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서울대교구 답십리성당

천주교 서울대교구 답십리성당 천주교 서울대교구 답십리성당

30/07/2026

미사강론
(2026. 7. 30. 목 / [녹] 연중 제17주간 목요일)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3,47-53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47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48 그물이 가득 차자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49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50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51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
제자들이 “예!” 하고 대답하자, 5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53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들을 다 말씀하시고 나서 그곳을 떠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연중 제17주간 목요일
(2026. 7. 30 ; 답십리 본당)

유다인의 율법 규정에는, 먹을 수 있는 음식과 먹을 수 없는 음식이 분명하게 구분된다. 이 규정은 시나이산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에 들어 있는데(레위 11장), 이에 따르면 네 발 달린 짐승 중에서 굽이 두 쪽으로 갈라지고 새김질하는 동물만 먹을 수 있기에, 낙타나 토끼, 돼지 등은 부정한 동물로 여겨져 먹을 수 없었다. 물고기도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어야만 먹을 수 있었다. 따라서 뱀장어나 미꾸라지, 게, 새우는 먹을 수 없다. 그렇기에 어부들은 그물을 끌어 올린 후 선별작업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예수님 말씀처럼 율법 규정에 합당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그런데 이 비유의 핵심은 그물로 고기를 잡는 것에 있지 않고, 물가에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별하여 나쁜 것은 버리는 데에 있다. 여기서 “그물”로 번역된 그리스어(σαγήνη)대로라면 저인망(底引網)을 가리킨다. 즉 떼 지어 다니는 고기를 대량으로 잡기 위해 두 배 끝에 그물을 고정시켜 움직이는 배로 그물을 끌어 그곳을 지나가는 고기들을 잡는 방식이기 때문에 그물이 지나가는 곳의 거의 모든 종류의 고기들을 잡을 수 있다.
그리고 “온갖 종류의 고기”(παντὸϛ γένουϛ)를 의미하는 그리스어는 각종 고기뿐만 아니라 저인망으로 잡을 수 있는 각종 모든 생물을 가리킨다. 이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은 인종과 성별, 악인과 의인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됨을 뜻한다.

한편,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에서 “좋은 것”으로 번역된 그리스어(τὰ καλὰ)는 ‘적합한 것들, 쓸모있는 것들’이라는 의미이며, “나쁜 것”(τὰ σαπρὰ)은 ‘썩은 것들, 무가치한 것들’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갓 잡아 올린 고기나 바다 생물이 썩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무가치한 것들’이라는 의미로 쓰였다. 결국 “나쁜 것들”은 ‘무가치하고 쓸모없는 것들’을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 ‘세상 종말에 악한 자들’은 하느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하느님의 나라에서 전혀 쓸모없는 “악한 자”라고 볼 수 있다.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는 어부가 쓸모 있는 고기만 그릇에 담고, 쓸모없는 고기는 내버리는 것처럼, 세상 종말의 때에 있을 심판의 양상도 똑같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여기서 “종말”로 번역된 단어(συντελεία)는 ‘완료, 완성, 끝, 종결’을 뜻하는 명사이므로, 여기서 심판의 때는 곧 종말의 때를 말한다. 그때에는 무엇보다도 ‘가려내는 작업’이 있게 된다. 여기서 “가려내다”는 의미로 번역된 그리스어(ἀϕοριουσιν)는 ‘경계를 지어 어떤 것을 다른 것들에서 구별하다, 분리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뒤엉켜 존재하고 있던 악한 자들은 이제 의인들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의인과는 영원히 다른 운명에 던져지게 되는 것이다.

또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에서 “던져 버릴 것이다”로 번역된 단어(βαλουσιν)는 어부가 무가치하고 쓸모없는 고기들을 인정사정없이 던져 버리는 것처럼, 최후 종말의 심판자이신 하느님은 ‘의로움’이 결핍된 악한 자들에게 조금도 동정을 보이지 않고, 영원히 타오르는 불구덩이 속에 던져 버릴 것이다. 하느님의 자비의 마음은 세상이 끝나기 전까지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일단 세상이 끝나고 마지막 심판 때가 되면, 악한 자들을 향해 결코 열리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에서 “자기 곳간”은 직역하면 ‘그의 보물’, ‘그의 창고’라는 뜻인데, 비유적으로 교육과 훈련을 통해 축적한 지식의 마음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구절은, 집주인이 자기 창고에서 필요에 따라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을 자유롭게 꺼내 사용하며 가족 구성원들에게 마음껏 나누어 주는 것처럼, 하늘나라의 제자가 된 율법학자들은 옛 진리, 즉 구약의 가르침과 새 진리, 즉 율법의 근본 의미와 정신을 바르게 해석해 주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필요에 따라 적절하게 사용하고 교육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까? 그것을 분명히 해야 마지막 날 하느님의 그물에서 좋은 것으로 구분될 수 있는데, 그릇에 담겨지는 고기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채워야 할지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29/07/2026

미사강론
(2026. 7. 29. 수 / [백]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1,19-27
그때에 19 많은 유다인이 마르타와 마리아를
그 오빠 일 때문에 위로하러 와 있었다.
20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고,
마리아는 그냥 집에 앉아 있었다.
21 마르타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22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23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니,
24 마르타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26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27 마르타가 대답하였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2026. 7. 29 ; 답십리 본당)

사랑을 고백하려면 진지해야 한다. 그래야 그 마음을 제대로 읽을 수 있다. 또 마음은 있지만 표현하지 않으면 그 진심을 놓칠 수 있다. 기회가 되면 적극적으로 마음을 표현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상대방도 깊이 헤아려 볼 것이다. 그런데 꼭 말을 해야 하느냐? 할 때는 해야 한다. 이심전심을 확인하는 순간이 될 것이다.

마르타는 마리아보다 더 활동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식탁에서 시중을 드는 일(루카 10, 40)에서도 그랬고, 오늘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하고 말하는 것을 봐도 그렇다. 마르타는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라며 오빠를 궂이 살려 달라고 청하지 않으면서도 예수님의 특별한 개입을 희망하고 있다. 어떻게 해서든 핏줄인 라자로를 살려내고자 하는 절박한 심정이 그 안에 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마르타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나는 것을 생각했고 여전히 예수님께서 라자로가 죽기 전에 함께 계셨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담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하고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는 말씀은 부활이 현재 사건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믿음 안에 있는 한 영원한 생명은 죽은 다음에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여기’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과 함께하고 있다면 오늘부터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요, 지금 구원을 이루는 것이다.

마르타는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함으로써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신앙고백의 표양을 보여 주었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믿었습니다.’의 고백이 아니라 ‘믿습니다.’라는 현재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께 나의 믿음을 고백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좀 더 적극적으로 했으면 좋겠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사랑의 실천에 더디게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면 아직도 입술에 익숙한 믿음의 고백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으로 말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나의 삶을 통해서 말씀하시도록 해야 한다. 스스로 행하지 않으면서 예수님을 전한다고 하면 오히려 예수님께 다가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다”(히브 11, 6)라고 했다. 우리의 믿음을 사랑의 실천으로 고백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성 루치아노는 “나는 그리스도교 신자입니다. 이것이 최고의 명예이며 또 하느님께 받은 최대의 은혜입니다.”라고 고백했다. 여러분도 신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만큼 사랑하십시오! 우리 믿음의 고백은 말로나 혀가 아니라 진리 안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데 있다.

28/07/2026

미사강론
(2026. 7. 27. 월 / [녹] 연중 제17주간 월요일)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3,31-35
그때에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군중에게 31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32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33 예수님께서 또 다른 비유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34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이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으셨다.
35 예언자를 통하여 “나는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리라.
세상 창조 때부터 숨겨진 것을 드러내리라.”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연중 제17주간 월요일
(2026. 7. 27 ; 답십리 본당)

‘용두사미’(龍頭蛇尾)라는 말이 있다. 용 대가리와 뱀 꼬리라는 말로, 시작은 요란하고 그럴듯하지만, 끝에 가서는 일이 흐지부지 흐려지는 것을 빗대어 말한다. 반면에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있다. 과감한 사람은 시작은 잘 하지만 끝을 맺지 못하고, 우유부단하거나 소심한 사람은 아예 시작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서 나온 말이다.

이처럼 사람이 하는 일은 거창하게 시작하여 흐지부지되는 일이 많다. 그러나 자연은 눈으로 볼 수 없게 시작하여 점점 거창해지고 아름다워진다. 겨자씨가 자라나 큰 나무가 되고, 누룩이 밀가루 속에서 부풀어 오른다. 이처럼 하느님의 나라는 사람의 법이 아니라 자연의 순리가 지배하는 나라이다. 달리 말해서 하느님의 나라는 내면에서 시작하여 겉으로 드러나게 된다. 말씀의 씨앗이 내 마음 안에서 자라나 기쁨으로 말씀을 실천할 때, 하느님의 나라는 성취된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순리를 따라 해야 한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라면 작고 큰 것이 따로 없다. 모두가 큰일이다. 내 마음대로 하면 인간의 일일 뿐이고, 순명으로 하면 주님의 일이 된다. 따라서 일상 안에서 주님의 일을 행함으로써 하느님의 나라를 완성해야 한다.

하지만 세상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완성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 세상에서는 잘난 척하면 헐뜯는 사람이 생기고, 아는 척하면 무시하려는 사람이 생긴다. 그리고 힘센척하면 해치려는 사람이 생기고, 있는 척하면 뺏으려는 사람이 생긴다. 이처럼 세상은 인간의 인위적인 법이 지배한다. 그러나 우리 믿는 이들은 하느님의 법을 따라야 한다. 물이 흐르면 물이 흐르는 대로,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살아야 한다. 그렇게 자연스러워야 한다. 모두를 품어야 한다. 그리하면 지금은 힘이 들지만 머지않아 큰 나무가 되고, 부풀어 오를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작은 일이라고 생각되는 것도 반드시 큰일을 위한 준비가 되니만큼 작은 일에 충실해야 하겠다.

그래서 서두르지 않아도 때가 되면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된다. 누룩은 때가 되면 안에서 밖으로 부풀어 오른다. 마찬가지로 생명을 지니고 있으면 성장한다. 그렇지만 그 열매를 얻기까지는 햇빛과 비, 그리고 거름도 필요하다. 주변의 잡풀을 뽑아주어야 하고 땀과 정성이 담겨야 한다. 그래야 영양을 제대로 취할 수 있고 튼실한 열매를 맺게 된다.
그렇게 수고와 땀에 따라서 하느님의 나라는 각 사람에게 다르게 다가온다. 하느님께서는 똑같은 열매를 주고 싶어 하지만 관리하지 않는 사람은 튼실한 열매를 수확할 수 없는 법이다. 우리 마음 안에 누룩처럼 부풀어 오를 수 있는 하느님의 힘이 있고 겨자 나무가 될 생명의 씨앗을 품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을 지닌 하느님의 사람이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주신 각자의 탈란트를 찾고 가꾸는 기쁨을 간직하시기 바란다. 혹 나에게 주어진 몫이 미약하게 보일지라도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니 결코, 작지 않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지금은 희미하게 보이나 때가 되면 하느님의 능력을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5/07/2026

미사강론
(2026. 7. 25. 토 / [홍] 성 야고보 사도 축일)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0,20-28
20 그때에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고 무엇인가 청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부인이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2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24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겼다.
25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26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27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28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성 야고보 사도 축일
(2026. 7. 25 ; 답십리 본당)

오늘 제1독서의 “우리는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우리와 하느님의 관계를 알려 주는 적절한 표현이다. 질그릇은 글자 그대로 화려하지 않고 투박하며 값지지 않은 평범한 그릇이다. 그리고 질그릇은 쉽게 깨질 수 있다. 그런 탓에 우리는 질그릇과 같은 존재이다. 이 비유는 우리의 현실을, 인간이 지닌 나약함을 잘 보여준다. 이렇게 우리는 인간으로서 나약한 존재이지만 무엇보다 값진 보물을 지니고 있다. 하느님의 말씀과 그분께서 보여주신 구원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는 힘이 없지만 우리 안에 담긴 보물을 통하여, 하느님의 힘을 통하여 어려움 속에서도 말씀을 선포하고 구원을 향하여 간다.

복음은 제자들의 모습을 통하여 우리의 나약함을, 인간적인 욕심과 생각들을 이겨내도록 일깨워 준다. 세상은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을 좋아하고 다른 이들을 다스리는 것을 추구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와 정반대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높은 사람은 섬김을 받고 낮은 사람은 섬겨야 한다는 세상의 생각을 뒤집는 말씀이다.

역설적이지만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의 청과 그녀의 두 아들의 바람은 그들이 꿈꾸던 세상의 방식은 아니었지만, 예수님의 부활 이후 시작된 교회공동체를 통하여 성취된다. 예수님의 공동체는 경쟁과 적자생존으로 높은 자리에 올라 남을 지배하려는 권력 공동체가 아니라, 첫째가 되려는 이는 종이 되어야 하고,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며, 많은 이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신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 기념하는 야고보 사도 역시 처음에는 예수님의 뜻을 잘 알지 못하면서 따르고 있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한 후에는 그분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처음에는 예수님께 자신을 따르라고 하였지만, 나중에는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고 그분을 위해 순교하였다. 이제는 우리도 예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그것을 실천하면서 그분을 닮아갈 수 있도록 결심하였으면 한다.

25/07/2026

미사강론
(2026. 7. 24. 금 / [녹] 연중 제16주간 금요일)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3,18-2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8 “너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새겨들어라.
19 누구든지 하늘 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길에 뿌려진 씨는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
20 돌밭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21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
22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23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연중 제16주간 금요일
(2026. 7. 24 ; 답십리 본당)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는 설명이 달려 있다. 이 비유는 농사에 관한 내용이 아니라, 말씀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사람들이 다니는 길과 흙이 많지 않은 돌밭과 가시덤불 때문에 씨가 자라지 못하는 땅과 좋은 땅은 말씀을 들은 사람들을 의미한다. 말씀은 이미 뿌려졌다. 구원의 기쁜 소식은 예수님을 통하여 이미 사람들에게 선포되었다. 이제 그 말씀은 우리 안에서 자라난다.

비유의 해설은 가장 먼저 ‘나는 어떤 땅일까?’를 묻게 만든다. 길가, 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 우리의 상황은 이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똑같은 말씀이 선포되었지만, 그 말씀이 우리 안에서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는 각자 다르다. 말씀이 달라서가 아니라 어떻게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삶에서 실천하는지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

비유의 설명은 말씀을 받아들이는 다양한 사람들에 대한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를 향한 호소처럼 들리기도 한다. 우리는 변할 수 있고 언제든지 좋은 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말씀이 내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면, 귀 기울여 말씀을 들어야 한다. 그 말씀의 의미를 찾고 나를 위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도 말씀을 통하여 위로받고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세상의 걱정거리나 유혹은 항상 있다. 그것이 우리를 포기하게 만들지 못하도록 꾸준히 기도하면서 말씀을 따라 살아가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렇게 한다면 우리도 ‘좋은 땅’이 되어 갈 것이다.

23/07/2026

미사강론
(2026. 7. 23. 목 / [녹] 연중 제16주간 목요일)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3,10-17
그때에 10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12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13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14 이렇게 하여 이사야의 예언이 저 사람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15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16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연중 제16주간 목요일
(2026. 7. 23 ; 답십리 본당)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마음의 문을 완전히 닫고 계속 반대만을 일삼는 유다인들에게 커다란 실망감을 드러내신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하고 묻는데, 이에 예수님은 “너희에게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라고 대답하신다. 즉 제자들은 하느님 나라를 원하고 맞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기에 그 신비를 알아듣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럴 마음의 자세를 갖추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이다. 실상 하늘나라는 신비이기에 아무에게나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맞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이들에게만 드러난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라고 하신다. 언뜻 보면 매우 불편부당하고 편애하는 듯한 말씀이다. 열심한 사람들에게 복을 많이 주시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구태여 안 그래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에게 그 가진 것마저 빼앗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오히려 부족한 사람에게 더 큰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 조금이라도 상황이 좋아지도록 하는 것이 맞지 않나 싶다. 지금 한국 사회에선 빈부(貧富)의 양극화(兩極化)가 더 심해지고 있는데, 마치 그것을 옹호하는 듯한 말씀처럼 들린다.

하지만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라는 말은 정신차리고 살지 않으면 좁쌀 서 말도 못 지닌다는 의미이며 영적으로도 그렇다는 뜻이다. 자기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고, 자기가 가진 것에 관한 관심도 없기에 그것을 빼앗기거나 없어져도 그 사실조차 모른다는 의미이다. 결국 하느님께서는 열정과 관심을 가진 사람에게는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을 넉넉히 주시지만, 뭐가 뭔지 모르고 애초에 삐딱선을 타고 있는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쥐여주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감각적으로 지각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깨닫게 하려는 의도이다. 그러나 그들은 보면서도 보지 못하고 들으면서도 듣지 못한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그들은 마음의 문을 닫고, 귀를 막고 눈을 감았기 때문에 구원의 은총을 스스로 발로 차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고, 비유의 말씀을 알아들을 힘도 없다.

하늘나라는 신비라서 아무에게나 보이는 것이 아니라 준비된 이들에게만 보인다. 여기에는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 보는 열린 마음, 들리는 것을 넘어 들을 줄 아는 열린 마음, 그리고 자신의 의지와 욕망을 온전히 주님께 맡기고 의탁할 줄 아는 열린 정신이 하늘나라의 진리를 향해 나아가게 한다. 아무쪼록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날이 아니라 눈과 귀와 마음을 열어 더 받아 넉넉해지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다.

23/07/2026

미사강론
(2026. 7. 22. 수 / [백]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0,1-2.11-18
1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2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12 들여다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13 그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14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
15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6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17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18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2026. 7. 22 ; 답십리 본당)

오늘 기념하는 마리아 막달레나는 교회 역사에서 오랫동안 큰 오해를 받아왔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마리아 막달레나는 매춘부였다가 예수님을 만나 회개한 여인으로 간음하다 잡힌 여인, 일곱 마귀에 사로잡혀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나면서 생이 완전히 바뀐 여인으로, 베타니아에서 예수님께 순 나르드 향유를 부은 여인 등으로 다양하게 설명하였다. 그러나 정작 그 어디에도 마리아 막달레나와 죄 많은 여인이 동일 인물이라는 근거가 없다. 복음서가 알려주는 기록을 종합하면, 고향은 막달라, 이름은 마리아, 한때 일곱 마귀에 시달리며 고생했으나 은혜롭게도 예수님을 만나 치유를 받았다는 것, 예수님을 만난 이후 지니고 있던 전 재산을 털어 그분과 사도들의 생계에 힘을 보탰다는 것,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에서 지키고 있었다는 것, 예수님 부활의 최초 목격자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마리아에게 제일 먼저 당신의 부활하신 몸을 보여주셨을까?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던 십자가 밑에 있었고, 부활하신 무덤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예수님과 늘 함께하던 제자들은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붙잡히자마자 뿔뿔이 흩어졌고, 죽음 뒤에는 다락방에 숨어서 벌벌 떨고 있었다.

그러나 마리아 막달레나는 삼엄하고 살벌했던 예수님의 처형 현장인 골고타 언덕을 성모님과 함께 끝까지 지켰다. 그뿐만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님의 시신을 정성껏 수습했다. 모두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이시지만, 가장 두렵고 힘든 순간에 함께 있었던 마리아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마리아에게 제일 먼저 나타나셨고, 당신의 부활을 처음으로 전할 수 있는 영광까지 주신 것이다. 이런 마리아에게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사도 중의 사도”라는 칭호를 선물하셨다. 예수님의 인생 곡선이 절정에 도달했던 시절, 잘 나가던 시절, 공생활 기간에도 그분께 충실했지만, 급격히 하강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던 수난 시기, 특별히 십자가의 길을 걸으실 때 역시 그분께 충실했던 마리아 막달레나였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마리아 막달레나가 당신을 애타게 찾으면서도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자 먼저 다가가시고 마리아를 불러주시듯이 언제나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시고, 먼저 우리를 부르고 계시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의 고정관념이나 편견에 사로잡혀 있을 때는 자기 옆에 계신 예수님도 동산지기로 만들 수 있음을 명심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깨어있는 자세로 그분을 뵙고 “나의 주님!”으로 맞아들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

23/07/2026

미사강론
(2026. 7. 20. 월 / [녹] 연중 제16주간 월요일)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2,38-42
38 그때에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스승님이 일으키시는 표징을 보고 싶습니다.”
39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
그러나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40 요나가 사흘 밤낮을 큰 물고기 배 속에 있었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사흘 밤낮을 땅속에 있을 것이다.
41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42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와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연중 제16주간 월요일
(2026. 7. 20 ; 답십리 본당)

오늘 복음 앞에 나오는 내용을 보면, 예수님께서 마귀 들려 눈이 멀고 말을 못 하는 사람을 고쳐 주시자 바리사이들이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마귀들을 쫓아내지 못한다.”(마태 12, 22-24)라고 모독하였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스승님, 스승님이 일으키시는 표징을 보고 싶습니다.”라며 유혹한다. 이 두 표현은 하느님의 아드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아드님이 하신 일을 마귀가 했다고 모독하였고, 기적을 요구함으로써 하느님의 아드님의 능력에 대해 의심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개탄하시며 회개를 촉구하신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라는 말씀에서 “악한 세대”라는 말은 단지 마음이나 행실이 악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까지 치달은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마태 17, 17)를 의미한다. 사실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이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청한 것은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모함할 구실을 찾기 위한 완악함과 비뚤어진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절개 없는 세대”라는 말이 ‘간음하는 세대’라고 번역할 수 있듯이, 마치 부부의 신의와 같은 하느님과의 계약에 불충하고, 신의를 지키지 않는 절개 없음을 의미한다.

사실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는 표징을 요구하지만, 표징을 보았더라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이 없이는 표징을 알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표징을 보았다고 해서 모두가 믿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서, 죽은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아직 살아있는 형제들에게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루카 16, 30)라고 간청했을 때, 아브라함은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루카 16, 31)라고 말한다. 그들의 마음이 완악하고 불신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는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 따라서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음을 깨닫습니다.”(히브 11, 1-3)라고 말한다.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를 향한 예수님의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회개이다. 요나의 표징으로 니네베 사람들이 회개한 것처럼, 표징은 회개를 통해 믿음을 가져온다. 그렇지만 오늘 복음에서 종교 지도자들은 단순히 놀라운 일을 보고자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한다. 그들의 요구는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것이었다.

믿음이 없는 이들에게 표징은 필요하지 않으며 아무런 의미도 주어지지 않는다. 표징은 회개와 믿음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표징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드러내고, 믿는 이들이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하느님과 함께” 걸을 수 있도록 이끌어 준다. 그러니 우리는 굳이 표징을 보여주지 않아도 믿는 이들이 되어야 한다. 사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는 표징들이다. 우리가 주님께 바라고 청해야 할 기적은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 변화되는 것’이다. 우리 눈앞에 대단한 기적이 일어난다 하여도, 그것이 기적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마음과 눈이 없다면 결코 기적을 보고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귀를 막으면 비오는 소리뿐 아니라 천둥치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던 완고한 마음을 돌려 예수님을 향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17/07/2026

미사강론
(2026. 7. 17. 금 / [녹] 연중 제15주간 금요일)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2,1-8
1 그때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였다.
2 바리사이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4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그도 그의 일행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지 않았느냐?
5 또 안식일에 사제들이 성전에서 안식일을 어겨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율법에서 읽어 본 적이 없느냐?
6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7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8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연중 제15주간 금요일
(2026. 7. 17 ; 답십리 본당)

처음 만난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첫눈에 반해서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어떤 매력에 이끌렸다는 것이지, 진정한 사랑의 모습과는 다를 것이다. 사랑하려면 많은 것을 알아야 한다. 상대의 장점과 단점,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꿈과 목표 등 그 사람에 대해서 하나부터 열까지 잘 알아야지만 사랑할 수 있다. 또한 서로에 대하여 알게 된 것을 공유하고 서로 배려해야 한다. 상대와 자신의 모습이 다름을 인정하고 그 거리를 좁혀 갈 때 사랑은 지속될 수 있다. 그리고 다름을 같음으로 만들어 가려면 상대를 배려하고 내 것을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함께 생활하게 된다. 함께 즐거워하고 행복해하며, 때로는 함께 아파하고 그 아픔을 견디며 살아간다. 그렇게 서로 닮아 가며 하나가 되는 것이 사랑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이러한 사랑의 관계로 이끌어 가신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알려 주신다. 무엇을 좋아하시고 무엇을 싫어하시는지, 무엇을 바라시고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려 주신다. 이를 기록해 놓은 것이 바로 ‘율법’이다. 율법에는 당신께서 ‘너희의 하느님이 되어 주고, 너희는 그분의 백성이 되게 하겠다.’(신명 26, 16-19 참조)하시며 이스라엘 백성과 사랑의 관계를 맺고자 하신 하느님의 의리와 신의가 포함되어 있다. 율법이라는 앎을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다. 함께 살아가고자 같은 생각과 뜻을 가지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내 것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것으로 채우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뜻으로 자신을 채우지 않았다. 율법을 통해서 사람들을 통제하고 권위를 세워 자신을 드러내려는 생각으로 가득하였다. 그들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사랑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하느님의 자비와는 멀어져 있었고 규정과 규정 준수에만 얽매여 있었다.

우리 또한 나름의 규칙과 법을 정해 놓는다. 교회 안에서도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한 법을 정해 놓았다. 그 법이 누구를 위한 법이고 규칙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라. 내가 편하려고, 나에게 위로와 희망과 즐거움을 주려고 만든 법인지, 아니면 진심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 뜻대로 살아가고 싶은 마음에서 지키는 법인지 성찰해 보았으면 한다.

16/07/2026

미사강론
(2026. 7. 16. 목 / [녹]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1,28-30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2026. 7. 16 ; 답십리 본당)

가볍고 편한 멍에가 세상에 존재할까? 하지만 실상 무겁고 불편해야 멍에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날마다 그런 멍에를 짊어지고 산다면, 그것이 무거운지도 모른 채 살아갈 것이다. 그러다가 그 무게에 짓눌려 어깨는 망가지고 마음도 갈기갈기 찢긴 자기 자신을 발견한 뒤에야, 이 멍에를 어떻게, 왜 짊어지게 되었는지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는 그 고민의 끝자락에서 멍에로 말미암은 고통과 짓눌림의 원인을 내가 아닌 남에게서 찾고 멍에를 사정없이 내동댕이칠 것이다.

사제는 미사를 시작하기 전에 제의를 입으며 침묵 가운데 “주님, 주님께서는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고 하셨으니 제가 주님의 은총을 입어 이 짐을 잘 지고 가게 하소서. 아멘!”이라고 기도한다. 지금 제가 메고 있는 멍에의 무게를 살펴보면 결코 가볍지 않다. 어깨에 두른 영대와 몸에 걸치는 제의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살지 못할 때도 있고, 누군가를 위한 희생을 스스로에게 강요할 때도 있다. 때로는 그 무게에 쓰러져 아무것도 하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리하셨던 것처럼 다시 일어선다. 그분께서는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시며 세 번이나 넘어지셨고, 다시금 묵묵히 일어나셨다. 그 멍에를 내려놓고 싶다고 피땀 흘리시며 아버지께 기도하셨고, 수많은 모욕과 조롱을 받으시면서도 그 무게를 견디어 내셨다. 예수님의 멍에가 무겁지 않고 고통스럽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 무게와 고통보다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이 더 크셨기 때문이다.

멍에는 결코 가볍지 않다. 그리고 내 멍에가 다른 사람들의 멍에보다 더 고통스럽고 무겁게 느껴진다. 그 무게를 견딜 수 있게 지탱해 주는 것은 바로 사랑이다. 멍에가 가벼워지거나 고통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어려움을 견디고 버텨 내는 것이다. 오늘도 사랑으로, 예수님에 대한 사랑으로 기꺼이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예수님께 나아가자.

Address

서울시 동대문구 전농로 29
Seoul
02605

Website

Alerts

Be the first to know and let us send you an email when 천주교 서울대교구 답십리성당 posts news and promotions.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used for any other purpose, and you can unsubscribe at any time.

Shortcuts

Sh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