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사랑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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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33:1-24 묵상카드*【함축문장】 이사야 33:1-24출처: 이사야 33:20 — "그것은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이라 그 말뚝이 영영히 뽑히지 아니할 것이요 그 줄이 하나도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며"문장: 유목...
23/08/2026

이사야 33:1-24 묵상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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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축문장】 이사야 33:1-24
출처: 이사야 33:20 — "그것은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이라 그 말뚝이 영영히 뽑히지 아니할 것이요 그 줄이 하나도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며"
문장: 유목민의 하루는 말뚝을 뽑는 일로 시작해 말뚝을 박는 일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왕이 계신 성에서는 아무도 짐을 싸지 않습니다. 견고함은 재료에서 오지 않고, 함께 계시는 분에게서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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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이사야 33:1-24
출처: 이사야 33:22 — "대저 여호와는 우리 재판장이시요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이요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라"
문장: 하나님은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시는 분이며, 사람의 방책이 모두 바닥난 자리에서 홀로 일어나 판을 뒤집으시는 분입니다. 재판장과 율법을 세우신 이와 왕이 한 분이시기에, 그분께 박은 말뚝은 다시 뽑을 일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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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문장】 이사야 33:1-24
출처: 성 베네딕도, 『수도 규칙』 제1장
문장: 베네딕도 성인은 이 수도원 저 수도원을 사흘 나흘씩 떠돌며 평생을 보내는 수도자들을 두고, 늘 움직이면서도 끝내 정착하지 못하고 제 뜻의 종노릇을 한다고 적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세운 공동체의 첫 번째 약속은 '정주', 곧 이 집에 머물겠다는 서원이었습니다. 머물게 하는 힘은 좋은 환경이 아니라 사죄였습니다. 용서받은 사람만이 도망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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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33:1-24 다시는 뽑지 않을 말뚝*온전한 신앙이란 내 힘으로 안전을 쌓아 올리는 기술이 아니라, 나를 지키시는 분의 땅에 삶의 말뚝을 옮겨 박는 생명 사건입니다.오늘이 처서입니다. 땅에 붙어 있던 더위가 ...
23/08/2026

이사야 33:1-24 다시는 뽑지 않을 말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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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신앙이란 내 힘으로 안전을 쌓아 올리는 기술이 아니라, 나를 지키시는 분의 땅에 삶의 말뚝을 옮겨 박는 생명 사건입니다.
오늘이 처서입니다. 땅에 붙어 있던 더위가 슬며시 등을 돌리고, 새벽 공기에는 어느새 서늘한 결이 섞여 듭니다. 마당 끝 풀잎 위에 밤새 맺힌 이슬이 아침 햇살에 잠깐 반짝이다 사라지고, 매미 소리가 잦아든 자리를 귀뚜라미가 조심스레 채웁니다. 계절은 이렇게 아무 소리 없이 자리를 옮기는데, 우리 삶의 자리는 왜 이토록 요란하게 흔들리는 것일까요. 여름 내내 견디느라 애쓰신 분들, 아직 매듭짓지 못한 일 앞에서 밤잠을 설치는 분들,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한 채 짐을 반쯤 싸 둔 마음으로 살아가는 모든 분의 심령 위에, 주님의 다사로운 평화가 깃들기를 소망합니다.
유목민의 하루는 말뚝을 뽑는 일로 시작해 말뚝을 박는 일로 끝났습니다. 풀이 마르면 걷어야 하고, 물이 줄면 옮겨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손에는 늘 밧줄 자국이 남아 있었고, 마음에는 내일을 알 수 없는 불안이 배어 있었습니다. 저는 이 그림이 남의 이야기 같지 않습니다. 우리도 평생 말뚝을 뽑으며 살지 않습니까. 전셋집을 옮기고, 직장을 옮기고, 관계를 옮기고, 때로는 마음까지 옮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끝자락에서 예언자는 우리가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한 장막 하나를 보여 줍니다. 다시는 걷지 않아도 되는 장막입니다.
주전 701년, 앗수르의 대군이 예루살렘 성문 앞에 진을 쳤습니다. 히스기야는 성전의 은과 금까지 긁어모아 조공으로 바쳤지만 산헤립은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애굽의 병거를 믿었던 외교는 무너졌고, 협상하러 간 사신들은 좋은 소식 대신 눈물을 들고 돌아왔습니다. 33장은 바로 그 자리에서 시작합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이 다 소진된 자리. 성경은 그런 자리를 절망이라 부르지 않고 하나님의 시작점이라 부릅니다. 이사야 28장부터 33장까지는 '화 있을진저'라는 외침이 여섯 번 울립니다. 앞의 다섯 번은 사마리아를 믿고 애굽을 믿던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것이었는데, 마지막 여섯 번째만은 방향이 다릅니다. 이번에는 그들을 짓밟던 자를 향합니다. 백성이 마침내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다 내려놓고 여호와께로 돌아선 그 순간에야, 하늘의 화살이 방향을 바꾼 것입니다.
그 바닥에서 예언자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가 놀랍습니다.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우리가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시며 환난 때에 우리의 구원이 되소서"(사 33:2). 한 번의 극적인 구출을 구하지 않고 아침마다의 팔을 구합니다. 고난이 매일 새롭기 때문에 도움도 매일 새로워야 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의 기도입니다. 광야의 만나가 하루치씩만 내렸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비축해 둔 은혜로 살기를 원하지 않으시고, 매일 아침 손을 내밀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성 밖의 풍경은 여전히 참혹합니다. 대로가 황폐하여 다니는 사람이 끊겼고, 레바논의 삼나무가 마르고 사론의 들판이 사막처럼 변했으며 갈멜의 잎이 떨어집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침묵하시던 분이 입을 여십니다. "내가 이제 일어나며 내가 이제 나를 높이며 내가 이제 지극히 높아지리니"(사 33:10). '이제'가 세 번 겹칩니다. 예루살렘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홀로 일어나 판을 뒤집으십니다. 인간의 방책이 완전히 바닥난 지점, 거기가 하나님의 첫 문장이 시작되는 자리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다음 심판의 묘사입니다. 하나님이 대적을 직접 내리치신다고 하지 않고, 그들이 겨를 잉태하고 짚을 낳으며 자기 호흡이 불이 되어 자신을 삼킬 것이라고 말합니다. 악은 저를 태울 연료를 이미 제 안에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등에 마른 지푸라기를 지고 불구덩이를 향해 달려가는 사람, 그것이 교만한 제국의 초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구원의 소식이 들리자 뜻밖의 두려움이 성 안에서 일어납니다. "우리 중에 누가 삼키는 불과 함께 거하겠으며 우리 중에 누가 영영히 타는 것과 함께 거하리요"(사 33:14). 앗수르의 불은 피했는데, 이제 하나님의 불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대답은 제단이 아니라 삶의 자리에서 주어집니다. 공의롭게 행하는 자, 정직히 말하는 자, 부당하게 얻은 재물을 가증히 여기는 자, 뇌물에 손을 흔들어 물리치는 자. 성전 출입증은 예배의 열심이 아니라 장부와 법정과 골목에서 발급됩니다. 그 목록 앞에서 예루살렘 사람들은 자신들이 한참 미달임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깨달음 다음 절에서, 약속이 주어집니다.
"네 눈은 왕을 그의 아름다운 가운데에서 보며"(사 33:17). 성문 앞에 적군이 진을 친 성 안에서, 사람들은 적군 대신 왕의 얼굴을 봅니다. 시선의 방향이 바뀌는 것, 그것이 구원의 첫 증상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장막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이라 그 말뚝이 영영히 뽑히지 아니할 것이요 그 줄이 하나도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며"(사 33:20). 성전도 성벽도 아니고 굳이 장막이라 부른 것이 마음에 오래 남습니다. 견고함은 재료에서 오지 않습니다. 함께 계시는 분에게서 옵니다. 유대인들이 초막절에 짓는 초막은 일부러 비도 새고 별빛도 스며들도록 엉성하게 짓는다지요. 튼튼한 집에 들어앉는 순간 사람은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 시인은 유목민의 천막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지붕을 펼쳐 얹으면 천막은 아침 신전이 된다." 돌로 쌓은 바벨탑은 무너지지만, 하나님을 모신 천 한 장은 신전이 됩니다.
베네딕도 성인은 『수도 규칙』 첫 장에서, 이 수도원 저 수도원을 사흘 나흘씩 떠돌며 평생을 보내는 수도자들을 두고 늘 움직이면서도 끝내 정착하지 못하고 제 뜻의 종노릇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적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세운 수도 공동체의 첫 번째 약속이 '정주', 곧 이 집에 머물겠다는 서원이었습니다. 거룩함이란 더 좋은 곳을 찾아내는 능력이 아니라 주어진 자리에 남아 있는 능력이라는 뜻이겠지요. 우리가 말뚝을 뽑는 이유도 다르지 않습니다. 여기가 아니면 저기, 이 사람이 아니면 저 사람, 이 교회가 아니면 저 교회. 그러나 이사야가 본 성에서는 아무도 짐을 싸지 않습니다. 그 성의 마지막 문장이 그 이유를 말해 줍니다. "그 거주민은 내가 병들었노라 하지 아니할 것이라 거기에 사는 백성이 사죄함을 받으리라"(사 33:24). 머물 수 있게 하는 힘은 좋은 환경이 아니라 용서였습니다. 용서받은 사람만이 도망치지 않습니다.
그러니 오늘 하루, 내 삶의 말뚝이 어디에 박혀 있는지 한번 살펴보시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사람의 호의에 박혀 있다면 그 호의가 식는 날 다시 뽑아야 합니다. 통장의 잔고에 박혀 있다면 숫자가 흔들리는 날 다시 뽑아야 합니다. 건강 검진 결과지에 박혀 있다면 한 줄의 수치가 바뀌는 날 온 장막이 흔들립니다. 저는 이 물음이 결코 한가한 물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무엇 위에 서 있는가는 평온한 날에는 드러나지 않다가, 바람이 부는 날 한꺼번에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호와는 우리 재판장이시요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이요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니"(사 33:22)라는 고백 위에 박혀 있다면, 우리는 이제 짐을 풀어도 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광양사랑의교회가 성도들에게 드려야 할 것은 더 좋은 프로그램이 아니라 말뚝을 뽑지 않아도 되는 자리입니다. 누군가 자기 실패를 조심스레 털어놓았을 때 그 말이 다음 주에 다른 입을 통해 돌아오는 공동체라면, 사람들은 그곳에 말뚝을 박지 않습니다. 반대로 사죄가 선포되고 그 선포가 끝까지 지켜지는 공동체라면, 사람들은 거기서 비로소 밧줄을 내려놓고 짐을 풉니다. 서로의 죄를 들추는 자리가 아니라 서로의 사죄를 확인해 주는 자리, 그것이 이사야가 본 장막의 오늘 이름입니다.
처서의 아침 이슬은 곧 마르겠지만, 그 서늘한 결은 가을 끝까지 이어질 것입니다. 계절이 소리 없이 자리를 옮기듯, 우리 마음의 말뚝도 오늘 조용히 옮겨 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흔들리는 것들 위에 박아 두었던 그 말뚝을 뽑아,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시는 분의 땅에 깊이 박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하루가 걷어야 할 천막이 아니라 아침 신전이 되고,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던 마음이 마침내 짐을 푸는 평화의 순례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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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오늘은 이사야 33장 1절에서 24절까지 말씀으로 '다시는 뽑지 않을 말뚝'이라는 제목으로 묵상에세이를 나눕니다....

이사야 33:01-24 소멸하는 불 곁에 사는 사람들*학대하는 자를 향한 마지막 화 선언으로 문이 열립니다. 속이고도 속임을 당하지 않던 세력에게 그 차례가 반드시 돌아올 것을 선포한 뒤, 예언자는 곧바로 아침마다 ...
23/08/2026

이사야 33:01-24 소멸하는 불 곁에 사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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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대하는 자를 향한 마지막 화 선언으로 문이 열립니다. 속이고도 속임을 당하지 않던 세력에게 그 차례가 반드시 돌아올 것을 선포한 뒤, 예언자는 곧바로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어 달라고 기도합니다(1-6절). 외교는 무너지고 대로는 황폐하며 레바논과 사론과 갈멜까지 시들어 버린 절망의 한복판에서(7-9절), 하나님은 내가 이제 일어나겠다고 세 번 말씀하십니다(10절). 그 불 앞에서 시온의 죄인들은 누가 삼키는 불과 함께 거하겠느냐고 떨지만, 공의롭게 행하는 자에게는 그 불이 도리어 요새가 됩니다(14-16절). 마침내 백성은 아름다운 왕을 보고, 예루살렘은 말뚝이 영영히 뽑히지 않는 장막이 되며, 그 거주민은 다시는 병들었노라 말하지 않습니다(17-2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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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야 28장부터 33장까지는 "화 있을진저"라는 외침이 여섯 번 울리며 하나의 큰 덩어리를 이룹니다. 김근주 교수는 이 '호이'라는 감탄사가 28장 첫머리뿐 아니라 29장과 30장과 31장과 33장 첫머리에도 반복되면서 28-33장을 한 덩어리로 보게 만든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앞의 다섯 번과 여섯 번째는 방향이 다릅니다. 앞의 것들이 사마리아와 예루살렘과 애굽을 의지하던 유다를 겨냥했다면, 33장 1절의 "학대하는 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그들을 짓밟던 앗수르입니다. 데이비드 젝맨은 이 마지막 신탁이 앗수르인들을 향하고 있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다윗 계열의 왕이 이끄는 하나님의 백성이 적어도 그들의 교훈을 배웠고 여호와의 자비에 의지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애굽의 병거를 믿다가 모든 길이 막힌 백성이 마침내 손을 들고 여호와께로 돌아선 자리, 거기서부터 33장이 시작됩니다.
# 역사의 자리는 주전 701년, 산헤립의 사절들이 예루살렘 성문 앞에 서 있던 그 절박한 시각입니다. 히스기야는 은과 금을 긁어모아 조공으로 바쳤지만 앗수르는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성 밖에는 대군이 진을 쳤고 성 안에는 물과 양식이 줄어들었습니다. 협상은 결렬되었고 동맹은 소용없었으며 왕은 굵은 베옷을 입었습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이 다 소진된 자리, 그것이 이 장의 배경입니다. 김필회 교수는 33장을 1-6절, 7-16절, 17-24절의 세 단락으로 나누어 읽으면서, 이 장의 중심을 "당신 백성을 억압하는 폭력적인 세력을 진멸하고 시온에서 왕으로 통치하실 여호와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규정합니다. 그에 따르면 1-6절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자신의 운명을 극복할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가는 이스라엘의 믿음에 관한 증언"입니다.
# 여기에 이 장의 중요한 통찰이 있습니다. 김필회 교수는 민족들이 패권을 놓고 다투다 멸망을 거듭하는 일이 억압당하는 이스라엘에게 결코 기쁜 소식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한 폭력이 물러가면 이스라엘은 또 다른 폭력에 떨어질 뿐이기 때문입니다. 앗수르가 무너지면 바벨론이 오고, 바벨론이 무너지면 페르시아가 옵니다. 강대국의 교체는 약자에게 해방이 아니라 주인의 이름이 바뀌는 일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게 남은 유일한 길은 하나뿐입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역사에 개입하실 때만 민족들의 폭력으로부터 온전히 해방될 수 있습니다.
# 문학적으로 이 장은 탄식과 신탁이 번갈아 울리는 예배의 구조를 지닙니다. 1절의 화 선언, 2절의 공동체 탄원, 3-6절의 확신, 7-9절의 비탄, 10-13절의 신적 응답, 14절의 두려운 질문과 15-16절의 대답, 17-24절의 환상. 성전 뜰에서 실제로 드려졌을 법한 예배의 순서가 그대로 본문이 되었습니다. 특히 14-16절은 시편 15편이나 24편 3-6절과 같은 형식을 지닙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라는 성전 입장 예식의 물음을 빌려, 33장은 새 예루살렘의 시민권을 묻습니다. 그리고 그 대답은 놀랍게도 제사의 규모가 아니라 삶의 윤리로 주어집니다. 젝맨은 33장의 설교 제목을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다"로 붙이고, 14절을 이 장 전체가 제기하고 탐구하는 중심 문제로 보라고 권합니다. 오늘 우리도 그 조언을 따라 읽으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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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절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소서
하나님은 폭력에게도 기한을 정해 두시고, 은혜를 구하는 백성에게 아침마다 새 팔이 되어 주시는 분입니다.
학대를 당하지 않고도 학대하며 속임을 당하지 않고도 속이는 자에게 화가 선포됩니다. 네가 학대하기를 그치면 네가 학대를 당할 것이며, 네가 속이기를 그치면 사람이 너를 속일 것입니다. 그 선언 바로 뒤에 기도가 이어집니다.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우리가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시며 환난 때에 우리의 구원이 되소서. 요란한 소리로 말미암아 민족들이 도망하며 주께서 일어나심으로 말미암아 나라들이 흩어집니다. 황충의 떼같이 사람이 노략물을 모을 것이며 메뚜기가 뛰어오름같이 그 위로 뛰어오를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지극히 존귀하시니 그는 높은 곳에 거하심이요 정의와 공의를 시온에 충만하게 하십니다. 네 시대에 평안함이 있으며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이니, 여호와를 경외함이 네 보배입니다.
1절의 "그치면"이라는 작은 낱말에 이 단락의 무게가 실려 있습니다. 김필회 교수는 이 낱말이 "이들이 승리를 즐길 수 있는 기간이 제한적임을 시사해 준다"고 풀이합니다. 파괴자에게도 허락된 기한이 있고, 그 기한이 지나면 파괴자 자신이 파괴와 배반에 넘겨집니다. 그러므로 배반과 파괴를 일삼는 불의한 세력의 승리 앞에서 낙담할 필요가 없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정의를 신뢰하고, 그분께서 그것을 실행하실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화 선언의 주어가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앗수르를 심판하시는 분은 앗수르에게 복수하는 유다가 아니라 여호와이십니다. 억울한 자가 스스로 심판자가 되려 할 때 그는 자신이 미워하던 그 얼굴을 닮아 갑니다. 본문은 그 유혹에서 우리를 건져 내어, 심판을 하나님의 손에 되돌려 놓습니다.
2절은 이 장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사 33:2). 환난에 처한 공동체를 대표하여 예언자가 하나님의 간섭을 간구합니다. 김필회 교수는 이 전반절의 기도가 간구인 동시에 고백이라고 지적합니다.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만 자신들의 구원이 가능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팔'은 힘의 상징입니다. 이미 30장 30절에서 여호와께서 당신의 팔로 앗수르를 내리치시는 모습이 나온 바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정말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아침마다"입니다. 고난이 매일 새롭기 때문에 도움도 매일 새로워야 합니다. 이 기도는 한 번의 극적인 구출을 구하지 않고 날마다의 동행을 구합니다. 예레미야애가가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애 3:23)라고 노래한 것과 같은 결입니다. 광야의 만나가 하루치씩만 내렸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비축한 은혜로 살기를 원하지 않으시고, 매일 아침 당신께 손을 내밀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3-4절에서 예언자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이미 본 사람처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일어나셨다는 소식만으로 민족들이 흩어집니다. 김필회 교수는 이것을 두고, 그분께서 당신 백성의 역사에 개입하셨다는 소식만으로도 이들이 싸움을 포기하고 황망히 도망한다고 설명합니다. 전쟁의 승패는 병력의 수가 아니라 누가 일어섰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4절의 황충과 메뚜기 비유는 이해가 쉽지 않지만 전체 의미는 분명합니다. 여호와께 대적하던 세력이 철저히 멸망하고, 그들이 남긴 것은 남김없이 거두어집니다. 본문은 그 약탈품을 누가 갖는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관심은 오직 하나, 그분이 일어나셨다는 사실입니다.
5-6절은 이 단락의 결론이자 찬양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지극히 존귀하시니 그는 높은 곳에 거하심이요 정의와 공의를 시온에 충만하게 하심이라"(사 33:5). 여기서 '높은 곳'은 세상과 무관하게 초연한 자리가 아닙니다. 김필회 교수는 이렇게 정리합니다. 여호와께서 높은 곳에서 민족들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며 세상을 통치하시고, 공의와 정의를 무시하다가 심판에 떨어진 예루살렘을 그분께서 공의와 정의로 채우신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위협은 그분께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의 보호자이시지 예루살렘이 그분을 지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6절이 그 모든 것을 한 낱말로 묶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네 보배니라"(사 33:6). 예루살렘을 멸망으로 이끌었던 거짓 지혜와 지식이 사라지고, 여호와를 아는 참된 지혜가 풍성해집니다. 애굽도 앗수르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된 백성이, 마침내 두려워해야 할 단 한 분을 되찾은 것입니다. 두려움의 대상이 바뀌는 것, 그것이 회복의 첫 증상입니다.
우리는 큰 위기 앞에서 단번의 해결을 구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기도는 "아침마다"입니다. 하루치의 힘을 하루치의 기도로 구하는 사람이 결국 오래 걷습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들이 새벽마다 예배의 자리로 나오는 일은 종교적 성실의 과시가 아니라, 오늘 하루를 감당할 팔을 오늘 아침에 받으려는 정직한 가난입니다. 지난주에 받은 은혜로 이번 주를 버티려 할 때 신앙은 회고담이 됩니다. 만나는 하루가 지나면 벌레가 생겼습니다.
또 하나, 우리를 억울하게 하는 세력이 영원할 것처럼 보일 때 1절의 "그치면"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악에게도 기한을 정해 두셨습니다. 우리의 몫은 그 기한을 앞당기려고 같은 방식으로 되갚는 것이 아니라, 정의를 행하시는 분을 신뢰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사업장에서, 때로는 가정에서 우리는 학대하는 자를 만납니다. 그때 우리 안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는 것은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는 은밀한 갈망입니다. 본문은 그 갈망을 기도로 바꾸라고 말합니다. 은혜를 베푸소서,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소서. 이 기도를 드리는 사람은 복수의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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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16절 누가 삼키는 불과 함께 거하겠는가
하나님은 사람의 방책이 모두 무너진 자리에서 홀로 일어나셔서, 당신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심판의 불이 도리어 요새가 되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들의 용사가 밖에서 부르짖으며 평화의 사신들이 슬피 곡합니다. 대로가 황폐하여 행인이 끊어지며 대적이 조약을 파하고 성읍들을 멸시하며 사람을 생각하지 아니합니다. 땅이 슬퍼하고 쇠잔하여 레바논은 부끄러워하고 마르며 사론은 사막과 같고 바산과 갈멜은 나뭇잎을 떨어뜨립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이르십니다. 내가 이제 일어나며 내가 이제 나를 높이며 내가 이제 지극히 높아지리라. 너희가 겨를 잉태하고 짚을 해산할 것이며 너희의 호흡은 불이 되어 너희를 삼킬 것입니다. 민족들은 불에 굽는 횟돌 같겠고 잘라서 불에 사르는 가시나무 같을 것입니다. 너희 먼 데에 있는 자들아 내가 행한 것을 들으라, 너희 가까이에 있는 자들아 나의 권능을 알라. 시온의 죄인들이 두려워하며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이 떨며 이르기를, 우리 중에 누가 삼키는 불과 함께 거하겠으며 우리 중에 누가 영영히 타는 것과 함께 거하겠느냐고 합니다. 오직 공의롭게 행하는 자, 정직히 말하는 자, 토색한 재물을 가증히 여기는 자, 손을 흔들어 뇌물을 받지 아니하는 자, 귀를 막아 피 흘리려는 꾀를 듣지 아니하는 자, 눈을 감아 악을 보지 아니하는 자, 그는 높은 곳에 거할 것이니 견고한 바위가 그의 요새가 되며 그의 양식은 공급되고 그의 물은 끊어지지 아니할 것입니다.
7절의 그림은 참혹합니다. 전쟁터에 나가 싸워야 할 용사들이 거리에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며 절망적으로 부르짖습니다. 평화의 사신들은 좋은 소식 대신 나쁜 소식을 들고 돌아와 비통하게 웁니다. 김필회 교수는 이 사신들을 평화 협상을 위해 보냄받았다가 결렬을 보고하며 슬피 우는 사절로 이해할 수 있다고 봅니다. 실제로 히스기야는 은 삼백 달란트와 금 삼십 달란트를 바치고도 앗수르를 돌려보내지 못했습니다(왕하 18:14-17). 8절은 그 결과입니다. 대로가 황폐해져 다니는 사람이 끊겼고, 조약이 파기되었으며, 사람이 존중받지 못합니다. 젝맨의 표현대로 외교는 실패했고 온 땅이 앗수르의 철권 아래서 타 버린 땅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8절은 전쟁의 그림인데 9절은 전쟁이 아니라 가뭄의 그림입니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두 장면이 왜 나란히 놓였을까요. 김필회 교수는 그 답을 언약 신학의 틀에서 찾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하면 하나님이 땅을 저주하신다는 신명기의 논리입니다. 사람들에 의한 계약의 파기가 땅에 저주를 초래했다는 것입니다. 레바논은 고대 근동 최고의 목재를 내던 산림지대였고, 갈멜은 이름 자체가 과수원을 뜻하는 기름진 산지였으며, 사론은 지중해 해안을 따라 펼쳐진 곡창이었고, 바산은 초지의 비옥함으로 유명한 평야였습니다. 가나안에서 가장 푸르던 네 이름이 한꺼번에 시들었다는 것은, 땅이 사람의 배신에 함께 앓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8절 끝의 "사람을 생각하지 아니하며"라는 짧은 구절이 이 모든 것을 요약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무시되는 사회에서 그분의 피조물인 사람이 존중받지 못하는 것은, 김필회 교수의 표현대로 차라리 당연한 일입니다.
바로 그 바닥에서 10절이 터집니다. "내가 이제 일어나며 내가 이제 나를 높이며 내가 이제 지극히 높아지리니"(사 33:10). '이제'가 세 번, 일어남과 관련된 동사가 세 번 겹칩니다. 김필회 교수는 이 반복이 새로운 신적 사건의 시작과 그 확실성을 강조한다고 봅니다. 젝맨도 같은 지점을 짚습니다. 인간적인 해결책이 없을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루살렘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판을 바꾸십니다. 오랫동안 침묵하시며 얼굴을 감추셨던 분이 이제 행동을 시작하십니다. 11-12절의 심판 묘사도 독특합니다. 하나님이 직접 내리치신다고 하지 않고, 대적들이 겨를 잉태하고 짚을 낳으며 자기 호흡이 불이 되어 자신을 삼킨다고 말합니다. 악은 스스로를 태울 연료를 이미 제 안에 지니고 있습니다. 등에 마른 지푸라기를 지고 불구덩이로 달려가는 자들, 그것이 교만한 제국의 초상입니다.
14절의 질문은 이 장의 심장입니다. 앗수르의 불을 피했더니 이제 하나님의 불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우리 중에 누가 삼키는 불과 함께 거하겠으며 우리 중에 누가 영영히 타는 것과 함께 거하리요"(사 33:14). 김필회 교수는 '영원한 불꽃'이 제물을 태워 바치는 번제단의 화덕을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제단의 불이 영원히 꺼지지 않는 것처럼, 죄인에게는 그 심판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여기 쓰인 '거하다'라는 동사는 객으로 정착한다는 뜻입니다. 객은 완전한 시민은 아니지만 그 사회에서 법적 정치적 권리를 인정받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곧 이 질문은 이런 뜻입니다. 이 불 곁에 누가 살 자격을 얻겠는가. 히브리서 기자가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히 12:29)고 말한 그 하나님이십니다. 젝맨은 여기서 놓쳐서는 안 될 것을 짚습니다. 예루살렘 주민들의 각성이 물리적 공포에 그치지 않고 영적 성질을 지녔다는 사실입니다. 앗수르의 침략에서 하나님의 소멸하는 불을 보는 것은 충분히 공포스럽지만, 진짜 물음은 그 거룩하신 분과 함께 살 수 있는가입니다.
15절의 대답은 놀랍도록 세속적이고 구체적입니다. 공의롭게 행하는 것, 정직히 말하는 것, 토색한 재물을 가증히 여기는 것, 뇌물을 받지 않는 것, 피 흘리려는 꾀를 듣지 않는 것, 악을 보지 않는 것. 여섯 항목이 모두 윤리적 내용입니다. 김필회 교수의 설명대로 '토색한 재물'은 권력을 남용하거나 속임수를 써서 부당하게 얻은 재산이고, '피 흘리는 일'은 살인뿐 아니라 무죄한 사람을 희생양으로 만드는 모든 폭력적 행위를 가리키며, '악한 일을 보지 않음'은 불의한 음모에 가담하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성전 출입증은 제물의 크기가 아니라 장부와 법정과 골목에서 결정됩니다. 다만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목록은 자격을 스스로 갖추라는 요구이기 이전에, 불 곁에 살게 된 자가 그 불에 의해 빚어지는 삶의 모양입니다. 젝맨은 예루살렘 거민들이 자신들이 이 기준에 한참 못 미친다는 것을 깨달았고 우리 모두가 그와 마찬가지라고 말한 뒤, 그 필요에 대한 의식과 함께 곧바로 17절에서 약속의 말이 주어진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자격 없음을 아는 자리가 은혜의 문턱입니다. 그리고 16절의 "높은 곳"은 이미 5절에서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말해진 자리입니다. 의인이 안전한 것은 그가 강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 높은 곳으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같은 불이 누구에게는 소멸이고 누구에게는 요새입니다. 불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그 앞에 선 사람이 달라진 것입니다.
오늘 한국 교회가 두려워해야 할 불은 밖에 있지 않습니다. 세상의 조롱이나 제도의 압박보다 무서운 것은, 우리가 예배하는 그 거룩하신 분이 우리 가운데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늘 따뜻한 위로로만 상상해 왔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임재를 불이라고도 부릅니다. 예배가 뜨거워질수록 삶이 정직해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15절의 목록을 주일의 언어가 아니라 월요일의 언어로 읽으십시오. 계약서에 정직한가, 회계에 투명한가, 약자를 희생양 삼는 자리에 동석하지 않는가, 남의 험담이 오가는 자리에서 눈을 감을 줄 아는가. 광양사랑의교회가 지역에서 신뢰를 얻는 길은 더 큰 행사가 아니라 이 여섯 항목의 반복입니다. 교회의 재정이 투명하고, 교회의 말이 정직하고, 교회가 약한 이를 대신 변호할 때 세상은 비로소 우리가 섬기는 분이 살아 계심을 짐작합니다.
그리고 이 목록 앞에서 스스로 미달임을 발견하거든 절망하지 말고 그 자리에 머무십시오. 14절의 떨림 없이 17절의 아름다움에 이른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그 불 곁에 설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완전함 때문이 아니라, 그 불 속으로 먼저 걸어 들어가신 한 분 때문입니다. 골고다에서 소멸하는 불을 온몸으로 받으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그 자리를 비워 두셨습니다. 그러므로 15절의 목록은 구원의 조건표가 아니라, 이미 그 성에 들어온 자들이 살아 내는 시민의 일과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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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24절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
하나님은 몸소 우리의 재판장과 율법을 세우신 이와 왕이 되셔서, 다시는 말뚝을 뽑지 않아도 되는 처소를 당신 백성에게 주시는 분입니다.
네 눈은 왕을 그의 아름다운 가운데에서 보며 광활한 땅을 볼 것입니다. 네 마음은 두려워하던 것을 생각해 내려니와, 계산하던 자가 어디 있으며 공세를 계량하던 자가 어디 있으며 망대를 계수하던 자가 어디 있느냐고 묻게 됩니다. 네가 강포한 백성을 보지 아니하리니 그 백성은 방언이 어려워 네가 알아듣지 못하며 말이 이상하여 네가 깨닫지 못하는 자입니다. 우리 절기의 시온 성을 보라, 네 눈이 안정된 처소인 예루살렘을 보리니 그것은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이라 그 말뚝이 영영히 뽑히지 아니할 것이요 그 줄이 하나도 끊어지지 아니할 것입니다. 여호와는 거기에 위엄 중에 우리와 함께 계시니 그곳에는 여러 강과 큰 호수가 있으나 노 젓는 배나 큰 배가 통행하지 못합니다. 대저 여호와는 우리 재판장이시요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이요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네 돛대 줄이 풀렸으니 돛대의 밑을 튼튼히 하지 못하였고 돛을 달지 못하였으나, 때가 되면 많은 재물을 탈취하여 나누리니 저는 자도 그 재물을 취할 것입니다. 그 거주민은 내가 병들었노라 하지 아니할 것이라, 거기에 사는 백성이 사죄함을 받을 것입니다.
17절의 왕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다윗 계열의 인물이나 메시아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김필회 교수는 10절과 14절과 22절의 문맥이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당신 모습을 감추셨던 여호와께서 이제 그 모습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순간이 왜 그토록 놀라운지를 그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전 시대에는 모세나 예언자와 같은 특별한 인물들만 그분을 직접 볼 수 있었지만, 새로운 시대에는 15절의 의로운 자라면 누구나 그분을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의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가 여기서 멀지 않습니다. 성문 앞에 적군이 진을 친 성 안에서, 사람들은 적군 대신 왕의 아름다움을 보게 됩니다. 시선의 방향이 바뀌는 것, 그것이 구원의 시작입니다.
18-19절은 구원 시대의 축복을 이전 시대의 두려움에 대조하여 그립니다. 계산하던 자와 공세를 계량하던 자는 조공을 거둬 가던 앗수르의 관리들이고, 망대를 계수하던 자는 유다의 재무장을 통제하기 위해 방어시설의 수를 세던 자들입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떠들며 거만하게 거리를 활보하던 이방인 정복자들이 예루살렘 주민에게 안겨 주던 좌절과 굴욕감을, 김필회 교수는 이사야 28장 11절과 연결해 설명합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기억을 떠올리는 방식입니다. 본문은 "두려워하던 것을 생각해 내리라"고 말합니다. 두려움이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기억으로 남는 것입니다. 지나온 밤을 기억하는 사람만이 아침의 의미를 압니다.
20절의 장막 비유는 유목민의 경험에서 나옵니다. 그들은 새 목초지를 찾아 끊임없이 말뚝을 뽑고 줄을 감아야 했습니다. 김필회 교수는 그 반복 속에 배어 있는 정서를 이렇게 짚습니다. 이들은 내일을 걱정하며 불안에 사로잡혀 말뚝을 뽑고 줄을 정리하며 장막을 거두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이란 미래의 불안이 완전히 제거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러면서도 성전이나 성벽이 아니라 굳이 '장막'이라 부른 것이 인상적입니다. 견고함은 재료에서 오지 않고 함께 계시는 분에게서 옵니다. 21절이 그 이유를 말합니다. 장막이 거두어지지 않는 이유는 여호와께서 거기 계시기 때문입니다. 강이 없는 예루살렘에 여러 강과 큰 호수가 있다는 초현실적인 그림은, 시편 46편 4절이나 에스겔 47장이 그리는 하나님의 임재의 강물과 같은 결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이 강물처럼 성 주변을 흐르기에 적의 배는 접근조차 하지 못합니다.
22절은 이 장의 신학적 정점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이 세 번 불리고, 재판장과 율법을 세우신 이와 왕이라는 세 직임이 한 분께 모입니다. 김필회 교수는 이 마지막 고백이 2절의 간구에 정확히 일치한다고 말합니다. 은혜를 베풀어 달라던 기도가 "그가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라"는 확언으로 닫힌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구원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통치하시기에 이스라엘은 더 이상 재판장들이나 지파 지도자들이나 왕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3절의 돛대 줄이 풀린 배 역시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예루살렘은 제대로 싸울 준비조차 되어 있지 않았지만 전리품은 나누어집니다. 심지어 저는 자도 그 재물을 취합니다.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자가 전리품을 나눈다는 이 이상한 문장은, 이 승리가 예루살렘 주민의 승리가 아니라 여호와의 승리임을 못 박습니다. 은혜의 정의가 여기 있습니다. 싸우지 않은 자에게 승리의 몫이 돌아가는 것.
그리고 마지막 24절이 가장 놀랍습니다. "그 거주민은 내가 병들었노라 하지 아니할 것이라 거기에 사는 백성이 사죄함을 받으리라"(사 33:24). 병들었노라 하지 않는 성의 근거로 제시된 것은 의료도 번영도 아니고 사죄입니다. 김필회 교수는 죄 사함이 질병으로부터의 해방의 전제 조건이 된다고 설명하면서,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예루살렘은 죄로부터 해방된 공간이기에 생명을 위협하는 어떤 세력도 용납될 수 없다고 정리합니다. 신약은 이 순서를 그대로 이어받습니다. 중풍병자를 고치실 때 예수님은 먼저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고 그다음에 일어나 걸으라 하셨습니다(막 2:5-11). 앗수르에게서 벗어나는 것보다 더 깊은 해방이 여기에 있습니다. 죄에서 놓인 백성이 사는 성, 그것이 이사야가 본 마지막 그림입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은 그 성의 완성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계 21:3). 이사야가 본 옮겨지지 않는 장막이 거기서 영원히 세워집니다.
우리는 여전히 말뚝을 뽑으며 삽니다. 전셋집을 옮기고, 직장을 옮기고, 관계를 옮기고, 때로는 교회를 옮깁니다. 옮김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다만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하는 불안이 삶의 기본값이 되어 버린 것은 슬픈 일입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이사할 곳을 알려 주는 대신, 이사하지 않아도 되는 근거를 알려 줍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의 재판장이시요 율법을 세우신 이시요 왕이시라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내 삶의 말뚝이 어디에 박혀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그것이 사람의 호의나 통장의 잔고나 건강 검진 결과에 박혀 있다면 언제든 다시 뽑아야 합니다. 그러나 왕이신 그분께 박혀 있다면 이제 짐을 풀어도 됩니다.
교회가 성도들에게 제공해야 할 것도 결국 이것입니다. 더 좋은 프로그램이 아니라, 말뚝을 뽑지 않아도 되는 자리입니다. 서로의 죄를 들추는 대신 서로의 사죄를 확인해 주는 공동체가 그 장막입니다. 누군가 자신의 실패를 털어놓았을 때 그 말이 다음 주에 다른 입을 통해 돌아오는 교회라면, 사람들은 그곳에 말뚝을 박지 않습니다. 반대로 사죄가 선포되고 그 선포가 지켜지는 공동체라면, 사람들은 거기서 비로소 짐을 풉니다.
마지막으로 24절을 기억하십시오. 우리 가운데 병들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몸이 아니면 마음이, 마음이 아니면 관계가 앓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가 본 성에서는 아무도 병들었노라 말하지 않습니다. 그 성의 아침을 오늘 여기서 미리 살아 내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사죄를 믿는 것입니다. 용서받은 사람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받은 그 사죄가, 언젠가 우리 몸의 모든 앓음까지 거두어 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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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시는 주님,
학대하는 자가 영원할 것처럼 보이는 날에도
그에게도 기한을 정해 두신 주님을 신뢰하게 하소서.
단번의 해결을 구하기보다
오늘 하루치의 힘을 오늘 아침에 구하는
정직한 가난을 우리에게 주소서.
비축한 은혜로 살지 않고
날마다 손을 내미는 백성이 되게 하소서.
소멸하는 불로 우리 가운데 계신 주님,
밖의 위협보다 안의 부패를 더 두려워하게 하소서.
공의롭게 행하고 정직히 말하게 하시고,
부당한 이익과 뇌물과 침묵의 공모에서 우리를 건지소서.
그 목록 앞에서 우리의 미달을 발견할 때
도망하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물러
먼저 그 불 속으로 걸어 들어가신
주님의 은혜를 붙들게 하소서.
우리의 재판장이시요 율법을 세우신 이시요 왕이신 주님,
날마다 말뚝을 뽑으며 살아온 우리에게
다시는 옮기지 않아도 될 처소가 되어 주소서.
광양사랑의교회가 서로의 죄를 들추는 자리가 아니라
서로의 사죄를 확인해 주는 장막이 되게 하시고,
우리 가운데 누구도 내가 병들었노라 말하지 않는
그 성의 아침을 오늘 여기서 미리 살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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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32:1-20 묵상카드*【함축문장】 이사야 32:1-20출처: 이사야 32:15 — "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문장: 광야를 밭으로 바꾸는 힘은 아래에서 올라오...
22/08/2026

이사야 32:1-20 묵상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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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축문장】 이사야 32:1-20
출처: 이사야 32:15 — "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문장: 광야를 밭으로 바꾸는 힘은 아래에서 올라오지 않고 위에서 내려옵니다. 궁전이 폐하고 성읍이 적막해진 그 자리가 실은 은총이 들어갈 빈자리였습니다. 부어 주심 하나로, 사람이 삼십 년을 걸어야 닿는 자리가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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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이사야 32:1-20
출처: 이사야 32:2 — "또 그 사람은 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는 곳 같을 것이며 마른 땅에 냇물 같을 것이며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으리니"
문장: 하나님은 몰아치는 것을 막아 주는 벽이 되시고 말라 가는 것을 적셔 주는 냇물이 되시는 분입니다. 그늘을 만들어 주시는 분이 아니라, 친히 뙤약볕을 맞으시며 우리에게 그늘이 되어 주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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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문장】 이사야 32:1-20
출처: 시몬 베유, 『중력과 은총』
문장: 시몬 베유는 이렇게 썼습니다. "영혼의 모든 자연스러운 움직임은 물질의 중력과 같은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오직 은총만이 예외다." 우리 마음은 가만두면 안일한 쪽으로, 계산이 맞는 쪽으로 흘러내립니다. 그 중력을 거스르는 단 하나가 위에서부터 부어지는 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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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2026

이사야 32:1-20 광야가 밭이 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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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신앙이란 내 힘으로 땅을 바꾸어 보려는 안간힘을 내려놓고, 위에서부터 불어오는 숨결에 나를 열어 드리는 생명 사건입니다.
팔월도 하순으로 접어들었습니다. 가마솥 같던 염천의 기세가 한풀 꺾이고, 저녁 바람 끝자락에 서늘한 가을의 기척이 수줍게 스며드는 무렵입니다. 마당가에서 극성스레 울어 대던 매미 소리도 제풀에 지쳤고, 대지는 그토록 치열했던 여름의 열기를 가만히 내려놓으며 숨을 고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계절이 바뀐다고 삶의 온도까지 함께 내려가지는 않습니다. 여름 내내 마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정작 자신이 얼마나 말랐는지 모르고 계신 분, 무너지지 않으려고 버티느라 어깨가 굳어 버린 분, 남에게 그늘이 되어 주느라 정작 자신은 온몸으로 뙤약볕을 받고 계신 분 — 그 모든 분의 심령 위에, 주님의 다사로운 평화가 깃들기를 소망합니다.
내몽골의 모래땅에 나무를 심은 한 농부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시집온 첫날 눈앞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모래언덕뿐이었다는 그 여인은, 물동이를 지고 먼지바람 속을 오가며 삼십 년 가까이 나무를 심었다고 합니다. 심은 만큼 죽었고, 죽은 자리에 다시 심었습니다. 그렇게 이만 그루의 미루나무가 자라 사막 한복판에 숲이 생기고, 그 그늘 아래 옥수수가 자라고 수박 넝쿨이 뻗어 갔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했습니다. 광야가 밭이 되는 일은 참으로 아름답지만, 참으로 더디구나.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 더딘 일을 단 한 문장으로 말합니다. "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사 32:15). 사람이 삼십 년을 걸어 도달하는 자리를, 하나님은 부어 주심 하나로 여십니다.
때는 주전 701년 무렵, 앞 장들과 같은 자리입니다. 앗수르의 그림자가 예루살렘 성벽에 드리우던 시절, 유다의 왕 히스기야와 그의 자문단은 애굽의 병거를 세어 보며 살길을 찾고 있었습니다. 김필회 교수는 이사야 28장부터 32장까지를 '어떻게 해야 유다가 살아남는가'라는 한 물음 아래 놓인 말씀들로 읽습니다. 아하스는 앗수르를, 히스기야는 애굽을 붙들었으니 의지한 대상만 달랐을 뿐 여호와를 의지하지 않은 점에서는 부자가 다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정리한 히스기야에게 정작 필요했던 한 가지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그분의 말씀에 의존하여 '정의와 공의'로 다스리는 것. 오늘 본문의 첫 문장이 바로 그 말로 시작합니다.
"보라 장차 한 왕이 공의로 통치할 것이요"(사 32:1). 앞선 네 장이 모두 '화 있을진저'라는 탄식으로 시작했다면, 32장은 '보라'로 시작합니다. 김근주 교수는 이 한 글자의 차이에 주목합니다. 28장부터 31장까지가 심판을 말했다면, 32장은 그 심판을 지나온 뒤에 맞이할 회복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회복의 첫 얼굴은 놀랍게도 한 사람입니다. "또 그 사람은 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는 곳 같을 것이며 마른 땅에 냇물 같을 것이며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으리니"(사 32:2). 앞의 둘은 밖에서 몰아치는 것을 막아 주는 벽이고, 뒤의 둘은 안에서 말라 가는 것을 적셔 주는 물입니다. 사람에게는 이 둘이 다 필요합니다. 막아 주기만 해서도, 적셔 주기만 해서도 살아지지 않습니다.
저는 이 구절에서 '그늘'이라는 말 앞에 오래 머물렀습니다. 이 왕은 그늘을 만들어 주는 분이 아니라 그늘 '같은' 분입니다. 그늘이 된다는 것은 내가 그 햇볕을 대신 맞는다는 뜻입니다. 길가에 서서 온몸으로 뙤약볕을 견딘 뒤 지친 길손에게 제 한편을 서늘하게 내어 주는 늙은 느티나무처럼, 그늘은 언제나 누군가의 견딤 위에 생깁니다. 훗날 이 그늘은 한 사람의 몸이 되어 언덕 위에 세워졌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초청은 그러니까 나무 그늘의 목소리였습니다. 그리고 그 왕의 통치 아래서 감겼던 눈이 열리고, 말을 더듬던 혀가 분명해지고, 어리석은 자를 존귀하다 부르던 뒤집힌 저울이 바로잡힙니다. 존귀함은 신분이 아니라 계획으로 판명됩니다. "존귀한 자는 존귀한 일을 계획하나니"(사 32:8). 무엇을 마음에 품고 사는가, 그것이 한 사람의 격입니다.
그런데 이 찬란한 미래를 그려 놓고 예언자는 갑자기 목소리를 바꿉니다. "너희 안일한 여인들아 일어나 내 목소리를 들을지어다"(사 32:9). 그가 흔든 사람들은 악한 사람들이 아니라 편안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염려 없는'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의 뿌리는 본래 '무언가를 깊이 신뢰하다, 그것에 피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의 문제는 아무것도 믿지 않은 것이 아니라, 엉뚱한 것을 너무 깊이 믿은 데 있었습니다. 내년에도 포도는 익으리라는 조용한 확신이 그들의 피난처였습니다. 그러나 일 년 남짓 지나 수확이 끊기고, 희락의 성읍에 가시와 찔레가 돋고, 궁전이 폐하여 들나귀가 즐기는 곳이 됩니다. 여기 쓰인 '가시'는 창세기에서 아담의 땅이 저주받을 때 돋아났던 바로 그 단어입니다. 사람이 살던 자리가 에덴 밖의 땅으로 되돌아간 것입니다. 안일함은 사치보다 훨씬 조용한 죄여서, 무너지고 나서야 자기 정체를 드러냅니다.
바로 그 폐허 위에서 신탁이 뒤집힙니다. "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사 32:15). 여기 '영'으로 번역된 '루아흐'는 숨이자 바람입니다. 앞 장에서 예언자는 애굽의 말들을 두고 "육체요 영이 아니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유다가 남쪽으로 내려가 사려 했으나 끝내 살 수 없던 그것이, 이제 하늘에서 값없이 부어집니다. 그리고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됩니다. '아름다운 밭'으로 옮겨진 말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기름진 땅 갈멜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광야가 갈멜이 되고, 그 갈멜이 다시 숲처럼 여겨질 만큼 무성해집니다. 하나님의 회복은 원상복구가 아닙니다. 그런데 다음 절에서 예언자는 그 밭에 무엇이 자라는지를 말하지 않고, 그 땅에 무엇이 거하는지를 말합니다. "그 때에 정의가 광야에 거하며 공의가 아름다운 밭에 거하리니"(사 32:16). 영이 부어진 표지는 황홀한 체험이 아니라 삶의 자리에 뿌리내린 바름이었습니다.
시몬 베유는 『중력과 은총』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영혼의 모든 자연스러운 움직임은 물질의 중력과 같은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오직 은총만이 예외다." 우리 마음은 가만두면 언제나 아래로 흐릅니다. 안일한 쪽으로, 편한 쪽으로, 계산이 맞는 쪽으로 흘러내립니다. 그것이 영혼의 중력입니다. 그리고 베유는 은총이 채우러 오지만 빈자리가 있는 곳에만 들어갈 수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유다의 궁전이 폐하고 성읍이 적막해진 그 자리가, 실은 은총이 들어갈 빈자리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무너진 자리를 그토록 부끄러워하는 동안, 하나님은 그 자리를 밭으로 갈고 계셨습니다. 그러니 오늘 내 삶에 생긴 빈자리를 서둘러 무엇으로든 메우려 하지 마십시오. 위에서 내려오는 것은 언제나 빈 곳으로 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본문은 마지막 절에서 아주 구체적인 한 장면을 보여 줍니다. "모든 물 가에 씨를 뿌리고 소와 나귀를 그리로 모는 너희는 복이 있느니라"(사 32:20). 물이 넉넉하니 아끼지 않고 뿌린다는 것입니다. 계산하지 않고 뿌리는 삶, 그것이 영이 부어진 사람의 모습입니다. 오늘 한국 교회는 오래 계산하며 살아왔습니다. 몇 명이 오는지, 얼마가 들어오는지, 이 일이 우리에게 무엇이 되는지를 먼저 헤아렸습니다. 그러나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라고 본문은 말합니다(사 32:17). 여기 '열매'로 옮겨진 히브리어는 공을 들여 만든 작품을 뜻하는 말입니다. 화평은 저절로 찾아오는 정적이 아니라, 바른 것이 자리를 잡을 때 비로소 지어지는 작품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가 이 도시의 광야에 아끼지 않고 씨를 뿌리는 교회이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성도 한 분 한 분이 누군가에게 광풍을 피하는 곳, 큰 바위 그늘 같은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거창한 일이 아닙니다. 약한 이의 말을 끝까지 듣는 일, 내 이익이 걸린 자리에서 반걸음 물러서는 일, 계약서를 정직하게 쓰는 일 - 그것이 광야에 거하는 정의이고 밭에 거하는 공의입니다. 그렇게 살아 낸 하루하루가 모여 마침내 화평한 집과 안전한 거처와 조용히 쉬는 곳(사 32:18)이 지어집니다. 삼십 년을 심어야 숲이 생기는 것이 사람의 일이라면, 그 사람의 손에 숨을 불어넣어 삼십 년을 걷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늦여름의 바람이 결을 바꾸고 있습니다. 이 바람은 우리가 만든 바람이 아닙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이 바람이 불면 마른 것이 살아납니다. 오늘 두 손을 위로 벌리시는 여러분 모두가, 자기 안의 광야가 아름다운 밭으로 바뀌어 가는 것을 눈으로 보게 되시기를, 그리고 그 밭에서 거둔 것을 다시 아낌없이 뿌리는 평화의 순례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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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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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32:01-20 정의와 공의가 거하는 땅*"보라"라는 한마디로 새 시대가 열립니다. 한 왕이 공의로 통치하고 방백들이 정의로 다스릴 그 날, 그 사람은 광풍을 피하는 곳이며 마른 땅의 냇물이며 곤비한 땅의 큰...
21/08/2026

이사야 32:01-20 정의와 공의가 거하는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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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라는 한마디로 새 시대가 열립니다. 한 왕이 공의로 통치하고 방백들이 정의로 다스릴 그 날, 그 사람은 광풍을 피하는 곳이며 마른 땅의 냇물이며 곤비한 땅의 큰 바위 그늘입니다(1-2절). 그 통치 아래서 감겼던 눈이 열리고 어눌한 혀가 분명해지며, 어리석은 자를 존귀하다 부르던 뒤집힌 저울이 바로잡힙니다(3-8절). 그러나 예언자의 눈길은 곧 안일한 여인들에게로 돌아섭니다. 일 년 남짓 지나면 포도 수확이 없고, 희락의 성읍에 가시와 찔레가 나며 궁전은 들나귀가 즐기는 곳이 됩니다(9-14절). 그 폐허 위에서 신탁이 뒤집힙니다. 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부어 주시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고, 정의와 공의가 그 땅에 거하여 화평과 영원한 평안이 열매로 맺힙니다(15-2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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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장의 역사적 자리는 앞 장들과 같은 주전 701년 전후, 히스기야 왕의 시대입니다. 김필회 교수는 이사야서에서 28장부터 32장까지 수집된 예언들을 "열방 신탁과 히스기야 — 어떻게 해야 유다가 살아남는가"라는 한 물음 아래 묶습니다. 아하스는 앗수르를, 히스기야는 애굽을 붙들었으니 의존 대상만 달랐을 뿐 여호와를 의지하지 않은 점에서는 부자가 다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김필회 교수는 히스기야에게 정작 필요했던 것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면서 그분의 말씀에 의존하여 '정의와 공의'로 통치하는 것뿐이라고. 오늘 본문 첫 절이 바로 그 말로 시작한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닙니다.
# 문학적으로 32장은 앞 네 장과 뚜렷하게 구별됩니다. 김근주 교수가 지적하듯이 28장에서 31장까지는 모두 재앙을 선포하는 '호이'(화 있을진저)로 시작하는 반면, 32장은 "보라"로 번역된 '헨'으로 시작합니다. 첫머리에서 주의를 끄는 방식은 비슷하지만 내용은 정반대입니다. 28-31장이 심판을 말했다면 32장은 심판을 거치고 나서 맞이할 회복을 말합니다. 또 32장은 정의와 공의가 전체를 감싸는 구조를 지닙니다. 첫머리에서 정의와 공의로 다스릴 왕을 다루고(1절), 끝머리에서 정의와 공의가 광야와 아름다운 밭에까지 가득 찬 세상을 보여 주어(16절) 처음과 끝이 맞물립니다. 그 사이에 놓인 9-14절의 폐허는 이 두 기둥 사이를 지나가야 하는 길입니다.
# 1절의 왕은 누구입니까. 데이비드 젝맨은 "보라 한 왕이"라는 이 선언이 이사야 7장과 9장과 11장에 나왔던 메시아적 인물, 곧 임마누엘을 상기시킨다고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영원한 나라에 관해 하신 모든 약속을 구현할 완전한 다윗 계열의 왕을 통해, 당신의 백성을 영적으로 구원하고 새롭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왕의 의로운 통치는 그 아래서 섬기는 사람들 안에 그대로 반영됩니다. 셉나(22:15-19)와 히스기야 행정부 자문단들의 어리석은 언행과는 전혀 다른 지도자들이 세워지는데, 그 자질은 그들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왕 자신으로부터 흘러나온 것입니다. 한편 김근주 교수는 15절에서 위로부터 임하는 영이 "우리"에게 임한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특정한 한 사람이 다스리는 통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임한 공동체 전체의 변화를 다룬다는 것입니다. 한 왕에게서 시작된 통치가 온 공동체의 삶으로 번지는 것, 그것이 32장이 그리는 회복의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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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절 광풍을 피하는 곳, 큰 바위 그늘 같은 왕
성자 하나님은 공의로 통치하시며 당신의 백성에게 피할 곳과 그늘과 냇물이 되어 주시는 분입니다.
장차 한 왕이 공의로 통치하고 방백들이 정의로 다스릴 것입니다. 그 사람은 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는 곳 같을 것이며, 마른 땅에 냇물 같고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을 것입니다. 그 날에는 보는 자의 눈이 감기지 아니하고 듣는 자가 귀를 기울이며, 조급한 자의 마음이 지식을 깨닫고 어눌한 자의 혀가 민첩하여 말을 분명히 할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를 다시 존귀하다 부르지 아니하고 우둔한 자를 다시 존귀한 자라 말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은 것을 말하며 마음에 불의를 품어 간사를 행하고 패역한 말로 여호와를 거스르며 주린 자의 속을 비게 하고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이 없어지게 합니다. 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합니다. 그러나 존귀한 자는 존귀한 일을 계획하며 항상 존귀한 일에 섭니다.
1절의 '공의'와 '정의'는 이사야서 전체를 관통하는 한 쌍의 열쇳말입니다. '미쉬파트'는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공의로운 판단을, '체다카'는 관계를 바로 세우는 하나님의 성품을 가리킵니다. 여기 등장하는 방백들은 유다 왕국의 지방 행정 책임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통치할 자들입니다. 그들은 인간적 탐욕에 따라 다스리지 않고 하나님의 성품을 부여받아 다스립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찾으신 것이 정의와 공의의 열매였고(5:7), 다윗의 왕좌에 앉을 이가 견고케 할 것도 정의와 공의였으며(9:7), 시온이 구속될 것도 정의와 공의로써였습니다(1:27). 그러니 회복의 시대를 여는 첫 문장이 정의와 공의여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2절은 네 개의 직유를 한 호흡에 쏟아 냅니다. 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는 곳, 마른 땅의 냇물, 곤비한 땅의 큰 바위 그늘. 앞의 둘은 밖에서 몰아치는 것으로부터의 보호이고, 뒤의 둘은 안에서 말라 가는 것에 대한 소생입니다. 사람은 이 두 가지 모두를 필요로 합니다. 몰아치는 것을 막아 주는 벽만 있어도, 목마름을 적셔 주는 물만 있어도 살 수 없습니다. 특히 '큰 바위 그늘'은 광야를 걸어 본 사람만이 아는 은혜입니다. 사막에서 바위 그늘은 목숨을 살립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왕이 그늘을 '주는' 분이 아니라 그늘 '같은' 분이라는 점입니다. 그는 자기 몸으로 햇볕을 막아섭니다. 훗날 이 그늘은 한 사람의 몸으로 십자가 위에 세워졌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는 초청은 이 바위 그늘의 목소리입니다.
3-4절은 6장 10절의 심판 선언과 정확히 대조를 이룹니다. 이사야가 부름받던 날 하나님은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고 눈이 감기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보는 자의 눈이 감기지 아니하고 듣는 자가 귀를 기울입니다. 심판으로 닫혔던 감각이 회복으로 열립니다. '조급한 자'로 번역된 '니므하림'은 진지하게 선포되는 말씀도 한 귀로 흘려 버리는 경솔한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런 완악한 심령조차 심령에서부터 변화를 받습니다. '어눌한 자의 혀가 민첩하여'는 문자적으로는 말더듬이가 유창해진다는 뜻이지만, 문맥으로 보면 세상의 이목이 두려워 진리를 품고도 전하지 못하던 이들이 담대하게 증거하게 되리라는 예언으로 읽는 것이 옳습니다.
5-8절은 뒤집힌 저울이 바로잡히는 장면입니다. 이사야 당시 유다 사회는 악을 선하다 하고 선을 악하다 하는(5:20) 전도된 가치관 위에 서 있었습니다. '우둔한 자'로 번역된 '킬라이'는 본래 돈 씀씀이가 인색한 수전노를 뜻하고, '존귀한 자'로 번역된 '쇼아으'는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상태를 미화한 말입니다. 곧 돈을 제 마음대로 쓴다는 이유만으로 존귀한 자라 칭송받던 시대의 아첨을 냉소하는 표현입니다. 그런 아첨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됩니다. 그리고 6절은 어리석음의 정체를 폭로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단지 지능이 모자란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여호와를 거스르는 말을 하고, 주린 자의 속을 비게 하며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이 없어지게 하는 사람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어리석음은 언제나 하나님을 향한 태도와 이웃을 향한 태도로 함께 드러납니다. 반대로 존귀함도 신분이 아니라 '계획'으로 판명됩니다. "존귀한 자는 존귀한 일을 계획하나니." 존귀함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마음에 품고 사는가로 결정됩니다.
우리 시대에도 저울은 여전히 기울어 있습니다. 많이 가진 이의 말은 그 자체로 지혜처럼 들리고, 가난한 이가 아무리 바르게 말해도(7절) 그 말은 쉽게 흩어집니다. 교회는 이 기울어진 저울을 바로 세우는 자리여야 합니다. 헌금 액수로 존귀함이 매겨지고 직분이 서열이 되는 순간, 우리는 이사야가 고발한 그 사회를 예배당 안에 그대로 옮겨 놓는 것입니다. 존귀함은 계획으로 드러납니다. 우리 교회의 계획표에 주린 자와 목마른 자의 이름이 적혀 있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누군가에게 광풍을 피하는 곳이 되고 큰 바위 그늘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늘이 된다는 것은 내가 햇볕을 맞는다는 뜻입니다. 누군가의 곤비함을 대신 지고 서 있는 사람만이 그늘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 내 앞의 한 사람에게 나는 광풍인지 그늘인지를 정직하게 물어보십시오. 그리고 존귀한 일을 하나만 계획해 보십시오. 존귀함은 늘 계획에서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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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4절 안일한 여인들아, 일어나 들을지어다
하나님은 안일함의 잠을 깨우시고, 무너진 자리 위에서 다시 시작하시는 분입니다.
예언자는 안일한 여인들을 향해 일어나 자기 목소리를 들으라고 외칩니다. 염려 없는 딸들에게 귀를 기울이라고 촉구합니다. 일 년 남짓 지나면 그들이 당황할 것인데 이는 포도 수확이 없고 열매 거두는 일이 이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안일한 여자들은 떨고 염려 없는 자들은 당황하며, 옷을 벗어 몸을 드러내고 베로 허리를 동여야 합니다. 좋은 밭과 열매 많은 포도나무를 위하여 가슴을 치게 될 것입니다. 내 백성의 땅에 가시와 찔레가 나며 희락의 성읍과 기뻐하는 모든 집에도 그리할 것입니다. 궁전이 폐한 바 되고 인구 많던 성읍이 적막하며, 오벨과 망대가 영원히 굴혈이 되어 들나귀가 즐기는 곳과 양 떼의 초장이 될 것입니다.
1-8절의 찬란한 미래에서 갑자기 9절의 경고로 넘어가는 이 단절은 당혹스럽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이사야의 목회적 지혜가 있습니다. 젝맨이 지적하듯이 1-8절은 예언에 믿음으로 반응하게 하는 동기 역할을 합니다. 믿는 자들을 기다리는 영광스러운 미래를 먼저 보여 주고, 그다음에 지금 여기서 무엇에 굴복하면 안 되는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설사 그 영광스러운 미래가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이라 해도, 오늘의 득의양양함에 굴복해서는 그 미래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참된 반응은 환락과 편안함이 아니라 떨며 회개하며 우는 것입니다.
'안일한'과 '염려 없는'이라는 두 표현이 이 단락의 열쇠입니다. '염려 없는'에 해당하는 '뽀트호트'의 원형 '빠타흐'는 본래 무언가를 깊이 신뢰하거나 위기의 때에 무언가를 의지하여 피난하는 것을 나타내는 동사입니다. 곧 이들의 문제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 데 있지 않고, 엉뚱한 것을 너무 깊이 믿는 데 있었습니다. 지금의 풍요가 계속되리라는 확신, 내년에도 포도는 익으리라는 확신이 그들의 피난처였습니다. 여인들이 지목된 것은 여성이 더 죄가 크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사야는 3장 16절 이하에서도 예루살렘 상류층 여인들을 통해 유다 전체를 형상화한 바 있습니다. 다만 3장이 사치와 방탕을 겨냥했다면 여기서는 다가올 재앙에 아무 대비 없이 현재의 이익에만 만족하는 준비성 없음을 겨냥합니다. 안일함은 사치보다 훨씬 조용한 죄입니다.
13절의 '가시와 찔레'는 우연한 표현이 아닙니다. 여기 쓰인 '코츠'는 창세기 3장 18절에서 '가시덤불'로 번역된 바로 그 단어입니다. 최초의 인간이 범죄한 결과 땅이 저주받았음을 드러내는 그 표지가, 이제 돌이키지 않는 유다 땅을 뒤덮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에덴 밖의 땅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14절은 그 폐허를 담담하게 그립니다. 궁전이 버려지고 성읍이 적막해지며, 사람이 살던 자리에 들나귀가 즐기고 양 떼가 풀을 뜯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문장이 반전의 예비입니다. 폐허가 된 자리가 '초장'이 되었다는 표현 속에는 이미 다음 단락의 밭과 숲이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끝이 아니라 다시 심으실 땅을 갈아엎는 일이었습니다.
안일함은 우리 시대 신앙의 가장 흔한 병입니다. 큰 죄를 짓지 않았다는 사실이 곧 잘 살고 있다는 증거가 되어 주지는 않습니다. 예언자가 흔든 사람들은 악한 사람들이 아니라 편안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신앙생활이 습관이 되고, 예배가 일정표의 한 칸이 되고, 말씀이 익숙한 소음이 될 때 우리는 이미 안일한 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일어나 들으라는 부름은 그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라는 부름입니다.
또 하나 물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피난처'로 삼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건강, 지금의 수입, 지금의 관계가 내년에도 그대로일 것이라는 조용한 확신이 실은 우리의 애굽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우리를 겁주려는 말씀이 아닙니다. 무너져 본 자리에서만 새것이 시작되기 때문에 주시는 말씀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의 성도 여러분 가운데 지금 삶의 어느 부분이 궁전이 폐한 것처럼 무너져 내린 분이 계신다면, 그 자리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늘 폐허에서 다시 시작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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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20절 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부어 주시리니
성령 하나님은 위로부터 부어져 광야를 아름다운 밭으로 바꾸시고 정의와 공의를 삶의 자리에 거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하면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숲으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 정의가 광야에 거하며 공의가 아름다운 밭에 거할 것이니,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입니다. 내 백성이 화평한 집과 안전한 거처와 조용히 쉬는 곳에 있을 것이며, 그 숲은 우박에 상하고 성읍은 파괴될 것입니다. 모든 물 가에 씨를 뿌리고 소와 나귀를 그리로 모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마침내"로 번역된 '아드'는 앞의 폐허와 뒤의 회복 사이를 잇는 경첩입니다. 폐허가 영원하지 않다는 것, 그러나 그 폐허를 건너뛸 수도 없다는 것을 이 한 단어가 함께 말합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방향이 제시됩니다. '위에서부터'입니다. 회복은 아래에서 올라오는 노력의 총합이 아니라 위에서 내려오는 부어 주심입니다. 여기 쓰인 '루아흐'는 바람이자 숨이자 영입니다. 앞 장에서 예언자는 애굽의 말들이 "육체요 영이 아니라"(31:3)고 선언했습니다. 그 없던 것이 이제 하늘로부터 부어집니다. 유다가 애굽에서 구하려던 것, 병거로도 마병으로도 살 수 없던 것이 값없이 부어집니다.
그 결과가 놀랍습니다.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됩니다. 여기 '아름다운 밭'으로 번역된 말은 갈멜을 가리키는 단어로, 이스라엘에서 가장 기름진 땅의 이름입니다. 광야가 갈멜이 되고, 그 갈멜이 다시 숲처럼 여겨질 만큼 무성해집니다. 변화의 폭이 한 단계가 아니라 두 단계입니다. 하나님의 회복은 원상복구가 아닙니다. 그런데 16절에서 예언자는 그 밭에 무엇이 자라는지를 말하지 않고, 그 땅에 무엇이 '거하는지'를 말합니다. 정의가 광야에 거하고 공의가 아름다운 밭에 거합니다. 곧 성령이 부어진 표지는 신비한 체험이 아니라 삶의 자리에 뿌리내린 정의와 공의입니다. 김근주 교수의 지적처럼 32장은 1절의 왕의 통치와 16절의 정의·공의로 앞뒤가 맞물리는데, 이는 왕 한 사람에게서 시작된 통치가 마침내 온 땅의 일상으로 번져 나갔음을 뜻합니다.
17절은 이 모든 것을 한 문장으로 압축합니다.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열매'로 번역된 '마아세'는 공을 들여 무언가를 만들거나 힘써 행하는 것을 뜻하는 동사 '아사'에서 온 명사로, '일'·'작품'·'소출'을 함께 뜻합니다. 화평은 저절로 오는 정적이 아니라 공의가 공들여 지어 낸 작품입니다. 다툼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바른 것이 자리를 잡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18절의 세 표현—화평한 집, 안전한 거처, 조용히 쉬는 곳—은 30장 15절에서 그들이 원하지 않았던 그 "조용히 있음"이 마침내 선물로 주어진 장면입니다. 원하지 않아 거절했던 것을 하나님은 끝내 은혜로 안겨 주십니다.
19절은 다시 우박과 파괴를 말해 흐름을 끊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이는 회복의 취소가 아니라, 하나님을 거스르는 '그 숲'과 '그 성읍'—곧 교만한 권력의 상징인 앗수르—이 무너져야 내 백성의 조용한 쉼이 지켜진다는 선언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리고 20절이 축복으로 매듭을 짓습니다. "모든 물 가에 씨를 뿌리고 소와 나귀를 그리로 모는 너희는 복이 있느니라." '복이 있느니라'에 해당하는 '아쉐레켐'의 원형 '아쉐르'는 산상수훈의 '마카리오이'로 번역된 바로 그 단어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얻는 행복이 아니라 오직 위에서부터 내려 주시는 복을 가리킵니다. 물 가에 씨를 뿌린다는 것은 낭비처럼 보이는 넉넉한 파종을 말합니다. 물이 넉넉하니 아끼지 않고 뿌립니다. 영이 부어진 사람의 삶은 계산하지 않고 뿌리는 삶입니다.
우리는 자주 변화를 아래에서 만들어 내려 합니다. 결심을 다지고 계획을 세우고 습관을 고칩니다. 그러나 광야를 밭으로 바꾸는 힘은 위에서 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첫 번째 일은 더 애쓰는 것이 아니라, 위를 향해 두 손을 벌리는 것입니다. 성령을 구하는 기도가 신앙생활의 장식이 아니라 뼈대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영이 부어진 증거를 우리는 감정에서 찾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은 분명히 말합니다. 영이 부어지면 정의가 광야에 거하고 공의가 밭에 거한다고. 성령의 표지는 예배당의 뜨거움이 아니라 일터와 가정과 골목에 자리 잡은 바름입니다. 계약서를 정직하게 쓰는 일, 약한 이의 말을 끝까지 듣는 일, 내 이익이 걸린 자리에서 한 걸음 물러서는 일 - 그것이 광야에 거하는 정의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 도시에서 그런 밭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성도 한 분 한 분이 물 가에 씨를 뿌리는 사람, 계산하지 않고 선을 뿌리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화평은 그렇게 공들여 지어지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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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공의로 통치하시는 왕이신 하나님,
오늘도 우리를 향해 "보라" 하고 부르시니 감사합니다.
광풍을 피하는 곳이 되어 주시고
마른 땅의 냇물이 되어 주시며
곤비한 우리에게 큰 바위 그늘이 되어 주시니
그 그늘 아래서 오늘 하루를 살게 하소서.
감겼던 눈을 열어 주시고 닫힌 귀를 기울이게 하시며
존귀한 일을 계획하는 마음을 우리에게 주소서.
안일한 우리를 깨우시는 하나님,
큰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으로 스스로를 안심시키던
그 조용한 잠에서 우리를 일으켜 주소서.
지금의 풍요와 지금의 평온을 피난처로 삼던 마음을 내려놓고
오직 주님만을 피난처로 삼게 하소서.
가시와 찔레가 돋은 자리, 궁전이 폐한 자리에서도
주님은 다시 시작하시는 분이심을 믿게 하소서.
무너진 자리를 부끄러워하지 않게 하소서.
위에서부터 영을 부어 주시는 하나님,
우리의 힘으로 광야를 밭으로 만들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주님의 영을 우리 위에 부어 주시어
메마른 심령이 아름다운 밭이 되게 하시고
그 밭에 정의와 공의가 거하게 하소서.
공의의 열매인 화평을 우리 가정과 교회에 두시고
조용히 쉬는 곳을 우리에게 허락하소서.
광양사랑의교회가 이 도시의 광야에 뿌려지는 씨가 되어
모든 물 가에 아끼지 않고 뿌리는 복된 백성이 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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