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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과 사자말씀 / 미가 5:1-15요절 / 미가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But y...
20/12/2021

이슬과 사자

말씀 / 미가 5:1-15
요절 / 미가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But you, Bethlehem Ephrathah, though you are small among the clans of Judah, out of you will come for me one who will be ruler over Israel, whose origins are from of old, from ancient times." NIV)

성탄 말씀으로 미가 5장을 공부하고자 할 때, 부담이 되기도 합니다. 많은 역사적인 배경이 있고, 시간적 공간적 거리도 있기에, 본문 이해 자체가 쉽지 않은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미가서는 B.C 8세기에, 지금부터 2700년 전에 하나님이 선지자 미가를 통해서 주신 말씀입니다. 내용은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예고와, 하나님이 이루시는 구원에 대한 것입니다.

미가서에 사용 되는 표현들은 미가의 시대에서는 별다른 설명이 없어도 이해가 되는 말들일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코로나19’라는 말을 쓰면 굳이 설명 안 해도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미가의 시대를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한 단어 한 구절의 의미가 무엇인지 잘 다가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설명이 필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메시지는 기초 공부를 통해 어느 정도 설명이 되었다는 전제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공부하는 ‘미가서’는 예언서에 속하는 하나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에서 종말까지, 모든 역사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어느 시대 어떤 선지자에게 계시를 주실 때든지, 하나님이 알려주시려는 구원의 계획은 다르지 않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질 궁극적 구원에 대해서 말씀을 해 주십니다. 다만 그 시대, 그 시대마다 그 말씀을 전하고 듣는 사람들에게 그들 당시의 역사 속의 사건들과 언어들로 표현하고 기록하게 하셨기 때문에 표현이 다를 수 있을 뿐입니다.

미가서 전체는 1-2장, 3-5장, 6-7장을 하나의 단원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5장은 두 번째 단원으로, 3장에서 예루살렘의 죄에 대한 심판을, 4장에서 심판 후의 회복을 말씀하신 것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다시 말해 그런 회복이 누구를 통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런 구원과 회복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알아야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4장에서 말하는 구원과 회복이 그들의 당대에 곧바로 이루어지는 구원이 아니라, 인류 역사의 끝에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지는 궁극적인 구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그들의 당장의 현실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세상에 계속 살아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현실의 삶에서는 그들도 연단과 시련을 계속 받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남는 문제는 미래에 있을 궁극적인 그 구원에 참여하기까지 어떻게 당장의 연단과 시련들을 이겨내고 믿음을 지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이에 대해 말씀해 주십니다. 그 길은 오늘날의 우리가 알고 있는 길과 다르지는 않습니다. 아니 다를 수가 없습니다. 그 길은 바로 그들의 구원을 위해 나실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어떻게 구원 하실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그들은 시련이 계속 되는 현실 속에서도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살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를 위해 미가 선지자에게 예수님의 성탄을 미리 예언하게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도 예수님을 바라보는 가운데, 예수님 안에서 이 시대의 고난 속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소망과 믿음을 덧입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본문 1절은 ‘딸 군대여’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부르시는 시적 표현입니다. 하나님에게 자기 백성은 사랑하는 딸과 같으면서, 동시에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싸우는 영적인 군대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4장에서 심판 후의 회복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회복은 종말에, 재림하실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질 궁극적인 구원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려는 구원은 그런 구원 안에서 오늘의 구원도 주시는 구원입니다. 그래서 그 궁극적 구원의 때까지는 하나님의 백성들도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죄악으로 심판하시는 세상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는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말씀해 주시고 살아갈 길과 힘도 주십니다.

이런 차원에서 하나님은 먼저 그들이 누구인지를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딸 군대임을 잊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런 그들에게 ‘때를 모으라’고 하십니다. 이는 세상의 모습에 대한 실망과 두려움 때문에 흩어지지 말고 모이기를 힘써야 함을 말씀한 것입니다. 이 시대의 현상에 대해 말하면 ‘가나안’ 성도가 되지 말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뿔뿔이 흩어지고 혼자가 될 때는 우는 사자 같이 삼킬 자를 찾는 악한 마귀의 희생자가 될 수밖에 없기 쉽습니다. 그러나 혼자가 아니고 믿음이 동지들이 함께 뭉치면 세상을 이기는 강하고 담대한 ‘원 팀’이 될 수 있습니다. 두세 사람이 믿음으로 함께 할 때 예수님께서도 그들과 함께 해 주십니다.

세상이 그들의 죄악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가운데, 그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현실을 보면 영적인 대적들이 그들을 에워싼 채 위협하며 굴복을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미가의 시대에 대적들은 막대기로 이스라엘 재판자의 뺨을 쳤습니다. 이는 예를 들어 바벨론이 남 유다를 침략해, 시드기야 왕을 사로잡고, 백성들 앞에서 두 눈을 뽑고 쇠사슬에 묶어 바벨론으로 끌고 가는 그런 경우를 말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누구라도 두려워 떨며 대적들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시대에도 하나님의 참된 백성들이 비록 소수에 불과하지만 똘똘 뭉칠 때 어떻게 되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그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시대에 살았고, 원치 않게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야 했습니다. 그곳에서는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된 신상을 만들고, 그 신상에 절하지 않는 사람은 풀무불에 던져 넣겠다고 위협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똘똘 뭉쳤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아닌 우상에 절하느니 차라리 풀무불에 던져지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죽기를 각오했고 죽음에 던져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이런 그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심을 증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혼자일 때보다, 함께 뭉친 믿음의 동역자들이 있을 때 그들은 강했고, 세상을 이겼습니다. 우리가 출애굽기 17장에서 본 모세와 아론과 훌은 기도에 있어서 무적의 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승천 후에 베드로와 요한 역시 단지 둘이었지만 강하고 능력 있는 기도의 팀이 되었습니다. 바나바가 바울과 한 팀이 되었을 때 안디옥 교회는 생명 역사가 풍성하게 일어났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딸 군대로서 이렇게 뭉치고 단합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딸 군대로서 그렇게 뭉치고 어려움을 이겨나갈 수 있습니까? 그 비결은 오직 예수님을 바라보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미가 선지자를 통해 그시대에서도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베들레헴 에브라다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나오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은 미가 당시의 이스라엘 나라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을 정말 믿고 섬기는 참된 하나님의 백성을 말합니다. 이들은 구약시대부터 신약시대까지의 모든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말합니다. 이들을 다스릴 자란, 사람을 다스릴 수 있는 진정한 분, 사람을 창조하신 분이신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나실 분을 말합니다.

우리는 사람의 모든 문제의 뿌리는 하나님께 지은 죄 문제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죄 문제는 ‘다스릴 자에 관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지 않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시고, 땅과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동시에 사람은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는 자리에 두셨습니다. 이를 위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지 않을 때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을 마귀가 뱀을 통해 유혹하여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지 않게 만들고자 했습니다. 사람은 이런 마귀의 말을 듣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 먹음으로 하나님께 반역하였고, 그래서 죽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죽음에서 구원 받는 길은 다시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는 존재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사람의 구원자로 나실 분을 다스릴 자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다스릴 자는 바로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나실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2절은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다스릴 자를 베들레헴 에브라다에서 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만일 세상 왕으로서의 다스릴 자라면 수도 예루살렘의 왕궁에서 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베들레헴과 에브라브다가 유다 족속 중에 작을 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는 한 지역을 부르는 두 가지 이름이었습니다. 베들레헴은 집이라는 단어와 양식이라는 단어를 합친 말로, 양식의 집, 곡식 창고라는 뜻입니다. 에브라다는 많은 열매를 맺는 장소라는 뜻입니다. 이 지역은 바로 좋은 땅이 있어서 곡식이 많은 열매를 맺는 땅, 그래서 양식이 가득 찬 창고가 있는 땅이란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곳은 천명 이상의 인구가 있어서 천부장이 있는 그런 큰 동네는 아니었습니다. 수도인 예루살렘에 비하면 시골의 작은 동네에 불과했습니다.

무엇보다 이곳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슬픈 일을 비유할 때 표현하는 한 사건이 있었던 동네였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조상 야곱이 타향살이에서 돌아올 때 그의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막내 아들 베냐민을 낳으면서 난산으로 죽어 묻힌 곳이었습니다. 그때 라헬은 갓 태어난 핏덩이 아들을 두고 죽어야 하는 고통으로 비통하게 슬퍼하며 죽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 가장 슬픈 일을 표현하는 말은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슬퍼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에브라다는 바로 그렇게 사람에게 죽음이 얼마나 슬픈 것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땅이었습니다. 사람에게 슬픔이 있는 것은 죽음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슬픔의 근본 원인인 죽음이 있게 된 것은 사람이 하나님이 다스리심을 받지 않는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른 곳이 아닌 베들레헴 에브라다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나오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참된 백성은 이런 죽음으로 슬퍼하지 않아도 되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때 다스릴 자를 ‘네게서 곧 베들레헴에서, 내게로 곧 하나님께로’ 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내게로’란 ‘하나님이 뜻을 이루게 하기 위하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한 가지입니다. 사람을 죄로 인한 죽음에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다시 받을 때만 얻을 수 있는 구원입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다스릴 자로 오셔서, 회개하고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는 자를 다스려 주실 때만 있는 구원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뜻은 예수님을 우리를 다스릴 자, 우리의 왕으로 영접하고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그래서 5:24,25에서 예수님의 말을 듣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친히 부활하셔서 그런 영생이 있음을 증명하셨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이를 배웠으니, 우리 중에는 한 분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이 다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3절에서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백성들이 알아야 할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다스릴 자가 되셔서 구원을 주시는 것은 예수님의 초림에서 시작해서 재림까지 이루어질 때 완전히 주어지는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까지는 하나님의 백성들도 이 땅에서 살아갈 때는 실제적으로는 대적들의 다스리심에 붙여 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영적으로는 예수님의 다스리심을 받지만, 현실적으로는 사람들이 만들고 사람들이 주체가 되어 다스리는 정치 체제 속에서 살게 됩니다. 고대에는 왕정체제에서, 현대에는 민주정치체제에서 살아가지만, 어디까지나 그 체제는 하나님이 아닌 사람들이 주체입니다. 당연히 이런 체제도, 이런 체제의 주체인 사람들도 부족하고 한계적인 면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아는 하나님이 백성에게는 때가 되어 우리의 진정한 다스릴 자가 되어 주실 예수님이 항상 소망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쨌든 현실은 하나님의 참된 백성일지라도 하나님은 그런 세상에 붙이시고 그런 세상에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한계적인 그런 체제와 사람일 뿐인 다스리는 자들 아래 살아가게 됩니다. 비록 이 시대가 선거를 통해 누가 자신을 다스릴지를 택할 수 있는 민주체제를 발전시켰지만, 그러나 그럴지라도 한계는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에게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런 세상에서 살아가게 하시면서 하시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3절 하반절에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의 형제 가운데 남은 자가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오게 되도록 하시는 일입니다. 그의 형제란, 한 다스릴 자로 나신 예수님의 형제들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내 형제라고 하셨을 때, 그들은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주신 자들이요, 예수님이 택하여 세우신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낳으신 하나님의 참된 자녀들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범죄 이후, 종말의 때까지 남은 자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자녀를 낳으시고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참된 하나님의 백성 소속으로 돌아오게 하는 일을 하십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하나님이 낳으셔서 예수님의 형제가 되었고, 하나님의 참된 백성을 뜻하는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오게 된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지 않은 실낙원의 세상, 하나님을 믿고 섬기지 않는 자들이 다스리는 세상, 때로 믿는 자들이 다스리는 지도자가 된다고 할지라도 어디까지나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정치체제의 한계 안에 있을 뿐인 세상에서 사람들을 연단하시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일을 하십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나게 하실 다스릴 자가 오십니다. 그 분은 바로 베들레헴 에브라다에서 마리아에게서 나신 그리스도, 성탄의 예수님이십니다. 이 예수님의 나심은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거쳐 재림으로 완성이 되는 나심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통해서 자신이 세상에 나신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하셨지만, 다스릴 자로서 다스리시는 일은 재림을 통해서 온전히 하시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믿는 자들을 성령으로 다스리는 일을 하십니다. 그러나 재림하신 후 그때는 여호와의 능력으로, 하나님이신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으로 다스리시게 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다스리심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예수님의 다스리심을 받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죄로 인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의 존재로 살게 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은 그 존재 자체로 우리의 평강이 되실 것입니다.

그러면 이 예수님이 오실 약속을 받고 그 약속을 믿고 살아가는 미가 시대의 사람들이나, 이 예수님이 초림 이후에 재림의 약속을 믿고 살아가는 신약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예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5절 하반절에서 6절은 한 마디로 그가 우리를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구원은 우리가 일곱 목자와 일곱 군왕을 일으켜 대적을 쳐서 이기는 것이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세상에서 하나님이 없는 자들의 손에 붙여 살아가야 하는 참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딸 군대로서 뭉치고 단합하는 교회가 되어서, 그런 가운데 예수님을 본받고 따르는 영적 지도자들을 세움으로써, 또한 충성스러운 일꾼들을 세움으로써 이겨나가도록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들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모인 사람들, 구약 시대의 야곱의 남은 자에서부터 신약 시대의 교회를 이룬 사람들까지, 그들의 존재의미와 사명은 무엇입니까? 7-9절을 통해 두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한 가지는 이슬 같고 단비 같은 사명입니다. 이스라엘의 기후는 비가 한 내리지 않는 건기와 비가 내리는 우기의 두 계절이 있습니다. 이런 기후에서 이슬은 건기 동안 모든 식물이 생명을 유지하게 합니다. 우기에 내리는 단비는 곡식을 파종하여 자라게 하고 풍성한 결실을 맺게 하여 사람과 동물이 살아갈 수 있게 합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참된 백성들은 세상에서 이슬과 같고 단비와 같은 존재의미와 사명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 사명은 바로 사람에게 생명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서 섬기는 사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적으로는 생명을 주는 것이 없는 건기와 같은 메마른 세상에서, 오직 유일하게 생명을 주는 이슬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으로 하여금 죽을 때도 없어지지 않는 참된 열매, 하나님이 옳게 여기시는 의의 열매를 맺게 하는 단비와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받는 가운데, 죽음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생명과 결실을 맺게 하는 이슬과 단비와 같은 존재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은 수풀의 짐승들 중의 사자 같고 양 떼 중의 젊은 사자 같다고 하셨습니다. 사자는 짐승들 중에 가장 강한 존재입니다. 사자가 지나가면 밟고 찢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자 앞에서 능히 구원할 자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참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이 옳게 여기시는 삶,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갑니다. 그런 사람들은 삶의 선한 영향력을 가지게 됩니다. 그들은 그런 삶의 영향력은 그들이 있는 곳마다에서 그들이 하는 일, 그들의 존재를 통해서 다양하게 세상에 드러나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를 보고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알게 됩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은 바벨론 왕에게 붙인 바 되었으나 그들은 공부를 통해서 사자와 젊은 사자 같은 존재의미를 드러냈습니다. 바벨론 왕과 온 백성들이 하나님이 온 세상을 다스리는 분이심을 알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였습니다. 느부갓네살이 만든 금신상은 우상에 불과하며, 하나님만이 참으로 충성할 분이심을 알게 함으로, 그런 우상 숭배를 헛되게 만들었습니다. 다니엘은 왕에게 외에는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금령이 내려진 가운데,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열어두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사자굴에 던져졌지만 하나님은 사자의 입을 막고 다니엘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를 통해 다니엘은 그를 시기하는 바벨론의 관리들이 만든 금령을 밟고 찢는 사자가 되었습니다.

이 시대에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자나 젊은 사자와 같은 존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각자의 자리에서 믿음으로 이런 삶을 살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이를 위해서 우리에게 예수님을 믿게 하셨고, 예수님의 다스리심을 받게 하셨습니다. 참된 신자들은 어떻게 하는 것이 사자와 같이 젊은 사자와 같이 자기 시대의 불의나 죄악과 싸우는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함께 뭉치되, 광장에 나가서 소리를 높이는 세상의 방식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다니엘의 세 친구들처럼 그런 방식에 무릎 꿇지 않는 것입니다. 조용히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한명 두명, 백명 천명이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삶의 선한 영향력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런 중에 당하는 박해나 핍박으로 죽음과 같은 상황을 만날 지라도 오히려 하나님이 능력을 나타내시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심을 드러내는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 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당하셨으나 부활을 통해 드러내신 길입니다.

하나님이 오늘날 두신 삶의 자리가 어느 곳이든 지는 상관이 없습니다. 학생으로서 공부하는 자리든지, 직장인으로 직장생활을 하는 자리든지, 이름도 빛도 없어 보이는 집안의 일을 하는 자리인지, 그 자리가 사회적 주목을 받는 자리인지 아닌지는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에 있든지 다 보시고 다 아십니다. 이 하나님 앞에서 사는 한 사람의 삶의 본질은 다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옳게 여기시는 삶을 알고 그 삶을 살아갈 때, 그 안에 말씀이 있는 사람이 되어 살아갈 때, 그는 이슬과 같고 단비와 같은 사람이 됩니다. 사자와 젊은 사자와 같은 존재로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며 높아진 것들을 무너뜨리는 삶의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통해 우리 시대에도 남은 자들이 우리를 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오게 되도록 역사하십니다.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이 뜻하신 만큼 하나님의 백성의 숫자가 찰 때, 하나님은 예수님의 재림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 곧 만물이 회복되고 구원과 심판이 완성되는 끝이 오게 하십니다.

10-15절은 그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 나라는 사람이 힘을 내세우는 것을 상징하는 군사력이 없어지고, 사람이 하나님을 떠난 채 앞날에 대한 불안 때문에 찾는 복술과 점쟁이 없게 될 것이며, 하나님 대신에 우상을 섬기며 거짓 위안을 삼는 데 쓰는 우상도 없게 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모든 사람에 대한 진노와 분노의 심판이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상에서 미가 선지자를 통해 그 시대 사람들에게 주신 성탄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은 단지 나실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성탄의 말씀을 들은 자 중에 다니엘과 그 세 친구 같은 ‘딸 군대’가 일어나고 뭉쳤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우리에게 예수님의 성탄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성탄의 예수님,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나신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더 나아가 다시 오실 재림의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이 예수님은 우리를 진정으로 다스릴 자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이 예수님의 다스리심을 받는 사람만이 죄와 죽음에서 벗어나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다스리심을 받는 사람은 이슬과 같고 단비와 같은 사람, 사자와 같고 젊은 사자와 같은 존재로 살게 됩니다. 비록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사람들이 다스리는 세상에 붙여 살지만, 교회를 이루고, 교회를 통해 하나님이 하시는 가장 고귀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영생으로 인도하는 일, 세상의 불의와 죄악을 삶의 선한 영향력으로 이기며,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며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탄을 통해 이런 이슬과 단비 같고, 사자와 젊은 사자 같은 우리의 존재의미와 역할을 새롭게 깨닫고 영접하기를 기도합니다. 겸손히 예수님을 믿는 자리를 지키며 함께 뭉치고 동역하는 우리의 교회가 되고, 항상 하나님께서 일곱 목자와 여덟 군왕을 일으켜 주셔서 세상을 이기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예수님의 다스리심을 받으며 살아가는 참된 이스라엘이 다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

누가복음 16장의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의 이해제목: 빛의 아들들의 재물관 누가복음 16장의 전체적인 내용은 제목에서처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떤 재물관을 가져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 중...
09/11/2021

누가복음 16장의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의 이해

제목: 빛의 아들들의 재물관

누가복음 16장의 전체적인 내용은 제목에서처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떤 재물관을 가져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 중에서도 재물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를 중심으로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를 딱딱한 이론이 아니라, 매우 흥미진진한 두 가지의 이야기를 통해서 가르쳐 주십니다. 그 이야기는 서두에 나오는 어떤 사람의 청지기 이야기와, 끝에 나오는 어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입니다.

본문에서 청지기 이야기는 서론 역할을 하고, 어떤 부자의 이야기는 결론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난해한 본문으로 알려진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그 당대 사람이 아닌 우리가 이해하는 데는, 누가복음 16장에서 결론 역할을 하는 부자 이야기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결론을 이해하게 되면 예수님께서 왜 이런 불의한 청지기의 이야기를 예로 드셨는가를 좀 더 잘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는 19-31절까지 다소 긴 분량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도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대로의 재물관으로 회개하지 않는다면 결론적으로 어떻게 되느냐를 말씀하시려는 것입니다.

한 부자가 있습니다. 그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겼습니다. 그는 많은 재물로 자기에게 좋다는 것은 다 해 보며 한 마디로 왕처럼 살았습니다. 그는 '헤롯' 백화점에 가서 수 천 만원 하는 명품 브랜드 옷도 수시로 사 입었을 것입니다. 또, 유명한 연예인을 불러 호화로운 파티도 수시로 열고 즐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 하는 한 거지가 있었습니다. 그의 온 몸은 병들고 피부는 헌데 투성이었습니다. 그는 그 부자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다시 말하면 부자 집의 쓰레기통을 뒤져 배를 채우고자 하였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의 누가복음을 통해 그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인가를 알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그가 어떻게 해서 그런 인생의 바닥에 떨어졌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물론 그가 이렇게 된 데는 그 자신이나 누군가의 죄 문제도 없지 않아 있을 것입니다. 지도자들이 정치를 잘못해서 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죽어 아브라함의 품에 있다고 한 것에서, 우리는 그가 그런 인생의 고난을 통하여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돌아온 사람이라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그는 예수님의 가르치심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누군가가 자기 몸처럼 섬기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신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기회를 주신 복 받은 사람은 누구였겠습니까? 우리는 그 사람이 바로 본문의 그 부자였음을 직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나사로는 거리의 개들이 그 헌데를 핥을 정도로 누구의 돌봄도 받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나사로는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그 부자도 죽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는 12:20에 나온 어리석은 부자처럼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도로 찾으심으로써, 거지 나사로가 죽은 얼마 후 갑자기 죽었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부자였기 때문에 백세 인생을 살다가 죽었는지도 모릅니다. 사람은 언젠가는 다 죽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통해서 그 두 사람이 죽은 후에 어떻게 되었느냐를 보라고 하십니다. 부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부자는 음부에서 불꽃 가운데 고통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을 ‘아버지 아브라함이여’라고 부르며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자기 혀를 서늘하게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했습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말을 빌려 죽은 후에는 더 이상 운명을 바꿀 수 없음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에게 세상에서 좋은 것을 다 받았기 때문에 죽은 후에는 괴로움 밖에 받을 것이 없다고 하시고, 너희와 우리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있어서 서로 오갈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어 자기 형제 다섯에게 증언하게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좋은 것을 받은 그는 지옥에 있고, 세상에서 고난을 받은 나사로는 천국에서 위로를 받고 있다는 것을 증언하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그가 살았던 삶의 방식, 재물을 자기만을 위해 쓰는 삶의 방식을 영원한 미래를 위해서 반드시 회개해야 한다는 것을 자기 형제들에게 말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나사로와 같이 세상에서 비록 가난과 질병 속에 죽었다 할지라도, 고난을 통해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은 사람,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이킨 사람을 하나님은 외면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위로를 받게 하신다는 것을 말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다섯 형제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재물을 쓰는 삶을 살 수 있게 말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자기처럼 지옥에 떨어져 고통하지 않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므로 그들에게 들어야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부자가 그렇지 않다고 하며,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할 것이라고 하였지만, 아브라함은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할 것이라며 거절하였습니다.

우리가 이쯤에서 짚어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결론적으로 이 이야기를 하시게 된 배경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15장에서 바리새인들의 문제를 이야기 하게 된 것이 출발점이었습니다(15:1-3). 예수님은 그들이 가진 잘못된 신앙을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물질을 어떻게 쓰고 있는가가 보여주는 것임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그들의 문제를 알게 해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럼으로써 제자들이 그런 바리새인들을 반면교사로 삼아 그들의 실패를 되풀이 하지 않도록 돕고자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재물관이 잘못된 것이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낳게 되는가를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통해 결론적으로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시고자 하시는 재물관의 핵심적인 내용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그것을 위해 1절 이하에서 보는 어떤 사람의 청지기의 예를 이야기 하셨습니다. 그 청지기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렸습니다. 주인은 그를 불러 말했습니다.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청지기는 주인에게 해고 통보를 받고 하던 일을 정리하면서 누구라도 당연하겠지만 자기의 앞날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앞으로 뭐해서 먹고 살아야 할지 길이 잘 안보였습니다. 어느 것도 쉬운 일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무릎을 치며 속으로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청지기는 현재의 자리를 잃더라도 또 다른 사람들이 자기에게 일자리를 줄 수 있는 묘책을 찾아내었습니다. 그것은 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그들이 주인에게 빚진 것을 감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주인에게 기름 백 말을 빚진 자에게는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빚을 줄여주었습니다. 또 다른 자는 밀 백석을 빚졌다고 하자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이렇게 빚을 감해 준 분량을 주목해야 하는데, 여기에 본문 해석의 중요한 열쇠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에서 어떤 점을 주목하여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이 이야기에 나오는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지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음으로 칭찬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주인이 이 청지기를 옳지 않은 청지기, 불의한 청지기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 청지기가 전에도 주인의 소유를 낭비했고 지금도 사람들을 불러 주인에게 진 빚을 임의로 줄여준 것이 청지기로서는 옳지 않은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인이 이 청지기를 칭찬한 것이 그가 한 옳지 않은 일을 한 것을 칭찬했다는 것은 아님이 분명합니다. 주인이 칭찬한 것은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주인이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다고 한 것은 어떤 것을 두고 하는 말일까요? 이는 이어지는 말씀의 맥락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 청지기는 자신의 앞날을 준비했습니다. 그것도 주인의 재물을 가지고 했습니다. 그가 구체적으로 한 일을 보면, 주인에게 빚진 자의 빚을 일부분 줄여준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것은 그가 기름 백 말을 빚진 자는 오십으로 줄여주고, 밀 백 석을 빚진 자는 팔십으로 줄여준 것을 주목하고,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이해할 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는 왜 똑 같은 비율로 빚을 줄여주지 않았을까요?

이렇게 한 것이 일관성이 없는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부분에서 학자들의 연구의 빚을 지게 됩니다. 연구에 의하면, 그 차이는 당시 기름과 밀의 이자가 달랐고, 그래서 이자만큼 줄여준 것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이 동족에게 무엇을 빌려 줄 때는 이자를 받지 말도록 명령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신 23:19). 그러므로 주인으로서는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한 일을 법정에 가져가서 고소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손해 본 재물로 인해 속은 쓰리더라도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속 모르는 사람들로부터는 이자를 받기로 하고 빌려주었다가 회개하고 이자를 받지 않기로 한 좋은 사람으로 여겨질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주인은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다고 칭찬을 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통해 1차적으로 이야기 하시려는 것은 8절 후반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라.”

이는 당시 빛의 아들들로 자처하는 바리새인들의 문제를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본문에서 이 세대의 아들들은 청지기가 대변하고 있는 사람들, 곧 하나님 없이 사는 세상 사람들을 말합니다. 자기 시대에 있어서란 그들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있어서란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에 살 동안 항상 장래를 대비하고, 지혜 있게 준비를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청지기가 주인에게 해고 통보를 받은 이후 한 일이 그 예가 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본문에 나오는 청지기는 얼마나 지혜로운지, 주인의 재물을 가지고 자기의 장래를 준비하기까지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장래를 준비한다는 점에서 보면, 그들이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롭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바리새인들의 어떤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만일 바리새인들이 진정으로 지혜롭다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진정한 장래를 준비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앞에서 미리 살펴본 어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였습니다. 그 부자는 많은 재물이 있었지만, 그 재물로서 진정하고 더 중요한 장래인 죽음 이후를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그에게는 그것을 준비하는 지혜가 없었습니다.

성경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말씀합니다(잠 9:10). 이런 지혜는 이 세상에서의 삶이 다가 아니며,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의 심판이 있으며, 하나님의 나라가 진정한 소망이며 영원한 장래가 된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그런데 부자는 이런 지혜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돈이 있음에도 그런 진정한 장래를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바로 현재 바리새인들이 가진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잘 아시기에 제자들이 바리새인을 반면교사로 삼고 그들과 같이 되지 않도록 돕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비유를 통해서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9절에서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9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이 말씀에는 예수님이 청지기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신 요점이 들어 있습니다. 제자들, 곧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진정한 빛의 자녀들은 어떤 물질관을 가져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하셨습니다. 불의의 재물이란, 옳지 못한 방법으로 얻은 재물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는 앞에 나온 청지기의 비유의 연장선에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청지기가 장래 준비를 위해 사용한 재물은 주인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청지기는 그것을 자기 것처럼 썼습니다. 그런 점에서 청지기가 쓰고 있는 재물은 불의의 재물이었고, 이를 제자들에게 적용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자들 역시 그들에게 있는 재물은 다 하나님이 맡겨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대개는 재물을 하나님의 것으로 여기기보다, 내가 노력해서 번 것이고, 내 부모가 물려준 것이고 그래서 내 것이라고 여기기 마련입니다. 이는 신자라고 해서 다르지 않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가 혹시 재물을 내 것으로 여기고 쓰고 있다면, 그런 차원에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불의의 재물인 셈입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이런 불의의 재물을 어떻게 쓰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 마디로 친구를 사귀는 데 쓰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친구를 사귀는 데 쓰라고 하시는 것은 어떤 뜻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오늘날 이 시대의 사람들이 친구를 사귀는 것 같이 하는 것을 말씀하는 것일까요? 이 말씀은 누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말씀하신 맥락에서 이해해야 맞을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시고 섬기기 원하셔서 인도해 주시는 사람들을 친구로 삼고 섬기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10:33-35에 나오는 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이웃사랑을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또 14:13에서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지도자에게 잔치를 베풀 때 차라리 어떤 사람들을 청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신 말씀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또한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한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할 때는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이 끝날 때, 다시 말해 하나님이 맡겨주신 재물이 더 이상 우리의 것이 되지 못할 때, 그들이 우리를 영주할 처소로 인도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물론 비유적인 말씀입니다.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분은 오직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는 삶을 산다면, 그것은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는 자임을 뜻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가 그들에게 한 것을 예수님에게 한 것으로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재물관 곧 성경적인 재물관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재물을 내 것처럼 여기고 쓰지만, 실은 하나님이 맡겨주신 것임을 아는 것이요, 그렇기 때문에 그 재물을 ‘하나님의 뜻대로 써야 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청지기의 이야기를 기초로 알기 쉽게 친구를 사귀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인도하시는 사람들을 부담스러운 사람이 아니라, 우리를 진정으로 위하는 친구임을 알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재물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로 가는데 경비로 쓰라고 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로 가는 경비로 쓴다는 것은 구체적으로는 하나님이 섬기라고 인도하신 사람들을 친구로 삼고 섬기는 비용으로 쓰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만일 우리가 재물이 그런 용도임을 알지 못하고, 다른 데 써버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소위 자기를 위한 유흥비로 써 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이 뒤에서 한 부자의 이야기를 하신 것에 그것이 잘 나와 있음을 이미 보았습니다. 그 부자는 하나님이 주신 재물을 하나님의 나라에 가는 경비로 쓰지 않았고, 그 결과는 음부에 떨어져 고통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는 성경적 재물관이 정말 무엇인가 알고 그런 재물관을 가지고 사는 것이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잘 보여줍니다. 정말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표현은 이런 재물관을 통해서 나타나게 될 수밖에 없음도 보여줍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이나, 오고 오는 세대의 하나님의 자녀들이 물질관을 통해서 자신을 살펴보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 기초한 바른 재물관을 가질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10-12절에서 이를 정리해서 다시 말씀해 주십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는 것은 재물을 하나님의 뜻대로 쓰는 것이 될 것입니다. 큰 것에 충성하는 것은 재물보다 더 귀하고 영원한 것인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일에 충성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재물을 하나님의 뜻대로 쓰지 않는 사람은 어떻게 하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일에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까를 염려하며 재물에 매이거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부자처럼 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이런 자들에게는 복음의 말씀과 같은 참된 것을 맡겨주실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이런 그들은 진리의 말씀이 있는 사람이 될 수도 없고, 그들을 통해서 진리의 말씀이 전해지는 일도 없게 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런 그들에게는 영원히 그들의 것이 될 수 있는 영생을 주실 수도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누군가 재물을 하나님의 뜻대로 쓰지 않는다는 것은 재물을 어떻게 여기기 때문입니까? 13절에서 예수님은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것은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재물을 하나님의 뜻대로 쓰지 않는 것은 재물을 하나님의 자리에 두기 때문임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 이를 말씀하시는 것은 제자들이 바리새인들의 문제를 잘 알고 그들의 전철을 밟게 되지 않도록 경고하시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문제의 하나는 그들이 스스로 빛의 아들들로 자처하면서도 재물관이 성경적이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부분적으로 이해하고, 잘못된 재물관을 만들었습니다. 14절에 보면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왜 예수님의 말씀을 비웃는 것입니까? 이는 그들의 성경공부가 바른 이해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재물관의 전체를 받아들이지 않고, 일부만 자기에게 좋을 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구약 성경을 읽을 때, 재물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하는 말씀은 깊이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 많은 재물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경건한 삶을 산 자임을 입증하는 증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그들은 돈을 좋아했고 열심히 돈을 모아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런 그들이 볼 때 부자는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나사로와 같은 가난한 거지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닐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무엇을 말씀해 주셨습니까? 이런 그들이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많은 재물을 가진 자체가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잘 하고 있는 것을 증명한다고 여겼습니다. 한 마디로 자신들이 부자가 된 것을 하나님이 축복하신 것이요, 신앙생활을 잘 한 때문이라고 늘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그들을 부러워하였고 이런 그들을 높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우상숭배와 같은 가증하고 혐오스러운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보시고 그렇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들이 재물을 쓰는 것을 볼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말해주는 예가 앞에서 미리 살펴 본 한 부자의 경우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바리새인들처럼 재물관이 잘못되고 왜곡될 가능성은 장차의 제자들에게도 있고, 이 시대의 신자들과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16-18절에서 이를 경고하십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 무릇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림당한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구약 성경의 시대는 세례 요한까지로 끝이 나고 그 후부터는 예수님의 시대요, 하나님 나라의 복음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율법과는 상관없이 예수님의 은혜로 얻게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 나라로 차별 없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구약의 율법은 다 폐지가 된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울 것이라고 하시면서, 예수님의 시대가 되었다고 해서 간음이 로맨스가 되지는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도 간음하는 것이고,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재물을 어떻게 쓰느냐에 대해 율법에서 말씀하신 뜻도 변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재물을 하나님의 뜻대로 쓰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않고 간음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믿은 이후에 간음해도 되고, 재물을 하나님의 뜻대로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만일 그런 이상한 주장을 한다면 그것은 그가 예수님을 믿지도 않고 섬기지도 않은 사람임을 나타낼 뿐입니다.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에 의하든지, 예수님이 다시 가르쳐주신 재물관에 의하든지 중요한 것은 성경적 재물관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재물을 맡겨주신 것은 자기 자신만 좋은 것을 누리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고난으로 인해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게 된 자들, 그래서 하나님이 섬기기를 원하시는 사람들을 하나님을 대신하여 돌보라고 주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또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들의 재물관은 그 핵심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으면 축복 받고 부자가 된다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렇게 부자가 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재물을 쓰기까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볼 때 각자 가진 재물의 분량은 다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과 상관없이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재물관을 가지느냐입니다. 많든 적든 재물을 우리에게 맡겨주신 하나님이 쓰시기 원하는 대로 쓰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두고 예수님은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누가복음에서 배움으로 더 확실하게 알게 된 대로 하나님이 섬기라고 인도하신 사람들을 하나님을 대신하여 섬기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당장은 빠듯한 현실 속에서 내게 맡겨주신 가족을 부양하고 돌보는 것이 되기도 하겠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거기서 더 나아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사람들, 하나님이 나에게 하나님을 대신하여 섬기게 하신 사람들로 확장되어 가는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을 물질관에 의해서 분류한다면 몇 가지로 분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늘에 재물을 쌓아두는 아브라함의 진정한 자손, 자기만을 위해 재물을 쓰는 본문의 부자와 같은 사람, 가난과 질병 속에서 죽어갔지만 그것을 통해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 믿음으로 살다가 죽은 나사로와 같은 사람,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런 가난과 질병 속에서 마음이 더욱 피폐해져서 원망과 불신 속에 살며 죽는 사람 등으로 말입니다. 우리는 이 중에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 말을 안 해도 다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재물관을 가지고, 부하든지 가난하든지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 진정한 장래를 준비하는 지혜 있는 사람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

성장하는 그리스도인 입니까?베드로전서 2:2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아기들이 태어나고 자라가는 일은 참으로 신비롭기만 합니다....
13/08/2021

성장하는 그리스도인 입니까?

베드로전서 2:2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아기들이 태어나고 자라가는 일은 참으로 신비롭기만 합니다. 생명과 생명에 속한 모든 것을 지닌 존재는 존재 자체가 신비입니다. 그런데 이 생명의 신비가 어떻게 시작되고 지속됩니까? 생명의 모든 신비는 생명의 창조주, 생명의 주이신 주 하나님으로 말미암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또한 우리에게 신비 중의 신비이신 분이십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누구입니까? 생명의 주이신 하나님께서 죄와 허물로 죽은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사람들입니다. 베드로전서 1:3은 이를 두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은혜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8월 중에 함께 배우고 있는 ‘믿음 이후’ 특강이란, 우리가 거듭난 이후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듭난 이후의 삶이 곧 우리의 믿음생활이요 신앙생활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을 승리로 이끄는 힘이 무엇인가를 성경에서 찾아보려는 중입니다. 지난주에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에서, 믿음이 바로 신앙생활의 원동력인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 두 번째 주제로, 말씀에 관한 것입니다. 말씀이란 모든 성경에 담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모든 성경 말씀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어떤 자리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성경 말씀이 가진 의미와 역할을 배우고자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것은 여러 관점에서 설명을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3은 하나님 편에서 이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하나님 편에서 보면 우리의 구원 사건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공로를 기초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 사건입니다. 거듭나는 것은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새로운 생명,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새 생명을 얻는 것은 우리가 무슨 값을 내었기 때문도, 무슨 이쁜 짓을 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피 흘리고 죽으신 십자가의 은혜 때문이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새 생명으로 다시 살게 해 주신 은혜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육체의 생명이 우리의 부모님을 통해 전달되었듯이, 하나님이 주신 영원한 새 생명도 전달되는 통로가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23은 이에 대해 말씀합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창조하실 때, 거의 모든 생명이 씨앗을 통해 새로운 생명으로 전달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씨는 모든 생명의 전달에 있어서 통로입니다. 제가 설악산에 갔을 때 그 무성한 숲이 어떻게 지속되고 있는가를 설명한 안내판을 보았더니, 바로 나무가 씨앗을 통해 생명을 전달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런 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새 생명을 주실 때도 마찬가지였다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은혜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실 때도 생명 전달의 통로로 사용된 씨앗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썩어질 씨가 아닌, 살아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성경공부를 통해 복음을 전해 듣고,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을 때, 그 말씀 안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새 생명이 들어 있었다는 뜻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기까지 한 일은 성경을 공부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한 말씀을 영접하는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를 좇으라’는 말씀을 받았고, 어떤 사람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라가’ 하시는 말씀을 받았고, 어떤 사람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다 이루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고 하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어떤 분은 신약이 아니라 구약의 창세기를 공부하는 중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또는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받았을 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생겼고, 하나님이 죄인인 나를 위해 예수님을 보내신 것과 예수님이 나의 구주이신 것을 믿는 믿음이 생겨났습니다. 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실 때, 살아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기독교 신자 곧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때로 이와 관련해 오해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오해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는 것이 다인 줄 여기는 것입니다. 구원 받는 것은 단지 시작일 뿐입니다. 물론 그 시작은 어떤 시작보다 가치 있고, 위대한 시작입니다. 구원 받는 것이 거듭나는 것이요, 하나님이 주신 새 생명을 얻고 태어나는 것이라는 말은 다음 단계가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아기들이 태어난 후 부모는 온 힘을 다 쏟아 아기가 자라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기들 편에서는 열심히 엄마 젖을 먹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구원 받은 이후의 새 생활이지만, 새 생활의 가장 중요한 본질은 자라가는 것임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단순히 전과는 달리 착한 생활, 의로운 생활을 해야 한다는 차원이 아닌 것입니다. 이에 대해 베드로전서 2:2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벧전 2:2 말씀을 다시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에서처럼 하나님은 거듭나게 하신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기본적인 뜻을 두고 계신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거듭나게 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을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일보다도 신자들이 자라는 것에 온 힘을 쏟으실 것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여기서 구원에 이른다고 할 때는 구원의 최종적인 목적에 이르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성경을 볼 때,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데 이르는 것이요, 부활의 몸을 입고 하나님 자녀의 영광에 이르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부모님들을 보면 아기를 낳은 후 자라게 하는 데 온 힘을 쏟습니다. 갓난아기 때는 밤잠을 설치며 젖을 먹입니다. 그 자람에 따라 우유나 이유식을 먹이고, 온갖 좋은 음식을 다 먹입니다. 또한 지성과 인격의 성장을 위해서도 온갖 노력을 기울입니다. 어린이집으로 시작해서 유치원에 보내고, 피아노 학원, 태권도 학원에도 보냅니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교육도 시키고, 그 기간에 온갖 사교육도 시킵니다. 이렇게 해서 장성한 사람이 되기까지 키웁니다. 만약 이런 과정에서 아이가 태어난 것으로 그치고 자라지 않는다면 부모에게는 보통 근심거리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나 심각한 문제요 병이 될 것입니다. 자라지 않는 아이는 제 역할을 할 수도 없고, 사람답게 살 수도 없습니다. 항상 누군가의 돌봄과 섬김만 받아야 하게 됩니다. 결코 자라서 남을 섬기고 돕는 사람이 될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거듭난 이후 자라게 하려고 하십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이 하나님의 모든 말씀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순전하고 신령한 젖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거듭난 이후, 다시 말해 신자가 된 이후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무엇입니까? 순전하고 신령한 젖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입니다. 이는 다른 말로 말씀을 받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방식으로 성경 말씀을 가까이 하는 가운데, 한 말씀 한 말씀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고 삶에서 그 말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자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라는 데 꼭 필요한 말씀을 받기 위해서는 이를 방해하는 것을 알고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것을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악독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모든 나쁜 짓을 말합니다. 모든 기만은 남을 속이는 것이고, 외식은 자기를 속이는 것이며, 시기는 남을 부러워한 나머지 미워하는 것입니다. 모든 비방은 남의 허물을 말하는 것으로 한 마디로 남에 관한 말을 하기를 좋아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모든 일은 우리의 내면을 시끄럽게 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상처주고 힘들게 합니다. 무엇보다 이런 데 빠져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가 없게 되고, 말씀이 없는 사람, 그래서 영적 성장이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성장해 나가려면 하나님께서 내게 어떻게 말씀하셨고, 내가 어떻게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자 하며 그 말씀에 따라 살고자 하는지를 주로 말하고자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로서의 모임을 이루게 될 때의 주된 주제는 사랑방처럼 세상 이야기를 나누고 남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나의 이야기를 하는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자기도 자라가게 되고, 다른 사람에게도 은혜와 유익을 주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이 자란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면이 자라는 것을 말할까요? 아기들은 몸이 자라고 키가 자라고 마음이 자랍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것이 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후서 3:18은 이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오직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그리스도인이 자라는 것은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자라는 것입니다. 이는 단지 네이버 지식인처럼 지식의 양이 자라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의 핵심은 예수님의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알려면 내가 누구인지, 하나님은 누구신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그런 가운데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가고, 그 은혜를 알아가고, 그럴 때 예수님을 본받고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가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 안에 거하게 되고, 예수님이 자기 안에 살게 하시게 됩니다. 결국 그리스도인들이 자라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까지 자라가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거듭난 우리, 구원 이후의 우리가 어떤 사람으로 자라가야 할지 보여주는 모범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이 예수님 안에는 모든 것이 충만합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고, 생명이 충만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것이 충만하여, 사람을 향한 자비와 긍휼이 충만합니다.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에 대한 모든 지혜와 지식이 충만합니다. 우리가 갓난아기들이 젖을 받아먹듯이, 그렇게 말씀을 받아먹을 때 하나님이 자라기 원하시는 대로 그리스도를 향해 자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라면 자랄수록 예수님을 닮아가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되고,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존재로 변화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하게 되든지, 그 일을 통해 그 있는 곳에서 왕의 제사장과 같이 섬기며 은혜를 끼치고, 사람들을 영원한 구원으로 인도하는 전도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한다면, 거듭난 우리가 자라가야 한다면, 구체적으로 예수님을 아는 지식과 은혜에서 자라가야 한다면, 무엇을 통해 예수님을 알 되 그 은혜를 알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성경을 통해 예수님의 모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예수님의 은혜에 대해서, 예수님의 모든 것에 대해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3:15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이 말씀대로 성경은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 구주로 알고 믿게 하는 출발점이 됩니다.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에서도 이를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5:39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이 말씀대로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을 알 수 있고, 예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을 아는 데서 끝없이 자라갈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이런 성경 말씀을 받아들인 참된 신자들과의 만남을 통해서도 예수님을 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모이는 이유, 함께 교회라는 공동체를 이루고 예배드리며, 복음역사를 위해 동역하는 이유도 예수님을 알아가고 예수님을 배우기 위함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 하나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에 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주는 성경은 단지 지식을 전달하는 인쇄물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어떤 본질을 가지고 있는가를 바로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디모데후서 3:16-17은 말씀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께서 그 자녀들을 교훈하고 책망하고 바르게 하고 의롭게 하려고 주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모든 성경 말씀을 거듭난 자녀들이 온전한 사람으로 자라게 하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고 주셨다는 것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4:12-13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죄인인 사람을 구원하고 자라게 하는가를 잘 말해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식물의 씨앗 속에 생명이 있는 것과 같이, 그 자체로 살아있고 활력이 있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계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합니다. 이는 사람이 가진 어떤 문제라도 다 드러나게 하고, 수술하고 치료하는 능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할 때, 그래서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받게 될 때 사람들이 거듭날 뿐만 아니라 놀랍게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사도행전 19장의 이야기는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선교할 때 있었던 사례입니다. 이 사례는 하나님의 말씀의 힘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 가서 복음을 전했을 때 약 12명의 사람들이 영접하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 외 다른 사람들은 다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비방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12명만 따로 모아서 두란노 서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2년 동안 날마다 가르쳤습니다. 그랬을 때, 이들이 은혜를 받고 다른 사람에게 말씀을 전했고, 그 결과 온 아시아 사람들이 다 말씀을 듣게 되었고, 믿고 변화되는 역사, 회개의 역사, 말씀대로 행하는 역사가 크게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힘이 있어서, 개인을 구원하고, 변화시키고, 그들의 변화를 통해서 한 지역과 사회의 모습까지 변화시킬 정도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생각할 점은 이런 놀라운 힘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사람에게 힘 있게 역사하는 말씀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하는 말씀이 되는 경우를 보여주는 생생한 예들입니다. 그 중에서도 예수님의 어머니가 된 마리아의 경우는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하는 말씀이 되는 경우를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마리아는 우리가 아는 대로 갈릴리 나사렛이라는 시골 동네에 살던 처녀로서 요셉이라는 청년과 정혼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 가브리엘이 찾아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었고, 마리아는 이때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고 하였습니다(눅 1:38). 이를 두고 후에 엘리사벳은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고 했습니다(눅 1:45). 마리아는 자기에게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믿음으로 영접했습니다. 이를 볼 때,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고 성모 마리아로서 쓰임 받게 된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영접함으로 된 일이요, 그런 마리아에게 성령님이 능력으로 역사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2:5-9을 보면, 이런 역사하는 말씀을 체험한 마리아가 다른 하인들에게도 말씀대로 하면 된다는 것을 가르치는 사례가 나옵니다. 그래서 하인들이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했을 때,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하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영접하고 순종함으로서 그 말씀이 역사하는 말씀이 되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전파가 되면, 그래서 그 말씀을 듣는 자들이 믿음으로 영접하게 되면 역사하는 말씀이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데살로니가전서 2:13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우리가 근래에 공부한 누가복음에서도 이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은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떨기의 경우가 아니라, 좋은 땅에서의 경우와 같이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할 때 역사하는 말씀이 됩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하나님이 내게 하시는 말씀으로 받고, 그래서 그 말씀대로 행할 때 그 말씀은 역사하는 말씀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듭난 이후 자라가야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누가 뭐라 해도 말씀을 한 말씀이라도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가운데, 믿음으로 영접하고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역사하는 말씀이 되고, 그렇게 말씀을 받고 행하게 된 만큼 우리는 영적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아무리 오랫동안 말씀을 접하고 있었다 할지라도 개인적으로 받은 말씀이 없다면 영적으로는 전혀 성장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씀을 받지 못하고 성장하지 못할 때 어떻게 됩니까? 상담학에서 말하는 용어를 빌려 말하면 그런 사람은 마치 ‘성인아이’와 같은 사람이 됩니다.

디모데후서 3:1-7절은 그런 사람의 모습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받은 말씀을 통해 책망을 받고, 교훈을 받고, 바르게 됨을 받고, 의롭게 된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덧입은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삶의 모습은 결국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는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들을 불신자들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디모데후서의 흐름에서 보면 이들은 교회에 들어왔지만,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가 되고자 힘쓰지 않은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이들을 두고 사도 바울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한다고 하였습니다. 심지어 그들 중에는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여 중한 죄를 짓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이들도 겉으로 보면 항상 예배에 나오고 말씀을 듣고 공부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말씀을 듣고 받는 것이 없을 때 결국은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게 됩니다. 믿음으로 말씀을 받지 않으면, 그래서 듣고 행하지 않으면 말씀이 유익이 되지 못하게 됩니다(히 4:2). 머리만 커지고 그 말씀으로 바리새인처럼 남을 판단하게 되고, 사두개인처럼 말씀을 열심히 비틀어 자기 이익을 챙기는 수단으로 이용하게 됩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구원 이후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보았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개인적으로 받을 때 그 만큼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기에, 인간적으로 좋아 보이는 어떤 것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거듭난 신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끝없이 자라가는 자, 예수님을 닮아가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결단코 일만 만들고 섬김만 받는 영적 유아로 머물지 않고자 해야 할 것입니다. 신앙의 연수만 보면 수십 년을 자랑하는데 ‘성인아이’와 같은 사람이 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다 소원하듯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사람에게 유익을 끼치며 섬기는 그리스도 안에서 장성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성경 공부에 힘쓰면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대해 한 분이 이런 글을 쓴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 앞선 선배들은 무슨 어려운 일을 만나든지, 또는 어떤 벅찬 일을 감당해야 하든지, 우리는 늘 그 일을 말씀에 비추어보고, 말씀으로 방향을 잡고, 말씀에서 지혜와 힘을 얻곤 했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말씀에 기초해서 생각하고, 말씀에 기초해서 말하고, 말씀에 기초해서 행하고자 애썼습니다.” 이는 우리가 앞으로도 지켜나가야 할 자세일 것입니다. 이런 자세를 가질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계속 자라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늘 가까이 접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친 소중한 가치와 의미를 깊이 깨닫게 되고, 말씀에 대한 자세에서 갓난아기가 젖을 사모하듯이 하는 그런 자세를 가진 우리가 다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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