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2021
이슬과 사자
말씀 / 미가 5:1-15
요절 / 미가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But you, Bethlehem Ephrathah, though you are small among the clans of Judah, out of you will come for me one who will be ruler over Israel, whose origins are from of old, from ancient times." NIV)
성탄 말씀으로 미가 5장을 공부하고자 할 때, 부담이 되기도 합니다. 많은 역사적인 배경이 있고, 시간적 공간적 거리도 있기에, 본문 이해 자체가 쉽지 않은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미가서는 B.C 8세기에, 지금부터 2700년 전에 하나님이 선지자 미가를 통해서 주신 말씀입니다. 내용은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예고와, 하나님이 이루시는 구원에 대한 것입니다.
미가서에 사용 되는 표현들은 미가의 시대에서는 별다른 설명이 없어도 이해가 되는 말들일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코로나19’라는 말을 쓰면 굳이 설명 안 해도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미가의 시대를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한 단어 한 구절의 의미가 무엇인지 잘 다가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설명이 필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메시지는 기초 공부를 통해 어느 정도 설명이 되었다는 전제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공부하는 ‘미가서’는 예언서에 속하는 하나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에서 종말까지, 모든 역사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어느 시대 어떤 선지자에게 계시를 주실 때든지, 하나님이 알려주시려는 구원의 계획은 다르지 않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질 궁극적 구원에 대해서 말씀을 해 주십니다. 다만 그 시대, 그 시대마다 그 말씀을 전하고 듣는 사람들에게 그들 당시의 역사 속의 사건들과 언어들로 표현하고 기록하게 하셨기 때문에 표현이 다를 수 있을 뿐입니다.
미가서 전체는 1-2장, 3-5장, 6-7장을 하나의 단원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5장은 두 번째 단원으로, 3장에서 예루살렘의 죄에 대한 심판을, 4장에서 심판 후의 회복을 말씀하신 것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다시 말해 그런 회복이 누구를 통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런 구원과 회복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알아야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4장에서 말하는 구원과 회복이 그들의 당대에 곧바로 이루어지는 구원이 아니라, 인류 역사의 끝에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지는 궁극적인 구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그들의 당장의 현실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세상에 계속 살아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현실의 삶에서는 그들도 연단과 시련을 계속 받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남는 문제는 미래에 있을 궁극적인 그 구원에 참여하기까지 어떻게 당장의 연단과 시련들을 이겨내고 믿음을 지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이에 대해 말씀해 주십니다. 그 길은 오늘날의 우리가 알고 있는 길과 다르지는 않습니다. 아니 다를 수가 없습니다. 그 길은 바로 그들의 구원을 위해 나실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어떻게 구원 하실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그들은 시련이 계속 되는 현실 속에서도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살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를 위해 미가 선지자에게 예수님의 성탄을 미리 예언하게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도 예수님을 바라보는 가운데, 예수님 안에서 이 시대의 고난 속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소망과 믿음을 덧입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본문 1절은 ‘딸 군대여’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부르시는 시적 표현입니다. 하나님에게 자기 백성은 사랑하는 딸과 같으면서, 동시에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싸우는 영적인 군대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4장에서 심판 후의 회복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회복은 종말에, 재림하실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질 궁극적인 구원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려는 구원은 그런 구원 안에서 오늘의 구원도 주시는 구원입니다. 그래서 그 궁극적 구원의 때까지는 하나님의 백성들도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죄악으로 심판하시는 세상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는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말씀해 주시고 살아갈 길과 힘도 주십니다.
이런 차원에서 하나님은 먼저 그들이 누구인지를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딸 군대임을 잊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런 그들에게 ‘때를 모으라’고 하십니다. 이는 세상의 모습에 대한 실망과 두려움 때문에 흩어지지 말고 모이기를 힘써야 함을 말씀한 것입니다. 이 시대의 현상에 대해 말하면 ‘가나안’ 성도가 되지 말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뿔뿔이 흩어지고 혼자가 될 때는 우는 사자 같이 삼킬 자를 찾는 악한 마귀의 희생자가 될 수밖에 없기 쉽습니다. 그러나 혼자가 아니고 믿음이 동지들이 함께 뭉치면 세상을 이기는 강하고 담대한 ‘원 팀’이 될 수 있습니다. 두세 사람이 믿음으로 함께 할 때 예수님께서도 그들과 함께 해 주십니다.
세상이 그들의 죄악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가운데, 그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현실을 보면 영적인 대적들이 그들을 에워싼 채 위협하며 굴복을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미가의 시대에 대적들은 막대기로 이스라엘 재판자의 뺨을 쳤습니다. 이는 예를 들어 바벨론이 남 유다를 침략해, 시드기야 왕을 사로잡고, 백성들 앞에서 두 눈을 뽑고 쇠사슬에 묶어 바벨론으로 끌고 가는 그런 경우를 말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누구라도 두려워 떨며 대적들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시대에도 하나님의 참된 백성들이 비록 소수에 불과하지만 똘똘 뭉칠 때 어떻게 되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그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시대에 살았고, 원치 않게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야 했습니다. 그곳에서는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된 신상을 만들고, 그 신상에 절하지 않는 사람은 풀무불에 던져 넣겠다고 위협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똘똘 뭉쳤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아닌 우상에 절하느니 차라리 풀무불에 던져지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죽기를 각오했고 죽음에 던져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이런 그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심을 증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혼자일 때보다, 함께 뭉친 믿음의 동역자들이 있을 때 그들은 강했고, 세상을 이겼습니다. 우리가 출애굽기 17장에서 본 모세와 아론과 훌은 기도에 있어서 무적의 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승천 후에 베드로와 요한 역시 단지 둘이었지만 강하고 능력 있는 기도의 팀이 되었습니다. 바나바가 바울과 한 팀이 되었을 때 안디옥 교회는 생명 역사가 풍성하게 일어났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딸 군대로서 이렇게 뭉치고 단합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딸 군대로서 그렇게 뭉치고 어려움을 이겨나갈 수 있습니까? 그 비결은 오직 예수님을 바라보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미가 선지자를 통해 그시대에서도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베들레헴 에브라다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나오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은 미가 당시의 이스라엘 나라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을 정말 믿고 섬기는 참된 하나님의 백성을 말합니다. 이들은 구약시대부터 신약시대까지의 모든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말합니다. 이들을 다스릴 자란, 사람을 다스릴 수 있는 진정한 분, 사람을 창조하신 분이신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나실 분을 말합니다.
우리는 사람의 모든 문제의 뿌리는 하나님께 지은 죄 문제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죄 문제는 ‘다스릴 자에 관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지 않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시고, 땅과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동시에 사람은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는 자리에 두셨습니다. 이를 위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지 않을 때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을 마귀가 뱀을 통해 유혹하여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지 않게 만들고자 했습니다. 사람은 이런 마귀의 말을 듣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 먹음으로 하나님께 반역하였고, 그래서 죽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죽음에서 구원 받는 길은 다시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는 존재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사람의 구원자로 나실 분을 다스릴 자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다스릴 자는 바로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나실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2절은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다스릴 자를 베들레헴 에브라다에서 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만일 세상 왕으로서의 다스릴 자라면 수도 예루살렘의 왕궁에서 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베들레헴과 에브라브다가 유다 족속 중에 작을 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는 한 지역을 부르는 두 가지 이름이었습니다. 베들레헴은 집이라는 단어와 양식이라는 단어를 합친 말로, 양식의 집, 곡식 창고라는 뜻입니다. 에브라다는 많은 열매를 맺는 장소라는 뜻입니다. 이 지역은 바로 좋은 땅이 있어서 곡식이 많은 열매를 맺는 땅, 그래서 양식이 가득 찬 창고가 있는 땅이란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곳은 천명 이상의 인구가 있어서 천부장이 있는 그런 큰 동네는 아니었습니다. 수도인 예루살렘에 비하면 시골의 작은 동네에 불과했습니다.
무엇보다 이곳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슬픈 일을 비유할 때 표현하는 한 사건이 있었던 동네였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조상 야곱이 타향살이에서 돌아올 때 그의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막내 아들 베냐민을 낳으면서 난산으로 죽어 묻힌 곳이었습니다. 그때 라헬은 갓 태어난 핏덩이 아들을 두고 죽어야 하는 고통으로 비통하게 슬퍼하며 죽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 가장 슬픈 일을 표현하는 말은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슬퍼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에브라다는 바로 그렇게 사람에게 죽음이 얼마나 슬픈 것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땅이었습니다. 사람에게 슬픔이 있는 것은 죽음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슬픔의 근본 원인인 죽음이 있게 된 것은 사람이 하나님이 다스리심을 받지 않는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른 곳이 아닌 베들레헴 에브라다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나오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참된 백성은 이런 죽음으로 슬퍼하지 않아도 되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때 다스릴 자를 ‘네게서 곧 베들레헴에서, 내게로 곧 하나님께로’ 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내게로’란 ‘하나님이 뜻을 이루게 하기 위하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한 가지입니다. 사람을 죄로 인한 죽음에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다시 받을 때만 얻을 수 있는 구원입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다스릴 자로 오셔서, 회개하고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는 자를 다스려 주실 때만 있는 구원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뜻은 예수님을 우리를 다스릴 자, 우리의 왕으로 영접하고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그래서 5:24,25에서 예수님의 말을 듣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친히 부활하셔서 그런 영생이 있음을 증명하셨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이를 배웠으니, 우리 중에는 한 분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이 다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3절에서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백성들이 알아야 할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다스릴 자가 되셔서 구원을 주시는 것은 예수님의 초림에서 시작해서 재림까지 이루어질 때 완전히 주어지는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까지는 하나님의 백성들도 이 땅에서 살아갈 때는 실제적으로는 대적들의 다스리심에 붙여 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영적으로는 예수님의 다스리심을 받지만, 현실적으로는 사람들이 만들고 사람들이 주체가 되어 다스리는 정치 체제 속에서 살게 됩니다. 고대에는 왕정체제에서, 현대에는 민주정치체제에서 살아가지만, 어디까지나 그 체제는 하나님이 아닌 사람들이 주체입니다. 당연히 이런 체제도, 이런 체제의 주체인 사람들도 부족하고 한계적인 면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아는 하나님이 백성에게는 때가 되어 우리의 진정한 다스릴 자가 되어 주실 예수님이 항상 소망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쨌든 현실은 하나님의 참된 백성일지라도 하나님은 그런 세상에 붙이시고 그런 세상에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한계적인 그런 체제와 사람일 뿐인 다스리는 자들 아래 살아가게 됩니다. 비록 이 시대가 선거를 통해 누가 자신을 다스릴지를 택할 수 있는 민주체제를 발전시켰지만, 그러나 그럴지라도 한계는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에게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런 세상에서 살아가게 하시면서 하시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3절 하반절에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의 형제 가운데 남은 자가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오게 되도록 하시는 일입니다. 그의 형제란, 한 다스릴 자로 나신 예수님의 형제들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내 형제라고 하셨을 때, 그들은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주신 자들이요, 예수님이 택하여 세우신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낳으신 하나님의 참된 자녀들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범죄 이후, 종말의 때까지 남은 자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자녀를 낳으시고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참된 하나님의 백성 소속으로 돌아오게 하는 일을 하십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하나님이 낳으셔서 예수님의 형제가 되었고, 하나님의 참된 백성을 뜻하는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오게 된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지 않은 실낙원의 세상, 하나님을 믿고 섬기지 않는 자들이 다스리는 세상, 때로 믿는 자들이 다스리는 지도자가 된다고 할지라도 어디까지나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정치체제의 한계 안에 있을 뿐인 세상에서 사람들을 연단하시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일을 하십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나게 하실 다스릴 자가 오십니다. 그 분은 바로 베들레헴 에브라다에서 마리아에게서 나신 그리스도, 성탄의 예수님이십니다. 이 예수님의 나심은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거쳐 재림으로 완성이 되는 나심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통해서 자신이 세상에 나신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하셨지만, 다스릴 자로서 다스리시는 일은 재림을 통해서 온전히 하시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믿는 자들을 성령으로 다스리는 일을 하십니다. 그러나 재림하신 후 그때는 여호와의 능력으로, 하나님이신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으로 다스리시게 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다스리심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예수님의 다스리심을 받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죄로 인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의 존재로 살게 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은 그 존재 자체로 우리의 평강이 되실 것입니다.
그러면 이 예수님이 오실 약속을 받고 그 약속을 믿고 살아가는 미가 시대의 사람들이나, 이 예수님이 초림 이후에 재림의 약속을 믿고 살아가는 신약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예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5절 하반절에서 6절은 한 마디로 그가 우리를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구원은 우리가 일곱 목자와 일곱 군왕을 일으켜 대적을 쳐서 이기는 것이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세상에서 하나님이 없는 자들의 손에 붙여 살아가야 하는 참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딸 군대로서 뭉치고 단합하는 교회가 되어서, 그런 가운데 예수님을 본받고 따르는 영적 지도자들을 세움으로써, 또한 충성스러운 일꾼들을 세움으로써 이겨나가도록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들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모인 사람들, 구약 시대의 야곱의 남은 자에서부터 신약 시대의 교회를 이룬 사람들까지, 그들의 존재의미와 사명은 무엇입니까? 7-9절을 통해 두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한 가지는 이슬 같고 단비 같은 사명입니다. 이스라엘의 기후는 비가 한 내리지 않는 건기와 비가 내리는 우기의 두 계절이 있습니다. 이런 기후에서 이슬은 건기 동안 모든 식물이 생명을 유지하게 합니다. 우기에 내리는 단비는 곡식을 파종하여 자라게 하고 풍성한 결실을 맺게 하여 사람과 동물이 살아갈 수 있게 합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참된 백성들은 세상에서 이슬과 같고 단비와 같은 존재의미와 사명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 사명은 바로 사람에게 생명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서 섬기는 사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적으로는 생명을 주는 것이 없는 건기와 같은 메마른 세상에서, 오직 유일하게 생명을 주는 이슬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으로 하여금 죽을 때도 없어지지 않는 참된 열매, 하나님이 옳게 여기시는 의의 열매를 맺게 하는 단비와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받는 가운데, 죽음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생명과 결실을 맺게 하는 이슬과 단비와 같은 존재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은 수풀의 짐승들 중의 사자 같고 양 떼 중의 젊은 사자 같다고 하셨습니다. 사자는 짐승들 중에 가장 강한 존재입니다. 사자가 지나가면 밟고 찢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자 앞에서 능히 구원할 자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참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이 옳게 여기시는 삶,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갑니다. 그런 사람들은 삶의 선한 영향력을 가지게 됩니다. 그들은 그런 삶의 영향력은 그들이 있는 곳마다에서 그들이 하는 일, 그들의 존재를 통해서 다양하게 세상에 드러나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를 보고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알게 됩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은 바벨론 왕에게 붙인 바 되었으나 그들은 공부를 통해서 사자와 젊은 사자 같은 존재의미를 드러냈습니다. 바벨론 왕과 온 백성들이 하나님이 온 세상을 다스리는 분이심을 알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였습니다. 느부갓네살이 만든 금신상은 우상에 불과하며, 하나님만이 참으로 충성할 분이심을 알게 함으로, 그런 우상 숭배를 헛되게 만들었습니다. 다니엘은 왕에게 외에는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금령이 내려진 가운데,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열어두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사자굴에 던져졌지만 하나님은 사자의 입을 막고 다니엘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를 통해 다니엘은 그를 시기하는 바벨론의 관리들이 만든 금령을 밟고 찢는 사자가 되었습니다.
이 시대에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자나 젊은 사자와 같은 존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각자의 자리에서 믿음으로 이런 삶을 살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이를 위해서 우리에게 예수님을 믿게 하셨고, 예수님의 다스리심을 받게 하셨습니다. 참된 신자들은 어떻게 하는 것이 사자와 같이 젊은 사자와 같이 자기 시대의 불의나 죄악과 싸우는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함께 뭉치되, 광장에 나가서 소리를 높이는 세상의 방식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다니엘의 세 친구들처럼 그런 방식에 무릎 꿇지 않는 것입니다. 조용히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한명 두명, 백명 천명이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삶의 선한 영향력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런 중에 당하는 박해나 핍박으로 죽음과 같은 상황을 만날 지라도 오히려 하나님이 능력을 나타내시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심을 드러내는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 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당하셨으나 부활을 통해 드러내신 길입니다.
하나님이 오늘날 두신 삶의 자리가 어느 곳이든 지는 상관이 없습니다. 학생으로서 공부하는 자리든지, 직장인으로 직장생활을 하는 자리든지, 이름도 빛도 없어 보이는 집안의 일을 하는 자리인지, 그 자리가 사회적 주목을 받는 자리인지 아닌지는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에 있든지 다 보시고 다 아십니다. 이 하나님 앞에서 사는 한 사람의 삶의 본질은 다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옳게 여기시는 삶을 알고 그 삶을 살아갈 때, 그 안에 말씀이 있는 사람이 되어 살아갈 때, 그는 이슬과 같고 단비와 같은 사람이 됩니다. 사자와 젊은 사자와 같은 존재로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며 높아진 것들을 무너뜨리는 삶의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통해 우리 시대에도 남은 자들이 우리를 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오게 되도록 역사하십니다.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이 뜻하신 만큼 하나님의 백성의 숫자가 찰 때, 하나님은 예수님의 재림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 곧 만물이 회복되고 구원과 심판이 완성되는 끝이 오게 하십니다.
10-15절은 그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 나라는 사람이 힘을 내세우는 것을 상징하는 군사력이 없어지고, 사람이 하나님을 떠난 채 앞날에 대한 불안 때문에 찾는 복술과 점쟁이 없게 될 것이며, 하나님 대신에 우상을 섬기며 거짓 위안을 삼는 데 쓰는 우상도 없게 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모든 사람에 대한 진노와 분노의 심판이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상에서 미가 선지자를 통해 그 시대 사람들에게 주신 성탄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은 단지 나실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성탄의 말씀을 들은 자 중에 다니엘과 그 세 친구 같은 ‘딸 군대’가 일어나고 뭉쳤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우리에게 예수님의 성탄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성탄의 예수님,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나신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더 나아가 다시 오실 재림의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이 예수님은 우리를 진정으로 다스릴 자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이 예수님의 다스리심을 받는 사람만이 죄와 죽음에서 벗어나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다스리심을 받는 사람은 이슬과 같고 단비와 같은 사람, 사자와 같고 젊은 사자와 같은 존재로 살게 됩니다. 비록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사람들이 다스리는 세상에 붙여 살지만, 교회를 이루고, 교회를 통해 하나님이 하시는 가장 고귀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영생으로 인도하는 일, 세상의 불의와 죄악을 삶의 선한 영향력으로 이기며,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며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탄을 통해 이런 이슬과 단비 같고, 사자와 젊은 사자 같은 우리의 존재의미와 역할을 새롭게 깨닫고 영접하기를 기도합니다. 겸손히 예수님을 믿는 자리를 지키며 함께 뭉치고 동역하는 우리의 교회가 되고, 항상 하나님께서 일곱 목자와 여덟 군왕을 일으켜 주셔서 세상을 이기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예수님의 다스리심을 받으며 살아가는 참된 이스라엘이 다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