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소망교회

그소망교회 그소망교회 페이지입니다. Div.), 학부(사회학)

- 최승범 / 청소년부 교육전도사 010-5385-2699
장로회신학대학교 신대원 졸업(M. Div.) 학부(중어중문학)

- 정재호–신정희 / 협력선교사(일본 가고시마 호프채플)

■ 예전과 교회력에 충실한 예배
주일예배 시 에 따라 구약, 시편, 복음서, 서신서 병행본문을 읽습니다. 교회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사역, 수난, 죽으심, 부활, 성령의 함께하심, 그리고 재림 안에서 완성되어지는 구원의 역사를 기억하게 합니다.

■ 소풍, 나들이, 겨울 MT, 여름수련회
공동체 활동으로 1월 전교인 MT, 3-4월 봄꽃 구경, 5월 어린이주일 전교인야외예배, 6월 타 (교단) 교회 방문, 8월 전교인 수련회, 9-10월 한강공원 나들이 등이 있습니다.

■ 엘피스 포럼
엘피스 포럼은 그리스도인이 일상 속에서 직면하는 문제들을 함께 고민하고 토론하는 시간입니다.(‘엘피스’는 헬라어로 ‘소망’).
2013년
조석현 집사, 그소망교회, 혼자서 하는 교회사 공부
한수아 선교사, MVP선교회 본부장, 선교의 동기와 태도
김령고 집사 외, 그소망교회, 묻고 답하다(강영안/양희송 공저)
박용권 목사, 봉원교회/역사신학 박사, 에큐메니칼 운동과 WCC
신정희 전도사, 그소망교회, 교회사 속의 여성
이일학 집사, 그소망교회, 영화 속으로, 하나님 나라로
양희송 대표, 청어람 대표, 다시 프로테스탄트
전종윤 박사, 서울교대/철학박사, 타자를 위하여, 그리고 타자와 더불어

2014년
이택환 목사, 그소망교회, 술(중독)에 대한 성경적 이해
최경환 간사, 현대기독교아카데미, 디트리히 본회퍼의 공공신학
조흥식 교수, 서울대/사회복지학과, 복지와 사회
우종학 교수, 서울대/물리천문학부, 과학의 도전과 신학의 반응
이풍관 전도사, 그소망교회, 성서해석과 문화 이해
김사라 집사, 그소망교회, 한의학과 기독교
곽영준 집사, 그소망교회, 야구와 신앙
성기문 교수, 백석대/구약신학, “그리스도 속죄의 뿌리”
김보람 집사, 그소망교회, 미술과 신앙

2015년
박창수 대표, 주거권기독연대, 희년의 사람
신성관 목사, 안양감리교회, 하나님 나라 관점으로 성경 읽기
박정은 집사, 그소망교회, 나이팅게일 혁명
정선재 집사, 그소망교회, 예방의학, 하나님의 선물
이갈렙 선교사, MVP선교회, 타지키스탄 선교기지 하베스트코리아
김정일 아나운서, SBS, 스포츠와 정치
최영아 집사, 그소망교회, 질병과 가난한 삶
이진섭 교수, 에스라/신약신학, 구원 전후의 문제인가?
최병성 목사, 환경운동가, 세상을 소통케 하는 그리스도인

2016년
장선우 선교사, MVP선교회 본부장, 세계 선교의 역사
이일학 집사, 그소망교회, 좋은 죽음 – 기독교적 응답
이예지 집사, 그소망교회, 꽃다운 친구들
정기립 원장, 정신경정신과, 동성애에 대한 정신의학적 이해
윤주 화백, 추상화가, 미술의 이해
최주훈 목사, 중앙루터교회/조직신학박사, 루터의 서울 나들이
김슬옹 박사, 한글학자/훈민정음학, 세종대왕과 훈민정음
(엘피스 포럼은 2017, 2018, 2019년 현재까지 계속 진행중)

■ 타(교단) 교회 방문예배
그소망교회는 매년 6월 타(교단) 교회를 방문합니다. 역사와 전통은 달라도 세계의 모든 교회가 성령 안에서 하나의 교회임을 생각합니다.

■ 헌금 / 투명한 재정
그소망교회는 모든 재정을 매월 서면으로 보고합니다.

■ 섬기는 사람들
- 이택환 / 담임목사 010-5201-5561
장로회신학대학교 신대원 졸업(M. Div.) 학부(사회복지학)

- 양재희 / 어린이부 교육전도사 010-8254-5704
장로회신학대학교 신대원 졸업(M.

15/08/2026
15/08/2026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 롬 11:13-16, 29-32
(2026. 8/16, 성령강림주일 후 열두 번째 주일 그소망교회 교회력 설교)

롬 11:13-16, 29-32) 13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14 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15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16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29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30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31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32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

우리는 살면서 종종 후회합니다. “그때 그런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 선택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가 미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선택이 앞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 수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늘 선택과 후회를 반복하며 삽니다. 그런데 오늘 로마서 11장 29절에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당연합니다. 미래를 아시는 하나님께서 후회하실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의 상황을 보면, 하나님께서도 충분히 후회하실 법합니다. 하나님께서 기껏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그의 후손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들에게 언약을 주시고, 율법을 주시고, 선지자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까지 보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누구보다 먼저 예수님을 알아보아야 할 사람들이 이스라엘 아닙니까? 누구보다 예수님을 영접해야 할 사람들이 유대인들 아닙니까?

그런데 정반대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거꾸로 이방인들이 받아들였지요. 바울에게 이것은 매우 난감한 문제였습니다.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면 늘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바울 선생, 당신이 말하는 예수가 정말 이스라엘의 메시아라면 왜 정작 당신의 동족은 그분을 믿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이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이제 이스라엘을 버리셨다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혹시 하나님도 실패할 수 있다는 것일까요? 이것이 로마서 9~11장까지 바울이 붙들고 씨름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1장은 아주 직설적인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이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단호합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그 첫 번째 증거가 바울 자신이었습니다. 그가 이스라엘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러므로 바울만 보아도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더 나아가 이스라엘의 불순종조차 하나님께서 복음을 확장시키는 통로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30절,

“30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여기서 “너희”는 이방인 그리스도인입니다. 복음이 유대인에게 거절당하자 이방 세계로 널리 퍼져나갔지요. 그러나 바울은 이것을 두고 “이제 유대인들이 끝났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늘 1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15절

“15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즉, 이스라엘이 불순종으로 끝나지 않고 마침내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것처럼 그들을 다시 받아들이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문맥에서 29절의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는 말씀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개인적으로 적용할 때가 많아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사는 없어지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부르신 것을 후회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이 말씀의 직접적인 문맥은 개인적 차원보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과 약속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 여기서 ‘후회하심이 없다’(아메타멜레토스)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하신 약속을 다시 거두어들이지 않는다”, “그들을 불러놓고 잘못 불렀다고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이렇게 풀어서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은 철회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말씀이 이스라엘의 불순종이 다 괜찮다는 것은 아닙니다. 잘못은 잘못이고, 불순종은 불순종입니다. 다만 인간의 실패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까지 실패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은 결코 그들이 다른 민족보다 더 의롭거나 더 뛰어나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되었지요. 그러므로 인간의 실패가 하나님의 은혜를 무효로 만들 수 없습니다. 이로 인해 바울이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하나님을 가장 잘 알아야 할 사람들이 하나님을 거부하는 뒤틀린 현실이었습니다. 누구보다 성경을 가장 많이 알고 있던 동족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 메시아를 가장 오래 기다렸던 사람들이 정작 메시아가 오셨을 때 그분을 배척했다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오늘날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교회를 가장 사랑한다는 사람이 오히려 교회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일이 참 많은 우리의 현실이니까요. 그래서 성경을 가장 강조하는 사람이 정작 성경이 가르치는 사랑과 정의와 긍휼을 외면하고, 복음에 목숨을 걸어야 할 사람들이 강단에서 인간의 처세술을 전합니다. 신앙을 정치적 진영과 동일시하고, 교회 지도자들이 너무나도 자주 돈과 권력과 성 문제로 세상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기기도 합니다. 그러면 교회 밖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좋은 분인데 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저 모양입니까?” 참으로 곤혹스러운 질문입니다.

우리도 그런 모습을 보면 화가 나지요. “저 사람들 때문에 전도가 안 된다.” “저 교회 때문에 모든 교회가 욕을 먹는다.” 그런데 바울은 복음을 거부한 자기 동족을 그렇게 비판하면서도 그들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로마서 10장 2절에서 바울이 말합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열심이 있다고 다 좋은 신앙은 아닙니다. 잘못된 열심은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과거에 바울 자신이 그랬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하나님께 열심이었지만 그 열심으로 교회를 박해했지요.

그랬기에 바울은 동시에 로마서 10장 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바울은 동족을 비판하지만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잘못을 지적하지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태도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똑같이 경고합니다. “너희도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왜 그렇습니까? 이방인들 역시 자기 힘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들을 내려다보며 “저 사람들은 참 완고하다”고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었다면 그들과 똑같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중요합니다. 우리가 잘못된 기독교인들을 비판할 수 있지요. 그러나 동시에 기억해야 합니다. “높은 마음을 품지 말라.” “저 사람들은 잘못 믿지만 우리는 제대로 믿는다.”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우리 역시 또 다른 교만에 빠질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을 비판하다가 새로운 바리새인이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의 이야기는 처음에는 유대인의 불순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유대인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유대인도 불순종했지만, 이방인도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 앞에서 자랑할 수 없습니다. 결국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우리가 오늘 여기까지 온 것도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훌륭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긍휼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의 잘못을 보고도 침묵해서는 안 되지만, 기독교와 그리스도인들을 쉽게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

잘못을 분명하게 지적하되 그 사람의 회복 가능성까지 우리가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를 개혁하려 하되 우리가 교회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대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을 후회하실 것같은 순간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은혜를 받고도 잊었습니다. 용서받고도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말씀을 들으면서도 우리의 고집을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이 말씀은 우리가 무엇을 해도 괜찮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은혜를 실패하게 만들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희망은 우리의 신실함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붙들고 있는 힘보다 우리를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의 손이 더 강합니다. 우리의 불순종보다 하나님의 긍휼이 더 큽니다. 우리의 실패보다 하나님의 약속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잘못된 것은 분명히 잘못되었다고 말하되 사람까지 포기하지는 맙시다. 그러다가 오히려 자신이 교회를 떠나고 기독교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오히려 다른 사람의 허물을 보면서도 우리가 높은 마음을 품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도 하나님의 긍휼로 여기까지 왔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푸셨다가 후회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부르셨다가 잘못 불렀다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약속하셨다가 마음을 바꾸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그 후회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오늘 우리에게도 희망이 됩니다.

08/08/2026

“상처를 넘어서는 은혜” / 창 37:1-9
(2026. 8/9, 성령강림주일 후 열한 번째 주일 그소망교회 교회력 설교)

창 37:1-9) 1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의 아버지가 거류하던 땅에 거주하였으니 2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의 형들과 함께 양을 칠 때에 그의 아버지의 아내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함께 있었더니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 3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4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 5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말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6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가 꾼 꿈을 들으시오 7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8그의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의 꿈과 그의 말로 말미암아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9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의 형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

부모에게 아무런 상처도 받지 않고 자란 사람이 있을까요? 아마 없을 겁니다. 물론 부모님은 나름 최선을 다해 자녀를 키웠겠지요. 그러나 부모가 최선을 다했다는 것과 자녀가 상처받지 않았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형제와 끊임없이 비교당하며 자랐고, 또 어떤 사람은 부모의 지나친 기대 속에서 늘 잘해야 한다는 부담을 안고 살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엄격한 부모로부터 인정받으려고 애를 썼지만 정작 필요한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우리 대부분이 부모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렇게 부모 때문에 상처받았던 우리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자녀들에게 비슷한 상처를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본문의 야곱도 그랬습니다. 야곱은 부모의 편애가 얼마나 큰 상처를 주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형 에서를 사랑했고 어머니는 동생 야곱을 사랑했습니다. 그 편애 때문에 두 형제는 경쟁했고, 야곱은 아버지를 속였으며 결국 형을 피해 집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어느새 자신도 똑같이 자녀를 편애합니다. 3절,

“3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야곱은 마음속으로만 요셉을 더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 아들 중에 그에게만 비싼 채색옷을 입혔지요. 요셉은 야곱의 네 아내 중에 가장 사랑했던 라헬에게서 그것도 오랫동안 기다린 끝에 얻은 아들이었습니다. 게다가 라헬마저 죽었으니, 요셉은 귀한 자식만이 아니라 늘 애틋한 자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특별히 요셉에게 큰 애정을 쏟아부었지요.

부모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도 자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너는 형이니까 동생보다 잘해야 한다.” “너는 우리 집의 희망이다.”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희생했는데.” “너만은 나를 실망시키지 말아야지.” 모두 잘되라는 말입니다. 사랑해서 하는 말이지요. 그러나 부모의 기대가 지나치면 사랑이 짐이 됩니다. 야곱이 입혀준 채색옷은 요셉에게는 사랑의 표시였지만 형제들에게는 차별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래서 4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4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

여기서 ‘편안하게’가 히브리어 ‘샬롬’입니다. 아버지의 편애 때문에 가족 간에는 이미 샬롬, 평화가 깨졌습니다. 야곱의 편애로 요셉의 형들은 오랜 세월 마음속에 상처를 쌓아갔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어떤 아이였을까요? 2절을 보면 그는 형들의 잘못을 일일이 아버지에게 일러바치는 아이였습니다. 그때마다 형들은 아버지에게 혼났겠지요. 그러니 형제들의 눈에는 요셉이 얄미운 정도가 아니라, 거의 죽여버리고 싶은 녀석이었을 겁니다. 이처럼 요셉에 대한 야곱의 편애가 실은 요셉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그런 요셉이 어느 날 눈치 없이 꿈에 형들이 자기에게 절을 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형들은 요셉을 쥐어박고 싶었겠지요. 그런데 며칠 후 요셉이 또 꿈 이야기를 합니다. 이번에는 열한 별과 함께 해와 달까지 자기에게 절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 꿈은 누가 봐도 형제들만이 아니라 아버지와 어머니까지 자기에게 절했다는 것으로 들립니다. 요셉이 실제로 그런 꿈을 꾸었고, 또 그 꿈이 장차 이루어진다 해도, 이런 말을 형들에게 자랑하듯 했다는 것 자체가 그가 얼마나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철부지였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요셉을 가족과 나라와 세상을 구하는 인물로 사용하셨다는 것이 아이러니입니다. 왜 하나님은 부모의 잘못된 양육으로 미숙했던 아이, 형들에게 사랑은커녕 시기와 미움만 받고 자란 아이를 굳이 선택하셨을까요? 여기에 복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완성된 사람을 찾아 사용하시는 분이 아니라, 부르신 사람을 빚어 사용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러면 때로는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열일곱 살에 형들에 의해 애굽으로 팔려간 요셉이 산전수전을 겪고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 나이 서른 살, 13년이 걸렸습니다.

그동안 채색옷은 사라졌습니다. 자신을 특별대우하던 아버지도 없습니다. 그는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렸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으며, 자신이 도와준 사람에게도 잊혀졌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부모가 잘못해도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형제가 상처를 주어도, 사람에게 버림받아도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요셉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과거의 요셉은 자신에게 절하는 형들의 꿈 이야기를 했었지요. 그러나 훗날 요셉은 자신에게 절하러 온 형들을 먹여 살립니다.

미숙한 요셉은 “형들이 내게 절한다”고 자랑했지만, 성숙한 요셉은 그가 높은 자리에 올라간 것이 그들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에 주신 사명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형들에게 사랑받지 못했지만 형들을 사랑하게 되었고, 형들은 그의 옷을 벗겼지만 그는 형들에게 옷을 주었습니다. 형들은 요셉을 구덩이에 던져놓고 자기들끼리 음식을 먹었지만, 그는 굶주린 형들에게 양식을 주었습니다. 형들은 요셉을 타국에 팔아버렸지만 그는 형들이 타국에서 살아갈 땅을 주었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상처받은 사람이 반드시 상처 주는 사람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 반드시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부모에게 받은 상처를 반드시 자녀에게 물려주어야 하는 것 역시 아니지요. 하나님의 은혜는 그 악순환을 끊게 합니다. 우리에게도 가정에서 받은 많은 상처들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좋은 것도 받았습니다. 사랑도 받았고 희생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사랑보다 상처가 더 선명하게 기억되는 법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자녀들 또한 우리에게 좋은 것만 받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해도 자녀들의 기억은 다를 수 있습니다. 나는 격려했다고 생각했지만 자녀는 압박으로 느꼈을 수 있습니다. 잘되라고 한 말이 비교와 비난으로 남을 수도 있습니다. 생활이 바빠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했지만 자녀에게는 “내가 중요하지 않았다”는 기억으로 남았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일단 완벽한 부모가 되려는 생각부터 내려놓아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좋은 부모는 자녀에게 상처 하나 주지 않는 부모가 아닙니다.

그보다 좋은 부모는 자신이 잘못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부모입니다. 그래서 잘못했을 때 “그때 내가 잘못했다.” “네 마음을 몰랐다.” “미안하다.” 사과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자녀가 받은 상처를 말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느 날 그들이 “어릴 때 아빠 때문에 힘들었다.” “엄마가 나를 형하고 비교하는 것이 정말 싫었다.” 그런 말을 들으면 우리는 “내가 언제 그랬냐?” “너도 부모가 되어 봐라.” 변명하고 싶어지겠지요. 그러나 자녀에게 필요한 것은 부모의 변명이 아니라 자녀가 아픔을 말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부모가 그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관계가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하나님께 자녀를 맡겨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를 책임져야 하지만 자녀의 인생 전체를 책임질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자녀의 구원자가 아닙니다. 야곱은 요셉을 잘 키우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문제를 만들었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야곱의 실패보다 컸습니다. 이것이 모두에게 큰 위로입니다. 내가 완벽하게 키워야 내 자녀가 잘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실수가 있었다고 해서 내 자녀의 인생이 아주 망가지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인생도 부모에게 받은 것만으로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요셉의 인생을 결정한 것도 야곱의 편애가 아니었습니다. 형들의 미움도, 구덩이도, 노예 신분도, 감옥도 그의 마지막 운명이 아니었습니다. 그 모든 것보다 요셉과 오랫동안 함께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인생을 이끌어 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 이야기에서 반복되는 중요한 말이 있지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이것이 요셉 인생의 비밀입니다. 우리가 어떤 부모 밑에서 자랐는지도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100% 우리 삶을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우리의 상처는 우리의 운명이 되지 않습니다. 그때는 오히려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고, 상처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부모에게 물려받은 아픔을 다음 세대에 그대로 넘겨주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야곱의 가정에 대물림되던 편애와 형제 갈등은 또다시 반복될 가능성이 매우 컸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의 상처 가득한 이야기를 마침내 용서와 화해와 생명의 이야기로 바꾸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의 상처를 하나님께 바꿔주시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가 이미 자녀들에게 준 상처가 있다면 용서를 구할 것은 용서를 구하고, 고칠 것은 고치고, 들어주어야 할 이야기는 들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우리 자녀를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우리와 우리 자녀들이 상처에 붙들려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과거의 그 어떤 상처보다 크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배신하고 상처 입히고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저지른 그 악과 죽음이 마지막이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십자가가 상처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로 이어졌듯이, 우리의 삶도 우리가 받은 상처와 우리가 남긴 상처로 끝나지 않습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그 상처보다 크시기 때문입니다. 상처와 죽음을 넘어 새로운 생명을 일으키시는 부활의 주님을 믿으며 상처를 넘어 사랑과 생명을 이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01/08/2026

“약속과 현실” / 창 32:22-31
(2026. 8/2, 성령강림주일 후 열 번째 주일 그소망교회 교회력 설교)

창 32:22-31) 22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23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24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26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28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29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30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31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

우리는 아브라함, 이삭과 함께 야곱을 믿음의 조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처음부터 야곱을 믿음의 대가라고 소개하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에도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만 현실 앞에서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큰 은혜를 경험했음에도 자기 꾀를 버리지 못하는, 너무나도 우리와 흡사한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야곱의 인생에서 가장 힘겨운 밤을 기록합니다. 그 밤은 단순히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이 아니라, 야곱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한꺼번에 뒤섞여 그의 영혼을 뒤흔들던 밤이었습니다.

야곱은 20년간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살았습니다. 처음에는 빈손으로 갔습니다. 형 에서를 속여 장자의 축복을 빼앗은 뒤, 분노한 에서로부터 목숨을 건지기 위해 약 900 킬로미터나 떨어진 아람 땅 라반의 집으로 도망간 것이지요. 그러나 20년이 지난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야곱에겐 네 아내가 생겼고 열한 명의 아들이 태어났으며, 수많은 양과 염소 떼, 소와 낙타, 나귀와 남녀 종들을 거느린 큰 부자가 되어 있습니다. 세상 기준으로 충분히 성공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굳이 아람을 떠날 이유가 있었을까요?

외삼촌 라반과 조금 불편한 일이 있었다 해도 적당히 타협하며 근처에서 계속 살 수 있었습니다.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도 없이, 이미 가진 것을 지키고 더 큰 부를 이루며 사는 것이 지혜로운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창 31:3에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이 말씀은 “네가 성공했으니 이제 금의환향하라!”와 같은 권유의 말씀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너를 선택한 이유를 기억하라”는 하나님의 준엄한 명령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단지 아람의 부자로 만들기 위해 선택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언약을 이어 갈 언약의 자손으로 그를 부르셨지요. 그 언약은 아람 땅이 아닌 가나안 땅에서 이어져야 했습니다. 그 약속을 잘 알았던 야곱이었기에 그 역시 집을 떠나 벧엘에서 밤을 보낼 때 하나님께 이렇게 서원했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며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입니다!”(창 28:20-21)

이처럼 야곱은 단지 가나안이 고향이고 부모님이 거기 계셔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었기에 가나안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신앙은 우리 앞의 가장 안전한 길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 길이 더 위험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안전보다 부르심을 따라가는 것이 신앙이지요. 그렇다면 신앙의 길을 선택했던 야곱의 안전을 위협하는 당시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었을까요?

그의 형 에서입니다. 야곱이 가나안으로 돌아간다면 20년 전에 그를 죽이려했던 형 에서를 반드시 대면해야 했습니다. 20년 전에 그는 형을 두 번이나 울렸지요. 먼저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의 권리를 빼앗았고, 그 장난 같은 사건을 실제로 이루기 위해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웠던 아버지 이삭에게 마치 자신이 에서인 것처럼 속여 장자의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에서가 이를 알고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내가 야곱을 죽이겠다!”(창 27:41) 그래서 그날로 야곱이 아람으로 도주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20년이 흘렀습니다. 20년이라는 세월은 에서의 상처를 치유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을까요? 그건 사람마다 다릅니다. 사실 야곱은 에서가 거주하는 세일 땅 에돔을 피해 다른 길로 돌아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단순히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는 것만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자신의 과거와 화해해야 했고, 그러려면 언젠가 에서를 반드시 만나야만 했습니다. 알고 보니 에서 역시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야곱을 다시 만나보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먼저 에서가 있는 세일 땅 에돔으로 종들을 보내 조심스레 에서의 반응을 살펴보았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보고가 그의 마음을 얼어붙게 했습니다. 에서가 400명을 거느리고 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굳이 400명과 함께 온다는 것은 필시 자기를 죽이러 오는 것으로 여기기에 충분했습니다. 성경은 그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창 32:7). 야곱이 결코 믿음이 없어서 두려워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서 두려워한 것도 아닙니다. 그가 너무나 현실적인 인물이었기에 두려웠던 것입니다.

아마 그런 상황이 들이닥치면 우리 역시 400명의 군사들만 보일 뿐, 하나님의 약속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을 것입니다. 실제로 모든 교우들이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며 위로해 주고, 기도해 주어도, 아무 이상이 없다는 병원 검사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합격 통지서를 받기 전까지 우리는 마음을 놓지 못합니다. 약속은 믿고 싶지만, 구체적으로 손에 잡히지 않는 반면, 당장 구체적으로 직면하게 될 눈앞의 현실은 너무나도 생생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현실이 하나님의 약속을 압도한다고 느낍니다. 야곱도 그렇게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흔들리는 중에도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이란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두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날 밤(곧 에서를 만나기 전날 밤), 하나님께서는 가장 두려워하던 야곱을 찾아오셨습니다. 당시 야곱은 두 아내와 두 여종, 열한 아들, 그리고 모든 소유를 먼저 얍복강 건너편으로 보내고 혼자 남아 있었습니다. 그 순간은 가족도 함께할 수 없고, 그의 많은 재산도 도움이 될 수 없으며, 종들도 그를 대신해서 싸워 줄 수 없는 그야말로 고독한 순간이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그런 고독한 밤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누구에게는 지금이 그 순간일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우리를 그렇게 ‘홀로 남는 자리’로 이끄십니다. 그 자리가 외롭고 두려운 자리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을 가장 깊이 만나는 자리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날 야곱에게 갑자기 어떤 사람(하나님/천사?)이 나타나 밤새 씨름을 합니다. 혹시 야곱의 환상 아닐까요? 그러나 본문은 그것이 실제 사건이었다고 증거합니다. 야곱 스스로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다...”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창 32:30).

특이한 것은 그날 하나님이 야곱을 이기지 못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힘이 부족하셔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하나님께서 그날 밤 야곱의 두려움과 죄책감, 집착과 고집을 모두 끌어안으시며 그가 승리할 수 있도록 도우신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다가 날이 새어 갈 무렵 하나님께서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심으로 이후 야곱이 평생을 절뚝거리게 되었는데(이것도 단지 환상이 아니라는 증거), 웬 날벼락일까요?

야곱은 평생 자신의 힘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는 꾀가 많았고, 상황 판단에 능했습니다. 형을 이기고, 아버지를 속이고, 외삼촌과 겨루어 큰 재산을 모은 것도 그의 능력 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하나님이 그의 능력의 근원을 치셨습니다. 허벅지는 고대 사회에서 힘과 능력을 상징하는 부위인데, 하나님이 야곱의 허벅지를 치셨다는 것은 “야곱아, 이제는 네 꾀로 살아가는 인생을 끝내라!”는 상징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자기 능력으로 약속을 이루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약속을 붙드는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실제로 야곱의 인생은 여기서 처음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자기 힘으로 축복을 빼앗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날도 그가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습니다!” 그것은 “이제는 당신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라는 그의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다!” ‘야곱’은 ‘발꿈치를 잡는 자’, 즉 남을 밀어내고 앞서가려는 자를 떠올리게 하는 이름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겨루며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의미합니다. 야곱은 그곳을 ‘브니엘’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이 고백이 중요합니다. 야곱은 에서 만나기를 몹시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브니엘을 지나면서 깨닫습니다. 자신이 정말 만나야 할 대상은 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이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 에서는 더 이상 그의 인생을 결정하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창세기 33장을 보면 야곱이 가장 두려워했던 에서와의 만남이 단지 기우였음이 드러납니다. 오히려 그날 에서가 달려와 야곱을 끌어안고 입 맞추며 함께 웁니다. 야곱은 에서에게 죽을 것을 두려워했지만 하나님은 에서와의 화해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 화해는 에서를 만나는 순간 시작된 것이 아니라 전날 밤 브니엘에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자 사람과의 관계도 새롭게 열리기 시작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수입은 불안하고, 체력은 약해지고, 자녀의 미래는 늘 걱정스럽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의 약속보다 현실이 훨씬 크게 보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믿지 못한다고 해서 야곱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두려워하는 야곱을 먼저 찾아오셨지요. 그리고 씨름하셨습니다. 야곱을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변화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연약함을 아십니다. 현실 앞에서 흔들리는 것도 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그대로 두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교만을 내려놓게 하시고, 자기 확신을 비우게 하시며, 결국 하나님의 은혜만 붙드는 사람으로 빚어 가십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허락하신 그 어떤 '절뚝거림'도 모두 은혜의 흔적일지 모릅니다. 우리는 그것을 실패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통해 우리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이끄십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의 신앙은 약속과 현실 사이를 살아가는 여정입니다. 현실은 여전히 우리를 흔들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현실이 약속보다 크게 보이는 날에도 하나님을 놓지 마십시오. 그리고 야곱처럼 “주님, 주님께서 복을 주시지 않으면 저는 갈 수 없습니다!”는 고백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25/07/2026

“기뻐하며 다 팔아” / 마 13:44–50
(2026. 7/26, 성령강림주일 후 아홉 번째 주일 그소망교회 교회력 설교)

마 13:44-50) 44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45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46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47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48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 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 49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50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

----------

오늘 예수님께서는 세 가지 짧은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 “극히 값진 진주를 찾아낸 장사”, 그리고 “온갖 물고기를 끌어 올린 그물의 이야기”입니다. 이 비유들은 사실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가?”를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은 이미 하나님 나라에 대해 모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장차 메시아가 강한 왕으로 나타나 로마의 지배를 끝내고 이스라엘의 영광을 되찾는 것을 하나님 나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군대를 모으거나 권력자와 손을 잡지 않으셨습니다. 병든 사람을 고치시고, 죄인과 식탁을 나누시며,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셨지요. 원수를 사랑하고, 높아지려는 사람은 종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가 세상을 단번에 뒤집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그 나라가 겨자씨처럼 작게 시작되고 누룩처럼 보이지 않게 스며든다고 하셨습니다. 이 비유들은 모두가 당연하다고 여겼던 하나님 나라의 기준을 흔들고, 전혀 다른 하나님의 현실을 보게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오늘 우리에게 주신 예수님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물으십니다. “너희가 하나님 나라를 아느냐?”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는 첫째, “발견되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이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다”고 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밭에서 일하다가 보화를 발견합니다. 그는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지요. 이어서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가 등장합니다. 그는 오랫동안 좋은 진주를 찾아다닌 전문가였습니다. 마침내 극히 값진 진주를 발견하자 그 역시 소유를 다 팔아 그것을 삽니다. 누구는 찾지도 않았는데 발견하고, 누구는 오래 찾다가 마침내 발견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도 이와 비슷합니다. 어떤 사람은 인생의 위기 속에서 뜻밖에 하나님을 만나고, 어떤 사람은 진리를 갈망하던 끝에 예수님을 만납니다.

두 사람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전까지 귀하게 여겼던 모든 것을 다 팔아버릴 만큼 압도적으로 귀한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44절의 그 사람이 “기뻐하며” 돌아가 자기 소유를 다 팔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이 비유를 “천국에 들어가려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무거운 명령으로 읽습니다. 그러나 이야기의 순서는 포기보다 발견이 먼저이고, 의무보다 기쁨이 먼저입니다. 그는 이를 악물고 재산을 처분한 것이 아닙니다. 더 큰 가치를 보았기 때문에 기꺼이 팔았던 것입니다. 손해를 감수한 것이 아니라 비교할 수 없는 이익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은 먼저 무엇을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전에 무엇이 참으로 귀한지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알지 못한 채 희생만 강조하면 신앙은 무거운 의무가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성공과 실패를 넘어 존귀한 존재가 되는 기쁨을 발견하면 삶의 우선순위가 달라집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발견했습니까? 아니면 혹시 교회 안에 오래 머물렀어도 여전히 하나님 나라를 그저 의무와 부담으로만 알고 있지 않습니까?

둘째, 하나님 나라는 “우리 삶의 주인이 바뀌는 나라”입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 하면, 죽어서 가는 천국을 떠올립니다. 물론 하나님 나라는 죽음을 넘어 완성될 영원한 생명을 포함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왕으로 다스리시는 현실이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질문은 “죽어서 어디에 갈 것인가?”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오늘 지금 이 자리에서 누가 나를 다스리는가?”를 묻습니다.

우리는 자유롭게 산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수많은 왕의 지배를 받습니다. 성과에 따라 자존감이 오르내리고, 아파트 평수가 삶의 성공을 판정하며, 자녀의 성취가 부모의 성적표가 됩니다. 오늘날 우리 앞에 왕이 따로 없어도 돈과 성공, 인정과 두려움이 우리에게 왕 노릇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추구한다는 것은 돈을 벌지 말라거나 경쟁을 피해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왕이 되시면 돈은 숭배의 대상에서 이웃을 살리는 도구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일은 나의 가치를 증명하는 전쟁터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소명이 되지요.

그래서 보화와 진주를 발견한 사람은 모두 자기 소유를 다 팔았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당장 재산을 처분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보다 앞세운 것은 무엇이든 내려놓아야 한다는 부르심입니다. 그럼에도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 나라보다 돈이나 명예가, 어떤 사람에게는 자녀를 통제하려는 욕망, 또 어떤 사람에게는 내가 옳다는 확신이 더욱 소중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으려는 분이 아니십니다. 정말로 가장 귀한 것을 주시기 위해 우리가 움켜쥔 작은 것을 놓으라고 하시는 것이지요.

셋째, 하나님 나라는 “종말에 하나님의 정의가 드러나는 나라”입니다. 앞의 두 비유에는 발견의 기쁨이 가득하지만 세 번째 그물 비유는 엄중함이 있습니다. 어부가 바다에 그물을 치면 좋은 물고기와 좋지 않은 물고기가 함께 잡힙니다. 그물이 가득 차면 물가로 끌어내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버립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는 귀한 보배인 동시에 우리 삶을 판단하는 최종 기준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물론 교회 안에도 선과 악이 섞여 있습니다. 당장 우리 내부에도 선과 악이 공존합니다. 그러다 보니 정직하게 일한 사람이 손해 보고, 책임져야 할 사람이 권력을 누리며, 피해자가 오히려 자신을 탓하는 현실을 봅니다.

그러나 그물 비유는 악이 영원히 묻히지 않을 것을 선언합니다. 세상의 마지막은 악한 권력의 승리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단으로 끝납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선행, 조직이 덮어 버린 부정, 피해자의 말 못 한 눈물도 하나님 앞에서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최종 심판이 두려운 소식이긴 하지만 억울한 사람에게는 희망의 소식입니다. 동시에 이 비유는 우리에게 겸손을 요구합니다. 물고기를 가르는 이는 그물 속의 다른 물고기가 아닙니다. 제자들도, 교회도, 우리도 최종 심판자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심판하십니다.

그런데 사랑의 하나님께서 왜 심판을 하시는가?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만이 아닌 공의의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그리고 사랑과 공의는 동전의 양면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폭력과 착취와 거짓을 영원히 문제 삼지 않으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고통당하는 피해자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은 변덕스러운 보복이 아니라 창조세계를 바로 세우시는 사랑의 엄중함입니다. 따라서 마지막 심판을 믿는 사람은 “어차피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는 냉소를 멈춰야 합니다. 동시에 “내가 당장 모든 악을 제거해야 한다”는 조급함도 버려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는 너무나도 많은 선택지가 놓여 있어서, 사람들이 굳이 하나님 나라를 선택하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런 시대일수록 하나님 나라가 더욱 중요합니다. 좋은 직장과 안정된 노후와 자녀의 성공이 소중해도, 우리 인생의 최종 목적은 아닙니다. 목적이 되지 말아야 할 것을 목적으로 삼으면, 그것을 얻기 전에는 불안하고, 얻은 뒤에는 허무해집니다. 그러나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우리의 일과 재산과 관계는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제자리를 찾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성공해야 사랑받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성공한 사람으로 존재합니다. 많이 소유해서 안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두려움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세상은 연봉과 직함과 자산으로 사람의 무게를 재지만, 하나님 나라는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깁니다. 세상은 효율이 낮은 사람을 뒤로 밀어내지만, 하나님 나라는 어린아이와 병든 사람과 가난한 사람을 한가운데 세웁니다. 세상은 승자가 옳다고 말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참된 왕으로 선포합니다.

그런 하나님 나라는 미래의 소망이기도 합니다. 경제 불안, 세대 갈등, 전쟁과 기후 위기, 급격한 기술 변화 앞에서 우리는 미래를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종말의 날에 세상의 모든 악을 심판하시고 우리 눈에서 눈물을 닦으시며, 만물을 새롭게 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았으면 합니다. 나는 무엇을 얻기 위해 가장 많은 시간과 마음을 쏟고 있는가? 그 중심에 있어야 할 하나님 나라가 혹시 주일에만 겨우 생각해 보는 나의 극히 작은 일부인가, 아니면 내가 기뻐하며 모든 것을 걸 만큼 소중한 보화인가?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마지못해 치르는 희생의 목록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성공과 실패를 넘어 존귀한 존재가 되고, 하나님의 정의가 마침내 승리할 것을 바라보는 기쁨이지요.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에게 왔고, 그분의 십자가에서 세상의 권력과 전혀 다른 왕권이 드러났으며, 그분의 부활에서 마지막 나라의 새 아침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보화를 설명만 하신 분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어 그 나라를 열어 주신 우리의 보배로운 왕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결단보다 먼저 주님의 은혜가 선행합니다. 주님이 먼저 우리를 찾으셨고, 자기 생명을 내어주셨으며,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부르심에 우리가 응답해야 할 차례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 모두 하나님 나라를 가장 값진 보화로 발견하기를 바랍니다. 그 기쁨 때문에 삶의 가치가 새로워지고, 그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사랑을 세상 한가운데서 살아 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11/07/2026

“언약의 계승자” / 창 25:19-26
(2026. 7/12, 성령강림주일 후 일곱 번째 주일 그소망교회 교회력 설교)

창 25:19-26) 19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고 20이삭은 사십 세에 리브가를 맞이하여 아내를 삼았으니 리브가는 밧단 아람의 아람 족속 중 브두엘의 딸이요 아람 족속 중 라반의 누이였더라 21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더니 22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23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24그 해산 기한이 찬즉 태에 쌍둥이가 있었는데 25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털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26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였더라

-----------

오늘 본문은 쌍둥이 형제 에서와 야곱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읽을 때 흔히 “왜 하나님은 에서가 아니라 야곱을 선택하셨을까?”라는 질문부터 할 때가 많습니다(저도 100%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창세기의 관심은 그것보다 더 큰 곳에 있습니다. 창세기가 묻는 질문은 “누가 구원을 받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은 어떻게 이어지는가?”에 있습니다. 창세기 전체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을 선택하여 그 사람을 통해 온 세상을 구원하시겠다는 계획을 조금씩 펼쳐 가십니다.

하나님은 먼저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다.” 그런데 그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에게는 약속을 이어 줄 자녀가 없었습니다. 아내 사라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으로는 약속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가능성이 끝난 자리에서 아들 이삭을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이야기를 다시 반복합니다.

이번에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인데, 이삭 역시 사십 세에 결혼했지만 이십 년 동안 자녀가 없었습니다. 본문 21절이 “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에게도 이삭에게도 오랫동안 아이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같은 일을 반복하셨을까요? 이유는 분명합니다. 언약은 인간이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언약은 인간의 능력이나 혈통이나 노력의 결과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역사는 언제나 인간의 가능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서 시작됩니다. 사실 우리가 잘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아서 그렇지 우리의 삶도 그러합니다. 우리는 흔히 뭔가를 성취하고 나면, 그것을 오직 자신의 능력과 피땀 어린 노력으로 이룬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돌아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태어난 시대와 나라, 부모와 친구, 스승, 사업의 파트너, 절호의 기회까지 실은 거의 대부분을 우리는 우리의 계획 밖에서, 곧 은혜를 통해 이룬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단순히 아이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누가 언약을 이어갈 것인지를 결정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스마엘과 이삭이 있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이스마엘이 장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이라.” 오늘 본문도 같습니다. 에서가 장자였습니다. 당시 사회에서는 장자가 가문의 모든 권리를 이어받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태중에 있는 아이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에서 개인을 미워한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야곱 개인이 에서보다 더 훌륭하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나중에 야곱은 속이고, 거짓말하고, 형을 배신하고, 아버지까지 속였습니다. 반면에 에서는 사냥을 좋아했고, 대범한 면이 있었지만 본능에 충실했습니다. 둘 중 누구도 완전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야곱을 통해 언약을 이어가십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의 자격을 따라 이어지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계획을 따를 뿐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 된다는 것은 당연히 은혜이지 특권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에서는 왜 언약에서 멀어졌는가? 그것이 인간의 삶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에서는 하나님의 언약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과 바꾸었습니다. 결혼도 그런 식으로 자기 마음대로 해서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성경은 에서를 단순히 ‘선택받지 못한 사람’으로만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보다 눈앞의 만족을 더 소중하게 여긴 사람으로 그려집니다.

반대로 야곱은 흠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한 가지는 포기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때로는 그 언약을 잘못된 방법으로 붙잡았고, 때로는 욕심 때문에 넘어졌지만, 평생 하나님의 축복을 붙들려고 씨름했습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과 씨름한 후에야 비로소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언약을 계승한다는 것은 완벽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붙드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과연 ‘언약의 계승자’가 되는 것이 중요한 일일까요? 사실 현대인들에게는 아브라함과 이삭 시대처럼 가문을 잇고, 대를 잇는다는 말이 큰 의미를 갖지 않습니다. 결혼을 하지 않는 사람도 많고, 아이를 낳지 않는 가정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혈통이나 족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화는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습니다. 그렇다면 창세기가 그렇게 중요하게 말하는 ‘언약의 계승’은 오늘날에는 시대에 뒤떨어진 이야기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약은 창세기의 언약이 단지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가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은 단지 한 민족을 만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다.” 이 약속은 처음부터 온 세상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셨고, 이삭과 야곱을 거쳐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습니다. 마태복음은 일부러 그 족보를 길게 기록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가족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수천 년 동안 신실하게 언약을 이어 오셨음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의 완성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3:29)

우리는 유대인이 아닙니다. 당연히 아브라함의 혈통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는 피를 이어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은혜를 이어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무엇을 남기고 또 무엇을 이어가야 할까요? 오늘날 우리 사회는 부모의 가업을 이어받거나, 재산을 상속받는 것을 중요시 여깁니다. 물론 그런 것들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더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언약을 다음 세대에 남기고, 또 이어받고 있는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건물을 계승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전통을 계승하는 공동체도 아닙니다. 복음을 계승하는 공동체입니다. 교회가 아무리 크고 아름다운 건물을 가졌어도 복음을 잃어버리면 더 이상 언약 공동체가 아닙니다. 반대로 작은 교회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다음 세대에 전하고 있다면 그 교회는 아브라함의 언약을 계승하는 공동체입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좋은 환경과 재산을 물려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귀한 유산이 있습니다. 언약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입니다.

그것은 돈으로 살 수도 없고, 상속세를 내고 물려줄 수도 없습니다. 오직 삶으로 전해지는 언약의 유산입니다. 한국교회가 가장 깊이 고민해야 할 문제도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의 수가 줄어드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복음이 다음 세대의 삶 속으로 이어지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신앙은 자동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에게도, 이삭에게도, 야곱에게도, 언약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그들의 삶을 통해 이어졌습니다. 오늘 우리의 자녀들도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데, 우리의 역할은 그 길을 삶으로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여기서 예배드리는 것도 실은 누군가가 언약을 이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부모일 수도 있고, 주일학교 선생님일 수도 있고, 목회자일 수도 있고, 어릴 적 친구일 수도 있습니다. 그 누군가가 포기하지 않았기에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 자신도 누군가의 믿음 위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가 그 언약을 이어 줄 차례입니다. 직장에서, 학교에서, 가정에서, 교회에서, 우리가 살아내는 작은 믿음 하나가 다음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언약은 거창한 것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기도로, 한 사람의 정직으로, 한 사람의 사랑으로, 한 사람의 용서로 이어집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서 이삭으로, 이삭에게서 야곱으로, 야곱에게서 이스라엘로, 이스라엘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교회로, 마침내 오늘 우리에게까지 언약을 이어 오셨습니다. 이제 그 언약이 우리에게서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 우리의 자녀에게, 우리의 이웃에게, 그리고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에까지 계속 흘러가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를 언약의 계승자로 부르신 이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창세기의 족보는 고리타분한 고대의 가족 스토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결코 자신의 약속을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증언입니다. 사라는 늙었지만 하나님은 약속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리브가는 오랫동안 아이를 갖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약속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야곱은 수없이 넘어졌지만 하나님은 약속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모든 민족을 향한 구원의 언약을 이루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 은혜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도 하나님의 언약이 머물다 사라지는 종착역이 아니라, 다음 사람에게 흘러가는 통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믿음과 복음을 소중히 간직하고,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세상 속에서 신실하게 이어 가는 언약의 계승자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Address

서울시 마포구 월드컵북로 92
Seoul
03978

Website

Alerts

Be the first to know and let us send you an email when 그소망교회 posts news and promotions.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used for any other purpose, and you can unsubscribe at any time.

Contact The Place Of Worship

Send a message to 그소망교회:

Shortcuts

Sh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