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1/2019
시편 119편 1-16절
시인은 율법을 지킬 것에 대한 강렬한 의지를 내세우고 있다. 그가 어떤 이유로 인하여 그렇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의 궁핍한 상황(8)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열심을 품게 했던 것만 같다.
혹자들에게 율법은 은혜와는 아주 상반이 되는, 불과 물과 같은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시인에게 율법은 하나님을 섬기는 삶에 있어서 너무나도 필수적인 요소였다. 특별히 처음 복이 있음을 1-2절을 통하여 선포하는 것은 그로 하여금 율법을 지키는 삶이 하나님 앞에 복이 되는 삶이라는 고백을 하는 것으로서, 결국 그의 어려운 처지가 그로 하여금 온전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도록 하려는 계기를 만든 듯하다.
그러나 시인에게 율법은 단순히 버림을 받지 않게 하려는 수단이거나 복을 받게 하는 수단으로 마무리 되어지지는 않는다. 이 율법을 지킴으로 자신이 온전히 하나님 안에 거하고자 하는 모습이 되려는 것이다.(10-11) 이는 마치 또 다른 시편에서 주의 전에 거하기를 간절히 사모했던 신앙인의 고백과도 연결이 된다. 결국 시인의 이 모습은 단순히 율법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얻어내려거나 징계함을 받지 않으려는 도구적인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자 하는 모습이 되는 것이다.
누군가의 마음을 사고자 하여 인위적으로 주는 것을 뇌물이라고 한다. 하지만 정말 그 자체를 기뻐하여 주는 것을 선물이라고 한다. 마치 시인에게 율법은 앞서 뇌물에 상황에서 선물의 상황으로 바뀌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하여 시인은 마침내 주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모습이 된 것이다. 우리의 신앙의 어떠한 행위가 수단이 될 수가 있다. 헌금/기도/예배/찬양 그러나 이것이 어느새 그 자체로 여호와를 기뻐하며 하나의 표현이 되어버리는 것. 이게 시인의 율법에 대한 모습과 유사하지 않을까 한다.
하나님께 아부적인 잘 보임을 위해서, 복을 얻기 위해서, 받고 있는 고난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려는 모습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길을 가고자 하는 신앙적 순수의 모습. 그게 시인으로 하여금 율법에 관심을 쏟게 만들고 있다. 마치 시인이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려는 시편1편의 고백처럼 그 자체로 기쁨이 되어버리는 상황. 그렇게 한 걸음 더 성숙하게 나아가려는 거룩한 열망이 시인에게 있음을 보며,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보게 된다.
예수를 믿는 것이 오래 되어질 때, 매너리즘에 빠져 모든 예식들이 요식행위가 되어버리고, 입으로는 신학자가 되어버리지만 행위는 믿기 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삶이 될 가능성이 얼마나 많아지는지... 하나님과의 더욱 깊은 영적 관계를 사모하는 모습이 되어 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