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4/2026
마가복음 연속설교(45) 한결교회 주중설교
마가복음 11:12~25
무화과나무 같은 예루살렘 성전
지난 설교는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향하셨던 예수님의 이야기를 살펴봤는데, 그 마지막 여정은 평소와 다르게 매우 특별한 모습이셨다. 즉, 그전과 별반 다르지 않게 제자들과 함께 걸어가셨던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을, 굳이 어린 나귀를 타고 성에 들어가셨을 뿐만 아니라, 당신을 “메시아”와 “왕”으로 외치며 환대하는 사람들을 책망하지 않으셨고, 도리어 그들이 “호산나!” 하며 찬양하는 소리를 그냥 내버려 두셨다. 심지어 같은 이야기를 기록한 누가복음에서는, 예수께서 당신을 “주(主)와 왕”으로 찬양하는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표시하는 바리새인들을, 오히려 단호히 꾸짖으며 정면으로 반박하셨는데, 제자들과 예루살렘 사람들이 잘못된 시선으로 예수님을 바라본 것은 문제지만, 당신을 “그리스도 메시아와 왕 중의 왕”으로 찬송한 말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당신 나름대로 “내가 너희의 왕이다!”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의도하신 유일한 장치가, 바로 어린 나귀에 올라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것이다. 즉,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가난한 자들의 왕. 낮고 천한 자들의 임금. 겸손한 자들의 왕”임을 나타내신 셈이다. 이처럼 “섬김을 받으러 온 분이 아니라 죄인들을 섬기려고 오신 왕”임을 증명하신 일이, 바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사건이다! 너무 높은 곳에 있느라 오르지 못할 나무처럼 서 있는 세상의 왕들. 거대한 힘으로 윽박지르느라 감히 범접할 수조차 없는 제국의 군주들과는 전혀 다른 왕. 겸손의 왕으로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 분. 그래서 누구든지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고 어떤 사람이든 만날 수 있는 왕. 낮고 천한 자들의 눈높이에 맞추시려고 기꺼이 자신의 몸을 낮추시는 분. 무엇보다 약한 자들과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서기 위해, 저 스스로 약하고 가난한 모습으로 오신 분. 그분이 바로 우리 예수님이시다. 그렇다면 어린 나귀를 타신 겸손의 왕을 따르는 사람은 누구인가? 누가 어린 나귀를 타고 행차하신 왕의 행렬에 참여하는 사람인가? 거지이자 시각장애인이었던 바디매오처럼 작고 가난하고 약하고 비천한 자들이, 바로 어린 나귀를 타고 들어가신 겸손의 왕에게 가장 걸맞은 백성이다. 즉, 가련하고 애통하고 굶주리며 연약한 죄인임을 알고 자신을 낮춘 자들. 그들이야말로 나귀를 타신 왕이 다스리는 나라에 딱 어울리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지난 설교 본문의 마지막 구절인 11절이 조금 독특하다. 11절은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모두 둘러보신 후 베다니로 가셨다.” 하고 기록했다. 이 내용이 어떻게 보이는가? 설교자는 마치 예수께서 “두고 보자.” 하고 다짐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이후에 전개되는 이야기가 심상치 않아서다. 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2절~14절 :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함.
15절~17절 :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쫓아냄.
18절 :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예수 살해 모의.
19절~21절 : 뿌리째 말라버린 무화과나무 발견.
22절~25절 : 기도에 관한 교훈으로 대답.
세세하게 살펴보면 다섯 가지 내용으로 구분할 수 있지만, 원래 12절부터 25절까지는 한 묶음으로 봐야 한다. 그중에서도 중심이 되는 이야기는 15절부터 17절까지 기록된 일명 ‘성전정화(聖殿淨化)’ 사건인데, 예수께서 성전 안에서 장사하던 자들을 몰아내신 일로 널리 알려진 이야기로써, 모든 복음서가 다 기록할 만큼 중요한 사건 중 하나 다. 물론, 예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후에 그 나무가 뿌리째 마른 사건은 마태와 마가의 복음서만 등장하는데, 그중에서도 마태복음은 ‘무화과나무 저주’에 관한 이야기를 마가복음처럼 두 부분으로 나누지도 않았고, 다만 성전정화 사건을 먼저 기록한 뒤에 무화과나무 이야기를 순차적으로 기록했다. 그러나 마가복음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일’과 그 ‘나무가 말라버린 일’ 사이에 ‘성전정화 사건’을 삽입함으로써, 마치 샌드위치(sandwich) 빵의 구조처럼 보이게끔 기록했다. 다시 말해, 성전정화 사건을 샌드위치나 햄버거의 내용물처럼 가운데 배치한 다음, 무화과나무와 관련한 이야기를 내용물을 감싼 빵처럼 양쪽으로 배치한 게 특징인데, 이 복음서의 저자인 마가는 ‘무화과나무 이야기’와 ‘성전정화 사건’을 하나의 이야기로 묶어 보게끔 의도한 게 틀림없다. 또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해코지하기 위해 모의하는 18절의 내용은 ‘성전정화 사건’ 뒤에 곧장 이어지는 내용이고, ‘기도에 관한 교훈’은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린 일”로 인해 깜짝 놀란 제자들의 질문에 대답하신 말씀으로써, 얼핏 보면 서로 다른 이야기가 아무렇게 이어진 말씀처럼 보이지만, 이 이야기들은 저자의 의도에 따라 하나의 맥락으로 묶여진 이야기가 틀림없다. 그렇다면 이 복음서의 저자인 마가는 어떤 주제와 교훈을 전달하기 위해 “무화과나무에 관한 이야기”와 “성전정화 사건”을 하나로 묶었을까? 또한,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린 모습을 보고 놀란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을 향해, 예수께서 뜬금없이 기도에 관한 교훈을 가르치신 이유는 무엇일까?
다시금 강조하지만, 본문의 핵심적인 사건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일’과 ‘성전정화 사건’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두 가지 이야기는 공통점을 지닌다. 우선은 “무화과나무와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와 저주의 대상으로 등장한다.” 하는 점이다. 게다가 무화과나무와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고 저주하는 주체가 “예수님”이란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그 내용을 재차 주의 깊게 살펴보라.
- 14절 : 예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다.
- 15절~16절 : 예수께서 장사꾼들을 내쫓고 의자를 엎으며 그들의 출입을 막으시다.
- 20절~21절 : 예수님의 저주로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말라버리다.
대부분 신자들은 이 부분에서 적잖게 당혹감을 느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지금까지 보여주셨던 모습과는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이토록 과격하게 행동하는 예수님을 본 적이 있는가? 또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일도 마찬가지다. 일부러 자연을 훼손하거나 망가뜨리는 일은 물론이고, 어떤 대상을 향해 직접적으로 저주하신 일은 거의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런데 본문은 “예수님이 하신 일이다.” 하고 생각하기 힘든 일들을 연달아 기록했다. 물론, 이 내용을 근거로 예수님을 “자연 파괴범”으로 몰아세우거나,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冷血漢)으로 오해할 사람은 없을 테다. 다만, 평소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은 낯설게 와 닿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수께서 아무 이유 없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고, 더불어 거룩한 장소인 성전에서 무턱대고 야단법석을 피우실 리는 없지 않은가? 다행히도 본문은 그에 관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짧게 언급한다.
- 13절 :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이유? 따 먹을 만한 열매가 없었기 때문.
- 17절 :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쫓아낸 이유? 그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기 때문.
예수님은 매우 허기진 상태에서 무화과나무를 발견하셨고, 따 먹을 만한 열매를 구하기 위해 가까이 갔으나 정작 그 나무는 잎사귀만 무성했을 뿐, 허기를 채워줄 열매는 하나도 없었는데, 그때 예수께서 “이 나무는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한다.” 하고 저주하셨던 것이다. 성전에서 장사하던 상인들을 내쫓은 이유도 마찬가지다. 여기 등장하는 상인들은 대부분 환전상(換錢商)을 가리키는데, 당시 유대 사회의 매매와 상거래는 주로 로마의 화폐를 통해 이뤄진 반면, 성전에 바치는 ‘성전세(聖殿稅)’는 반드시 유대의 화폐로 내야 했고, 그것은 이방인의 물건 자체를 부정하게 여기는 관습 때문이었다. 그래서 로마의 화폐만 아니라 이방인이 사용하는 화폐를 ‘유대의 화폐’로 바꿔주는 환전상이 필요했고, 그들은 바꿔주는 돈에 웃돈을 얹어 이윤을 얻었던 사람들이다. 또한, 본문의 “비둘기를 파는 자들”은 일종의 “제물 대행업자”로서, 원래 제사에 사용할 제물은 직접 기르거나 잡아서 바치는 게 원칙인데, 그마저 번거롭게 여기는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하여 제물을 파는 장사꾼들까지 등장했고, 게다가 장사꾼들과 환전상들은 성전을 관리하는 제사장들과의 거래를 통해. 성전 안의 구역 중 하나인 “이방인의 뜰”에 자리 잡고 장사했던 것이다. 문제는 무엇인가? “이방인의 뜰”은 장사를 위한 공간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 허락된 기도와 제사의 공간이었지만, 매매하는 자들이 그 공간을 차지하고 앉았던 까닭에, 정작 하나님께 기도하고 제사하기 위해 찾아온 이방인들은 설 자리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이 얼마나 어이없고 부조리한 일인가? 그래서 예수님은 분개하실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본문의 교훈을 정리하면 그만일까? 즉, “무화과나무와 예루살렘 성전이 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 탓에 주님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하며 이해하면 그만이고, 거기서 더 나아가 “맡겨진 본분(本分)과 사명을 올바로 감당하자.” 하는 교훈으로 마무리하면 괜찮을까? 그러나 그런 식의 해석과 결론은 두 가지 문제를 초래한다. 우선은 “맡겨진 본분과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않았기에, 예수님의 분노를 산 무화과나무와 예루살렘 성전은 망할 수밖에 없었다.” 하는 해석은, 예루살렘 성전에 관한 이야기에는 적절하지만, 무화과나무에 관한 교훈으로는 적합하지 않다. 왜냐하면, 당시는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13절을 보라.
(막 11:13)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만일 마가가 “본분과 사명을 지켜라.” 하는 교훈을 의도했다면, 13절은 굳이 언급할 필요나 이유가 없다. 그러나 그 시기는 무화과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그야말로 제철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한겨울에 “개나리와 아카시아 꽃을 보여달라.” 하고 생떼 쓰는 사람처럼, 예수님은 제철이 아닌 시기에 무화과를 찾으셨던 셈이다. 무화과나무입장에서는 너무나 억울한 일 아닌가? 그러나 주님이 그 사실을 모르셨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이 일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기 직전에 벌어졌던 것을 염두에 두고 보면, 예수님은 모종의 교훈을 가르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 퍼포먼스를 벌이셨던 것 같다. 그뿐만이 아니다. ‘맡겨진 본분과 사명에 관한 교훈’으로 뭉뚱그려 볼 수 없는 또 다른 이유가 등장하는데, 거룩한 성전을 매매의 장소로 전락시킨 자들을 몰아내신 후, 그다음 날 뿌리째 말라버린 무화과나무를 보고 놀란 제자들과 예수님이 나눈 대화가 두 번째로 의아한 부분이다. 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21절 : 선생님,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렸습니다.
- 22절 : 너희는 하나님을 믿어라.
- 23~24절 : 믿고 의심하지 않으면 그대로 된다. / 기도한 대로 이뤄질 줄 믿어라.
21절에서 베드로가 “무화과나무가 말랐습니다.” 하는 말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하는 뜻도 담겨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한 대답이 “믿음과 기도”에 관한 예수님의 교훈이다. 그렇다면 ‘믿음과 기도에 관한 교훈을 여기에 적용하면, 이 말씀은 “예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그대로 이루어졌으니, 제자들도 그 믿음으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 하는 뜻인가? 즉, 본문은 “믿음으로 기도하면, 무엇이든 이뤄진다.” 하는 교훈일까? 그 해석도 적절하지 못하다. 물론, 성전정화 사건과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의 요지가, 믿음과 기도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마가는 하나의 주제와 교훈으로 이어진 두 이야기를 일부러 샌드위치 형식으로 배치했고, 더불어 예수님은 두 이야기의 결론을 “믿음과 기도”로 마무리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두 사건을 관통하는 공통점과 주제는 과연 무엇일까?
이쯤에서 다시금 생각해 보라. 예수님이 성전에서 분노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한 채, 그저 서로의 유익을 위해 매매하는 장소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또한, 제철도 아닌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억지로 찾으시고, 게다가 그 나무에게 저주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단 한 가지 이유밖에는 없다. 예수님은 당장 열매를 필요로 하셨지만, 그 나무는 열매를 내어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차 언급했듯이, 무화과나무는 그 시기에 열매를 맺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두 이야기가 지닌 진짜 공통점은 다름 아닌 이것이다. 무화과나무와 예루살렘 성전의 사람들은, 죄다 “자연의 생리와 인간의 본성에 순응(順應)했다.” 하는 점이 공통점이다. 먼저 무화과나무를 생각해 보라. 여느 다른 식물이나 나무와 다를 바 없이, 계절에 따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무화과나무는, 그야말로 자연의 순리에 따라 생장(生長)하고 열매를 맺는 존재다. 즉, 무화과나무는 계절의 변화에 적절하게 반응하여 생존하는 자연의 일부일 뿐만 아니라, 물과 양분을 공급받는 대로 생장하여 열매를 맺는 과실나무다. 따라서 자연의 섭리와 법칙을 거스를 만한 의지나 생각을, 무화과나무에게 기대하기는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물론, 오해하지 마라. 철을 따라 피고 지며 열매를 맺는 무화과나무에게 “너 같은 나무는 악하고 잘못됐다.” 하고 정죄하는 짓은, 그야말로 우스꽝스럽고 무의미한 짓거리에 불과하다. 그러나 문제는 매매하는 자들로 들어찬 예루살렘 성전이, 바로 자연의 생리와 같은 인간의 본성에 충실한 곳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원래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 세우신 곳이 ‘하나님의 성전(聖殿)’ 아닌가? 이쯤에서 “기도”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라. 즉, 소원성취와 욕구충족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성경이 가르치는 기도가 무엇인지 따져 보라. 자신의 뜻과 욕심을 내려놓은 죄인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기 위한 몸부림. 죄인이 자신의 본성과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힘입어 살게끔 돕는 영광스러운 수단. 그것이 기도다. 그래서 타락한 세상의 사고방식과 생리를 거절하고,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기도로 구하며 사는 사람. 그가 하나님의 자녀이자 그 나라의 백성다운 사람이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기도하지 않는다. 아니, 기도할 필요가 없다. 당연하다. 그들은 하나님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을뿐더러, 제 뜻대로 사는 것이 그들의 생리이자 미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죄악의 생리를 용감히 거절하고 불의의 물결을 힘써 거슬러 오르기는커녕, 죄인의 본성과 세상의 생리에 잇대어 서로 이득을 주고받는 곳으로 전락한 성전은, 죄인의 본성을 거슬러 하나님의 나라와 그 뜻을 구하기는커녕, 제철이 아니어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와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하나님의 백성. 선택받은 민족”이랍시고 자처했던 당시 유대인들은 “시대가 악하고 더러운 탓에,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가 어렵다. 정직하고 선하게 사는 것은 유익이 없다.” 하며 핑계대기 일쑤였고, 공의와 정의를 추구하거나 회개의 열매를 맺는 일 따위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이처럼 타락한 세상과 불의한 죄인의 본성에 순응하느라 하나님 앞에 선하고 의로운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 그저 죄악의 바람이 부는 대로 나부끼고, 불의의 물결이 흘러가는 대로 떠내려가는 사람들. 정의와 진리의 중심을 세우고 상록수처럼 고고하게 서있기는커녕, 계절을 따라 시시각각 피고 지는 낙엽수 같은 이스라엘. 그런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내뱉는 말이 이런 종류의 것들이다. “다들 그렇게 산다. 어쩔 수 없어 그랬다.” 그러나 자의든 타의든, 앞서가든 따라가든, 어차피 결과는 똑같다. 시절과 계절을 좇아 과실을 맺는 무화과나무처럼, 예루살렘 성전은 그 시대의 풍조와 죄인의 생리를 좇는 곳으로 전락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저주를 받아 말라버린 무화과나무처럼, 그 성전도 결국에는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기억하라. 신자는 별다른 존재여야 마땅하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을 디디고 살아가지만, 땅에 뿌리박혀 살아가기는 단호하게 거절하는 사람이다. “네 마음의 소리를 따라라. 생각하는 대로 살고 말하는 대로 이뤄진다.” 하고 죄인의 탐심을 부추기는 세상의 소리가 아닌,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뜻을 좇아 살아라.” 하는 성령의 음성에 따라 사는 사람이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나그네와 이방인처럼 취급받으며 종종 곤경을 겪지만, 이미 세상을 이기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진정한 자유와 평안을 만끽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을 다음과 같이 감동적으로 묘사했다.
(히 11:33, 36~38a)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믿음과 기도로 사느라 온갖 고난과 손해를 당하지만, 그 믿음과 기도로 거대한 제국의 권력과 폭력 앞에 무릎 꿇지 않는 사람. 그리고 세상의 생리와 죄인의 본성에 항거하고, 용감하게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따랐던 사람들. 그가 바로 신자다.
설교를 마무리하자. 신자는 하여가(何如歌)를 불렀던 이방원(李芳遠. 1367~1422)이 아니라, 단심가(丹心歌)를 부른 정몽주(鄭夢周. 1337∼1392)처럼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이어야 마땅하다. 그래서 돈으로도 매수할 수 없고 무시무시한 폭력과 권력에 굴하지 않는 사람. 그가 바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믿음의 사람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예수님을 생각해 보라. 똑같은 하루 일과를 보냈지만, 육체의 피로를 못 이기고 늘어지게 잠을 잤던 제자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육체의 욕구를 거스르고 아버지께 힘써 기도하셨던 예수님. 세상의 생리와 육체의 욕구에 따라 살지 않고, 기도로 승리의 본을 보이신 주님을 깊이 생각해 보라. 물론, 인간의 모든 욕구와 욕망을 다 싸잡아 악으로 정죄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거기에 기대고 잇대어 사는 인생을 ‘믿음의 삶’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 심지어 불신자들 중에도 그런 식의 삶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권장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그래서 프랑스 소설가 폴 부르제(Paul Bourget, 1852~1935)는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One must live the way one thinks or end up thinking the way one has lived).”하는 유명한 말을 남기지 않았던가? 우리 그리스도인은 ‘생각’이란 단어 대신 ‘기도’와 ‘믿음’을 집어넣고 그에 관해 고민해봐야 마땅하다. 그러므로 예수님처럼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게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세상의 생리와 죄인의 본성에 따라 살아갈 것인지 결정하라. 주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마가복음 연속설교(45) - 무화과나무 같은 예루살렘 성전 / 막 11:12~25 / 한결교회 주중설교 최승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