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0/2018
은혜의 시스템 안으로 들어가라
요시야는 성전에서 이방 신들의 그릇을 제거했습니다. 말하자면, 잘못된 가르침을 제거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잘못된 가르침을 교회에서 제거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교회로 가져오는 세상적인 가르침이 있고, 그런 가르침이 교회가 가르치는 복음을 서서히 제거해가기 때문입니다. 로마서에 따르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또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 그래서 복음이 윤색되면, 하나님의 능력이 약해지고, 복음에 인간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에서 행위로 변질됩니다.
갈라디아교회에도 이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갈라디아교회에 와서 바울이 가르친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는 복음을 믿는 것만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아야만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니까 갈라디아서는 이런 사람들의 꾐에 넘어간 교인들을 향한 편지입니다. 잘못된 무엇에 대한 답변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논쟁의 핵심을 다룹니다.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15절) 바울은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고 이방 죄인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압니다. 이방인은 모릅니다. 율법은 인간에게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행위가 무엇인지, 잘못된 행동이 무엇인지 가르쳐줍니다. 다시 말해, 유대인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삶이 무엇인지 아는 자들이고, 반면 이방인은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그렇죠? 교회 다니는 분들은 어떤 삶이 하나님 원하시는 삶인지 배워서 압니다. 교회 다니시지 않는 분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정확히 모르잖아요. 하나님이 원하는 삶의 방식을 안다면, 그렇게 행하면 되겠네요? 그러나 바울은 다음처럼 대답합니다.
“우리는 본다. 사람이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것을 율법의 행위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제외하고는”(16절) 우리말은 헬라어, 그러니까 신약성경의 뉘앙스를 살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헬라어 어순으로 성경을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모습을 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누구도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고 있다. 어떤 인간도 ‘항상’ ‘모든’ 율법을 지킬 수 없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가 지키신 율법의 행위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 성경은 믿음으로 번역했는데, 많은 영어 성경은 신실함으로 번역합니다. 전체적인 문맥 안에서 볼 때, 저도 신실함이 보다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 다니는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올바른 삶의 모습을 알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7장으로 이어지는 산상수훈이지요. 그것을 항상 전부 지키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어라 우리 리더는 항상, 전부 모든 율법을 마음으로 지키는 것 같은데요? 우리 목사님...우리 전도사님...은 그런 것 같은데요? 네, 아닙니다. 꿈에서 깨십시오. 오직 예수 그리스도 단 한 분을 제외하면 누구도 지킬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올바른 삶의 방법은 알지만, 우리 힘으로 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래서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들어간다.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통해 의로워지려고,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라”(16절)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불의한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받아서 하나님 앞에서 구원 받기 위해서입니다. 율법의 행위로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왜요?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저는 꽤 괜찮은 사람인 것 같은데, 하나님도 저를 좋게 여기실 것 같아요. “왜냐하면 모든 육체가 율법의 행위로는 의로워짐을 받지 못한다”(16절). 앞서 말했지만, 그 누구도 나의 선행과 도덕으로 하나님에게 합격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러운 의문점이 생깁니다. 나의 도덕과 하나님의 율법 준수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면, 우리는 마음대로 살아도 되는가? 그렇다면 거룩한 삶의 동기는 무엇인가? 구원 받기 위해서 거룩한 삶이 필요 없다면 나는 왜 거룩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바울은 두 가지로 답변합니다. 17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17절)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받는다고 해서 결코 죄를 마음껏 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를 추구하다가, 오히려 죄를 더 짓게 된다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시는 분”이라는 것인데, 절대 그럴 수 없다는 말입니다. 안심하라는 것이지요. 그 다음 봅시다.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18절) 그리고 은혜로 구원을 한 번 받고 나서,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다시 율법을 통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범법자로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통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순간에, 율법은 항상 모든 율법을 지키라고 상대방에게 명령하며, 이를 수행할 사람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렇게 율법을 통해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은 스스로를 법을 어긴 사람, 범법자로 드러냅니다.
여러분 어떠세요?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여김을 받지만, 그것이 정말 내게 소중한 생명 같은 진리로 여겨집니까?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불타듯이 일어나시는지요? 바울은 지금부터 그 비결을 소개합니다. 봅시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19절). 바울은 율법을 통해 율법에게 죽었습니다. 더 이상 바울은 율법과 관계하지 않습니다. 왜요? 그래야 하나님과 친밀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헉, 이게 무슨 소리죠? 율법은 신령하고 좋은 것이고, 거룩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친밀하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율법은 나를 정죄합니다. 율법은 내가 얼마나 타락한 사람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려고 분투하면 얼마 못 가서 뼈저리게 알게 됩니다. 얼마나 내가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싶어 하는지 말입니다. 어느 날 한 교우님께서 예배시간에 은혜를 받고 결단합니다. 나는 이웃을 미워하지 말아야지. 그런데, 옆에 있는 사람이 상당히 내가 싫어하는 행동을 합니다. 아 왜 교회에 저런 옷을 입고 와...참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괴롭습니다. 여기서 끝나면 좋은데, 보통 내가 미워하는 이웃은 내가 싫어하는 행동을 더 합니다. 이상한 말을 하면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습니다. 화장도 이상합니다. 언제까지요? 내가 화를 낼 때까지 합니다. 내가 그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에 힘들어 할 때까지 합니다. 이제 율법은 나를 정죄합니다. 내가 율법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했는데 하지 못했기 때문에, 내가 전보다 더 죄인이라는 인식이 강해집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율법을 지키는 삶이 아니라 율법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율법을 통해 율법에게 죽었고, 나는 이제 하나님을 향해 삽니다. 그래요? 율법을 통해 율법에게 죽었다는 것은 무엇이고, 하나님을 향해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먼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해 죽었다는 말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20절)라는 것입니다. 율법은 나를 죄인이며, 하나님의 원수로 밝혔습니다. 그러니까 내게 합당한 자리는 지옥입니다. 죄인에게 쏟아지는 하나님의 실재하는 진노가 내게 쏟아지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진리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우습게 여기는 것은 내가 구원받을 만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이 말에, 많은 사람 중에 나만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서, 나만 하나님 앞에서 특별히 큰 잘못을 한 것이 아니라서 안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이해하면 안 됩니다. 지금도 복음을 믿지 않는 모든 인간이 매우 실제적인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잠시 허락된 이 짧은 세상에서 어떻게 살든지 간에, 그들이 죽고 나면 영벌에 처해집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기다립니다. 나 역시 지옥의 불못에서 영원한 고통을 받아야하는 죄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나 역시도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함께 죽었습니다. 율법은 율법을 따라서 나에게 사형선고를 내렸고, 그 선고를 십자가에서 집행했습니다. 그래서 나와 율법은 이제 그 어떤 채무 관계도 없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고, 예수님이 나의 모든 죗값을 십자가에서 지불하셨습니다. 나는 이제 율법에게 처벌받을 일이 없습니다. 율법과의 관계는 끝났습니다. 지금 내가 나를 볼 때, 율법의 기준에서 볼 때 오늘도 죄를 지었더라도 율법에게 처벌받을 수 없습니다. 이미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율법의 기준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더 이상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향해 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십자가에서 내가 죽은 결과를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20절) 이제 내 안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사십니다. 내가 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사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나는 여전히 나로 남아서 생각하고 밥먹고 친구랑 이야기도 합니다. 그런데 무슨 그리스도께서 산다는 말인가요? 안에서 명령을 내리시고, 안에서 밥달라고 하시나요? 다음 봅시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0절). 이 구절은 조금 뉘앙스를 살리기 위해서 헬라어 직역으로 봅시다. “산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이제 나는 육신 안에 산다. (어떻게) 나는 믿음 안에 산다. (어떤 믿음?)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어떤 하나님의 아들?) 나를 사랑하사, 그리고 자신을 버리신, 나를 위하여”
그러니까 이 구절에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고 할 때, 내가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내 삶의 주권을 예수 그리스도께 넘긴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주권을 넘겨도 아직 나는 육신 안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전과 달리 어떤 믿음 안에서 삽니다. 나를 사랑하셔서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이 내 안에 산다는 믿음을 가지고 삽니다. 이것이 율법보다 사람을 훨씬 거룩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시려고 율법이 아니라 믿음과 은혜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율법에 몰두할 때는, ‘나’에 몰두합니다. 내가 간음하지 않아야 하고, 내가 부모를 공경해야 하고, 내가 우상숭배를 하지 않아야 합니다. 주인공은 나입니다. 언제나 내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나에 대한 기준은 언제나 너무 높고, 나는 그것을 행할 수 없습니다. 열심히 지키면 교만함이 생깁니다. 역시 나야. 옆의 사람은 왜 저런담. 그러다가 어느날 실패하면 정죄만 남습니다. 내가 또 죄를 저질렀구나... 지친다. 잘해보고 싶었는데... 피곤하다. 믿음 생활이란 너무 힘든 것이야. 누구에게 말하지 않아도, 이런 사이클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만드신 거룩을 향한 시스템은 믿음과 은혜입니다. 내 안에 지옥가야 하는 나를 죽기까지 사랑하셔서 내 대신 십자가에서 죗값을 지불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사신다. 그러니까 이제는 내 안에 사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의식하며 삽니다. 율법을 먼저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을 의식합니다. 예수님, 제가 예수님이 주위 사람 험담하는 걸 싫어하실 것 같아서 잘 안 되지만 참았어요. 그래도 이런 작은 순종에 예수님이 기뻐하실 줄 믿어요. 예수님 제가 말을 함부로 하고 싶은데 또 화를 내버렸어요. 예수님 저는 못해요. 그래도 주님은 하실 수 있어요. 다음에는 도와주세요! 예수님 제가 또 실수했네요. 또 잘못했네요. 제가 봐도 제가 희망이 없는데, 이런 저를 용서하시고자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니요. 그 사랑이 정말 크네요. 예수님 감사합니다. 이제는 예수님이 중심이 됩니다. 이게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에 대해 살아 있는 삶입니다.
율법은 율법 자체로는 하나님과의 교제에 도움이 안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성품이 율법에 반영되어 있음을 압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기쁘게 하고자 율법을 지킵니다. 믿음과 은혜의 시스템 안에서 율법은 정죄하는 기능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는지를 제시합니다. 이 시스템이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기쁘게 할 때도 겸손할 수 있고, 예수님을 슬프게 했을 때에도 그 사랑을 더 크게 느낄 수 있는 시스템입니다.
이제 바울은 자신의 주장을 한 문장으로 요약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21절) 우리가 율법을 가지고 의롭게 되려고 애쓸 때, 그 사람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가치가 없어집니다. 은혜의 시스템 안에 우리가 머물러야 겠습니다.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