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소망교회

그소망교회 그소망교회 페이지입니다. Div.), 학부(사회학)

- 최승범 / 청소년부 교육전도사 010-5385-2699
장로회신학대학교 신대원 졸업(M. Div.) 학부(중어중문학)

- 정재호–신정희 / 협력선교사(일본 가고시마 호프채플)

■ 예전과 교회력에 충실한 예배
주일예배 시 에 따라 구약, 시편, 복음서, 서신서 병행본문을 읽습니다. 교회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사역, 수난, 죽으심, 부활, 성령의 함께하심, 그리고 재림 안에서 완성되어지는 구원의 역사를 기억하게 합니다.

■ 소풍, 나들이, 겨울 MT, 여름수련회
공동체 활동으로 1월 전교인 MT, 3-4월 봄꽃 구경, 5월 어린이주일 전교인야외예배, 6월 타 (교단) 교회 방문, 8월 전교인 수련회, 9-10월 한강공원 나들이 등이 있습니다.

■ 엘피스 포럼
엘피스 포럼은 그리스도인이 일상 속에서 직면하는 문제들을 함께 고민하고 토론하는 시간입니다.(‘엘피스’는 헬라어로 ‘소망’).
2013년
조석현 집사, 그소망교회, 혼자

서 하는 교회사 공부
한수아 선교사, MVP선교회 본부장, 선교의 동기와 태도
김령고 집사 외, 그소망교회, 묻고 답하다(강영안/양희송 공저)
박용권 목사, 봉원교회/역사신학 박사, 에큐메니칼 운동과 WCC
신정희 전도사, 그소망교회, 교회사 속의 여성
이일학 집사, 그소망교회, 영화 속으로, 하나님 나라로
양희송 대표, 청어람 대표, 다시 프로테스탄트
전종윤 박사, 서울교대/철학박사, 타자를 위하여, 그리고 타자와 더불어

2014년
이택환 목사, 그소망교회, 술(중독)에 대한 성경적 이해
최경환 간사, 현대기독교아카데미, 디트리히 본회퍼의 공공신학
조흥식 교수, 서울대/사회복지학과, 복지와 사회
우종학 교수, 서울대/물리천문학부, 과학의 도전과 신학의 반응
이풍관 전도사, 그소망교회, 성서해석과 문화 이해
김사라 집사, 그소망교회, 한의학과 기독교
곽영준 집사, 그소망교회, 야구와 신앙
성기문 교수, 백석대/구약신학, “그리스도 속죄의 뿌리”
김보람 집사, 그소망교회, 미술과 신앙

2015년
박창수 대표, 주거권기독연대, 희년의 사람
신성관 목사, 안양감리교회, 하나님 나라 관점으로 성경 읽기
박정은 집사, 그소망교회, 나이팅게일 혁명
정선재 집사, 그소망교회, 예방의학, 하나님의 선물
이갈렙 선교사, MVP선교회, 타지키스탄 선교기지 하베스트코리아
김정일 아나운서, SBS, 스포츠와 정치
최영아 집사, 그소망교회, 질병과 가난한 삶
이진섭 교수, 에스라/신약신학, 구원 전후의 문제인가?
최병성 목사, 환경운동가, 세상을 소통케 하는 그리스도인

2016년
장선우 선교사, MVP선교회 본부장, 세계 선교의 역사
이일학 집사, 그소망교회, 좋은 죽음 – 기독교적 응답
이예지 집사, 그소망교회, 꽃다운 친구들
정기립 원장, 정신경정신과, 동성애에 대한 정신의학적 이해
윤주 화백, 추상화가, 미술의 이해
최주훈 목사, 중앙루터교회/조직신학박사, 루터의 서울 나들이
김슬옹 박사, 한글학자/훈민정음학, 세종대왕과 훈민정음
(엘피스 포럼은 2017, 2018, 2019년 현재까지 계속 진행중)

■ 타(교단) 교회 방문예배
그소망교회는 매년 6월 타(교단) 교회를 방문합니다. 역사와 전통은 달라도 세계의 모든 교회가 성령 안에서 하나의 교회임을 생각합니다.

■ 헌금 / 투명한 재정
그소망교회는 모든 재정을 매월 서면으로 보고합니다.

■ 섬기는 사람들
- 이택환 / 담임목사 010-5201-5561
장로회신학대학교 신대원 졸업(M. Div.) 학부(사회복지학)

- 양재희 / 어린이부 교육전도사 010-8254-5704
장로회신학대학교 신대원 졸업(M.

16/05/2026
16/05/2026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 행 1:6-14
(2026. 5/17, 부활절 일곱 번째 주일 그소망교회 교회력 설교)



행 1:6-14) 6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7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8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9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10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11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12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13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14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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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장은 예수님의 승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부활 후,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다가 승천하셨다는 내용도 사도행전 1장 3절에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 사도행전 본문을 읽으며 한 가지 질문을 피할 수 없습니다. 승천하신 예수님은 과연 하늘 위 그 어딘가로 떠나신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9절,

“9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본문이 말하는 하늘 위가 정말 대기권 밖의 우주, 은하계, 또 다른 갤럭시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또 갑자기 등장한 흰옷 입은 두 사람은 천사로 보이는데, 그들의 증언에 따르면 예수님은 제자들이 하늘로 올라가신 것을 본 그대로 다시 오신다고 합니다(11).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현대인에게는 매우 낯설고 비현실적인 이야기로 들린다는 것이지요. 성경은 원래 과학 교과서로 기록된 책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역시 예수님이 우주로 날아가서 다른 천체로 이동하셨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십자가에 죽으셨던 예수께서 이제 하나님 우편에 계시며 온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신앙고백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늘’은 단순히 우주 공간이 아닌 하나님의 통치와 임재를 의미하는 장소로 자주 쓰입니다. ‘구름’ 역시 기상 현상보다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구름이 예수님을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는 표현은, 이제 예수님이 제자들의 눈앞에 붙들려 있는 존재가 아니라, 성령 안에서 새롭게 임재하시는 온 세상의 주가 되셨다는 뜻입니다. 만약 그 구름이 단순한 자연현상이었다면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되었다”고 해야 할 텐데, 본문은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했다”라고 합니다.

원문을 직역하면 “구름이 예수님을 받아들여 제자들의 눈으로부터 감추었다”가 됩니다. 즉 단순히 거리가 멀어져서 예수님이 시야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구름’이 적극적으로 예수를 덮은 것이지요. 이것은 자연현상 묘사가 아닌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했던 구름 기둥, 모세가 올라간 시내산 꼭대기를 덮었던 구름, 예수님이 변화되신 변화산 위의 구름도 다 같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이러한 구름은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다”는 표지이면서 동시에 “인간이 함부로 볼 수 없는 신비”를 가리키는 역할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유난히 ‘보다’라는 동사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 “보이지 않게 되더라”
-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 “왜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 “본 그대로 오시리라”

이처럼 제자들은 끝까지 예수님을 붙들고 싶었습니다. 그들 곁에 계시는 예수님을 늘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사실 우리도 하나님이 눈에 보이기를 원합니다. 기적도 막연한 기적, 긴가민가하는 기적이 아니라 손에 잡히는 기적, 명확한 증거, 확실한 체험을 원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언제나 “보이는 것”을 넘어서는 자리로 우리를 부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제자들과 물리적으로 늘 함께하실 수 없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서 요 17:11에서도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할 것이며 아버지께로 갈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더 유익이라고 하십니다(요 16:7).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마침내 때가 도래하자, 제자들의 눈앞에서 사라지셨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 역시 이제 ‘보는 신앙’에서 ‘믿는 신앙’으로 새롭게 나아가야 했습니다. 더 이상 예수님을 육신의 눈으로 붙드는 것이 아니라, 비록 눈에 보이지 않을지라도 성령 안에서 살아 계신 예수님을 따라야 했습니다. 그때 천사들이 말하지요. 11절,

“11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이 말은 단순한 꾸중이 아닙니다. 그들이 현실을 떠나 하늘만 바라보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역시 제자들이 하늘만 응시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들을 세상 속으로 보내셨지요. 우리도 현실에서 벗어나 극단적인 신비 체험에만 머무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일시적으로 그럴 수 있다 해도 결국은 현실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리고 그때의 현실은 이전의 현실과는 다른 하나님 나라의 현실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여전히 하나님 나라와는 무관한 예전의 현실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직전까지도 그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기 때문입니다. 6절,

“6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그들은 아직도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아로 최우선적 기대를 했습니다. 그랬기에 예수님께 당신이 로마를 무너뜨리고 다윗 왕국을 회복할 때가 되었느냐고 물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때와 시기는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내 증인이 되리라.” 예수님은 이처럼 제자들의 관심을 민족적 회복에서 세계적 사명으로 바꾸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정치적 회복”보다 예수님에게 중요한 것은 “그들이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였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성령의 권능을 받은 제자들이 앞으로 되어야 할 ‘내 증인’, ‘예수님의 증인’이란 과연 무엇을 증언하는 자일까요?

여러분, 증인은 단순히 종교를 선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이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삶으로 증언하는 사람입니다. 제자들은 무엇보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죽임당한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고, 그분이 지금도 살아 계신 주님이심을 증언하는 사람들이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처음부터 끝까지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들의 증언의 핵심은 늘 같습니다. “너희가 예수를 죽였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살리셨다. 우리는 그 일의 증인이다.” 이 구조가 반복해서 나타납니다(행 2:32, 3:15, 4:20, 4:33, 5:30-32, 10:39-41).

그렇다면 제자들은 “내 증인이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즉시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온 세상으로 달려 나가 그리스도의 증인의 삶을 살았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조용히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다락방에 함께 모였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열한 사도들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에 속했던 이름 모를 여성들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썼습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설교의 핵심입니다.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제자들은 예수님 생전에 자주 다투었습니다. 누가 더 큰가를 놓고 경쟁했고, 서로 비교했고, 실패했고, 배신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함께 모여 기도합니다. 남자와 여자, 제자들과 예수님의 가족들,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한 공동체 안에서 마음을 같이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승천 이후 첫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들의 눈에 예수님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어도 공동체는 흩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하나가 되었지요. 그들은 하늘만 바라보며 멈춰 서 있지 않았습니다. 다시 현실로 돌아왔고, 함께 기도하며 성령을 기다렸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배웁니다. 교회는 눈에 보이는 카리스마적 지도자 한 사람으로 유지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떠나신 뒤에도, 오히려 교회는 성령 안에서 함께 기다리고 함께 기도하며 함께 증언하는 공동체로 굳건히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질문이 들려옵니다. “왜 서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느냐?” 우리는 때로 현실을 외면한 채 종교적 감정과 신비만 붙들고 싶어 합니다. 반대로 어떤 때는 기도 없이 인간의 힘만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 합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둘 다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현실로 돌아왔지만 세속화되지 않았고, 하늘을 바라보았지만 현실 도피자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함께 모였고, 마음을 같이했고, 오로지 기도에 힘썼고, 성령을 기다렸고, 마침내 세상 속 증인으로 살아갔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회복해야 할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는 공동체, 함께 기도하는 공동체, 보이지 않는 주님을 믿으며 성령을 기다리는 공동체, 그리고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성령의 공동체!

여러분, 이처럼 예수님이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고 해서 교회가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바로 그때부터 교회가 시작되었지요. 두려움 속에 숨어 있던 사람들이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하기 시작할 때, 성령께서 그들 가운데 임하셨고, 그들은 마침내 세상을 변화시키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눈에 보이는 힘을 원하고, 당장 확인되는 기적을 원하며, 때로는 하늘만 바라본 채 현실을 외면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왜 서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느냐?”

이제 다시 삶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가정으로, 교회로, 세상의 일터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이전의 현실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현실 속에,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하며, 성령을 기다리며, 십자가에 죽으셨으나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삶으로 증언하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완벽한 사람들이 모여 시작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실패했던 사람들, 두려워했던 사람들, 도망쳤던 사람들이 함께 기도하다가 성령 안에서 새로운 공동체가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그렇게 부름받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주님을 믿으며, 그러나 결코 혼자가 아니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살아가는 교회. 그리고 마침내 성령 안에서 이 시대 속에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교회 말입니다.

19/04/2026
19/04/2026

“설교란 무엇인가?” / 행 2:14a, 36-41
(2026. 4/19, 부활절 세 번째 주일 그소망교회 교회력 설교)

행 2:14a, 36-41) 14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36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37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39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40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41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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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오늘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기쁨 가운데 부활절 그 세 번째 주일을 맞이합니다. 오늘 본문은 교회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장면입니다. 최초의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가 베드로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공적으로 선포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선포는 개인의 신앙고백이나 즉흥적인 연설이 아닙니다. 성령 강림 이후, 성령의 능력 안에서 교회가 세상 앞에 처음으로 자신을 드러내며 선포한 공식적인 설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오늘 그 일부분만 읽음). 물론 이전에도 예수님이 많은 무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고 선포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 교회가 그 사명을 이어받아 세상 가운데 복음을 공개적으로 선포한 첫 설교라는 점에서 독보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특별히 오늘 베드로의 설교는 복음 선포와 회개 요청, 그리고 결단으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기독교 설교의 핵심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따라서 베드로의 설교는 단순히 ‘최초의 설교’이기 때문이 아니라, 설교의 본질을 가장 또렷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충분히 설교의 원형이자 모범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다음과 같은 중요한 질문을 해 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는 과연 어떤 설교를 듣고 있는가?” “그리고 오늘날 교회와 특별히 설교자들은 어떤 설교를 해야 할 것인가?”

오늘 말씀에 나타난 베드로의 설교를 보면, 거기에는 분명한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그의 설교가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려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당시 로마 식민지 백성으로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힘겹게 살아가는 1세기 유대인들을 행해 “여러분, 괜찮습니다. 다 잘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위로하십니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들에게 위로가 필요했지만, 베드로는 그것을 먼저 말하지 않았습니다

둘째, 그는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웃음을 유발하는 재미있는 이야기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않았습니다. 이왕이면 ‘짧고 재미있는 이야기’, ‘공감 가는 에피소드나 예화’를 통해 먼저 사람들의 마음을 열고(아이스 브레이크), 그 뒤에 메시지를 전달하는 설교 방식이 오늘날 널리 사용됩니다(필요하고 유용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렇게 설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보다 복음 자체로 승부했습니다.

셋째, 베드로의 설교는 삶의 지혜나 교훈을 전하는 데 머물지 않았습니다(이후 바울의 설교 등, 신약성경에 나오는 모든 설교가 그러함). “이렇게 살면 더 행복해집니다”, “이런 태도를 가지면 인생이 달라집니다”와 같은 실용적인 조언을 중심으로 메시지를 전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사람들에게 복잡다단한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삶의 기술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 사건을 선포했습니다. 그가 한 말은 이것입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

이 말의 중심에는 오직 한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처럼 베드로는 설교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문제를 분석하는 데 집중하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하신 일을 선포할 뿐입니다. 실은 이것이 설교의 핵심입니다. 설교는 사람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말하기 전에, 하나님이 이미 무엇을 하셨는지를 먼저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설교를 들은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마음에 찔림을 받았다”

이것은 그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흔히 말하는 “설교에 은혜 받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질문합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그러자 베드로가 분명하게 말합니다.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여기서 우리는 설교의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을 봅니다. 그것은 설교가 결단을 촉구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베드로의 설교는 “그 중심에 예수님이 계시고, 설교를 들은 사람들을 하나님 앞에 세우며, 그들의 회개와 결단을 촉구하는 설교”였습니다.

물론 베드로의 설교는 2000년 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이후, 예루살렘에 모인 유대인들을 향해 특정한 상황 속에서의 선포라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표현과 방식, 그 긴박한 분위기를 오늘 우리 시대의 설교에 그대로 옮기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설교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설교의 모범이 됩니다. 왜냐하면 상황은 달라도 설교의 본질은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직접적인 당사자는 아니지만, 여전히 하나님 없이 살아가고, 여전히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며, 여전히 그리스도를 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환경 속에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설교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어야 하고, 사람을 하나님 앞에 세워야 하며, 그들의 회개와 결단을 요청해야 한다는 본질은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솔직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듣는 설교는 어떠합니까?

아쉽게도 많은 설교들이 설교 본래의 자리에서 벗어난 경우가 많습니다. 첫째, 예수님이 중심이 아닌 설교입니다. 설교가 종종 잘 사는 법, 마음이 편해지는 법, 성공하는 방법 등을 말하는 데 집중합니다. 이런 설교가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지만 설교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는 굳이 교회가 아니라도 다른 곳에서 얼마든지 해당 분야 전문가로부터 들을 수 있습니다. 만약 교회에서 그런 주제를 다루고자 한다면 설교 시간보다 성경공부, 세미나 시간(엘피스 포럼)을 활용하는 게 좋습니다.

둘째는 회개를 말하지 않는 설교입니다. 요즘은 사람들이 듣기 불편할까 봐 죄에 대해 말하지 않는 설교가 많습니다. 잘못된 삶에 대해서도 지적하지 않기에, 설교를 들어도 마음이 찔리지 않습니다. 삶도 바뀌지 않습니다. 특히 오늘날에는 더 조심스러운 부분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싫어하고 논쟁거리가 될까 봐 특정 이데올로기에 깊이 빠져 신앙보다 그것을 더 앞세우는 문제, 타 종교인, 이주민, 사회적 소수자들을 향해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는 문제에 대해 아예 침묵하는 설교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부분 역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중요한 영역입니다. 이것을 외면할 때, 설교는 점점 더 안전한 이야기만 반복하게 되고, 결국 사람을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는 설교가 되고 맙니다.

셋째, 결단을 요구하지 않는 설교입니다. 그런 설교는 듣고 나면 “좋은 말씀이다”라는 생각은 듭니다. 하지만 “그래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남지 않습니다. 넷째, 신앙이 ‘유익’으로 바뀌는 설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유가 마음이 편해지기 위해, 문제가 해결되기 위해, 더 잘 살기 위해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우리의 삶의 방향 자체를 바꾸시는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설교해야 하고, 어떻게 설교를 들어야 할까요?

먼저, 설교자는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사람, 사람들이 듣기 좋은 말을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때로는 사람들에게 불편한 말씀도 전해야 하고, 회개를 요구해야 하며, 무엇보다 복음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설교를 듣는 성도들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설교를 들을 때 여러분은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이 말씀이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 “나는 무엇을 바꾸어야 하는가?” 그러나 그런 질문은 전혀 하지 않고, 설교를 듣고 재미가 있는지, 감동적인지만 생각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설교의 본질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나 오늘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결국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어찌할꼬?” 그리고 그들은 회개했습니다. 세례를 받았습니다.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같은 자리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많은 설교를 들었습니다. 많은 말씀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결단할 것인가? 오늘 이 말씀 앞에서 우리 각자가 하나님께 이렇게 고백하기를 원합니다. “주님, 이제는 듣는 데서 멈추지 않겠습니다” “이제는 삶을 바꾸겠습니다”

설교는 단순한 이야기나 교훈이 아닙니다.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선포하는 것이며,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고, 회개와 결단으로 부르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하나입니다. 우리의 응답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듣고 그저 “좋은 설교였다”라고 말하고 돌아갈 것입니까? 아니면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고 결단할 것입니까?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처럼 우리도 다시 한번 이 질문 앞에 서야 합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교우 여러분, 설교는 듣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설교는 우리의 삶이 바뀔 때 비로소 완성됩니다. 오늘 이 말씀 앞에서 각자의 자리에서 결단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내 삶의 중심으로 모시겠다는 결단, 하나님 없이 살아온 삶을 돌이키겠다는 결단, 내 생각과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겠다는 결단, 이 결단이 우리 안에 있을 때, 오늘의 설교는 단순한 말씀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사건이 될 것입니다.

11/04/2026

“믿음의 결국, 영혼의 구원” / 벧전 1:3-9
(2026. 4/12, 부활절 두 번째 주일 그소망교회 교회력 설교)

벧전 1:3-9) 3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5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6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7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8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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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부활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부활절은 지난 주일로 끝났는데 부활절 두 번째 주일이라니?” 그러나 그것은 교회의 전통이 아닙니다. 교회력에서 부활절은 단 하루의 절기가 아니라, 성령강림절 전까지 이어지는 긴 여정입니다(올해는 5월 24일이 성령강림절). 그래서 교회는 전통적으로 부활절 이후 성령강림절 전까지 7주간을 ‘기쁨의 50일’로 지켰습니다. 그 이유는 십자가 사건이 과거의 한 시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현재의 사건이듯이, 예수님의 부활 역시 단 하루의 기념일이 아니라 우리의 전 존재 전체를 새롭게 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력은 부활절을 일회성 행사로 끝내지 않고, 부활의 의미를 계속 묵상하며 살아가도록 우리를 계속해서 부활절로 초대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신앙적 균형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집중하면서 부활을 상대적으로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없는 부활이 없듯이, 부활 없는 십자가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에, 그 십자가가 구원의 십자가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력에 40일간 십자가에 집중하는 사순절이 있다면, 그보다 조금 긴 50일간의 부활절 절기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베드로전서는 매우 특별한 상황 속에서 기록된 편지입니다. 이 편지는 편안한 시기에 쓰여진 글이 아닙니다. 극심한 고난 가운데 쓰여진 글이지요. 많은 학자들이 이 편지를 주후 60년대 네로 황제의 대박해 시기에 베드로가 썼거나, 혹은 그보다 약 30년 뒤 ‘제2의 네로’라고 불리운 도미티안 황제 시대에 베드로의 제자가 쓴 것으로 봅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히 신앙생활이 불편한 정도가 아니라, 생명의 위협을 받는 상황에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3절, “하나님을 찬송하라!...”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역설적인 말씀입니까?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이 찬송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그 고난이 어디 보통의 고난입니까?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에 의하면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64년에 발생한 로마 대화재의 주범으로 몰려 십자가형, 맹수의 먹이, 산 채로 불태워지는 등 잔혹한 처벌을 받았다고 합니다. 살아남은 그리스도인들도 사회에서 배척당하고, 경제적으로 큰 손해를 보았고, 무엇보다 믿음이 흔들리는 시험 가운데 있었습니다. 제2의 네로로 불리던 도미티안 시대에는 황제숭배를 거부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네로 시대 못지않은, 때로는 더 가혹한 고난을 받았습니다(요한계시록이 쓰여진 시대).

그런 상황에서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셔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우리에게 산 소망을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그 소망이 “세상의 형편에 따라 흔들리는 헛된 기대가 아니라,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하늘의 유업에 대한 확실한 약속”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찬송은 상황이 좋아서 드리는 감정적인 반응이 아니라,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과 장차 완성될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드리는 믿음의 고백인 것입니다.

물론 초대교회와 오늘 우리의 상황은 겉으로는 매우 달라 보입니다. 우리는 로마 시대 대박해 상황에 비하면 거의 무한한 신앙의 자유를 누립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매우 유사한 점이 있습니다. 저는 오늘날 한국교회 역시 나름 큰 고난 가운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고난은 세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먼저 외적으로 교회가 사회적 신뢰를 거의 상실한 고난입니다. 그 결과 세상은 더 이상 교회를 존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비난하고, 때로는 조롱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교회는 세상 속에서 어떤 존재인가?” 베드로전서가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세상보다 더 바른 삶을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실제로 베드로전서는 반복해서 그 점을 강조합니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야 한다(2:12)”, “선을 행함으로 어리석은 자들의 말을 막아야 한다(2:15)”, 이처럼 세상의 비난을 단지 말이 아닌 행실과 삶으로 이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신뢰는 말이 아닌 삶을 통해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고난은 교회 내부에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부활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 안에서조차 부활 신앙이 희미해지고, 부활을 믿는다는 사람 중에서도 부활 신앙보다 돈, 성공, 권력을 더 신앙하는 그리스도인이 적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말하고, 부활도 말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실제 삶의 기준이 세상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이지요. 오히려 하나님을 믿으니까, 당연히 돈도 더 많이 벌어야 하고, 성공도 더 해야 하고 더 큰 권력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십자가와 부활 신앙에서 멀어진 것 자체가 오늘날 한국교회의 큰 위기이자 고난입니다. 세 번째는 각종 기독교 이단의 발호입니다. 요즘 교회마다 청년이 없다, 다음 세대가 없다. 재정도 모자란다 등 많은 염려를 하는데 오히려 이단에는 청년도 많고 재정도 많아서, 오히려 기존 교회들이 어려움을 겪는 사이, 이단들은 그 자리를 빠르게 잠식해 가고 있습니다.

정통교회에서 참된 복음을 바르게 선포하지 못할 때가 이단의 거짓 복음이 급속히 퍼져나가기 딱 좋은 때입니다. 그때 사람들은 진리를 찾기보다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켜주는 메시지를 찾습니다. 고난을 피하고, 기다림 없이 즉각적인 해결을 얻고, 십자가도 부활도 없는 가짜 복음에 더 쉽게 끌립니다. 그래서 이단은 늘 ‘더 쉽게’, ‘더 빠르게’, ‘더 강하게’, 더 ‘확실하게’를 약속합니다. 그러나 참된 복음은 그렇게 값싸고 쉬운 길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통과해야 하고, 기다림을 통과해야 하며, 흔들리는 중에도 믿음으로 끝까지 견뎌야 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복음을 전하는 교회를 찾는 이들이 줄어듭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오늘 본문 6절은 고난 가운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오히려 크게 기뻐하라!” 그러나 교회가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는데 어떻게 기뻐할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 ‘산 소망’ 있기 때문입니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세상의 모든 것은 결국 사라집니다. 아무리 좋아 보이는 것도 결국은 무너집니다. 그러나 고난 속에서도 인내하며 신앙을 지키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실 유업이 하늘에 간직되어 있습니다. 그 소망은 단순한 미래의 약속이 아니라, 현재의 고난을 견디게 하는 힘입니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해주는 말씀이 있는데, 바로 5절입니다.

5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여기서 ‘보호하다’는 군사적 용어입니다. 마치 성을 지키는 군사들이 사방에서 둘러 서서 외부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처럼, 하나님이 고난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철저히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하나님이 필요할 때 한 번씩 도와주시는 정도가 아니라, 지금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친히 우리를 둘러 지키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강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지켜지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고난의 시대라고 하여 성도의 삶은 버려진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현재적인 강력한 보호 아래 있는 삶인 것입니다.

이제 오늘 말씀의 핵심으로 들어갑니다. 그것은 9절의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는 말씀과 관련이 있습니다. 여기서 ‘영혼’은 육체에서 분리된 어떤 비물질적 존재가 아닙니다. 그보다 성경이 말하는 영혼은 우리 ‘삶 전체’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결국은 우리의 삶 전체가 ‘전인적’으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 구원은 단지 우리가 죽어서 영혼이 천국 가는 것만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안에서 회복되는 것도 구원이고, 우리의 생각과 마음이 새로워지고, 관계가 회복되며, 삶의 방향과 선택이 달라지는 것도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전체, 곧 가정, 일터, 인간관계, 가치관까지 새롭게 하시는 것부터, 장차 우리가 죽어서 마지막 때에 부활의 몸을 입고 하나님 나라에 가는 것까지를 모두 포함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믿음의 결국에 이르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무엇보다 우리의 신앙의 중심을 십자가와 함께 부활에 두어야 합니다. 부활은 단순한 교리가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힘입니다. 그러기에 부활을 믿는 사람은 절망 속에서도 끝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에게는 고난을 새롭게 해석하는 눈이 있습니다.

그때 우리 앞에 놓여있는 수많은 고난들은 사라져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이겨야 할 대상이 됩니다. 고난은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연단하는 도구가 됩니다. 금이 불 속에서 정금이 되듯이 우리의 믿음도 그렇게 자라가게 됩니다. 이처럼 고난 속에서 단련된 믿음은 결코 마음속에만 머물지 않고, 반드시 삶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무엇보다 세상은 우리가 하는 말을 보지 않습니다. 그보다 우리의 삶을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이 아닌, 삶으로 복음을 증명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부활절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부활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가 고난 속에서도 소망을 붙들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이 시대의 고난 속에서 같은 믿음, 특별히 부활 신앙을 붙들어야 합니다. 세상이 흔들려도 심지어 교회까지 흔들려도 우리의 부활 신앙에 근거한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국 “영혼의 구원”, 곧 삶 전체의 회복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우리를 붙드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드시는 것입니다. 오늘의 고난을 이기고 끝내 승리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27/03/2026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 / 빌 2:5-11
(2026. 3/29, 종려주일, 수난주일 그소망교회 교회력 설교))

빌 2:5-11) 5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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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종려주일이며 동시에 수난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히브리어 ‘호산나’는 “이제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의 메시야를 향한 환영과 기대의 찬송입니다. 이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로마의 억압에서 구원해 줄 메시아로 기대했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 환호는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같은 입에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외침이 터져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극적인 변화 속에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마주하게 됩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가?”

오늘 우리가 읽은 빌립보서 2장 5–11절은 이 질문에 대한 가장 깊은 대답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5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이 말씀은 단순한 교리 설명이 아닙니다. 아주 구체적인 공동체의 문제 속에서 나온 말씀이지요. 오늘 말씀의 배경이 된 빌립보 교회는 좋은 교회였습니다. 바울을 사랑했고, 복음을 위해 헌신했고, 물질로도 후원했던 교회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균열이 있었습니다. 성도들 사이에 다툼이 있었고, 서로를 높이려는 마음,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있었습니다. 실제로 빌립보서 마지막 부분을 보면 그 갈등의 한 장면이 드러납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빌 4:2,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평범한 교인이 아니었습니다. 바울과 함께 복음을 위해 수고했던 동역자들이었지요. 그들의 이름의 의미를 보면 ‘유오디아’는 ‘좋은 길’, ‘순두게’는 ‘함께 만남’이라는 의미입니다. 그 이름대로라면 두 사람은 “좋은 길에서 함께 만난 사람”, “만나면 좋은 친구”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들 사이에는 갈등이 있었고, 그것이 교회 전체에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어쩌면 바울은 젊은 시절, 안디옥 교회 선교사였던 자신이 바나바와 심하게 다투어 서로 갈라섰던 일을 떠올렸을지도 모릅니다(행 15:36~41).

복음을 위해 함께 헌신했던 동역자가 갈라지는 아픔을 바울 스스로 경험했기에, 그가 빌립보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더욱 가슴 아프게 바라보았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단순한 화해가 아닌 ‘그리스도의 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일지 모릅니다. 우리는 유오디아와 순두게 사이에 있었던 갈등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모릅니다. 교리 문제였는지, 사역 방식의 차이였는지, 아니면 감정적인 문제였는지...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갈등의 뿌리에 ‘같은 마음을 품지 못함’, 곧 그리스도의 마음을 놓쳐버린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단순히 “두 사람이 화해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더 깊은 차원의 권면을 하지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은 단순한 감정이 아닙니다. 특별히 ‘마음’은 명사가 아닌 동사로서, “마음을 두다”, “어떠한 태도를 가지다”, “삶의 방향을 정하다”와 같이 “지속적인 사고방식, 즉 삶의 태도”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예수님의 마음을 조금 닮아라!’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의 생각 방식과 삶의 태도를 그대로 너희 안에 두라!’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교회 안에서도 골이 깊은 갈등은 인간적인 노력으로 쉽게 해결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우리 안에 자리 잡을 때만 해결되지요. 빌립보교회 역시 유오디아와 순두게의 갈등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두 사람이 지속적인 사고방식과 삶의 태도를 바꿔나갈 때에 비로소 해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과연 두 사람만의 문제였을까요? 특별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에서 ‘너희’는 단지 이 두 사람만이 아닌, 교회 공동체 전체를 의미한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즉, 교회의 갈등 문제는 개인 당사자만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같은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신약학자들은 빌립보서 오늘 말씀을 바울이 새로 쓴 것이 아니라, 당시 교회에서 부르던 찬송이나 신앙고백문을 바울이 인용한 것으로 봅니다.” 즉, 본문은 원래 초대교회가 예배 시간에 사용하고 있던 ‘그리스도 찬가’나 ‘신앙고백문’인데, 바울이 그의 편지에 옮겨놓았다는 것입니다. 문체가 갑자기 시적이고 리듬감 있는 구조로 바뀐 점이나, 그 내용이 예수님의 신성과 성육신, 십자가의 죽으심과 온 세상의 주로 높임 받으심(승귀)을 신학적으로 완벽하게 정리한 고백의 형태를 띠고 있는 점이 특히 그러합니다. 아마도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배 시간에 이 찬송을 부르며 그들의 신앙을 이렇게 고백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시다. 그러나 스스로 낮아지셨다. 그래서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그런 그를 하나님께서 만왕의 왕으로 높이셨다.”

여러분, 이 찬송은 단순한 교리 교육에만 유용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삶의 방향을 규정하는 신앙고백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교회는 큰 박해 가운데 있었고, 사회적으로 약한 공동체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살기 위해 세상 권력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낮아지신 그리스도를 따라 살기로 했지요. 그랬기에 바울도 이 찬송을 인용해서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너희가 부르는 그 찬송, 그 고백대로 살아라!” 그것은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그렇게 사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마음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궁금합니다. 과연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바울의 권면을 받아들여 서로 하나가 되었을까요? 아쉽게도 성경은 그 답을 말해주지 않습니다. 일부러 그런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를 그들의 이야기로 끝내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이 질문은 이제 우리에게로 넘어옵니다. 우리는 과연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가? 어쩌면 오늘의 교회 안에도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있을 것이고, 그 사람이 바로 나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권면은 단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현재의 명령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따라서 오늘 말씀은 21세기 한국 교회에 더욱 절실히 필요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건물은 커지고 조직은 정교해졌습니다. 영향력도 커졌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우리는 과연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는 종종 교회 안에서 정의를 외치지만 사랑이 부족할 때가 있고, 반대로, 사랑을 외치지만 정의가 사라질 때도 있습니다. 사역은 많으나 비움은 적고, 리더십을 내세우지만 섬김은 약하고. 교회 안에서도 저마다 인정받고 싶어 경쟁하고 비교하다가 서로 상처를 받습니다.

이런 모습은 빌립보 교회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바울의 말씀이 그대로 우리에게 들려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여러분,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심에도 친히 사람이 되셔서 우리에게 내려오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치 하나님처럼 높아지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비우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을 자꾸 채우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인의 자리를 원하지요. 이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입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은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왕 되심은 세상의 방식과 달랐습니다. 그분은 정복자들처럼 큰 말을 타고 오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지배자들처럼 군대를 이끌고 오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권력을 행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겸손하게 어린 나귀를 타고 들어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친히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셨습니다. “사람들은 왕을 기대했지만, 예수님은 종으로 오셨다”. 이것이 바로 빌립보서 2장의 메시지입니다. “그는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종려주일은 영광의 시작이 아니라, 수난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그 수난의 끝에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러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십자가 이후에 부활과 승천을 통한 높임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진리를 배웁니다. “내려감 없이 높아짐은 없다! 십자가 없이 영광은 없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떤 길을 선택하고 있습니까? 교우 여러분, 오늘 말씀은 단순한 묵상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을 바꾸는 초대입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는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가?” 높아지려는 마음, 인정받으려는 마음인가? 아니면 순종하려는 마음, 낮아지려는 마음인가?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먼저 사과하는 것이고, 먼저 내려놓는 것이며, 내가 꼭 이기려 하기보다 때로는 져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마음은 우리 안에 자연스럽게 생기지 않습니다. 우리는 원래 그리스도의 마음을 완벽하게 가질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를 위해 자신을 비우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분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그 사랑에 붙들려, 그 마음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종려주일의 환호는 쉽게 사라집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순종은 영원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왕으로 환영했지만, 예수님은 종으로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높이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은 어디에 서 있습니까? 환호의 자리입니까, 아니면 십자가의 자리입니까? 주님은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이 사순절의 끝자락에서, 우리가 다시 한번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참된 제자의 길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21/03/2026

“절망의 자리, 영광의 자리” / 요 11:1-16
(2026. 3/22,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 그소망교회 교회력 설교)



요 11:1-16) 1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2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 3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4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5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6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7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8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9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10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11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12제자들이 이르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13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그들은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14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15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 16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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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요한복음 11장 말씀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가장 근원적인 현실, 곧 죽음과 그 죽음의 자리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역설적인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현실을 연결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말씀은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으로 시작됩니다. 본문은 나사로의 병의 상태를 직접 설명하지 않지만, 여러 정황상 결코 가벼운 병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누이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소식을 전합니다. 당시 베다니에서 예수님이 계시던 요단 동편까지는 하루 만에 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을 보냈다는 것은 그만큼 상황이 위급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전한 메시지는 매우 짧았습니다. 3절,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이 말은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닙니다. 그 안에는 “예수님 지금 오셔야 합니다!”라는 절박한 요청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직접적으로 “나사로의 병을 고쳐주십시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예수님과의 특별한 사랑의 관계 때문입니다. 그 안에 이미 모든 요청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이 가정을 특별히 사랑하셨습니다. 5절이 이를 분명히 말합니다.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예수님은 나사로를 “친구”라고 부르셨습니다. 제자도 아니고 군중도 아닌,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맺어진 특별한 호칭이지요. 이 가정은 예수님의 사역 중 쉼과 교제가 이루어지던 공간이었는데, 우리가 잘 알듯이 음식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겼던 마르다(눅 10장),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향유를 부어 예수님의 장례를 예비했던 마리아(눅 10장, 요 12장), 그리고 수많은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던 나사로가 있는 가정입니다(요 12:11).

그 가정은 섬김과 봉사, 실천적 신앙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 된 공동체로서의 오늘날 교회가 따라야 할 모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기대하게 되지요. 예수님이 곧바로 그리로 가셔서 나사로를 고챠주실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우리의 기대를 정면으로 뒤집습니다. 6절,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예수님은 즉시 가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일부러 지체하십니다. 그리고 그 결과 나사로가 죽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신앙의 문제와 직면합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사랑하셨다면 왜 지체하셨을까?” 우리는 흔히 생각하지요. “사랑하시면 빨리 응답하실 것이다, 사랑하시면 즉시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전혀 다른 사실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지체는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라, 거꾸로 사랑하기 때문에 이루어진 지체였습니다. 예수님은 4절에서 이미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이 말씀은 병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나사로가 병으로 죽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결과에 대한 선언입니다. 이 사건이 결국 어디로 향하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인 것이지요. 우리의 삶에도 이와 같은 시간들이 있습니다. 기도했지만 응답이 없는 시간, 하나님이 늦으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시간, 상황이 더욱 나빠지는 시간들입니다. 그때 우리는 쉽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으시는가?” “왜 이렇게 늦으시는가?” 그러나 오늘 말씀은 분명히 말합니다. 하나님의 지체는 하나님의 부재가 아니라,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계획 때문이라는 것입니다(본문에는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

이제 나사로의 죽음에 대한 예수님의 독특한 말씀이 이어집니다. 11절,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그런데 이 말씀을 제자들이 오해합니다. 12절,

“주여 (나사로가) 잠들었으면 낫겠습니다.”

그들에게는 잠과 죽음은 전혀 다릅니다. 잠은 깨우면 되지만, 죽음은 돌이킬 수 없는 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다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14절,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죽음을 몰라서 ‘잠’으로 표현하신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단순히 다르게 해석하신 것이 아니라, 죽음을 깨우실 수 있는 분으로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죽음은 끝입니다. 영원한 단절이지요. 되돌릴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죽음은 설명의 대상이 아니라, 깨우실 수 있는 그분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음을 ‘잠’이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까지 죽음을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죽음은 여전히 비극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며, 관계의 단절이고, 육체의 고통과 상실을 동반하는 우리 현실입니다. 만약 우리가 죽음을 단순히 ‘잠’처럼 여기고 아무 두려움도 느끼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외면이지요. 성경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을 이상하게 보지 않습니다. 예수님조차 겟세마네 동산에서 죽음을 앞두고 땀이 피처럼 떨어지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죽음의 두려움에 지배당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더 이상 우리의 최종적이고도 영원한 지배 세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죽음을 단순한 물질의 해체로 이해하여 두려워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인간은 우연히 결합된 원소의 집합이며, 죽음은 단순히 그 결합이 풀어지는 과정일 뿐이라고 담담히 말합니다. 그러나 그 관점은 결국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본래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사라져도 괜찮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은 전혀 다릅니다. 우리는 우연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창조된 존재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죽음은 소멸이 아니라, 장차 하나님 앞에서 몸의 부활을 입고 새롭게 시작하는 새 창조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단지 죽음을 설명하는 신앙이 아니라,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분을 믿고, 또 그분의 뒤를 따라가는 영원한 소망의 삶인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이제 우리는 이 사건의 가장 중요한 지점에 이르게 됩니다. 왜냐하면 나사로 사건은 단순한 기적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요한복음 11장 5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은 곧 예수님의 죽음을 결정짓는 사건이 됩니다. 이것은 곧 예수께서 나사로를 살리시기 위해 당신이 죽음의 길로 들어가신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죽음을 멀리서 설명하신 분이 아니라, 죽음을 직접 짊어지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음을 ‘잠’이라 부르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죽음을 당신이 담당하시고, 그 죽음을 깨뜨리실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절정이 바로 십자가와 부활에서 드러났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나사로의 죽음은 모든 것의 끝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는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자리였습니다.

그리고 그 영광은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완성됩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죽음은 우리에게 여전히 끝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합니다. “그 자리는 끝이 아니다, 하나님은 아직 일을 다 마치지 않으셨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도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피하는 사람이 아니라, 죽음을 넘어 일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 속에 끝처럼 보이는 자리가 있습니까? 기도해도 변하지 않는 현실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늦으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있습니까?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 지체 속에서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신다, 그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은 영광을 준비하고 계신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끝처럼 보이는 자리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이루십니다. 그리고 그 영광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끝을 보는 것이 아니라, 끝 너머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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