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파교회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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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 목사님 말씀입니다.

사랑의 모험 (2026/08/23, 성령강림 후 제13주 예배) by 김기석 목사님요일 4:19~21[음성] http://www.chungpa.or.kr/pastorate/preach/preach_files/s202...
24/08/2026

사랑의 모험 (2026/08/23, 성령강림 후 제13주 예배) by 김기석 목사님
요일 4:19~21

[음성] http://www.chungpa.or.kr/pastorate/preach/preach_files/s20260823.mp3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보이는 자기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자매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계명을 주님에게서 받았습니다.]

사랑의 모험 (2026/08/23, 성령강림 후 제13주 예배)by 김기석 목사님예배 실시간 방송 (다시 보기)[요일 4:19~21][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가 하나님을 ...
23/08/2026

사랑의 모험 (2026/08/23, 성령강림 후 제13주 예배)
by 김기석 목사님
예배 실시간 방송 (다시 보기)

[요일 4:19~21]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보이는 자기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자매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계명을 주님에게서 받았습니다.]

성령강림 후 제13주 예배 (2026년 8월23일)말씀: 사랑의 모험본문: 요일 4:19~21설교자: 김기석 목...

너를 위한 눈물, 평화의 씨앗 (2026/08/16, 성령강림 후 제12주 예배) by 김재흥 목사님눅 19:41~44[음성] http://www.chungpa.or.kr/pastorate/preach/preach_...
16/08/2026

너를 위한 눈물, 평화의 씨앗 (2026/08/16, 성령강림 후 제12주 예배) by 김재흥 목사님
눅 19:41~44

[음성] http://www.chungpa.or.kr/pastorate/preach/preach_files/s20260816.mp3

[예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에 오셔서, 그 도성을 보시고 우시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에 이르게 하는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터인데! 그러나 지금 너는 그 일을 보지 못하는구나. 그 날들이 너에게 닥치리니, 너의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에워싸고, 너를 사면에서 죄어들어서, 너와 네 안에 있는 네 자녀들을 짓밟고, 네 안에 돌 한 개도 다른 돌 위에 얹혀 있지 못하게 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1. 광복, 분단, 전쟁 그리고 아픔과 슬픔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평안과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교우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어제는 8.15 광복 81주년이었습니다. 한국기독교교회 협의회는 1989년부터 8.15 직전 주일을 남북의 교회가 함께 만든 공동의 기도문으로 예배드리는 날로 지켜왔습니다. 그러나 남북관계가 단절되면서부터는 그렇게 못하고 있습니다. 8.15 광복절이 되면 자연스레 남북의 평화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됩니다. 광복을 맞아 조국은 해방되었지만 해방은 곧바로 남북 분단으로 이어졌고 분단은 전쟁으로 이어졌으며 그 아픔과 슬픔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우리 정부는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대북 확성기 방송을 중단했고, 대북 전단 살포도 금했으며 북에 대화를 제안하고 인도적 차원의 지원 의사도 밝혔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대남 방송을 중단하는 정도의 반응을 했을 뿐 거의 무반응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이미 북한의 김정은 정권은 2023년부터 남북관계를 ‘한 민족’이 아니라 ‘두 국가’로 재정의했습니다. 이후 북한은 남한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러시아와 중국과의 관계를 이전보다 더욱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와 전쟁 중인 러시아에 북한 군인들을 파병하고 무기를 판매하면서 수십 조 원의 자금을 벌어들이고 있습니다. 이미 1만 명을 파병하였고, 곧 3만 명에서 5만 명을 추가로 파병한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습니다. 러시아에 파병된 북한 군인의 절반 정도가 죽거나 부상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북한 정권은 국민의 목숨을 팔아 권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악합니다.

러시아로 파병된 북한군인 중 2명이 전투 중 생포되어 우크라이나 포로수용소에 수용 중입니다. 우리나라 기자가 우크라이나로 가서 그들을 직접 인터뷰했습니다. 한 명은 리강은 20대 후반, 다른 한 명은 백평강 20대 초반입니다.(가명) 그들은 러시아로 군사 유학이나 훈련을 가는지 알았으며, 가족에게도 전혀 파병을 알리지 못하고 갑자기 간 것입니다. 리강은은 ‘살아 있는 게 불편합니다. 지금 어머니가 나 때문에 잘못되지나 않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전투 중 죽었어야 했는데 죽지 못한 게 안타깝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북한군은 전쟁 중 포로가 되면 자폭해야 합니다. 포로가 된다는 것은 조국에 배반자가 되는 일이며 그 가족 또한 ‘반동’의 가족이 됩니다. 백평강은 아주 앳된 얼굴로 ‘고향에 가고 싶습니다. 어머니가 보고 싶습니다. 군생활하면서 4년째 어머니를 뵙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둘은 북한으로 송환될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북으로의 송환은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 둘은 한국에 갈 수 있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우리 정부가 그 두 사람을 꼭 한국으로 데려올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대한민국 헌법상 북한의 주민과 탈북민은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국민으로 보기 때문이고, 그들도 우리와 한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의 눈물
공생애 마지막 시간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셨습니다.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사람들은 메시아로 맞이했습니다. 제자들은 자기의 옷을 깔아 드렸고 사람들은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런 후 예수님께서는 기드론 골짜기 건너편 감람산 중턱에 서서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이 왜 눈물을 흘리셨던 것일까요? 이때 예수님께서 흘리신 눈물은 소위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때 흘리신 눈물과는 다른 눈물이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중 흘리신 눈물이 자신에게 닥칠 십자가의 고난과 그것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당신의 운명으로 인하여 흘리신 눈물이었다면, 감람산 중턱에서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흘리신 눈물은 예루살렘에 닥칠 멸망을 내다보시며 예루살렘 사람들을 위하여 흘리신 눈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너도 평화에 이르게 하는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터인데. 그러나 지금 너는 그 일을 보지 못하는구나. 그날들이 너에게 닥치리니, 너의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에워싸고, 너를 사면에서 죄어들어서, 너와 네 안에 있는 네 자녀들을 짓밟고 네 안에 돌 한 개도 다른 돌 위에 얹혀 있지 못하게 할 것이다.” 예수님의 예언대로 예수님 사후 40여 년 만에 예루살렘은 로마에 의해 무너지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처참한 멸망을 예언하시면서 그 이유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예루살렘에 찾아오셨건만 예루살렘 사람들이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멸망하는 것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말씀은 예루살렘의 잘못을 꾸짖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한 심판의 예언을 강하게 꾸짖는 목소리로 선포하셔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셨습니다.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여러분은 언제 우십니까? 가끔 너무 기쁘고 행복할 때도 울지만, 억장이 무너질 때, 내 힘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 앞에서 울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면 예루살렘의 멸망을 내다보시고 우실 것이 아니라 그 멸망의 날이 오지 않도록 해 주시면 되는 것 아니었을까요? 예수님에게는 그 멸망을 멈추게 하실 능력이 없으셨던 것일까요?

예루살렘에 가면 감람산 중턱에 있는 눈물교회를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눈물을 흘리신 곳으로 추정되는 곳에 세운 교회입니다. 교회의 크기는 작은 편이고 건물 지붕의 네 귀퉁이에는 눈물이 담긴 항아리를 세워 놓았습니다. 그리고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면 창을 통해 예루살렘 성을 한눈에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예배당 앞에는 제대가 놓여 있는데 제대 전면에는 닭이 병아리들을 품고 있는 모자이크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는 누가복음 13:34의 말씀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사람들을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품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를 모아 품으려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예수님이 그것을 막을 능력이 없어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예루살렘 사람들이 자처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자식을 키워보신 분들은 아시죠. 자식 앞에 펼쳐질 어려움이 빤히 보여 그 어려움을 피해갈 길을 일러주어도 자식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가 가고 싶은 길로만 갈 때 부모는 그저 그 옆에서 눈물을 흘리며 지켜볼 수밖에 없음을.

3. 너를 위한 눈물, 평화의 씨앗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며 눈물을 흘리시며 “너도 평화에 이르게 하는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터인데”라고 말씀하실 때의 마음이 그 마음 아니셨을까요. 그런데 ‘평화에 이르게 하는 일’은 무슨 일일까요? 우리로 하여금 멸망에 이르게 하지 않고 평화에 이르게 하는 일은 무슨 일일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듯이 나의 아픔과 고통에만 매몰되어 우는 것이 아니라 너의 아픔과 고통을 슬퍼하여 우는 것.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를 위해 우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세상을 평화에 이르게 하는 일이 아닐까요?

시인 정호승은 이란 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나무 그늘에 앉아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우리 예수님이야말로 평생 그렇게 사셨지요. 그늘이 되어 눈물이 되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에 오르시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위해 우는 여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와 너희 자녀들을 위해서 울라.” (눅23:28) 저는 예수님이 여인들에게 이 말씀을 해 주실 때 예수님의 눈에서도 눈물이 흐르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여인들은 예수님을 위해 울고, 예수님은 그 여인들과 그의 자녀들을 위해 울고. 서로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서로의 아픔과 고통을 위해 흘리는 눈물. 자기의 아픔과 고통 때문이 아니라 너의 아픔과 고통을 온전히 내 것으로 받아들였기에 흘리는 눈물. 그 눈물은 어찌 보면 무능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눈물이 실질적으로 바꾸어주는 일은 거의 없으니까요. 그러나 그 눈물은 결코 무능하지 않고 무의미하지도 않습니다.

우크라이나 수용소에 있는 북한군인들을 만나기 위해 김영미 기자는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6개월만에 그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김영미 기자는 세계 곳곳의 전쟁터를 취재하는 50대 중반의 여기자입니다. 수용소의 철창이 열리고 리강은을 처음 만나는 순간이었습니다. 리강은은 “당국에서 머리를 잘 썼구만. 여성분을 보내면 내가 막 감동할 줄 알았나?”라고 차갑게 말하며 한껏 경계심을 드러냈습니다. 한동안 취재진과 눈도 마주치지 않았던 그가 ‘담배를 달라’하고는 담배를 한 대 피운 후부터는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고 자신이 궁금한 것 이것저것을 묻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네다섯 시간을 함께 이야기하다보니 경계는 사라지고 진담이 오갔고 농담도 오갔습니다. 이후에는 준비해온 밥도 같이 먹었습니다. 탈북민들이 만들어 준 북한 음식들이었습니다. 리강은과 백평강은 ‘엄마가 해 준 것과 같은 맛’이라고 했습니다. 수용소에서 허락받은 시간이 끝나 헤어질 때였습니다. 리강은은 “또 볼 수 있습니까?” 물었습니다. 그러기는 어렵다는 답을 듣고는 리강은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내고 싶지 않은데. 엄마 같은데.” 그 순간 김영미 기자는 마음이 무너졌습니다. 김영미 기자도 울고 리강은도 울고 백평강도 울었습니다. 그 순간 그 냉랭했던 수용소 공간은 남과 북이 하나 되는 따뜻한 공간으로 변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프고 고통스러울 때 눈물을 흘립니다. 자연스러운 눈물입니다. 그러나 그 눈물은 타인의 아픔과 고통에까지 이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를 위해 흘리는 눈물은 눈물로 그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타인을 위해 흘리는 눈물은 평화의 씨앗이 됩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멸망으로 치닫는 이유는 그 눈물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너를 위한 눈물이 드문 요즘입니다.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우리로 울게 하소서. 나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수많은 너를 위해 울게 하소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며 우셨던 예수님처럼 울어야 합니다. 부디 예수님을 닮아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너를 위해 눈물 흘리는 사람이 되어서 이 죽음과 분열의 세상을 생명과 평화의 세상으로 만들어가는 청파의 교우들과 이 시대 믿음의 백성이 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

너를 위한 눈물, 평화의 씨앗 (2026/08/16, 성령강림 후 제12주 예배)by 김재흥 목사님예배 실시간 방송 (다시 보기)[눅 19:41~44][예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에 오셔서, 그 도성을 보시고 우시었다....
16/08/2026

너를 위한 눈물, 평화의 씨앗 (2026/08/16, 성령강림 후 제12주 예배)
by 김재흥 목사님
예배 실시간 방송 (다시 보기)

[눅 19:41~44]
[예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에 오셔서, 그 도성을 보시고 우시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에 이르게 하는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터인데! 그러나 지금 너는 그 일을 보지 못하는구나. 그 날들이 너에게 닥치리니, 너의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에워싸고, 너를 사면에서 죄어들어서, 너와 네 안에 있는 네 자녀들을 짓밟고, 네 안에 돌 한 개도 다른 돌 위에 얹혀 있지 못하게 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령강림 후 제12주 예배 (2026년 8월16일)말씀: 너를 위한 눈물, 평화의 씨앗본문: 눅 19:41~44...

철든 신앙인 (2026/08/09, 성령강림 후 제11주 예배) by 김재흥 목사님사 32:1~8[음성] http://www.chungpa.or.kr/pastorate/preach/preach_files/s20260...
09/08/2026

철든 신앙인 (2026/08/09, 성령강림 후 제11주 예배) by 김재흥 목사님
사 32:1~8

[음성] http://www.chungpa.or.kr/pastorate/preach/preach_files/s20260809.mp3

["장차 한 왕이 나와서 공의로 통치하고, 통치자들이 공평으로 다스릴 것이다." 통치자들마다 광풍을 피하는 곳과 같고, 폭우를 막는 곳과 같게 될 것입니다. 메마른 땅에서 흐르는 냇물과 같을 것이며, 사막에 있는 큰 바위 그늘과 같을 것입니다. "백성을 돌보는 통치자의 눈이 멀지 않을 것이며, 백성의 요구를 듣는 통치자의 귀가 막히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경솔하지 않을 것이며, 사려 깊게 행동할 것이며, 그들이 의도한 것을 분명하게 말할 것이다." 아무도 어리석은 사람을 더 이상 고상한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며, 간교한 사람을 존귀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어리석은 말을 하며, 그 마음으로 악을 좋아하여 불경건한 일을 하며, 주님께 함부로 말을 하고, 굶주린 사람에게 먹거리를 주지 않고,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물을 주지 않습니다. 우둔한 사람은 악해서, 간계나 꾸미며, 힘 없는 사람들이 정당한 권리를 주장해도, 거짓말로 그 가난한 사람들을 파멸시킵니다. 그러나 고귀한 사람은 고귀한 일을 계획하고, 그 고귀한 뜻을 펼치며 삽니다.]

1. 철없는 폭염? 철없는 인간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평안과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교우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지난 금요일은 입추였습니다. 입추가 가을은 아니지만 ‘가을이 곧 오겠구나’라는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무더웠습니다. 그날 노원구는 기온이 40.2도까지 올라갔습니다. 우리나라 기상관측 사상 여름 최고기온은 2018년 41도였습니다. 그런데 올해 여름 양산에서 42.5가 관측되면서 8년 만에 최고기온 기록이 1.5도나 상승한 것입니다. 좋지 않은 지표입니다. 좋지 않은 지표는 또 있습니다. 기상전문가들은 1년 중 30도 이상 기온이 오른 날이 30일이 넘고 최고 기온이 40도에 이르는 극단적 폭염을 해마다 겪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2024년 전까지는 그랬던 해가 세 번뿐이었는데, 2024년부터는 계속 그런 날씨를 겪고 있습니다. 뉴 노멀, 극단적 폭염이 우리의 새로운 일상이 되었습니다. 결코 달갑지 않은 일상입니다.

좋지 않은 지표를 한 가지 더 말씀드리면, 그런 극단적 폭염이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알프스에서는 기온이 30도까지 오르면서 빙하가 녹아 폭포수가 되어 흘러내리고 있고, 유럽을 관통하는 라인강과 다뉴브강 등 물류이동과 발전소 냉각수로 사용하는 강물이 마르면서 유럽의 여러 국가가 막대한 피해를 보고 있습니다. 야경이 멋진 도시인 헝가리 부다페스트는 전력소비를 줄이기 위해 야간에 최소한의 전등만 밝혀 어둠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유엔 세계식량계획(WFP)의 경고인데 가뭄으로 말미암아 올 가을 농산물 생산량이 급격하게 줄어 내년에는 심각한 식량 위기상황에 직면하게 되는 사람이 기존 인원에서 4,900만 명이 추가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입추가 되어도 폭염이 계속되는 모습을 보면서 한 신문은 날씨에 대한 기사 제목을 다음과 같이 뽑았습니다. 날씨가 전혀 절기에 맞지 않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입추라는 말이 무색하게 무더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요즘의 극단적인 폭염은 폭염이 철을 몰라 일어난 일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철이 들지 않아서 일어난 일입니다. 철은 계절과 시기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고 사리를 분별할 수 있는 힘을 뜻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극단적 폭염은 우리 인간이 늘 눈앞의 이익과 욕심과 편한 것만을 좇아 살아갈 뿐 하나님이 정하신 이치를 분별하지 못하고 함께 살아가는 생명들의 아픔을 살피지 못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우리는 철든 사람으로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아직 철없이 살고 있습니까?

2. 철없는 사람과 새로운 왕
오늘의 본문인 이사야서 32장의 역사적 배경은 주전 8세기입니다. 팔레스타인의 동북쪽에서 앗수르가 일어나 주변 나라들을 정복하며 제국을 형성했습니다. 앗수르는 점점 팔레스타인 나라들을 점령했고 주전 722년에는 북이스라엘을 멸망시켰습니다.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자 앗수르의 다음 타겟은 유다가 되었습니다.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일 때 그 누구보다 그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여 백성을 이끌어야 할 지도자들은 제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혼란을 틈타 자기의 배를 불렸습니다. 유다의 지도자들은 뇌물을 좋아하고 고아와 과부의 억울한 사연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1:23) 부유한 자들은 토지를 독점하여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갈 터전마저 빼앗았습니다.(5:8) 재판관들은 가난한 자들의 권리를 빼앗고 부유한 자들을 위해 불의한 법을 제정했습니다.(10:1,2)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31장을 보면 유다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이집트를 의지했습니다. 이는 비신앙적인 행위인 동시에 시대를 잘못 읽은 것입니다. 유다를 향해 점점 다가오는 멸망의 조짐은 외부 세력인 앗수르에서 시작된 것이라기보다는 유다 내부의 부패와 비신앙과 하나님의 이치를 깨닫지 못하는 철없음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사야서 32장에는 ‘어리석은 사람’과 ‘우둔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들의 모습은 시편과 지혜서에 등장하는 악인의 모습과 유사합니다. 그는 어리석은 말을 하며, 주님께조차 함부로 말을 하고, 악을 좋아하고 간교한 계략 꾸미기를 좋아했습니다.(6,7절)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그렇게 어리석고 우둔하고 악한 자를 고상한 사람과 존귀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5절) 그렇게 어리석고 우둔하고 악한 자를 고상한 사람과 존귀한 사람이라고 불렀다는 것은 그 반대로 정말로 고상하고 존귀한 사람을 어리석고 우둔하고 악한 사람으로 여기는 이들도 있었다는 말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지도자만 철없던 것이 아니라 백성들도 철없던 것입니다. 시편과 지혜서에서 악인의 반대되는 존재로 의인이 언급되듯이 이사야서 32장에도 의인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그 의인의 모습은 왕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32:1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장차 한 왕이 나와서 공의로 통치하고 통치자들이 공평으로 다스릴 것이다.” 이는 이사야 한 명의 소망이 아니었습니다. 위기의 상황 속에서 부패하고 비신앙적이고 하나님이 정하신 이치를 깨닫지 못하던 철없는 유다의 지도자들을 보며 실망했던 모든 유대인의 소망이었을 것입니다. 이사야서 32:2은 유다 사람들이 고대하던 왕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습니다. ‘광풍을 피하는 곳과 같고, 폭우를 피하는 곳과 같으며, 메마른 땅에서 흐르는 냇물과 같으며, 사막에 있는 큰 바위 그늘과 같은 사람.’ 그 당시 사람들은 삶을 광풍과 폭우와 메마름과 사막처럼 느낄 수밖에 없었기에 그런 지도자를 꿈꾸었던 것입니다.

3. 철든 신앙인
성서학자들 중에는 이사야가 소망한 왕을 히스기야 왕으로 보는 이들이 있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그럴 만한 자격이 있었습니다. 히스기야는 그의 아버지 아하스가 세운 우상을 부수고 성전을 정화했습니다. 흩어진 북쪽과 남쪽의 백성을 모아 대대적으로 유월절 절기를 지켰습니다. 앗수르의 오랜 공격에 대비해 터널을 만들어 예루살렘성 밖에 있던 샘물을 성 안쪽으로 끌어왔습니다. 우상 숭배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바르지 않은 것을 기준으로 삼고 사는 그릇된 삶의 양태를 말합니다. 히스기야는 다른 신들을 버렸고, 그릇된 삶의 기준도 버렸습니다. 오로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만을 자신과 국가의 기준으로 삼은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히스기야는 남유다 백성뿐 아니라 나라를 잃고 남으로 내려온 북이스라엘 사람들까지 하나로 끌어안고 함께 유월절 절기를 지켰습니다. 그만큼 히스기야는 품이 넓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앗수르와의 장기전에 대비해 예루살렘 성의 최대 약점이었던 물 문제까지 해결했습니다. 그런 히스기야를 바라보며 사람들은 마음의 안정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광풍과 폭우를 피할 곳, 메마른 땅의 냇물, 사막에 있는 큰 바위 그늘처럼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히스기야에게도 단점은 있었습니다. 굳건하게 하나님만 의지하지 못하고 외세를 의지하여 앗수르와 이집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바빌론에서 온 사절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보물들을 자랑하듯이 내보였습니다. 히스기야는 철이 든 왕이었지만 완전히 철이 든 왕은 아니었습니다. 우상을 버렸지만 자만심까지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했지만 때로는 주변의 강대국과 자신의 힘을 의지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사야가 기다린 왕은 히스기야였다고 단정지어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을 경험한 사람들은 알았습니다. 그분이 하나님의 이치를 완전히 구현할 메시아, 구원자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과 이사야가 꿈꾸었던 왕의 일이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광풍과 폭우를 만난 이들에게 피할 곳이 되어 주셨고, 메마른 땅을 걸어가는 이에게 냇물이 되어 주셨고, 사막을 걸어가는 이에게 큰 바위 그늘이 되어 주셨습니다. 철든 신앙인이 된다는 것, 하나님의 이치를 깨달은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 생명들에게 내가 광풍과 폭우와 메마른 땅과 사막이 될 수도 있음을 자각하면서 조심히 사는 것이고, 거기서 더 나아가 광풍과 폭우를 만난 이에게 피할 곳이 되어 주고, 메마른 땅을 걸어가는 이에게 냇물이 되어 주고, 사막을 걷는 이에게 큰 바위 그늘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지난 7월말 몽골에 생태기행을 갔을 때, 테를지 국립공원이라는 곳도 들렀습니다. 국립공원답게 산에는 나무도 많고 들판 중앙에는 냇물도 흘렀습니다. 그리고 기암절벽들도 많아 절경을 이룬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산과 숲과는 달리 그늘이 많지는 않았습니다. 이른 아침이 되자 말들이 들판을 뛰어다니며 풀을 뜯어 먹었습니다. 그런데 해가 뜨거워지자 말들이 언덕 위에 있는 커다란 바위 둘레로 모여들었습니다. 바위 밑에 드리워진 작은 그늘 아래로 머리를 디밀고는 마치 반상회라도 하듯이 둥글게 모였습니다. 몇 시간 동안 그러고 있었습니다. 처음 보는 낯선 광경이었습니다. 그 이유를 알아보니 볕을 피하기 위함이었고 서로의 몸에 붙어 있는 벌레를 서로의 꼬리로 쫓아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위가 드리운 그늘에 비하여 모여든 말들이 많았습니다. 그래도 말들은 서로에게 곁을 내어주며 바위를 중심으로 빼곡하게 모여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교회 같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그늘 아래 모여 세상의 뜨거운 볕을 피하고 서로가 혼자만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어려움을 함께 해결해나가는 사람들의 모임. 한 사람이라도 더 품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곁을 내어주는 사람들의 모임.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점점 뜨거워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도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광풍을 만나고, 누군가는 폭우를 맞고 있으며, 누군가는 메마른 사막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이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피할 곳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냇물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그늘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이가 철든 신앙인입니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며 있는 성질 없는 성질 다 부려서 안 그래도 뜨겁고 메마르고 광포한 세상에 또 하나의 광풍과 폭우와 사막과 같은 존재가 되지 말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그러셨듯이 서로에게 피할 곳과 냇물과 그늘이 되어주는 청파교우들과 이 시대 믿음의 백성이 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09/08/2026

철든 신앙인 (2026/08/09, 성령강림 후 제11주 예배)
by 김재흥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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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32:1~8]
["장차 한 왕이 나와서 공의로 통치하고, 통치자들이 공평으로 다스릴 것이다." 통치자들마다 광풍을 피하는 곳과 같고, 폭우를 막는 곳과 같게 될 것입니다. 메마른 땅에서 흐르는 냇물과 같을 것이며, 사막에 있는 큰 바위 그늘과 같을 것입니다. "백성을 돌보는 통치자의 눈이 멀지 않을 것이며, 백성의 요구를 듣는 통치자의 귀가 막히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경솔하지 않을 것이며, 사려 깊게 행동할 것이며, 그들이 의도한 것을 분명하게 말할 것이다." 아무도 어리석은 사람을 더 이상 고상한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며, 간교한 사람을 존귀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어리석은 말을 하며, 그 마음으로 악을 좋아하여 불경건한 일을 하며, 주님께 함부로 말을 하고, 굶주린 사람에게 먹거리를 주지 않고,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물을 주지 않습니다. 우둔한 사람은 악해서, 간계나 꾸미며, 힘 없는 사람들이 정당한 권리를 주장해도, 거짓말로 그 가난한 사람들을 파멸시킵니다. 그러나 고귀한 사람은 고귀한 일을 계획하고, 그 고귀한 뜻을 펼치며 삽니다.]

[경향신문-사유와 성찰] 정의에는 절제가 필요하다- 김기석 목사
08/08/2026

[경향신문-사유와 성찰] 정의에는 절제가 필요하다
- 김기석 목사

푹푹 찌는 무더위가 일상을 짓누른다. 점심 식사 후 늘 즐기던 산책도 중단했다. 나뭇잎은 한층 푸르러졌지만, 불에 덴 듯 마음은 시들하다. 혹한의 추위를 견디며 살아가는 사람들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보며 잠시 마음을 ....

멸망 속 희망, 임마누엘 (2026/08/02, 성령강림 후 제10주 예배) by 김재흥 목사님마 28:20[음성] http://www.chungpa.or.kr/pastorate/preach/preach_files/...
03/08/2026

멸망 속 희망, 임마누엘 (2026/08/02, 성령강림 후 제10주 예배) by 김재흥 목사님
마 28:20

[음성] http://www.chungpa.or.kr/pastorate/preach/preach_files/s20260802.mp3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1. 멸망은 가까이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평안과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교우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길 빕니다. 저는 지난 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청파교우 19명과 함께 몽골 은총의 숲을 방문하고 왔습니다. 은총의 숲은 2009년부터 몽골 울란바타르 농과대학과 기독교환경운동연대와 청파교회가 함께 시작하였고 도중에 여러 교회들이 협력하여 17년 동안 몽골의 아르갈란트 지역에 조성한 숲입니다. 은총의 숲에 대해 처음 시작할 때부터 알고 있었지만 저는 이번 방문이 첫 방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출발 전부터 마음이 많이 설레었습니다. ‘2만평이 넘는 대지에 심겨진 25,000그루의 나무들이 이룬 숲은 얼마나 장관일까?’ 싶었습니다.

몽골공항에 도착해 차를 타고 1시간 반을 달려갔습니다. 여름을 맞아 모든 땅이 녹색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무는 보이지 않고 지표식물들로 표면만 녹색으로 보인 것입니다. 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녹색으로 보일 뿐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았습니다. 모든 산이 민둥산이었습니다. 강풍과 오랜 추위와 나무가 자라기 어려운 토질로 인해 몽골의 초원과 산에는 나무가 없었습니다. 도로를 달리던 차는 흙길로 들어섰고, 우리 모임을 인도하시던 기독교환경운동연대의 이진형 목사님은 “은총의 숲에 다 왔습니다.”라고 하셨는데, 눈앞에는 정원에 가까운 작은 숲이 있었습니다. 은총의 숲은 너무 작아 보였습니다. ‘몽골이 정말 나무가 자라기 힘든 곳이구나’라는 생각과 더불어 ‘17년간의 인간의 노력이라는 것이 이렇게 미약한 것인가’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은총의 숲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하얀 호수’를 방문했습니다. 풍광이 아름답고 몽골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겨 노래로 만들어 부를 정도로 그 지역의 유서 깊은 호수였습니다. 그런데 도착해서 보니 호수에 물이 별로 없었습니다. 이 목사님의 말씀에 따르면 가물었던 작년과 재작년에는 아예 호수의 바닥까지 말랐었다고 합니다. 몽골은 산업화 이전 대비 연평균기온이 2.5도에서 3도가 상승했습니다. 작년에 지구 전체의 평균온도가 산업화 이전 대비 1.5도가 오른 것에 비하면 몽골은 거의 그 두 배가 오른 것입니다. 몽골은 내륙국가이며 건조한 초원과 사막이 많습니다. 이런 조건 위에 지구온난화가 더해지면서 다른 지역보다 빠르게 기온이 상승하고 있습니다.

몽골은 전 국토의 70~80%가 초원입니다. 그런데 그 초원의 목초 생산성이 이전에 비해 절반정도 감소했습니다. 호수와 강과 습지가 마르니 풀이 마르고 풀이 마르니 가축들이 말라 죽어가고 있습니다. 최근 10년 사이에 4,500만 마리의 가축이 폐사했다고 합니다. 가축들이 죽으니 오랫동안 유목생활을 해온 몽골 사람들이 목초지를 버리고 수도인 울란바타르로 몰려 들어 도시빈민으로 살고 있습니다. 울란바타르의 인구 집중현상은 심각합니다. 전 몽골인의 절반이 살고 있습니다. 기온이 급격하게 오르고, 그로 인해 생태계가 파괴되고, 또 그로 인해 인간다운 삶이 무너진 몽골. 지금 몽골의 모습은 머지않아 인류 전체가 맞게 될 미래의 모습입니다. 멸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까이 와 있습니다.

2. 임마누엘의 복음서, 마태복음
많은 성서학자는 마태복음을 ‘임마누엘의 복음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첫 장인 1:23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이다.” 이는 본디 이사야서 7:14에서 나온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이사야서에 기록되지 않은 임마누엘의 뜻을 우리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뜻이다.’ 이 말씀은 앞으로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되어주실 것을 예고한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마지막 절인 28:20을 읽어보겠습니다.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이는 생전에도 우리와 함께하시던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이후에도, 부활하신 이후에도 우리와 함께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곧, 마태복음은 임마누엘로 시작해서 임마누엘로 끝나는 임마누엘의 복음서인 것입니다.

그런데 시작과 끝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을 읽다 보면 우리는 우리와 함께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픈 사람들과 함께하셨습니다. 마태복음 곳곳에는 예수님께서 아픈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의 병을 고쳐주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죄인들과도 함께하셨습니다. 마태복음 9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받던 세리 마태를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런 예수님을 보면서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런 말을 들을 정도로 예수님은 죄인과 함께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방인과도 함께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을 가장 큰 믿음이라 칭찬하셨고(8:10) 가나안 여인의 믿음도 귀하게 여겨주셨습니다.(15:28) 곧 예수님은 처음과 끝뿐 아니라 생애 전체가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특별히 마음 둘 곳 없던 연약한 자들과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이셨습니다.

그런데 왜 마태는 예수님의 생애를 ‘임마누엘’에 초점을 맞추어 소개했을까요? 마태가 처했던 역사적 상황이 가장 임마누엘에서 거리가 먼 상황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태 공동체가 처한 상황은 도저히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느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은 마태복음의 저작시기를 주후 80~90년경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보다 조금 전인 주후 70년에 로마의 장군 티투스에 의해 예루살렘성과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성전이 무너진 사건은 유대인들에게 있어 나라가 멸망한 것보다 더한 충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성전은 단순히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공간,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성전이 무너지자 유대인들은 희생제사를 드릴 수 없어져서 제사 중심의 종교를 경전 중심의 종교로 바꾸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유대교는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하는 유대기독교인들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유대교에서 축출했습니다.

곧 그 당시 유대 기독교인들의 상황은 이중적 멸망의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외세인 로마에 의해 국가와 성전이 무너지고 동족인 유대인들로부터도 추방을 당했습니다. 국가라는 보호막과 민족공동체라는 보호막이 동시에 사라졌습니다. 유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 것이 아닌가?’, ‘홀로 남은 우리가 거대한 로마와 유대교에 맞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라며 탄식했습니다. 마태는 그런 질문에 대해 이렇게 말해 준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전에만 계신 분이 아니시다.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새로운 성전이시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새로운 성전이요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하신다.’

3. 멸망 속 희망, 임마누엘
‘임마누엘의 복음서’인 마태복음의 절정은 25장입니다. 마태복음 25장은 임마누엘에 담긴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 우리가 어떻게 일상의 자리에서 임마누엘의 주님을 만날 수 있는지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는 여러 사람이 등장합니다. 먹을 것이 없는 사람, 마실 것이 없는 사람, 거할 곳이 없는 사람, 입을 것이 없는 사람 등. 그 사람들의 공통점은 결핍과 결여의 상황에 처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핍과 결여의 상황을 멸망에 가까운 상황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먹을 것, 마실 것, 거할 곳, 입을 것이 없는 상태가 지속되면 그는 죽기 때문입니다. 멸망하기 때문입니다. 로마와 유대교가 주류를 형성하던 그 시대에 유대 기독교인들은 소수자였습니다. 생존의 위협을 받았고 삶에 필수적인 의식주조차 해결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들은 죽음과 멸망을 직면하고 있었습니다. 그 멸망을 피하는 방법은 딱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해 주셨듯이 어렵고 힘들어도 서로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어 주는 것, 서로가 혼자가 아님을 일깨워주는 것, 서로에게 임마누엘이 되어주는 것뿐이었습니다.

몽골 은총의 숲의 현지 책임자는 침메드 씨입니다. 울란바타르 농과대학 교수로 은총의 숲을 처음으로 계획하셨던 최재명 교수님의 제자입니다. 침메드 씨는 2009년부터 지금까지 최 교수님을 도와 은총의 숲을 조성하고 관리해온 일꾼입니다. 아무것도 없던 맨땅을 나무 심기 좋은 토질로 바꾸고 몇 년간 묘목을 키우고 수많은 실패를 거쳐 은총의 숲을 만든 실질적 주역 중 한 명입니다. 현재 최 교수님이 은퇴하신 상황에서 침메드 씨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습니다. 은총의 숲을 떠나오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잠시 몽골의 현실을 둘러보고 돌아가는 우리의 마음도 이렇게 막막한데 이 땅에서 평생을 살아가는 침메드 씨의 마음은 얼마나 막막할까? 빠르게 황폐화 되어가는 고국의 땅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은 어떨까?’ 그러면서 침메드 씨에게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우리가 당신과 함께하고 있다’라는 우리의 마음이 전달되었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은 한두 번의 방문으로 전달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청파교회가 좀 더 자주 방문해야겠다’라는 다짐을 했습니다.

은총의 숲 일정 첫날 저녁이었습니다. 우리가 탄 버스가 도로를 벗어나 흙길에 올라섰을 때 서쪽 하늘에 크고 선명한 무지개가 떴습니다.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고 잠시 버스에서 내려 무지개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본 무지개 중 가장 무지개다운 무지개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멸망을 향해 미친 듯이 치닫고 있습니다. 기후재앙으로 인류가 멸망해가고 있는데도 전쟁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그런 인간들을 향해서 계속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희를 멸망하게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내가 너희와 함께하겠다. 내가 너희를 구원하겠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멸망의 상황에 놓인 이에게 임마누엘이 되어 주는 것은 하나님만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일이기도 합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인해 멸망 속에서도 희망을 체험한 우리가 멸망의 상황에 처한 이들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혼자가 아님을 일깨워줄 때 우리는 진정한 임마누엘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귀하고 아름다운 일을 함께 이루어가는 청파교회 교우들과 이 시대 믿음의 백성이 될 수 있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

멸망 속 희망, 임마누엘 (2026/08/02, 성령강림 후 제10주 예배)by 김재흥 목사님예배 실시간 방송 (다시 보기)[마 28:20][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
03/08/2026

멸망 속 희망, 임마누엘 (2026/08/02, 성령강림 후 제10주 예배)
by 김재흥 목사님
예배 실시간 방송 (다시 보기)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성령강림 후 제10주 예배 (2026년 8월 2일)말씀: 멸망 속 희망, 임마누엘본문: 마 28:20설교자: 김...

너희가 알지 못하는 나의 양식 (2026/07/26, 성령강림 후 제9주 예배) by 김재흥 목사님요 4:27~34[음성] http://www.chungpa.or.kr/pastorate/preach/preach_fi...
28/07/2026

너희가 알지 못하는 나의 양식 (2026/07/26, 성령강림 후 제9주 예배) by 김재흥 목사님
요 4:27~34

[음성] http://www.chungpa.or.kr/pastorate/preach/preach_files/s20260726.mp3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그 여자와 말씀을 나누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러나 예수께 "웬일이십니까?" 하거나, "어찌하여 이 여자와 말씀을 나누고 계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그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히신 분이 계십니다. 와서 보십시오.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닐까요?" 사람들이 동네에서 나와서, 예수께로 갔다. 그러는 동안에, 제자들이 예수께, "랍비님, 잡수십시오" 하고 권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나에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 하셨다. 제자들은 "누가 잡수실 것을 가져다 드렸을까?" 하고 서로 말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이루는 것이다.]

1. 피서와 피정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평안과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교우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길 빕니다. 이제 7말 8초, 본격적인 여름휴가 기간이 되었습니다. 예전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 시기에 휴가를 많이 가지요. 여름휴가를 우리는 피서(避暑)라고 부릅니다. 더위를 피해 쉬는 시간을 말합니다. 프랑스 언어권에서는 여름휴가뿐 아니라 휴가를 바캉스(Vacance)라고 하지요. 영어로는 Vacation이지요. 이 말들은 모두 라틴어 Vacatio에서 나온 말입니다. ‘비우다’라는 뜻입니다. 일상의 업무나 책임에서 벗어나 빈 상태를 만드는 것이 바캉스입니다. 많은 일과 복잡한 문제들이 하나둘 쌓여 우리의 머리와 마음속이 잡동사니로 가득 찬 서랍처럼 새로운 것을 더 넣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되면 우리는 바캉스에 대한 욕구가 커집니다. 떠나고 싶고 비우고 싶어집니다.

가톨릭에서는 피정의 전통이 있습니다. 피정(避靜)은 ‘피하여 마음을 고요히 한다’는 뜻입니다. 분주하고 복잡한 일상에서 벗어나 마음을 고요히 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간이 피정입니다. 저도 피정에 참여해본 적이 있습니다. 수도원에 들어가 3일 동안 휴대폰도 켜지 않고 묵언과 관상기도와 말씀 묵상과 산책을 했습니다. 잠도 자그마한 방에서 혼자 잤습니다. 분주했던 마음이 차분해지고, 복잡했던 머리가 청소되는 느낌이었습니다. 3일 후 한결 홀가분해져서 일상으로 복귀했습니다. 그런 비움의 시간은 삶에 필수적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은 온통 채움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끝없이 보고 듣고 먹고 구매하고 소유합니다. 물론 잠을 자면 보고 듣고 먹고 구매하고 소유하는 것을 멈추게 됩니다. 그러나 잠은 비움이 아니라 비의지적 ‘하지 않음’입니다. 그에 비해 비움은 단순히 ‘하지 않음’이 아니라 적극적 정화행위입니다. 이번 휴가를 보내실 때 평소보다 잠도 푹 주무시고 그것을 넘어 비움의 시간도 가지시면 좋겠습니다.

2. 예수님과 우물가의 여인
어느 날 정오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수가 성을 지나시게 되었습니다. 그 성에는 우물이 있었습니다. 피로하셨던 예수님만 우물 옆에 남으시고 나머지 제자들은 양식을 얻기 위해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우물 옆에 앉아 계신 예수님의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예수님은 뜨거운 이스라엘의 정오의 볕을 맞으며 물을 길어 올릴 두레박도 없이 우물 옆에 앉아 계셨고 때는 점심때였습니다. 뜨겁고 목마르고 배고픈 예수님. 왠지 불쌍하고 기운이 없어 보이지 않습니까? 그때 마침 한 사마리아 여자가 물을 길러 우물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사연이 많은 여인이었습니다. 여섯 번째 남자와 살고 있었습니다. 그 여인이 사람들이 거의 우물에 나오지 않는 정오에 홀로 나온 것도 그런 사연과 연관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보통 여인들은 아침과 저녁에 우물가에 물을 길러 나왔습니다. 우물가는 단지 물만 길어가는 곳이 아니라 아침에는 밤사이의 안부도 묻고 저녁에는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을 나누는 사귐과 대화의 장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그 여인 속에 진정한 믿음과 구원에 대한 깊은 갈망이 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대화를 통해 기꺼이 그 여인의 영적인 목마름과 배고픔을 채워주셨던 것입니다. 이야기를 마칠 때쯤 마을로 양식을 사러 들어갔던 제자들이 돌아왔습니다. 그 여인은 지고 왔던 물동이를 버려두고 다시 동네로 들어가 사람들에게 자기가 놀라운 사람을 만났다고, 아무래도 그가 그리스도인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물동이를 버려두고 갔다는 것은 그 여인이 더 이상 목마른 사람이 아니라 생명의 물을 마신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드러내고, 사람들을 만나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소개했다는 것은 그 여인이 더 이상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사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그 여인은 이제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3. 너희가 알지 못하는 나의 양식
여인이 동네로 들어가자 제자들은 마을에서 가져온 음식을 예수님께 드리며 말했습니다. “랍비님, 잡수십시오.” 그러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다.” 제자들은 “누가 예수님께 잡수실 것을 가져다 드렸을까?”하며 의아해했습니다. 그런 제자들을 보시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드신 양식이 무엇인지를 일러주셨습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이루는 것이다.” 그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뜨겁게 볕이 내리쪼이는 정오, 우물 옆에 혼자 앉아 계시던 뜨겁고 목마르고 배고프고 기운이 없어 보이던 예수님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물 한 모금, 빵 한 조각 드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힘 있고 당당하고 생기가 넘쳐 보이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며 사는 자가 맛보는 보람 속에는 그런 힘이 있는 것입니다.

놀라운 말씀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과 믿음생활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이 드신 양식을 우리의 양식으로 삼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양식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늘 우리가 살펴본 말씀을 가지고 말해본다면, 영혼이 목마르고 허기진 자의 갈증과 허기를 해결해 주는 것, 그래서 그로 하여금 그의 과거와 사람들의 평가에 짓눌려 지내지 않고 온전한 한 사람으로 서서 다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사람답게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수가성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에게 해 주신 일이 그런 일이었습니다.

4. 무엇을 먹으며 살고 있는가?
18,19세기 프랑스의 법관이자 미식가였던 브리야사바랭은 그의 책 「미각의 생리학」(1825년 발행)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를 말해 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 주겠다.” 그가 먹는 음식은 그 사람의 취향과 가치관을 드러내며, 결국 음식은 그 사람의 성격과 인격과 문화와 배경까지 보여준다는 말입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라는 책에서 그 말을 조르바라는 사람을 통해 이렇게 변주했습니다. “먹은 음식으로 뭘 하는가를 가르쳐 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나는 말해 줄 수 있어요. 혹자는 먹은 음식으로 비계와 배설물을 만들고, 혹자는 일과 좋은 유머에 쓰고, 내가 듣기로는 혹자는 하느님께 돌린다고 합디다.”( 「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106쪽) 장 브리야사바랭이 음식 자체에 의미를 두었다면 카잔차키스는 그 먹은 음식으로 행한 일에 의미를 둔 것입니다. 무엇을 먹는가도 중요하고, 그 먹은 것으로 무엇을 행하는가 또한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함이라는 하늘의 양식을 드셨고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욕망을 먹고 욕망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욕망과 욕망성취 자체가 죄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상식적이고 합법적이고 사회에도 유익하다면 문제될 것이 없지요. 그러나 욕망에 이끌려 사는 사람이 타자와 공동체를 도구화하고 수단화할 뿐 아니라 결국 그 자신도 욕망의 도구와 수단으로 전락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저는 교회 밖 사람들을 별로 만날 일이 없는데 목욕탕을 가면 요즘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런데 최근 1, 2년 목욕탕에 갈 때마다 듣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식.’ 사람들이 주식 이야기밖에 안 하는 것 같습니다. 정치인들이 정책을 가지고 싸워도 그것과 연관된 주식을 이야기하고, 전쟁이 일어나도 그것과 연관된 주식 이야기만 합니다. 정책의 공공성과 전쟁으로 죽어가는 생명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습니다. 물론 주식 자체가 문제는 아니지요. 모든 관심이 주가의 등락에만 있고 사회와 다른 생명의 아픔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지요.

담임목사가 되고 나서 힘들어진 것이 많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그렇게 자주 가던 농활봉사나 건축봉사를 가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농활과 건축봉사는 주로 여름수련회나 토요일에 많이 갔습니다. 그런데 담임목사가 되고 나니 수련회도 가지 못하고, 주일 설교준비로 인해 토요일에도 시간을 못내는 것입니다. 물론 제가 더 일찍 설교준비를 마치면 되는데 그게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이런 마음을 먹었습니다. ‘설교문을 다 외우지 못하더라도 앞으로는 농활은 가야겠다.’ 농활봉사나 건축봉사를 가면 물론 힘이 듭니다. 특히 여름에 일하다보면 땀으로 속옷까지 다 젖습니다. 그런데 일을 마치고 한가득 쌓여 있는 감자나 옥수수를 볼 때, 피사리를 끝내고 가지런해진 넓은 논을 볼 때, 한 층 한 층 올라가는 건물을 볼 때면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것 같은 뿌듯함을 느끼곤 했습니다. 물론 저녁밥도 평소보다 더 맛있게 먹었지요.

서두에 비움이 중요하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욕망으로 가득 찬 사람은 하늘의 양식을 먹을 수 없습니다. 그릇된 욕망을 비운 사람만이 하늘의 양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그릇된 욕망을 양식으로 삼고 그 욕망의 힘으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 뭇생명과 공동체를 파괴하는 이들이 넘쳐나는 시대입니다. 이제 그릇된 욕망은 그만 먹고 ‘하나님의 뜻을 행함’이라는 양식을 먹으며 살아갑시다. 그 양식이 주는 힘으로 쓰러진 생명들을 다시 온전한 생명으로 일으켜 세우며 살아갑시다. 그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선물처럼 주시는 뿌듯함과 보람을 느끼며 살아갑시다. 그 귀하고 아름다운 일을 함께 이루어가는 청파교우들과 이 시대 믿음의 백성이 될 수 있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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