꼬리를 두다리 사이로 사려넣습니다. 그런데 고양이는 개와 정반대로 신호를 합니다. 기분이 좋을 때 꼬리를 낮추고 기분이 나쁠 때나 싸울 때 꼬리를 치켜 올립니다. 가령 개가 어떤 때 고양이를 사랑해서 꼬리를 들고 반가이 만나려 하면 고양이는 개를 보고 ‘너는 어째서 나만 보면 원수로 대하느냐?’고 으르렁대기 마련입니다. 소통의 부재가 어떤 결과를 낳는지 우리는 개와 고양이의 예로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도 소통의 부재에 직면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 1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
여기에 등장하는 여리고는 지금으로부터 1만년 전에 세워진 고대 도시입니다. 여리고성의 크기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1만 평 정도 되는 성이었습니다. 축구장 크기 정도의 크기인 것입니다. 하지만 가나안 정복 시대에 여리고성의 크기는 평균 정도에 해당되는 성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여리고성의 정신적 비중은 대단히 컸습니다. 사막의 한자리에서 솟구치는 오아시스, 여리고 지대는 곡창지대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전략적인 가치도 대단했습니다. 여리고는 가나안을 들어가기 위한 중요한 위치였기 때문입니다. 여리고성은 이스라엘 군사들이 공격하기에는 불가능한 요충지였습니다. 여리고성은 가파른 꼭대기에 세워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리고성을 정복하는 유일한 길이 있다면 장기간 그들을 포위하는 것밖에 없었지만 그러다가는 다른 연합군의 공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었습니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여리고는 성문을 굳게 굳게 닫고 있었던 것입니다. 문만 닫고 버티면 여리고는 승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히브리 원문 성경에는 여리고성은 굳게 닫혔고라고 기록되지 않고 여리고는 닫혀 있고 또 닫혀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같은 말을 두 번 반복한 것으로 보아 얼마나 여리고성이 강하게 닫혀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여리고성을 굳게 닫아놓고 있다 보니까 출입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누구도 나갈 수도, 들어올 수도 없었습니다. 성을 드나드는 유일한 문을 닫아놓은 결과였습니다.

그렇다면 여리고성이 성문을 굳게 닫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수 5:1, “요단 서쪽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들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들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 때문에 정신을 잃었더라”
이스라엘 백성의 놀라운 일을 듣고 여리고성 사람들은 정신을 잃고 혼비백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문을 굳게 닫고 만반의 전투태세를 갖추게 된 것입니다. 다르게 말하자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여리고성을 정복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일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여리고성을 굳게 굳게 잠그고, 누구도 드나들 수없이 막은 것처럼 오늘도 이 세상을 사는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문을 굳게 닫고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비일비재하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이 시간 예배의 장소에 나와서 마음의 문을 굳게 걸어잠그고 하나님과도 대화하지 않고 이웃과도 대화하지 않고 마음 문의 빗장을 걸어잠근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남편과 아내 간에, 부모와 자식 간에, 이웃 간에도 소통과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었으니... 시댁, 며느리, 친척 형제와 마음 문을 닫고 사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습니다.

이렇게 마음의 문을 닫고 사니까 소통의 부재가 된 사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마다 상대를 향하여 마음의 문을 굳게 닫고 살아가는 것이 일상화가 된 시대. 이것을 뉴튼교수는 지식의 저주라고 불렀습니다. 여리고성을 반드시 열어야 했듯이 아무리 돈이 많고, 환경이 좋고, 권력이 있고, 지식이 있어도 마음의 문을 굳게 닫고는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 5:2,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을 열어 다오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그런가하면 요 10: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우리는 문을 열어야 합니다.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굳게 걸어 잠근 여리고성의 문이 열리듯이 굳게 걸어잠근 사람의 마음이 열려야 하는 것입니다. 굳게 걸어잠그고 살면 상대방에 대한 미움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상대방에 대한 오해와 불신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여리고성의 문을 열 수 있습니까? 먼저 생각해야 할 중요한 점은 인간의 수단과 방법으로는 여리고성의 문을 열 수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닫혀 있는 사람들의 마음 문도 인간의 힘으로는 열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렇게 굳게 잠겨 있는 여리고성의 문을 어떻게 열 수 있는가를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몇 번 볼링장에 가서 볼링을 해 본적이 있습니다. 10개의 볼링핀이 놓여져 있는데, 선수들이 던진 볼링공이 굴러가다가 가운데 있는 그 핀을 쾅 하고 맞춥니다. 그러면 이것이 쓰러지면서 10개의 핀이 다 쓰러집니다. 가운데 있는 핀을 킹핀이라고 부르는데, 이렇게 킹핀이 쓰러짐으로 10개의 핀이 모두 쓰러지는 것처럼 내 마음의 굳게 닫힌 문이 열리기 전까지는 그 어떤 문제도 해결될 수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여리고성은 인간의 방법으로 열 수 없었습니다. 굳게 닫힌 사람의 마음도 사람의 말로, 위로로, 격려로, 설명으로 열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여리고 성문을 여셨는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2-5절,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 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나아갈 것이요 일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그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불어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시매”, 10절,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리게 하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 하고”, 15절, “일곱째 날 새벽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서 전과 같은 방식으로 그 성을 일곱 번 도니 그 성을 일곱 번 돌기는 그 날뿐이었더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루에 한 번씩 엿새 동안 여리고성을 돌고 그 다음에 제사장 일곱 명이 양각나팔을 들고 언약궤 앞에 나아가 걸으면서 일곱 번째 날에 일곱 번을 돌면서 제사장이 양각나팔을 불 때에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큰 소리로 ‘야~~’ 하고 함성으로 외쳐 부르짖으면 여리고성이 무너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여리고성을 돌 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칠일 때 되는 날에 외치라. 그러면 성벽이 무너져 내릴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모든 내용이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만이 여리고성의 문을 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어떠한 방법과 수단으로도 열 수 업성ㅆ던 여리고성을 하나님이 무너뜨리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살을 맞대고 살던 남편과 아내가 마음의 문을 닫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굳게 닫힌 부부의 마음은 그 어떤 방법으로도 열리지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을 열 수 있을까?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간에 닫힌 문이 열릴 수 있을까?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볼 때 하나님만이 그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

전쟁을 할 때나 사람을 모을 때는 은 나팔을 부는데 여기서는 양각 나팔을 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쓰는 나팔입니다. 그래서 그 나팔을 크게 부를 때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 말 하지 않고, 칠일 째 되는 새벽에 그 양각나팔 소리가 들리면 소리를 지르면 성벽이 무너졌습니다. 에이 그럴 리가 있나? 하나님이 하시면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일곱 나팔, 일곱 째 되는 날, 일곱 제사장은 하나님의 완전수를 말하는 것입니다. 양각나팔을 부는 것은 복음의 소리를 외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일곱 째 날에 무너지게 한다는 것은 일곱 째 날을 통해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법궤는 하나님이 여기에 계시다는 임재를 뜻하는 것입니다.
무장한 군사가 나아가고, 제사장이 따라가고, 언약궤가 뒤 따르고, 마지막에는 이스라엘 백성 후군이 따라갔습니다. 다 자기가 머물러 있는 자리가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수아의 지시에 순종하며 나아갔습니다. 그러므로 여리고 성을 도는 방법은 하나님이 여기에 계시면서 하나님이 여리고성을 무너뜨려 주신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군사들과 제사장들과 언약궤를 따라가는 것은 말씀에 순종하며 따라가는 믿음의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 11장에서는 믿음으로 돌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히 11:30,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으며”

하나님의 명령대로 하면 여리고성이 무너질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고 따라가면 굳게 닫힌 마음의 문도 열려질 줄 믿습니다. 인간의 어떠한 힘으로도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수 없었으나 하나님의 신적인 섭리의 역사만이 여리고성을 무너뜨렸던 것처럼 오늘도 굳게 닫힌 마음 문을 가지고 소통 없이 대화 없이 살아가는 막막한 현대인들의 마음도 하나님의 능력으로만이 무너질 줄 믿습니다. 하나님만이 마음의 문을 열게 하시고, 굳세게 세워진 인간의 좋지 않은 마음과 생활을 무너뜨리십니다.

믿음으로 여리고성이 무너졌습니다. 굳게 닫힌 인간의 마음도 믿음으로만 무너질 줄 믿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굳게 닫힌 오늘날의 사람들의 마음이 남아있는한 그 어떤 문제도 해결될 수 없음을 다시금 기억하면서 마음의 문이 열려야 가정, 관계 교회도 부흥되고, 사회도 평안해 지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부터 한주간동안 이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시기 바랍니다.
“마음의 문이 열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본문. 삿 16:1-20제목. 삼손의 몰락설교자. 길자연목사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은 힘으로 산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생의 승리를 위해, 행복을 위해 자기 나름의 힘을 기르게 됩니다. 물질의 힘을 기르고, 지식의...
11/10/2015


본문. 삿 16:1-20
제목. 삼손의 몰락
설교자. 길자연목사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은 힘으로 산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생의 승리를 위해, 행복을 위해 자기 나름의 힘을 기르게 됩니다. 물질의 힘을 기르고, 지식의 힘을 기르고, 권력과 젊음과 건강의 힘을 기릅니다. 그러나 인생은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지식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전 1:18을 통해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지식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말씀입니다. 물질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렘 17:11을 통해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고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잠 23:4에서는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스스로 날개를 내어 하늘을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고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시 118:8,9을 통해,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고 했습니다. 오늘의 젊음과 건강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시 103:15,16에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가면 없어지나니”라고 했고, 사도 베드로도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라고 말했습니다.

인생의 모든 것이 유한하다는 말입니다. 인생의 힘 역시 제한적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이 직면하는 문제들을 힘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세베루스는 AD306년부터 307년까지 로마황제를 지냈던 인물로서 “내가 곧 세상”이라면서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그러나 임종의 순간에 “나는 모든 것이지만, 이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라고 탄식하며 “화장후 내 유골이 담겨질 항아리를 가져오라”고 명령했습니다. 신하가 항아리를 가져 오자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조그만 항아리여 너는, 이 세상인 줄 알았으나 사실은 미약한 존재였던 한 사람의 뼈를 담게 될 것이다”

라마크리사는 지식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지식은 신에 속하는 나를 어둡게 하려는 어리석음을 제지하기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다. 지식 그 자체가 독립된 가치를 가진 것은 결코 아니다. 지식은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인생은 결단코 자신이 가진 지식으로, 권력으로, 물질로, 그 어떤 힘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슥 4:6에서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인생은 무엇으로 사는가? 이 질문의 정답이 있는데 그것은 지혜입니다. 권력과 젊음, 명예, 물질,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인생은 지혜로 살아야 합니다. 잠 8:11에서 “대대저 지혜는 진주보다 나으므로 원하는 모든 것을 이에 비교할 수 없음이니라”고 했고, 잠 16:16에서는 “지혜를 얻는 것이 금을 얻는 것보다 얼마나 나은고 명철을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더욱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솔로몬은 또 말합니다. “지혜가 그의 집을 짓고 일곱 기둥을 다듬고 짐승을 잡으며 포도주를 혼합하여 상을 갖추고“ 지혜가 있어야 세상을 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영국의 시인 윌리암 워즈워드가 쓴 시에는 한 마리의 새와 폭풍에 관한 것이 있습니다. 거친 산 속에 살고 있는 새 한 마리가 폭풍 속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새는 있는 힘을 다하여 자기의 집 동리를 떠나지 않고 그 산 방향으로 날아가고자 있는 힘을 다 쓴 것입니다. 자기가 살고 있는 고향 산을 떠나면 죽을 것만 같아서 안간힘을 썼으나 그것은 허사였습니다. 폭풍을 이기고 날 수가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그 새는 폭풍이 부는 대로 자기의 몸을 맡기고 그 방향으로 날아갔습니다. 강한 폭풍을 따라 한참 날아갔습니다. 드디어 폭풍도 약해졌습니다. 그런데 그 새의 눈앞에는 푸른 초장과 멋진 수풀의 아름다운 산이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과거에 자기가 살던 거친 수풀의 산과는 비교가 안 되는 아주 훌륭한 수풀과 산이었던 것입니다.

내 힘으로 날아보려고 애쓰던 이 새는 안간 힘을 쓴다고 인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홍수가 세상에 창일할 때 아라랏산에 머물러 있던 방주는 노아와 식구들을 실은 채 물결이 흘러 가는대로 떠돌아 다녔습니다. 노아가 운전대를 잡고 움직여간 것이 아니라 물결이 흐르는대로, 바람이 부는대로 그렇게 다녔던 것입니다. 인생도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가야 합니다. 내가 가고 싶은 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안 됩니다. 세상은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생각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인생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끄는 대로 산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지혜입니다.

두 청년이 20kg의 등산 가방을 매고 산을 올라가는데 한 사람은 헉헉 거리며 힘들어하고, 한 사람은 가뿐히 산을 올라갔습니다. 왜 그럴까? 배낭을 싸는 방법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등산을 많이 해 본 사람은 배낭을 싸는 법을 압니다. 가벼운 것을 아래에 넣고 무거운 것을 위에 넣는 것입니다. 그런데 경험이 없는 사람은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무거운 것을 밑에 넣습니다. 이것이 아래로 잡아당기니 허리가 뒤로 젖혀질 수밖에 없습니다. 무조건 힘만으로 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삶에는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인생도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에 따라 힘든 인생을 살수도 있고, 가볍게 인생을 즐겁게 살 수도 있습니다. 지혜롭게 살면 인생은 수월하게 살 수가 있습니다. 또한 무지는 죄악입니다. 문제는 무지는 죄악을 뛰어넘어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삼손의 경우를 보면 우리가 그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삼손은 큰 힘을 가지고서도 몰락했습니다. 맨손으로 사자를 때려죽이고, 여우 삼백 마리를 붙들어 꼬리에 홰를 달아 블레셋의 밭을 태우던, 언제나 이기기만 할 줄 알았던 그가 쓰러졌습니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자신이 가진 힘을 유효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는 지혜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삼손의 몰락은 무지의 소치였습니다. 무지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인생의 최대 실수를 범하였습니다. 무지 때문에 블레셋 사람들의 포로가 되었고, 가사로 끌려가 재주나 부리며 세상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참담한 존재가 된 것은 힘이 없어서가 아닌, 지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마 10:16,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잠 11:9에서는 “악인은 입으로 그의 이웃을 망하게 하여도 의인은 그의 지식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느니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인생을 실패 없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돈은 많은데 지혜가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권력도 있고, 인생의 경험도 많은데 지혜가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향해 “스스로 섰다 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지혜입니까?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무엇이 무지입니까? 모르는 것이 무지입니다.

삼손이 힘은 있었지만 모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삼손이 몰랐던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이 세상에 내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삼손은 몰랐습니다. 이 사실에 무지했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은사는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삼손은 몰랐습니다. 사도 야고보가 약 1:17을 통해 뭐라고 말씀합니까?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은사는 헬라어로 ‘카리스마’라는 말로서 하나님이 위에서 주시는 좋은 선물을 말합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기능, 아파트, 재산, 건강, 사회적 명망, 온갖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이것들은 모두 하나님이 위에서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것, 또한 은사를 왜 주시는 것입니까?
고전 12:4-7,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지식이나, 권력이나, 건강이나, 젊음이나,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는 물질,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바로 우리로 살아가는데 있어 유익하게 살아가라고 주신 것입니다. 고전 12:8-11,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은사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 세상에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돈도 하나님이 주신 것, 건강도 하나님이 주신 것, 젊음도 주신 것, 지혜도 하나님이 주신 것, 왜? 우리가 세상을 살 때 유익하게 살아서 하나님의 일을 유익하게 하라고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을 보면, 돈 좀 많이 벌면 재수가 좋아서 번 것처럼 말합니다. 때로는 친구가 자기를 도와줘서 벌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초장부터 하나님의 심기를 건드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돈 벌면 집사고, 차사고 하지만 하나님께 십일조는 드리지 않습니다.

은사는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 세상에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돈을 쓰더라도, 인생을 살더라도, 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벧전 4: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돈 많이 벌었으면 그 돈을 지키고 사용할 때 그 돈을 맡은 종처럼, 청지기같이 돈을 관리하라는 말씀입니다.

제 후배중에 가장 아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가난한 목사였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사람이 달라졌습니다. 왜 그런지 처음엔 몰랐습니다. 왜 그럴까? 그는 돈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에게 지혜가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가 모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내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손에 들어온 돈이 자기의 돈인 것처럼 생각하여 교만하여졌습니다. 삼손이 몰랐던 것을 그도 몰랐던 것입니다.

삿 13:24, “그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 여기서 복은 히브리어로 ‘라카’입니다. 이 단어의 의미는 그렇게 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삿 14:6,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니” 하나님께서 성령의 은사인 힘을 삼손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삼손에게 힘을 주실 때 들릴라을 기쁘게 해 주라고 힘을 주신 것입니까? 하나님은 삼손에게 사사의 임무를 감당하라고 힘을 주신 것이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사자도 염소새끼처럼 찢어버리고, 일천 명의 블레셋 군사로 나귀 턱뼈 하나로 죽일 수 있는 힘이 삼손에게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있는 힘이 자신의 것인 줄 알았고, 그는 그 힘을 자신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하나님이 그 힘을 왜 주셨습니까? 하나님을 위해 유익하게 쓰라고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르우엘 왕의 어머니는 아들 르우엘에게 잠 31:3에서 “내 아들아 내가 무엇을 말하랴 내 태에서 난 아들아 내가 무엇을 말하랴 서원대로 얻은 아들아 내가 무엇을 말하랴 네 힘을 여자들에게 쓰지 말며 왕들을 멸망시키는 일을 행하지 말지어다”라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잘못된 곳에 힘을 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잘못된 곳에 우리의 물질을 쓰지 말고, 우리의 건강과 젊음을 쓰지 말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우리의 힘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남용이나 오용은 무능력보다 더 무섭습니다.’ 사람들은 은사를 잘못된 곳에 쓰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방언도 하나님과 깊은 기도를 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외국 언어를 방언으로 받은 경우는 전도하라고 주신 것인데 사람들 앞에서 자랑하면서 방언을 합니다. 안수해 주고 병이 고쳐졌으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데 감사헌금은 자기가 받아먹습니다. 지나간 70년 동안 많은 은사자들이 나타났는데 병고침 받은 사람들이 돈 가져오면 다 모아서 재산행세를 했습니다. 나중에 보면 그렇게 산 은사자들은 다 망했습니다. 예언의 은사에 대해서도 기도하다 다른 사람에 대한 예언이 나오면 그 사람을 신앙적으로 잘 인도해야 하는데 엉터리 같은 예언해서 돈 받아먹습니다. 여러분, 돈을 잘 사용해야 할 줄 믿습니다. 조금 가난하게 살아도 십일조는 건드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사업과 가정에 손을 대면 돌이킬 수 없습니다. 건강을 주시고, 젊음을 주시면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에게 유익한 존재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이 세상에 내 것이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물질도, 젊음도, 건강도, 지식도, 권력도 내 것이 아닙니다.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삼손의 무지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하나님이 버렸다는 사실조차 몰랐습니다. 블레셋 사람의 의도는 분명했습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삼손을 죽이려 하였습니다. 이런 절박한 상황 속에서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이 자신을 버렸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삿 16:20, “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삼손이 허장성세를 누리는 동안 하나님께서 잘못 사용한 은사를 거두어 가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셨던 은사를 거두어 가면 세상이 참 곤핍해 집니다. 힘을 잃어버린 삼손의 결말은 뻔했다. 눈도 뽑히고, 자유도 잃고, 힘도 잃고 참담해졌습니다.

그렇다고 인생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잃어버린 사람에게도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찾아 그 하나님을 붙드는 길이란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힘을 잃어버린 삼손에게 수치스러운 삶이, 눈을 뽑히고, 맷돌을 돌리면서 블레셋 사람을 위해 재주를 부리는 모욕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던 삼손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그러면서 기둥을 흔들어대니 삼천 명이 모여 있던 다곤 신전이 무너졌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

‘사즉생 생즉사’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다 잃어 버려도 남은 것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을 붙들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언제나 할 수 있습니다. 실패 했어도 잃어버렸어도 기도하면 하나님은 찾아와 주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이 한 가지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이 세상에 내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모든 것이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라고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라고 주신 물질, 건강, 젊음, 지식임을 아는 지혜를 가지고 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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