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운교회 청소년부

청운교회 청소년부 모두가 함께 만들어가는 청운교회 청소년부의 페이지입니다. 대한 예수교장로회 청운교회 청소년부의 페이지입니다.
예배시간 : 주일 AM08:00-09:30(1부)
AM09:30-11:00(2부)
예배장소 : 청운교회 B1 그레이스홀

2017 비전트립 단원을 모집합니다. 이번에도 은혜충만한 준비&비전트립 시간이 되도록 기도해주세요. 관심있는 학생들은 많이많이 지원해주세요~!
01/10/2016

2017 비전트립 단원을 모집합니다. 이번에도 은혜충만한 준비&비전트립 시간이 되도록 기도해주세요. 관심있는 학생들은 많이많이 지원해주세요~!

2016 청운청소년부 2학기 제자학교 & 비전트립 대모집!!기다리고 기다리던! 2016년도 2학기 청소년 제자학교가 개강합니다!!2학기 제자학교는 2017년 1월에 떠나는 비전트립 및 선교훈련과 연계하여 진행합니다....
24/08/2016

2016 청운청소년부 2학기 제자학교 & 비전트립 대모집!!

기다리고 기다리던!
2016년도 2학기 청소년 제자학교가 개강합니다!!
2학기 제자학교는 2017년 1월에 떠나는 비전트립 및 선교훈련과 연계하여 진행합니다.
선교에 대한 열정이 있는 친구들! 선교에 대하여 좀더 알고 싶은 친구들 모두 환영합니다!!
관심 있는 학생들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11/07/2016

주일 청소년부 예배
16.07.10
▶I Believe

[이사야 11장 6-9절]
06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07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08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09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여러분이 하나님의 비전을 품고, 그러기 위해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혹성탈출’이라는 영화를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이 영화의 내용은 먼 미래 테일러 선장과 그의 일행이 오랜 시간 우주여행을 하다가 어떤 행성에 불시착하게 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 행성에는 말을 하는 원숭이가 있었고 테일러 일행과 마주친 원숭이들은 그들을 잡아 연구를 하게 됩니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테일러 일행이 탈출에 성공하나 해변가에 쓰러져 있던 자유의 여신상을 보고 오열하는 장면이 그려지며 영화는 끝이 납니다.
이후의 시리즈에서 유인원들이 지능을 가지고 자신들의 세력을 만들게 되는 과정이 그려집니다. 지구에 어떤 바이러스로 인해 원숭이를 제외한 모든 동물들이 죽게 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애완동물로 원숭이를 키우기 시작하는데, 그 중 시저라는 원숭이가 인간들에게 엄청난 학대를 받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 때 그 학대를 견디다 못한 시저가 인간에게 외마디 소리를 외칩니다.
“No”. 인간의 학대에 대해 시저가 ‘No’를 외치면서 유인원들의 반란이 시작됩니다.

1950년대 이후 제작된 영화에서 원숭이들은 바로 흑인을 상징합니다. 혹성탈출 영화의 작가는 결국 백인우월주의가 팽배하던 사회에서 백인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흑인이 지배하는 사회가 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의미를 바로 직전에 언급한 ‘No’라는 단어를 통해 단편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950년대에 흑인 인권 운동 역사의 시발점으로 불리는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버스에는 흑인칸과 백인칸으로 나뉘어 있었고, 가난한 사람들이 주로 탑승하는 버스의 이용자 중 약 7-80%는 흑인이었기에 흑인들은 버스에 자리가 충분히 있었음에도 불편하게 버스를 이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때 ‘로자 파크스’라는 흑인 여성이 백인칸에 앉아 있다가 백인의 이동하라는 명령에 단호하게 “No”라고 외칩니다. 시저가 했던 ‘No’라는 단어는 결국 백인사회에 대해서 강력하게 차별과 편견에 순응하지 않겠다는 외마디 외침과 같은 외침이었습니다.
이후 로자 파크스는 백인들에게 구타를 당하고 감옥에 갇히기까지 합니다. 그녀를 돕기 위해 수많은 흑인들은 인권 운동을 펼쳤고 이 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만으로 많은 흑인들은 더 큰 차별을 당하기도 하고 직장을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여기서부터 흑인 인권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의 꿈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비전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비전이 혹시 의사가 된다거나 판사가 되는 것입니까? 여러분의 꿈이 유명한 배우가 된다거나 돈을 많이 버는 사업가가 되는 것은 아닙니까? 의사가 되면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우리가 꿈을 이야기 할 때 우리의 꿈은 ‘어떠한 모습이 되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단순히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의사가 되겠다고 다짐한 사람의 꿈은 먹고 사는 것에 집중하는 개와 돼지의 꿈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꿈이란 것은 “나는 무엇이 되고 싶어요”가 아닙니다. 흑인들의 비전은 인권 운동을 통해 백인과 흑인들이 차별 없이 서로를 존중하며 살아가는 세상을 꿈꾸는 것이었습니다.

더 이상 사람들이 질병 때문에 죽어가고 아파하는 세상을 만들지 않기 위해 의사가 되겠다는 다짐을 가지는 것, 더 이상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지 않고 공의 안에서 안전하게 살아가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판사가 되겠다는 다짐을 가지는 것 같이, 우리가 발견해야 하는 비전이란『이 세상 속에서 내가 만들어 나가고픈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19세기 초반은 최초의 비행기를 만들려는 사람들이 넘치던 시기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사무엘 피에르폰트 랭리라는 학자는 당시 최초의 비행기를 만드는 일에 가장 앞서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정부에서도 그를 후원하고 그는 당시 비행기 제작 분야 최고 권위자들과 함께 작업을 했습니다. 그에게는 인력과 지식과 시장까지 갖춰져 있었습니다. 그에 비해 라이트 형제는 교육을 받지도 못했고 인력은 물론 시장마저 갖춰져 있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대조되는 상황 속에서 비행기를 최초로 만들었던 사람은 바로 라이트 형제였습니다.
랭리의 꿈은 세계 최초 비행기를 만든 사람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달리 라이트 형제의 꿈은 비행기를 통해 세상의 판도를 바꾸고 사람들이 더 풍요롭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꾸는 것이었습니다. 이 결정적인 차이 때문에 라이트 형제는 노력 끝에 최초의 비행기를 만들게 됩니다. 랭리는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를 만들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가 해왔던 작업을 모두 중단해버립니다. 그는 최초의 비행기 제작자가 되겠다는 헛된 꿈, 잘못된 비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사야는 이스라엘에서 존경받는 최고의 예언자가 되는 꿈을 꾸지 않았습니다. 이사야가 꾸었던 꿈은 수많은 침략과 어려움 속에 있었던 이스라엘이 더 이상 아픔이 없는 하나님의 샬롬(평안)이 가득찬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지 않고 평안 가운데 살아가는 것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슬픔이 가득한 양육강식의 세계가 없어지고 이 땅의 모든 피조물들에게 하나님의 샬롬이 가득한 궁극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꿈꿨던 것이 바로 이사야의 꿈이었습니다. 이 꿈을 그대로 현실 속에 적용하여 살아갔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로자 파크스를 구제하며 흑인 인권 운동의 선봉에 섰던 마틴 루터 킹 목사님입니다.
흑인 인권 운동을 이끌어 가면서 흑인들의 피흘림이 있었던 그곳에서 그분이 세상에 외쳤던 꿈은 노예의 자손들과 노예를 핍박하던 자손들이 함께 손을 잡고 나아가는 세상이었습니다. 흑인과 백인이 섞일 수 없다고 생각했던 세상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며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올 것임을 그는 믿었습니다.

수많은 갈등과 아픔이 있는 이 사회에서 예배하는 청소년들을 통해 세상의 아픔과 어려움들이 해소될 수 있는 나라가 올 것을 믿습니다. 이 세상 가운데에 있는 불합리함과 아픔이 예배하는 청소년들의 꿈을 통해 해소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꿈을 꾸고 그 꿈을 향해 달려 나가는 사람이 되었을 때, 여러분들을 통해서 이 세상에 수많은 역사들이 바뀌어 나갈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꿈을 꾸는 여러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이 꿈꾸시는 세상을 함께 꾸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016 청소년부 기도행전을 소개합니다!
08/07/2016

2016 청소년부 기도행전을 소개합니다!

07/03/2016

주일 청소년부 예배
16.03.06
▶귀향

[마태복음 21장 8-9절]
08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0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요즘에 고향을 잃어버린 것에 대해 이야기들이 굉장히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귀향’이라는 영화가 개봉했습니다. 이 영화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으로 끌려갔다가 조국으로 돌아온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할머니들이 일본으로 끌려갔다가 돌아왔을 때 그분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아픈 일을 당하고 그토록 바라던 조국으로 돌아왔지만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비슷한 이야기의 영화인 ‘한공주’가 2년 전에 개봉되었습니다. 이 영화는 한공주라는 여자 아이가 집단 성폭행을 당하고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면서 생긴 이야기들을 다룬 영화입니다. 한공주는 사건이 발생한 이후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갔지만 그곳에서 소송을 당하고 가해자의 부모님들이 찾아와 공주를 몰아가면서 공주에게 일어난 일들이 서서히 밝혀지며 나타난 일들이 그려지는데, 이 영화는 결국 피해자인 한공주를 세상에선 마치 가해자처럼 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예수님을 맞이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 장면이 조금 어색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을 다 아는 것은 아니었습니다(10절). 유명한 선지자가 온다고 생각하여 호산나를 외쳤던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위엄있는 모습이 아닌 보잘 것 없는 나귀 새끼를 타고 볼품없는 모습으로 들어오는데 마치 ‘나는 아무 힘이 없다‘라는 것을 보이는 것처럼 위정자들이 보였던 모습과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들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집이자 예수님에게 고향같은 곳인 예루살렘에 들어오셨을 때 예수님은 장사하는 사람들, 대제사장들과 싸우고 저주하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원래 있어야 할 모습을 잃어버린 예루살렘의 모습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곳의 사람들이 타락했다는 것,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다는 것을 다 알고 들어오셨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들어가실 때 권능과 위엄이 넘치는 모습으로 가신 게 아닌, 비참하기 그지없는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오셨습니다.

왜 위안부 할머니들이 돌아왔을 때 사람들은 몇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들을 외면하며 살고 있을까요? 왜 이스라엘 백성들과 위정자들은 예수님을 손가락질하고 저주했을까요? 위안부 할머니들을 보며 우리가 그분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우리의 삶에 일부로 끌어안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프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아픈 과거이기 때문입니다.
일제강점기 때 있었던 그 모든 일들이 우리가 기억하고 싶지 않는, 상처가 되는 과거이기 때문이기에 그분들이 들어왔을 때 우리는 그들이 마치 아픔을 주는 사람인 것처럼, 그들이 잘못한 것이 없어도 그들이 잘못한 것처럼 가해자로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예수님을 향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손가락질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와서 하신 일들은 우리 안에 있는 악함들을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악들을 이야기하고 우리 안의 풀지 못한 문제들을 이야기하기에 아픈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예수님이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가해자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를 가해자로 만들어 결국 십자가에 달려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그렇게 오셨고 왜 그렇게 죽으셨을까요? 왜 예수님은 그렇게 사셨을까요? 요즘 세상을 보면 그 때와 똑같은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당신이 필요 없어요”, “당신을 생각할 시간이 없어요” 그래서 밀어내버립니다. 날마다 밀어냅니다. “나는 당신이 필요 없어요”, 우리는 이야기합니다. 그 때 우리가 하는 행동은 하나님이 계셔야 할 곳을 빼앗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우리는 입술로 이야기하지 않지만 날마다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보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우리 안에 있는 마음과 우리의 몸은 주님이 계셔야 하는 곳입니다. 더러워진 예루살렘 성전처럼 우리의 마음이 주님이 살아가셔야 하는 곳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날마다 밀어내고 배척하는 주님은 우리에게 오실 때 비참한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시고 있습니다. 욕하고 손가락질해도 그 모든 것들을 맞으시며 “그래도 너를 사랑한다”, “그래도 너와 함께 하겠다” 하시며 겸손하고 가장 작은 모습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려 하십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과 이 세상의 모습은 똑같습니다. 세상이 예수님을 부정할 때 세상을 향해서 주님은 똑같이 나귀 새끼를 타고 세상의 공격을 맞으며 들어가십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슬펐던 역사를 잊어버리면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나아갈 길을 잃어버립니다. 기독교인에게 똑같이 이 말이 적용됩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던 역사를 잊어버리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셨던 것, 내 안에 있는 주님을 거부하려는 마음과 이 땅의 주님을 거부하는 문화 때문에 주님이 죽으셨다라는 것과 그 피가 지금도 흐르고 있다는 것을 거부하게 되면 우리는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그것들을 우리가 받아들이고 가슴에 새길 때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의 길이 열린다는 것을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여러분들에게 정말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기독교인으로 살기로 하셨으면 기독교인으로 사십시오.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살기로 작정하셨으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사십시오.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내 안에 주님이 사시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더럽든 내 마음이 깨끗하든 상관없이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고향으로 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서 함께 하실 곳으로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분을 마음에 품고 그분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분은 우리에게 쓴소리도 하실 것입니다. 그래도 그것들도 받아들이시고 우리의 모습이 어떻든 우리를 사랑하시고 함께 하시고 인도하시겠다는 말씀들을 가슴에 새기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살아가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세상 속에서 누릴 수 있는 힘이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19/02/2016

2016 청소년부 동계수련회 홍보영상

2016 청소년부 동계수련회 Let Him Hear~!2월 23일 3시 시작됩니다~!
19/02/2016

2016 청소년부 동계수련회 Let Him Hear~!
2월 23일 3시 시작됩니다~!

15/02/2016

주일 청소년부 예배
16.02.14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복음 21장 17절]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예수님의 수제자라 알려졌던 베드로는 핑곗거리를 많이 가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은 그에겐 인생 최악의 날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그가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후 예수님이 병사들에게 잡혀갈 때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은 도망갔지만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뒤따라 쫓아갑니다.
예수님이 심문 당하시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베드로를 지목하여 예수의 제자가 아니냐라고 소리칩니다. 그 때 베드로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기 시작합니다. 또 다시 물음이 있을 때 그는 다시 예수님을 부인하게 됩니다. 그가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하는 그 때에 닭이 울고 그는 통곡합니다.

뮤지컬 ‘게바’에서 예수님을 부인하는 베드로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여집니다. 예수님을 사랑했기에 잡혀가시는 예수님을 쫓아갔지만 그는 사람들의 손가락질 속에서 예수님을 부인하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그리고 그는 잡혀있는 예수님을 향해 소리를 지르며 외칩니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을 있게 하셨습니까?”, “예수님이 잡혀 있는 상황에서 나는 예수님을 부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신의 일을 완성시키기 위해 나를 지목하신 것입니까?”라고 자신이 예수님을 부인했던 일들에 대해 핑계를 댑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에게 예수님을 부인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왔을 때 정말 여러분은 예수님을 자신의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식기도하는 것 조차 어려워합니다. 사람들의 시선이나 두려움, 부끄러움 때문에 예수님을 쉽게 부인하기도 합니다. 우리 삶 속에서 날마다 여러 핑계를 이야기하면서 예수님을 쉽게 포기하고 예수님과 멀어지려는 모습들, 결국 이런 모습은 성경에 나타나는 베드로의 모습과 많이 비슷합니다.
베드로에게 이러한 일이 있은 후 베드로는 초대 교회를 세워 예수님을 전하는 사역에 앞장서는 사람으로 서게 됩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을 부인했던 모습에서 회복되는 모습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성경 어느 곳을 찾아보더라도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셨을 때 베드로와 대화를 나누셨던 장면은 단 한 장면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 부분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이 강가에서 고기를 잡으려 하지만 잡지 못합니다. 그 때 예수님이 오셔서 말씀하신 곳에 그들이 그물을 내렸을 때 그물에 엄청난 고기가 잡히는 장면이 나옵니다. 제자들은 그 말씀을 하신 분이 예수님임을 알아보고 같이 식사를 하게 됩니다. 그 때까지도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여전히 예수님을 부인했던 핑곗거리를 가지고 있는 그 모습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음 속에 부담감을 가지고 있던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말을 하십니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가 핑계를 대는 것은 그저 하나의 이유에 불과합니다. 이유라고 말할 수 없기에 핑계라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주변을 맴돌고 있을 때 예수님은 베드로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을 부인했던 것에 핑계를 대지 말고 대신 그의 마음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한 가지,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했던 첫 번째 질문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것을 우리가 놓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질문을 하실 때 자신을 부인한 베드로가 괘씸해서 질문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분입니다. 인간을 너무 사랑하셔서, 베드로를 사랑하셨기에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감당하셨던 분입니다. 베드로를 죽기까지 사랑하셨던 예수님이 그에게 묻습니다. “베드로야 내가 널 사랑한다. 그런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가 어떠한 핑계를 대고 예수님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부인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우리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질문하십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주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지 못할 때에는 십자가는 그저 어떤 사람이 죽었다라는 형틀에 불과합니다. 죄를 지적질하는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분명히 알 때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그 안에 죽을 때까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메세지가 담겨있음을 알게 됩니다.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하셨던 그 이야기와 물음 속에서 예수님은 대답을 듣고 싶어 하셨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부인했다는 사실에 상처입은 베드로에게 하고 싶으셨던 그 한 마디는 “내가 너를 사랑한다”라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사순절의 첫 주일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사순절을 주셨던 이유는 베드로에게 했던 그 말씀과 동일합니다. 이 40일의 기간을 통해 우리 인간을 사랑하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던 것을 말씀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이 40일 기간 우리에게 동일하게 물어보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우리의 이 고백이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계속되기를 소망합니다.

09/02/2016

주일 청소년부 예배
16.02.07
▶더럽다? The Love다!

[마가복음 10장 49-52절]
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1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어느 중년 남성에게 한 청년에게 길을 물었습니다. 청년은 중년 남성에게 길을 알려주었고 청년과 중년 남성의 가는 길은 같은 방향이었기에 함께 지하철을 타게 되었습니다. 알고보니 중년 남성은 사고로 시력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도와주는 교회의 사무실을 가는 길이었고, 청년은 중년 남성을 위해 동행하기로 합니다. 물이 고인 웅덩이, 계단, 비가 오는 날씨 등 청년이 중년 남성을 위해 신경 써야할 요소들이 많았습니다. 이후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중년 남성은 청년에게 감사함을 여러 번 표하였습니다. 그런데 청년 또한 중년 남성에게 감사하다고 말을 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향기로운 성이라고 불릴 정도로 아름다웠던 여리고성입니다. 그러나 눈이 먼 바디매오에겐 그런 아름다움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던져주는 돈으로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그가, 어느 날 예수 그리스도가 이 여리고성에서의 일을 마치고 성을 떠나는 중이라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죄인이라 불리는 사람들과 밥을 먹고, 병든 자를 고치는, 바디매오에겐 그 순간이 구원을 받을 수 있을 순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즉시 일어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쳐 부르짖습니다(47절).
사람들은 바디매오에게 조용히 하라며 그를 꾸짖지만 그는 더욱 크게 외치며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짖습니다. 험악해진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은 그의 부르짖음을 듣고 바디매오를 예수님께로 나아오게 하실 때 바디매오는 입고 있던 겉옷을 벗고 예수님께 달려갑니다. 보기를 원한다는 바디매오의 말에 예수님은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후 바디매오는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고 예수님을 쫓아 따라가는 모습이 그려집니다(52절).

일교차가 심한 그 지역에서 어쩌면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 겉옷을 벗어던진 바디매오의 행동을 통해 그의 간절한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겉옷을 벗어던진 행위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무런 격식 없이 나아갔다는 의미를 가지기도 합니다.
바디매오라는 뜻은 ‘불결한 자의 아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시 시대에는 몸이 불편한 사람들은 하나님께 벌을 받아 신앙적으로, 사회적으로 결핍되었다고 인식되었습니다(요9:1). 죄를 지은 행위에 의해 벌로써 병을 받은 것이라 생각되었던 당시 시대, 죄인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병이 고침받는 것이었기에 바디매오에겐 눈이 고쳐진 것은 단순히 병이 치료된 것을 넘어 죄인이라고 자신을 스스로 학대하던 마음과 사람들의 정죄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구원’이었습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청년은 중년 남성에게 왜 감사할 수 있었을까요? 중년 남성과 동행하며 청년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의 따뜻함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약한 자의 친구가 되신 예수님을 닮아가려 했을 때 그는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디매오의 소리를 들으셨고 그를 부르셨던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몰려있는 상황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필요로 하는 한 사람의 외침에 반응하셨습니다.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옷자락이라도 만지면 고쳐지겠다는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갔을 때 여인의 병이 사라진 것처럼 예수님은 여인의 간절함에 응답하셨습니다(막 5:25-34).
사람들이 더럽다고 하는 때에 예수님은 The Love, 사랑스럽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얼마나 하나님께 사랑받고 있는지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나누는 자가 되길 원하셨기에 스스로 거친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세상은 자격과 요건을 요구하는 마귀의 소리에 현혹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바디매오입니까? 예수님을 따르던 군중입니까? 예수님의 제자입니까?

자신을 바디매오와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선 “내가 너의 신음소리를 듣고 있고, 너의 눈물을 보고 있다”, “세상이 말하는 더러운 자가 아닌, 사랑을 통해 아름다운 모습으로 고쳐주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믿음으로만 이루어집니다.
바디매오가 겉옷을 벗어던질만큼 간절한 마음으로 나아갔던 것처럼, 하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길가에 찢겨 버려진 나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집중하고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십시오.

자신이 제자와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우리 주변의 바디매오에게 잘 대해주기를 말씀하십니다. 교회 안에서 상처받아 몰려있는 바디매오를 잘 부탁하기를 바랍니다.
열두 명의 제자들은 누가 더 예수님의 수제자에 가까운지 다퉜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기꺼이 우릴 위해 그러하신 것처럼, 우리 또한 누군가를 위해 단단한 바닥이 되어주는 것이 바로 사랑의 모습이자,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가장 더럽다고 여겼던 그 자리에서 사랑을 시작할 수 있는 자리가 됨을 알길 원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라고 생각하신 여러분은 지금 당장 사랑을 시작하십시오. 더럽다가 The Love다라고 불릴 때까지.

02/02/2016

청소년부 주일 예배
16.01.31
▶알지어다

[시편 100편]
01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
02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
03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04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05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괴물’이라는 영화가 예전에 개봉한 적이 있습니다. 이 영화는 괴물 자체에 집중하기보다 피해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반응하는 외부사람들의 모습에 더 주목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 영화가 결론적으로 보여주고픈 내용은 괴물의 정체는 바로 괴물 자체가 아닌 대한민국 사회 현실에 감춰져있던 사람들의 모습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영화 외에 조금 다른 방면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작품이 하나 있습니다. 소설 ‘우리들의 영웅’입니다. 주인공 병태는 학교의 대장격이었던 석대에게 초반에 저항하다가 화해를 하고 권력 안에서 자유를 느끼다가 새로운 선생님에 의해 석대의 체제가 무너지고 이후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되었을 때 수갑을 차고 경찰소로 붙들려 가는 석대를 보며 병태가 고개를 돌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한 때 잘못된 사람이라고 나타난 석대를 이 소설의 제목에선 영웅으로 표현합니다.
사회의 모습을 괴물로 그리는 영화, 석대의 모습을 통해 일그러진 영웅으로 표현하는 소설 두 작품은 동일하게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지금 자신이 속한 곳이 좋은 곳인지 나쁜 곳인지 크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 자신이 있는 울타리 안에서 자신들을 둘러싼 조건과 규칙을 편안하게 느끼며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정작 자신들에게 주어진 상황에 대한 가치판단을 잃어버리고 그저 순응합니다.
사람들은 돈이 사람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실제적으로 돈이 더 중요한 것처럼 우리는 살아갑니다. 우리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는 순간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은 대학이 되어버립니다. 지금 입고 있는 옷이 나의 됨됨이를 표현하고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표현하는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우리는 그렇게 표현을 하게 됩니다. 마치 병태가 석대라는 그늘 아래서 잘못됨을 알면서도 편안함을 느꼈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수련회 기간이 되어 학생들과 이야기할 때 굉장히 많이 돌아오는 대답은 학원에 가야한다는 대답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살아가는 삶에서 공부를 더 해서 좋은 대학을 가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는 사회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면서도 거기에 따라갑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믿고 따라가는 사람들을 양육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이곳조차 이러한 가치관이 그대로 나타납니다.

시편 100편의 기자가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쓴 내용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에겐 이 본문이 다르게 읽힙니다. 감격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가치가 없어진 세상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전하는 이야기는, 세상에서 하나님이 가치가 없다고 말하지만, “누가 너희를 만들었고 누가 너희를 인도했고 인도하실 것이냐 여호와 하나님이시니 여호와가 너희의 하나님이신 줄 알지어다”. 가장 먼저 회복해야 할 가치가 바로 여기 있음을 시편의 기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청소년기 아이들 중 부모님의 모습들이 무너짐을 경험하는 학생들이 많습니다. 자신의 부모님이 완벽하지 않음을 알고 자신을 품어줄 날개를 가지지 못함을 알 때 부모님의 모습에 실망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선생님을 굉장한 존재로 생각했던 아이들이 선생님의 잘못된 모습을 통해 실망하기도 합니다. 친구 관계에서 그 관계가 무너지고 배신을 당했을 때 힘들어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병태가 석대의 무너지는 모습을 보면서 느꼈던 것처럼 영웅으로 여겼던 누군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웅이라 여겼던 것들이 언젠간 무너질 연약한 것들임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그것을 너무 크게 느끼고 그것이 무너질 때 슬픔을 느낍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배는 이 예배를 통해 우리가 달라지거나 구원이 온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여호와가 우리의 하나님이신 줄 아는 자리입니다. 여호와가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심을 고백하는 자리입니다. 2000년 전에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던 그분이 우리를 이제까지 인도하시고 우리의 구원이 되신다는 것을 고백하는 자리입니다.
성경에선 이 세상에 많은 가치와 영웅이라 추대하는 그 모든 것들을 넘어 최고로 계시는 분이 주님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바로 그 사실이고,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은 그런 분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새로운 만남과 새로운 체계와 환경을 맞이할 이 시기 여러분에게 말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너희는 알지어다 여호와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신 줄을”.

사람들은 많은 것들을 이야기할 것이고 많은 것들을 세상 사람들은 제시하겠지만 하나님이 이야기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너희의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 너희를 인도하시는 분이심을 분명히 알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환경에 있든지, 어떤 모습 가운데 있든지, 어떤 마음 가운데 있든지 여호와가 너희의 하나님이신 줄을 너희는 알지어다 오늘 여러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9/01/2016

청소년부 주일 예배
16.01.24
▶찬송하리로다

[에베소서 1장 3-7절]
0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0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0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0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0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찬송은 단순히 노래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찬송은 그 안에 담긴 내용이 중요하다. 우리는 찬송에 대해 기본적인 자세와 이해가 필요하다. 우리는 하나님께 진정으로 감사하고 찬양하고 있는가? 찬송하는 마음가짐은 단순히 일시적인 감정이나 영혼없는 마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에베소서에는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사랑하신 십자가를 통한 은혜에 대해 찬송함이 적혀있다. 에베소서를 쓴 바울은 진노의 자녀였던 우리를 크신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인쳐주심에 감사하며 이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 새사람으로 감사함을 입은 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모든 자는 하나님을 찬송해야 함이 본문에서 나타나 있다.

그럼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자로 살아가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본문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께선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고, 창세 전부터 우리를 택하셔서 사랑하시고,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아들되게 하셨으며, 우리에게 모든 것을 거저 주셨다. 우리 죄를 대속하셔서 죄 사함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기에 우리는 기뻐하고 찬송하며 감사해야 함을 바울은 감옥에서 에베소서를 통해 나타내었다. 그는 목숨을 위협받을 수 있는 그러한 상황에서 자신이 감옥에 갇힌 것이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에 도움이 된다면 기뻐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우리는 과연 은혜를 받을 만한 존재인가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갈 수 없는 자리로 데려다주시고 우리의 부족을 채워주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속량하시고 사랑하시기 위한 계획이 있으시며 우리를 높여주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우리에게 그의 사랑과 우리의 가치를 높여주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신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멋대로 살아서는 안된다.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희생당하셨다. 그분의 생명을 맞바꾼 존재가 바로 나의 가치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찬송하라는 말씀은 마가복음, 누가복음, 고린도후서, 베드로전서 등 성경의 여러 군데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방법으로 가장 첫 번째로 지켜야 할 것은 바로 하나님을 열심히 사랑하는 것이다. 두 번째 방법으로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 중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 있다. 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웃을 사랑할 수도 없다. 먼저 내 몸이 거룩한 성전이 되는 자리가 되어야 하며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전제된다.
찬송은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사랑스럽게 여기시도록 우리의 행동과 모습이 바뀌는 것이다. 나로 인해 주변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도록 우리 삶이 찬송하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 자신을 귀한 사람으로 여기는 삶은 바로 찬송하는 삶이다. 몸과 마음을 다해 삶의 자리에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한다.

06/10/2015

주일 청소년부 예배
15.05.17
▶죄 회개 용서

[삼하 12:9, 13]
09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치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도다
13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20년전 미국에서 비슷한 시기에 두 영화가 개봉되었습니다. 하나는 미국의 밝은 면을 바탕으로 제작된 ‘포레스트 검프’와 미국의 어두운 면을 바탕으로 제작된 ‘쇼생크 탈출’입니다. 미국의 밝은 면을 보여준 포레스트 검프은 여러 시상식에서 좋은 상을 수상하며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고픈 영화였지만, 그에 비해 쇼생크 탈출은 상대적으로 관심을 받지 못하고 감추고 싶은 영화로 인식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겐 누구나 감추고 싶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 일에 대해 부끄러워 하고 후회한다면 더더욱 들키고 싶어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2000년 전 한 인물의 흑역사를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시고 있습니다.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은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사랑했던 왕입니다. 그런 다윗에게도 흑역사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암몬이라는 나라와 전쟁을 치뤄야 했습니다. 당시 암몬의 동맹국의 왕들이 전쟁에 참여했었지만 이스라엘의 왕인 다윗은 전쟁에 참전하지 않고 요압 장군을 이스라엘 군사를 대신하여 보냅니다. 말씀에선 다윗은 전쟁 중에 왕궁 옥상을 거닐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한 여인의 목욕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다윗은 그 여인이 엘리앗의 딸이자 우리아의 아내인 밧세바임을 알아내었고 그 후 밧세바와 동침하는 죄를 짓습니다. 얼마 후 밧세바는 다윗의 아이를 임신하고 그 사실을 알게 된 다윗은 그 사실을 덮으려 암몬과 전쟁 중에 있는 우리아를 데려와 밧세바를 동침하게 하려 합니다. 그러나 충신이었던 우리아는 편히 자는 것을 거부한 채 길거리에서 병사들과 함께 잠을 잡니다. 이후 다윗은 계속해서 죄를 덮으려는 시도를 했지만 그것이 통하지 않자, 결국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죽이게 됩니다. 그 후 다윗은 밧세바가 낳은 아들과 함께 궁으로 들여옵니다.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하나님은 선지자 나단을 통해 다윗을 꾸짖으시고 다윗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여호와 앞에 회개의 고백을 합니다(시편 51편). 그는 죄에 대해 부정하지 않고 통회하고 회개했을 때 하나님은 다윗을 용서합니다. 다윗과 하나님 사이의 멀어졌던 관계가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은 그 사건이 있었던 1년 동안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시 51:3).
→내 죄 내가 알고 있사오며 내 잘못 항상 눈앞에 아른거립니다

하나님께선 왜 다윗이 감추고 싶은 과거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알려주시려 하는 것일까요?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다윗이었지만 그도 결국 죄인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과 관계가 멀어지고 덫에 걸려 넘어질 때 그 죄의 덫에서 건져내실 유일한 분이 하나님 뿐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윗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나단을 보내 그를 회개하게 하셨습니다.
밧세바가 임신했던 첫 번째 아들은 나중에 죽게 됩니다. 그러나 밧세바가 이후 두 번째 아이를 임신하여 아들 솔로몬을 낳았을 때, 하나님은 선지자 나단을 통해 솔로몬에게 ‘여호와께서 사랑하셨다’라는 뜻을 가진 「여디디야」라는 이름을 주십니다. 다윗을 끝까지 사랑으로 품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회개의 메세지를 주시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영적 상태에 있습니까? 매주 예배를 드리지만 하나님과 관계가 멀어져있다면, 마귀는 여러분을 쓰러뜨리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단순히 목욕하는 여인을 본 것으로 죄가 시작된 것처럼 죄는 가벼운 것으로 시작합니다. 결국 그것이 시초가 되어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 미국의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종으로 섬기지만 그 속에는 음란물의 종이 되어있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미국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사회를 돌아보면 모든 문화에 음란함이 가득 차 있습니다. 순결을 지키는 것은 바보같은 일이 되어버렸고, 음란한 문화가 당연시 되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다윗이 바라봤던 목욕 장면이 우리 사회 전체에 있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 또한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 가운데 있지 않으면 넘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미 그 덫에 걸려 넘어졌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붙들고 기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은 사랑으로 품으시고 용서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 깊은 관계에 있다면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내 생각와 행동만으로는 죄의 덫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기도함으로 하나님과 더 깊은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의 영을 인도함 받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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