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결교회

한결교회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기하성) 교단에 소속된 한결교회입니다.

한결교회는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기하성/별칭 : 순복음)" 교단에 속한 교회로, 강원도 춘천 지역에서 교회의 사명을 감당하는 작은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또한, 담임목사의 성경해석 및 설교의 주된 바탕은 개혁주의신학과 성경신학이며, 지금도 연구와 공부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한결교회는 은혜와 진리 안에서 거룩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믿음의 공동체를 지향합니다. 기도와 응원과 후원을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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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스33 / 암 8:11~14 / 가장 무서운 심판.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飢渴)11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
30/04/2026

아모스33 / 암 8:11~14 / 가장 무서운 심판.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飢渴)

11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12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 13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쓰러지리라 14 사마리아의 죄된 우상을 두고 맹세하여 이르기를 단아 네 신들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라 하거나 브엘세바가 위하는 것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라 하는 사람은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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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어떤 양상으로 성취될 것인가? 그에 관한 내용이 9절부터 14절까지 크게 다섯 가지 정도로 이어지는데, 우선은 신자와 불신자를 막론하고 누구나 꺼림칙스러워하는 “천재지변(天災地變)을 통한 징계와 심판(9절). 재앙으로 인한 무수한 죽음과 끊임없는 애통(10절). 우상단지들과 미신숭배로 인해 쓰러지는 젊은 남녀들(13절).” 등과 같은 심판의 내용이 등장하고, 거기 더하여 독특하게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飢渴)’에 관한 내용도 11절과 12절에 기록됐다. 그런데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갈’은 누구나 손쉽게 이해하거나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쉽게 말해, 지나가는 사람에게 “당신은 이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성경도 더는 이 세상에 남아있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고 경고한다면, 과연 사람들이 “그렇게 참혹하고 무서운 일이 일어난다니, 저는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하며 반응하겠는가? 도리어 대부분 “정신 나간 소리하네.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냐?” 하고 반문할 것이다.

그러나 이 경고의 말씀은 아모스서만이 아니라 구약과 신약 전반에 걸쳐 등장하는 내용으로써,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상태에 빠진 인간. 혹은,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그 뜻을 거역하고 거부하는 인간’을 가리켜 ‘죄인’으로 부르며, ‘죄인’이 처한 그 비참한 상태를 가리켜 “죄(고대희랍어; 하마르티아[ἁμαρτία])‘에 사로잡혔다. 죄에 빠졌다.” 하고 규정한다. 다시 말해, 성경은 죄의 저주에 사로잡힌 죄인에게 나타나는 대표적인 증상 중 하나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상태. 그 말씀을 거역하고 거부하는 행태”로 가르친다. 그에 관한 대표적인 구절이 다음과 같다. “(사 43:8)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을 이끌어 내라 (시 81:11)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죄의 저주에 사로잡혀 아예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죄인의 비참한 상태. 또한, 귀에 대고 크게 외칠지라도 되레 손사래를 치며 거역하는 죄인의 본성과 생리.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두 가지 특징을 다 포함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렘 6:10)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신들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하지 아니하니” 생각해 보라. 돌고래와 박쥐 등은 인간의 가청(可聽) 주파수 범위를 넘어선 ‘초음파’로 소통하고 사냥하기에, 보통 사람은 그들의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믿음 없는 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들어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 사실을 방증하는 내용이 청년 사울의 회심 이야기에 잘 나타난다. “(행 22:9)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환상 중에 나타나신 예수님과 소통하는 사람은,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은 청년 사울뿐이고, 그래서 사도 요한은 “(계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하며 선포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갈’을 우습게 여기지 마라.

아모스33 / 암 8:11~14 / 가장 무서운 심판.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飢渴)

마가복음 연속설교(45) 한결교회 주중설교                  마가복음 11:12~25무화과나무 같은 예루살렘 성전  지난 설교는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향하셨던 예수님의 이야기를 살펴봤는데, 그 마지막 여...
29/04/2026

마가복음 연속설교(45) 한결교회 주중설교
마가복음 11:12~25

무화과나무 같은 예루살렘 성전

지난 설교는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향하셨던 예수님의 이야기를 살펴봤는데, 그 마지막 여정은 평소와 다르게 매우 특별한 모습이셨다. 즉, 그전과 별반 다르지 않게 제자들과 함께 걸어가셨던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을, 굳이 어린 나귀를 타고 성에 들어가셨을 뿐만 아니라, 당신을 “메시아”와 “왕”으로 외치며 환대하는 사람들을 책망하지 않으셨고, 도리어 그들이 “호산나!” 하며 찬양하는 소리를 그냥 내버려 두셨다. 심지어 같은 이야기를 기록한 누가복음에서는, 예수께서 당신을 “주(主)와 왕”으로 찬양하는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표시하는 바리새인들을, 오히려 단호히 꾸짖으며 정면으로 반박하셨는데, 제자들과 예루살렘 사람들이 잘못된 시선으로 예수님을 바라본 것은 문제지만, 당신을 “그리스도 메시아와 왕 중의 왕”으로 찬송한 말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당신 나름대로 “내가 너희의 왕이다!”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의도하신 유일한 장치가, 바로 어린 나귀에 올라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것이다. 즉,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가난한 자들의 왕. 낮고 천한 자들의 임금. 겸손한 자들의 왕”임을 나타내신 셈이다. 이처럼 “섬김을 받으러 온 분이 아니라 죄인들을 섬기려고 오신 왕”임을 증명하신 일이, 바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사건이다! 너무 높은 곳에 있느라 오르지 못할 나무처럼 서 있는 세상의 왕들. 거대한 힘으로 윽박지르느라 감히 범접할 수조차 없는 제국의 군주들과는 전혀 다른 왕. 겸손의 왕으로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 분. 그래서 누구든지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고 어떤 사람이든 만날 수 있는 왕. 낮고 천한 자들의 눈높이에 맞추시려고 기꺼이 자신의 몸을 낮추시는 분. 무엇보다 약한 자들과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서기 위해, 저 스스로 약하고 가난한 모습으로 오신 분. 그분이 바로 우리 예수님이시다. 그렇다면 어린 나귀를 타신 겸손의 왕을 따르는 사람은 누구인가? 누가 어린 나귀를 타고 행차하신 왕의 행렬에 참여하는 사람인가? 거지이자 시각장애인이었던 바디매오처럼 작고 가난하고 약하고 비천한 자들이, 바로 어린 나귀를 타고 들어가신 겸손의 왕에게 가장 걸맞은 백성이다. 즉, 가련하고 애통하고 굶주리며 연약한 죄인임을 알고 자신을 낮춘 자들. 그들이야말로 나귀를 타신 왕이 다스리는 나라에 딱 어울리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지난 설교 본문의 마지막 구절인 11절이 조금 독특하다. 11절은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모두 둘러보신 후 베다니로 가셨다.” 하고 기록했다. 이 내용이 어떻게 보이는가? 설교자는 마치 예수께서 “두고 보자.” 하고 다짐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이후에 전개되는 이야기가 심상치 않아서다. 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2절~14절 :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함.
15절~17절 :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쫓아냄.
18절 :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예수 살해 모의.
19절~21절 : 뿌리째 말라버린 무화과나무 발견.
22절~25절 : 기도에 관한 교훈으로 대답.
세세하게 살펴보면 다섯 가지 내용으로 구분할 수 있지만, 원래 12절부터 25절까지는 한 묶음으로 봐야 한다. 그중에서도 중심이 되는 이야기는 15절부터 17절까지 기록된 일명 ‘성전정화(聖殿淨化)’ 사건인데, 예수께서 성전 안에서 장사하던 자들을 몰아내신 일로 널리 알려진 이야기로써, 모든 복음서가 다 기록할 만큼 중요한 사건 중 하나 다. 물론, 예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후에 그 나무가 뿌리째 마른 사건은 마태와 마가의 복음서만 등장하는데, 그중에서도 마태복음은 ‘무화과나무 저주’에 관한 이야기를 마가복음처럼 두 부분으로 나누지도 않았고, 다만 성전정화 사건을 먼저 기록한 뒤에 무화과나무 이야기를 순차적으로 기록했다. 그러나 마가복음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일’과 그 ‘나무가 말라버린 일’ 사이에 ‘성전정화 사건’을 삽입함으로써, 마치 샌드위치(sandwich) 빵의 구조처럼 보이게끔 기록했다. 다시 말해, 성전정화 사건을 샌드위치나 햄버거의 내용물처럼 가운데 배치한 다음, 무화과나무와 관련한 이야기를 내용물을 감싼 빵처럼 양쪽으로 배치한 게 특징인데, 이 복음서의 저자인 마가는 ‘무화과나무 이야기’와 ‘성전정화 사건’을 하나의 이야기로 묶어 보게끔 의도한 게 틀림없다. 또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해코지하기 위해 모의하는 18절의 내용은 ‘성전정화 사건’ 뒤에 곧장 이어지는 내용이고, ‘기도에 관한 교훈’은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린 일”로 인해 깜짝 놀란 제자들의 질문에 대답하신 말씀으로써, 얼핏 보면 서로 다른 이야기가 아무렇게 이어진 말씀처럼 보이지만, 이 이야기들은 저자의 의도에 따라 하나의 맥락으로 묶여진 이야기가 틀림없다. 그렇다면 이 복음서의 저자인 마가는 어떤 주제와 교훈을 전달하기 위해 “무화과나무에 관한 이야기”와 “성전정화 사건”을 하나로 묶었을까? 또한,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린 모습을 보고 놀란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을 향해, 예수께서 뜬금없이 기도에 관한 교훈을 가르치신 이유는 무엇일까?

다시금 강조하지만, 본문의 핵심적인 사건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일’과 ‘성전정화 사건’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두 가지 이야기는 공통점을 지닌다. 우선은 “무화과나무와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와 저주의 대상으로 등장한다.” 하는 점이다. 게다가 무화과나무와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고 저주하는 주체가 “예수님”이란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그 내용을 재차 주의 깊게 살펴보라.
- 14절 : 예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다.
- 15절~16절 : 예수께서 장사꾼들을 내쫓고 의자를 엎으며 그들의 출입을 막으시다.
- 20절~21절 : 예수님의 저주로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말라버리다.
대부분 신자들은 이 부분에서 적잖게 당혹감을 느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지금까지 보여주셨던 모습과는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이토록 과격하게 행동하는 예수님을 본 적이 있는가? 또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일도 마찬가지다. 일부러 자연을 훼손하거나 망가뜨리는 일은 물론이고, 어떤 대상을 향해 직접적으로 저주하신 일은 거의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런데 본문은 “예수님이 하신 일이다.” 하고 생각하기 힘든 일들을 연달아 기록했다. 물론, 이 내용을 근거로 예수님을 “자연 파괴범”으로 몰아세우거나,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冷血漢)으로 오해할 사람은 없을 테다. 다만, 평소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은 낯설게 와 닿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수께서 아무 이유 없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고, 더불어 거룩한 장소인 성전에서 무턱대고 야단법석을 피우실 리는 없지 않은가? 다행히도 본문은 그에 관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짧게 언급한다.
- 13절 :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이유? 따 먹을 만한 열매가 없었기 때문.
- 17절 :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쫓아낸 이유? 그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기 때문.
예수님은 매우 허기진 상태에서 무화과나무를 발견하셨고, 따 먹을 만한 열매를 구하기 위해 가까이 갔으나 정작 그 나무는 잎사귀만 무성했을 뿐, 허기를 채워줄 열매는 하나도 없었는데, 그때 예수께서 “이 나무는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한다.” 하고 저주하셨던 것이다. 성전에서 장사하던 상인들을 내쫓은 이유도 마찬가지다. 여기 등장하는 상인들은 대부분 환전상(換錢商)을 가리키는데, 당시 유대 사회의 매매와 상거래는 주로 로마의 화폐를 통해 이뤄진 반면, 성전에 바치는 ‘성전세(聖殿稅)’는 반드시 유대의 화폐로 내야 했고, 그것은 이방인의 물건 자체를 부정하게 여기는 관습 때문이었다. 그래서 로마의 화폐만 아니라 이방인이 사용하는 화폐를 ‘유대의 화폐’로 바꿔주는 환전상이 필요했고, 그들은 바꿔주는 돈에 웃돈을 얹어 이윤을 얻었던 사람들이다. 또한, 본문의 “비둘기를 파는 자들”은 일종의 “제물 대행업자”로서, 원래 제사에 사용할 제물은 직접 기르거나 잡아서 바치는 게 원칙인데, 그마저 번거롭게 여기는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하여 제물을 파는 장사꾼들까지 등장했고, 게다가 장사꾼들과 환전상들은 성전을 관리하는 제사장들과의 거래를 통해. 성전 안의 구역 중 하나인 “이방인의 뜰”에 자리 잡고 장사했던 것이다. 문제는 무엇인가? “이방인의 뜰”은 장사를 위한 공간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 허락된 기도와 제사의 공간이었지만, 매매하는 자들이 그 공간을 차지하고 앉았던 까닭에, 정작 하나님께 기도하고 제사하기 위해 찾아온 이방인들은 설 자리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이 얼마나 어이없고 부조리한 일인가? 그래서 예수님은 분개하실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본문의 교훈을 정리하면 그만일까? 즉, “무화과나무와 예루살렘 성전이 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 탓에 주님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하며 이해하면 그만이고, 거기서 더 나아가 “맡겨진 본분(本分)과 사명을 올바로 감당하자.” 하는 교훈으로 마무리하면 괜찮을까? 그러나 그런 식의 해석과 결론은 두 가지 문제를 초래한다. 우선은 “맡겨진 본분과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않았기에, 예수님의 분노를 산 무화과나무와 예루살렘 성전은 망할 수밖에 없었다.” 하는 해석은, 예루살렘 성전에 관한 이야기에는 적절하지만, 무화과나무에 관한 교훈으로는 적합하지 않다. 왜냐하면, 당시는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13절을 보라.
(막 11:13)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만일 마가가 “본분과 사명을 지켜라.” 하는 교훈을 의도했다면, 13절은 굳이 언급할 필요나 이유가 없다. 그러나 그 시기는 무화과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그야말로 제철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한겨울에 “개나리와 아카시아 꽃을 보여달라.” 하고 생떼 쓰는 사람처럼, 예수님은 제철이 아닌 시기에 무화과를 찾으셨던 셈이다. 무화과나무입장에서는 너무나 억울한 일 아닌가? 그러나 주님이 그 사실을 모르셨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이 일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기 직전에 벌어졌던 것을 염두에 두고 보면, 예수님은 모종의 교훈을 가르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 퍼포먼스를 벌이셨던 것 같다. 그뿐만이 아니다. ‘맡겨진 본분과 사명에 관한 교훈’으로 뭉뚱그려 볼 수 없는 또 다른 이유가 등장하는데, 거룩한 성전을 매매의 장소로 전락시킨 자들을 몰아내신 후, 그다음 날 뿌리째 말라버린 무화과나무를 보고 놀란 제자들과 예수님이 나눈 대화가 두 번째로 의아한 부분이다. 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21절 : 선생님,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렸습니다.
- 22절 : 너희는 하나님을 믿어라.
- 23~24절 : 믿고 의심하지 않으면 그대로 된다. / 기도한 대로 이뤄질 줄 믿어라.
21절에서 베드로가 “무화과나무가 말랐습니다.” 하는 말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하는 뜻도 담겨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한 대답이 “믿음과 기도”에 관한 예수님의 교훈이다. 그렇다면 ‘믿음과 기도에 관한 교훈을 여기에 적용하면, 이 말씀은 “예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그대로 이루어졌으니, 제자들도 그 믿음으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 하는 뜻인가? 즉, 본문은 “믿음으로 기도하면, 무엇이든 이뤄진다.” 하는 교훈일까? 그 해석도 적절하지 못하다. 물론, 성전정화 사건과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의 요지가, 믿음과 기도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마가는 하나의 주제와 교훈으로 이어진 두 이야기를 일부러 샌드위치 형식으로 배치했고, 더불어 예수님은 두 이야기의 결론을 “믿음과 기도”로 마무리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두 사건을 관통하는 공통점과 주제는 과연 무엇일까?

이쯤에서 다시금 생각해 보라. 예수님이 성전에서 분노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한 채, 그저 서로의 유익을 위해 매매하는 장소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또한, 제철도 아닌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억지로 찾으시고, 게다가 그 나무에게 저주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단 한 가지 이유밖에는 없다. 예수님은 당장 열매를 필요로 하셨지만, 그 나무는 열매를 내어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차 언급했듯이, 무화과나무는 그 시기에 열매를 맺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두 이야기가 지닌 진짜 공통점은 다름 아닌 이것이다. 무화과나무와 예루살렘 성전의 사람들은, 죄다 “자연의 생리와 인간의 본성에 순응(順應)했다.” 하는 점이 공통점이다. 먼저 무화과나무를 생각해 보라. 여느 다른 식물이나 나무와 다를 바 없이, 계절에 따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무화과나무는, 그야말로 자연의 순리에 따라 생장(生長)하고 열매를 맺는 존재다. 즉, 무화과나무는 계절의 변화에 적절하게 반응하여 생존하는 자연의 일부일 뿐만 아니라, 물과 양분을 공급받는 대로 생장하여 열매를 맺는 과실나무다. 따라서 자연의 섭리와 법칙을 거스를 만한 의지나 생각을, 무화과나무에게 기대하기는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물론, 오해하지 마라. 철을 따라 피고 지며 열매를 맺는 무화과나무에게 “너 같은 나무는 악하고 잘못됐다.” 하고 정죄하는 짓은, 그야말로 우스꽝스럽고 무의미한 짓거리에 불과하다. 그러나 문제는 매매하는 자들로 들어찬 예루살렘 성전이, 바로 자연의 생리와 같은 인간의 본성에 충실한 곳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원래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 세우신 곳이 ‘하나님의 성전(聖殿)’ 아닌가? 이쯤에서 “기도”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라. 즉, 소원성취와 욕구충족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성경이 가르치는 기도가 무엇인지 따져 보라. 자신의 뜻과 욕심을 내려놓은 죄인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기 위한 몸부림. 죄인이 자신의 본성과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힘입어 살게끔 돕는 영광스러운 수단. 그것이 기도다. 그래서 타락한 세상의 사고방식과 생리를 거절하고,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기도로 구하며 사는 사람. 그가 하나님의 자녀이자 그 나라의 백성다운 사람이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기도하지 않는다. 아니, 기도할 필요가 없다. 당연하다. 그들은 하나님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을뿐더러, 제 뜻대로 사는 것이 그들의 생리이자 미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죄악의 생리를 용감히 거절하고 불의의 물결을 힘써 거슬러 오르기는커녕, 죄인의 본성과 세상의 생리에 잇대어 서로 이득을 주고받는 곳으로 전락한 성전은, 죄인의 본성을 거슬러 하나님의 나라와 그 뜻을 구하기는커녕, 제철이 아니어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와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하나님의 백성. 선택받은 민족”이랍시고 자처했던 당시 유대인들은 “시대가 악하고 더러운 탓에,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가 어렵다. 정직하고 선하게 사는 것은 유익이 없다.” 하며 핑계대기 일쑤였고, 공의와 정의를 추구하거나 회개의 열매를 맺는 일 따위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이처럼 타락한 세상과 불의한 죄인의 본성에 순응하느라 하나님 앞에 선하고 의로운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 그저 죄악의 바람이 부는 대로 나부끼고, 불의의 물결이 흘러가는 대로 떠내려가는 사람들. 정의와 진리의 중심을 세우고 상록수처럼 고고하게 서있기는커녕, 계절을 따라 시시각각 피고 지는 낙엽수 같은 이스라엘. 그런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내뱉는 말이 이런 종류의 것들이다. “다들 그렇게 산다. 어쩔 수 없어 그랬다.” 그러나 자의든 타의든, 앞서가든 따라가든, 어차피 결과는 똑같다. 시절과 계절을 좇아 과실을 맺는 무화과나무처럼, 예루살렘 성전은 그 시대의 풍조와 죄인의 생리를 좇는 곳으로 전락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저주를 받아 말라버린 무화과나무처럼, 그 성전도 결국에는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기억하라. 신자는 별다른 존재여야 마땅하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을 디디고 살아가지만, 땅에 뿌리박혀 살아가기는 단호하게 거절하는 사람이다. “네 마음의 소리를 따라라. 생각하는 대로 살고 말하는 대로 이뤄진다.” 하고 죄인의 탐심을 부추기는 세상의 소리가 아닌,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뜻을 좇아 살아라.” 하는 성령의 음성에 따라 사는 사람이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나그네와 이방인처럼 취급받으며 종종 곤경을 겪지만, 이미 세상을 이기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진정한 자유와 평안을 만끽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을 다음과 같이 감동적으로 묘사했다.
(히 11:33, 36~38a)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믿음과 기도로 사느라 온갖 고난과 손해를 당하지만, 그 믿음과 기도로 거대한 제국의 권력과 폭력 앞에 무릎 꿇지 않는 사람. 그리고 세상의 생리와 죄인의 본성에 항거하고, 용감하게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따랐던 사람들. 그가 바로 신자다.

설교를 마무리하자. 신자는 하여가(何如歌)를 불렀던 이방원(李芳遠. 1367~1422)이 아니라, 단심가(丹心歌)를 부른 정몽주(鄭夢周. 1337∼1392)처럼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이어야 마땅하다. 그래서 돈으로도 매수할 수 없고 무시무시한 폭력과 권력에 굴하지 않는 사람. 그가 바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믿음의 사람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예수님을 생각해 보라. 똑같은 하루 일과를 보냈지만, 육체의 피로를 못 이기고 늘어지게 잠을 잤던 제자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육체의 욕구를 거스르고 아버지께 힘써 기도하셨던 예수님. 세상의 생리와 육체의 욕구에 따라 살지 않고, 기도로 승리의 본을 보이신 주님을 깊이 생각해 보라. 물론, 인간의 모든 욕구와 욕망을 다 싸잡아 악으로 정죄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거기에 기대고 잇대어 사는 인생을 ‘믿음의 삶’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 심지어 불신자들 중에도 그런 식의 삶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권장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그래서 프랑스 소설가 폴 부르제(Paul Bourget, 1852~1935)는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One must live the way one thinks or end up thinking the way one has lived).”하는 유명한 말을 남기지 않았던가? 우리 그리스도인은 ‘생각’이란 단어 대신 ‘기도’와 ‘믿음’을 집어넣고 그에 관해 고민해봐야 마땅하다. 그러므로 예수님처럼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게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세상의 생리와 죄인의 본성에 따라 살아갈 것인지 결정하라. 주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마가복음 연속설교(45) - 무화과나무 같은 예루살렘 성전 / 막 11:12~25 / 한결교회 주중설교 최승찬 목사

아모스32 / 암 8:9~14 /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9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날에 내가 해를 대낮에 지게 하여 백주에 땅을 캄캄하게 하며  10  너희 절기를 애통으로, 너희 모든 노래...
28/04/2026

아모스32 / 암 8:9~14 /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9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날에 내가 해를 대낮에 지게 하여 백주에 땅을 캄캄하게 하며 10 너희 절기를 애통으로, 너희 모든 노래를 애곡으로 변하게 하며 모든 사람에게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게 하며 모든 머리를 대머리가 되게 하며 독자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애통하듯 하게 하며 결국은 곤고한 날과 같게 하리라 11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12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 13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쓰러지리라 14 사마리아의 죄된 우상을 두고 맹세하여 이르기를 단아 네 신들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라 하거나 브엘세바가 위하는 것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라 하는 사람은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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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도 7장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아모스에게 보여주신 환상으로 시작되는데, 전장인 7장의 세 번째 환상으로 등장하는 ‘다림줄“에 관한 환상을 제외하면, 메뚜기 재앙과 불 재앙에 관한 환상은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예고하고 경고하는 8장의 ’여름 과일 광주리” 환상과 맥을 같이 한다. 그러니까 끊임없이 불의를 저지르고 한 순간도 여호와 하나님을 찾아본 적이 없는 북이스라엘의 심판과 멸망은 정해진 수순으로써, 2년 뒤에 일어나게 될 지진은 예고편에 불과하고 그보다 더한 일이 그들에게 머지않은 날 들이닥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재앙의 양상과 심판의 범위에 관한 내용이 9절부터 14절까지 길게 이어진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천재지변(天災地變)을 통한 징계와 심판(9절). 재앙으로 인한 무수한 죽음과 끊임없는 애통(10절). 우상단지들과 미신 따위를 섬기느라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쓰러지는 젊은 남녀들(13절).”

언급한 바와 같이 재앙과 심판의 양상은 앞서 여러 번 살펴봤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고, 도리어 심판의 양상을 조금씩 바꿔가며 다채롭게 표현하는데, 하나님의 징계가 북이스라엘 백성과 그들의 삶 곳곳은 물론이고, 신분과 연령과 성별을 아우르며 일어나게 될 것을 경고하는 듯하다. 다시 말해, 피하고 싶어도 도무지 피할 수 없을뿐더러, 숨어있을지라도 반드시 찾아내는 심판의 엄중함과 치밀함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런데 징계와 심판의 양상을 언급한 내용 중에서도 특별히 주목할 구절이 있다. 그것이 바로 11절과 12절이다. “(암 8:11~12. 현대인의성경)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낼 날이 올 것이다. 양식이 없어 굶주리거나 물이 없어 갈증을 느끼는 기근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해 굶주리고 목말라하는 기근이다. 사람들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로, 북에서 동으로 사방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찾아다녀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까 아모스서가 지금까지 다룬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에 대한 예언이, 8장도 이전의 내용과 별반 다르지 않은 기조와 분위기를 고스란히 이어가지만, 11절과 12절이 언급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굶주림과 목마름의 심판”은 그 자체로 매우 특별하면서도 독특하다. 왜냐하면, 앞서 언급한 “자연재해”와 “죽음”과 같은 심판의 양상은 누가 봐도 두렵고 꺼림칙한 일이지만, 과연 ‘말씀에 대한 기갈(飢渴)’을 ‘무서운 심판’으로 생각하고 두려워 떠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마찬가지다. 예수께서 다윗의 시편을 인용하여 “(막 15:34)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절규하셨던 일을 떠올려보라.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단절. 그 영적인 분리와 단절을 가장 끔찍한 일로 여겨 무서워하셨던 예수님. 기억하라. 신자의 수준은 이 고통에 대한 이해의 크기와 공감의 깊이에 따라 달라진다.

아모스32 / 암 8:9~14 /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아모스31 / 암 8:3~8 / 내가 그들의 모든 행위를 절대로 잊지 아니하리라3  그 날에 궁전의 노래가 애곡으로 변할 것이며 곳곳에 시체가 많아서 사람이 잠잠히 그 시체들을 내어버리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28/04/2026

아모스31 / 암 8:3~8 / 내가 그들의 모든 행위를 절대로 잊지 아니하리라

3 그 날에 궁전의 노래가 애곡으로 변할 것이며 곳곳에 시체가 많아서 사람이 잠잠히 그 시체들을 내어버리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4 가난한 자를 삼키며 땅의 힘없는 자를 망하게 하려는 자들아 이 말을 들으라 5 너희가 이르기를 월삭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곡식을 팔며 안식일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밀을 내게 할꼬 에바를 작게 하고 세겔을 크게 하여 거짓 저울로 속이며 6 은으로 힘없는 자를 사며 신 한 켤레로 가난한 자를 사며 찌꺼기 밀을 팔자 하는도다 7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두고 맹세하시되 내가 그들의 모든 행위를 절대로 잊지 아니하리라 하셨나니 8 이로 말미암아 땅이 떨지 않겠으며 그 가운데 모든 주민이 애통하지 않겠느냐 온 땅이 강의 넘침 같이 솟아오르며 애굽 강 같이 뛰놀다가 낮아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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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과일 광주리’ 환상을 통해 북이스라엘의 마지막이 다다랐음을 경고하신 하나님은, 6장에서 “백성들의 머리인 지도자들(암 6:1)”의 부조리와 악행을 신랄하게 비판하셨던 것처럼, 8장에서도 ‘궁전에서 부르는 노래가 슬픈 곡조로 바뀔 것이다.’ 하고 경고하시며, 가난한 자들과 약한 자들에 대한 억압과 착취를 일삼는 권력자들을 향해 무서운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신다. 그뿐만이 아니다. 5절과 6절은 종교의식을 빌미로 약자들에 대한 착취를 정당화하는 권력자들의 행태를 고발하는데, 그들의 행태가 얼마나 저급하고 역겨운 짓거리인지 생각해 보라. 그러니까 소위 기득권에 속하여 호의호식하던 작자들이, 월삭(月朔. 초하룻날)에 드리는 제사와 안식일을 핑계로 “우리가 월삭에 제사하느라 농사를 짓지 못해 소출이 줄었다. 또한, 안식일을 지키느라 장사를 못한 탓에 이윤을 보지 못했다.” 하고 투덜댔는데, 거기까지는 누구나 “그럴 수도 있겠다.” 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이후의 조치가 하나님의 분노를 더 크게 부추기기에 이른다.

즉, 당장은 물질적인 손해가 있을지언정 “하나님께 감사하며 바친 제물이니, 그것으로 충분하고 만족하다.” 하고 생각하는 게 헌신의 기본적인 정신인데, 권력자들과 기득권자들은 그런 생각 따위 염두에 두지 않았을뿐더러, 종교적으로 생색내기 위해 감수했던 손해를, 엉뚱하게도 약자에 대한 ‘폭리(暴利)’와 ‘인신매매’ 등을 통해 보전(補塡)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득권자들의 부조리한 행태에 심히 분개하셨고, 그런 행태가 만연했던 북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취소하거나 무마하실 수 없었으며, 오히려 “그들이 한 일 그 어느 것도 내가 두고두고 잊지 않겠다(7절. 표준새번역).” 하고 으름장을 놓으셨다. 그리고 그 재앙은 일차적으로 2년 뒤에 일어날 지진을 통해 나타날 거로 경고하셨다. 8절을 보라. “(암 8:8. 표준새번역) 그들이 이렇게 죄를 지었는데, 어찌 땅이 지진을 일으키지 않겠으며, 어찌 땅 위에 사는 자들이 모두 통곡을 하지 않겠느냐? 온 땅이 강물처럼 솟아오르다가, 이집트의 강물처럼 불어나다가, 가라앉지 않겠느냐?”

기억하라. 인과응보(因果應報)와 사필귀정(事必歸正)의 원리가 기독교 신앙의 전부는 아닐뿐더러, 오히려 우리 하나님은 그 원리를 아우르며 일하시고 더 나아가 그것을 초월하여 일하시는 분이지만, 그렇다고 악에 대한 심판과 보복을 제쳐놓으시거나 무관심하신 분은 아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개인과 공동체에 대한 심판의 엄정한 기준 몇 가지를 가지고 계신데, 그 기준 중 하나가 바로 ‘약자와 가난한 자’를 향한 태도와 자세다. 대표적인 교훈이 바로 잠언의 말씀이다. “(잠 14:31. 17:5. 22:2)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공경하는 자니라.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할 자니라. 가난한 자와 부한 자가 함께 살거니와 그 모두를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 혹시, 개인과 집단이 어떤 수준인지. 또한, 믿음과 경건의 수준이 어떠한지. 그리고 사역자와 그 교회가 하나님 앞에 합당한지 알고 싶다면, 약자들에 대한 인식과 태도가 어떠한지 살펴보라. 그러면 거의 맞다.

아모스31 / 암 8:3~8 / 내가 그들의 모든 행위를 절대로 잊지 아니하리라

아모스30 / 암 8:1~6 / 여름 과일 한 광주리와 내 백성 이스라엘의 끝1  주 여호와께서 내게 이와 같이 보이셨느니라 보라 여름 과일 한 광주리이니라  2  그가 말씀하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
27/04/2026

아모스30 / 암 8:1~6 / 여름 과일 한 광주리와 내 백성 이스라엘의 끝

1 주 여호와께서 내게 이와 같이 보이셨느니라 보라 여름 과일 한 광주리이니라 2 그가 말씀하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이르되 여름 과일 한 광주리니이다 하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 백성 이스라엘의 끝이 이르렀은즉 내가 다시는 그를 용서하지 아니하리니 3 그 날에 궁전의 노래가 애곡으로 변할 것이며 곳곳에 시체가 많아서 사람이 잠잠히 그 시체들을 내어버리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4 가난한 자를 삼키며 땅의 힘없는 자를 망하게 하려는 자들아 이 말을 들으라 5 너희가 이르기를 월삭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곡식을 팔며 안식일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밀을 내게 할꼬 에바를 작게 하고 세겔을 크게 하여 거짓 저울로 속이며 6 은으로 힘없는 자를 사며 신 한 켤레로 가난한 자를 사며 찌꺼기 밀을 팔자 하는도다

환상을 통해 아모스에게 계시하고 북이스라엘을 향해 경고하는 방식이, 7장에 이어 8장과 9장에서도 계속 이어지는데, 아마도 하나님은 이 사안을 중차대하게 여기셨고 그만큼 시급한 문제로 바라보셨던 게 틀림없다. 마치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섣부르게 까부는 아이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며 오히려 당사자보다 더 조바심 내는 부모의 심정이 이러할 것 같다. 어쨌든, 하나님께서 아모스에게 계시하신 네 번째 환상은 다 익은 ‘여름 과일 한광주리’로써, [개역개정]을 비롯한 모든 한글번역 성경은 1절의 ‘여름 과일’에 각주(脚注) 번호를 붙였는데, 거기에는 ‘여름 과일이란 말과 끝이란 말의 음(音) 카이츠(과일)’이란 설명이 덧붙여있다. 무슨 뜻인가? 신학자들의 견해는 대부분 다음과 같다. 1절과 2절에 언급된 ‘여름 과일’은 히브리어로 '카이츠(קַיִץ, qayits)‘로써, 이는 이스라엘의 마지막 수확 과일(무화과 등)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끝(3절)’의 히브리어 '케츠(קֵץ, qets)‘와 발음이 매우 비슷하기에 함께 쓴 거로 해석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여름과일’과 ‘끝’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단어의 ‘발음의 유사성’과 ‘의미의 유사성’을 이용하여 북이스라엘의 멸망과 심판이 머지않았음을 계시하신 것이다. 이렇듯 하나님의 경고는 다채로운 방식으로 아모스에게 전달되는데, 그것은 어떻게든 이 백성을 돌이키시려는 하나님의 열심 이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이 얼마나 애처로운 광경인가? 엇나간 자식새끼를 한도 끝도 없이 참고 기다리며, 돌이키기 위해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는 부모의 심정을 헤아리는 것이, 그나마 예언서에 담긴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것 같다. 따라서 심판의 말씀만 뚝 떼어내어 “하나님은 피를 즐겨하는 무자비한 신이다.” 하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거나, 혹은 성경의 하나님을 일부러 왜곡하고 폄하하기 위해 술수를 쓰는 게 틀림없다. 오히려 성경을 제대로 읽어본 사람이라면, 요나처럼 하나님의 인내와 자비를 답답해하며 “이젠 좀 끝내시지.” 하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들의 불의와 죄악에 대한 단호함을 잃지 않으신다. 무엇보다 앞서 정치지도자들과 종교지도자들의 불의에 분개하시며, 그들을 향한 심판을 단호하게 경고하신 그 기조가, ‘여름과일 광주리’ 환상을 보여주신 직후에도 계속 이어지는데, ‘궁전의 노래가 애곡으로 변할 것이다.’ 하고 경고하신 내용과 함께, 도무지 개선의 여지가 없는 위정자들과 상류층들의 사악함에 관한 고발의 내용이 끔찍하게 펼쳐진다. 무슨 내용인가? 명절과 안식일에 제물을 바쳐서 손실을 보거나, 율법의 명령에 따라 안식하다가 일어난 손실이 있으면, 그 손해를 메꾸기 위해 약자들을 착취하는 이들의 행태가, 4절부터 6절에 이르기까지 장황하게 이어진다. 수십억 원의 십일조를 교회에 갖다 바친답시고 자랑삼아 간증했던 모 기업 회장이, 무수한 직원에 대한 착취를 노골적으로 일삼고 심지어 법의 허점을 이용하여 대량해고를 저지른 탓에, 그들의 생계와 가정을 박살내고 몇몇 직원이 스스로 삶을 포기하게끔 만들었던 뉴스는, 시간과 공간과 문화를 초월한 죄인의 추악한 생리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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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八福)연속강해(13)                                     마태복음 5:1~12온유의 복을 받은 자가 얻을 땅(2)  예수께서 여덟 가지 복 중의 하나로 언급하신 ‘온유의 복’은, 단...
26/04/2026

팔복(八福)연속강해(13)
마태복음 5:1~12

온유의 복을 받은 자가 얻을 땅(2)

예수께서 여덟 가지 복 중의 하나로 언급하신 ‘온유의 복’은, 단순히 친절하거나 너그러운 성격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가난하고 애통한 마음 다음에 따라오는 하늘의 성품이고, 더불어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여유와 인내의 마음이다. 즉, ‘온유의 복’은 하늘의 선물이자 경건의 산물로써, 이 복은 ‘가난과 애통의 복’을 먼저 받은 사람에게 부어지는 하늘의 성품임과 동시에,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깊어질수록 온유하신 하나님을 닮아가기에 ‘경건의 열매’도 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온유한 자가 땅을 얻는다.” 하는 이 말씀을 액면 그대로 해석하여 “온유한 마음을 지닌 사람은 부동산을 차지한다.” 하는 뜻으로 이해하는데, 성경이 ‘가장 온유한 사람’으로 칭송하는 모세는 한 평의 땅조차 소유하지 못했을뿐더러, 땅과 기업(基業)은 성경에서 재산 가치를 지닌 것만을 가리키지 않고, 하나님의 존재 자체와 하늘의 신령한 복을 가리키는 경우도 많은 까닭에, 온유한 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물려받게 될 땅과 같은 재산과 유산을, 다름 아닌 “하나님과 그 나라”를 가리키는 거로 대부분 해석한다. 그리고 그 상징적 사건이 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 정복과 정착으로써, 여호수아와 신세대 백성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온유한 마음으로 요단강을 건넜고, 더불어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착하는 은혜와 복을 누릴 수 있었으나, 이후에는 자신의 가난함을 인식하고 말씀하시는 온유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기는커녕, 그저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이득과 쾌락에 눈과 귀를 빼앗겨 하나님의 뜻을 외면했기에, 광야를 떠돌았던 그들의 조상 못지않은 혼란과 분열과 부패를 자초했다. 기억하라. 자신의 가난함과 가련함을 알고 슬퍼할 줄 아는 사람은, 온 몸과 온 마음으로 자신을 겸손히 낮추기 마련이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자신을 한껏 낮춘 신자의 마음에 자리매김하는 것이 온유한 성품으로써, 그 온유한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과 타인의 말을 경청하는 태도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무엇보다 신자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땅을 소중히 여겨야 하지만, 그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그보다 더 중요하다. 이처럼 주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까닭에 온유한 마음을 얻은 사람. 또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자신을 한껏 낮출 수 있는 온유함을 지닌 사람. 그는 진정한 땅이자 기업이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복을 누리고, 더불어 그 은혜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평안과 자유와 기쁨을 충만히 맛볼 것이다.

그런데 ‘온유(溫柔)’란 말은 “인간관계”를 반드시 전제(前提)하고, 그것을 떼어놓으면 절대로 생각할 수 없는 단어다. 생각해 보라. 무인도에 뚝 떨어져 혼자 사는 사람에게 “배려. 예절. 친절. 온유” 등은 불필요한 단어에 불과하다. 즉, 언급한 단어들은 두 사람 이상이 서로 관계를 맺을 경우에만 필요한 것들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도 온유한 태도가 필요하다. 우선, 하나님께서 우리 같은 죄인을 먼저 온유하게 대접하셨기에, 우리도 하나님을 온유한 마음으로 신뢰하고 사랑해야 하는데, 실상은 하나님 머리 꼭대기 위에서 상전 행세하는 신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또한, 자신의 이익과 만족을 위해 성급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보다 제 뜻만 앞세우는 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신자는 타인을 대할 때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서도 온유한 태도를 갖춰야 마땅하다. 무엇보다 온유함이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온유하신 성품이 죄인의 구원을 성취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고, 더불어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온유하게 대하는 신자의 태도를 주께서 매우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온유의 복을 얻은 신자가 온유한 성품을 발휘할 또 다른 대상은 ‘타인과 이웃’으로서, 믿음의 사람은 우선적으로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온유한 태도로 받아야 하지만, 타인과 이웃을 향해서도 온유의 복을 받은 사람답게 처신해야 마땅하다. 따라서 온유한 자가 기업으로 얻을 첫 번째 땅은 하나님과 그 나라이고, 두 번째로 얻게 되는 땅의 기업은 바로 타인과 이웃으로서, 온유한 자가 얻을 땅의 기업(基業)은 사람을 가리킨다. 이쯤에서 다시금 온유함으로 하나님께 칭찬받았던 모세를 떠올려 보라. 430년간 남의 종노릇하느라 노예근성에 찌든 히브리 민족. 심지어 죄인의 생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불평과 원망을 일삼았던 이스라엘 백성. 그런데도 그들을 끝까지 용납하며 40년 동안 동고동락했던 사람. 또한,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온유한 태도로 떠받들고 무수한 백성을 인내로 섬기며 광야에서 자신을 연단했던 인물. 그래서 민수기는 모세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민 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그런데 이 칭찬의 말씀은 갑자기 튀어나온 게 아니다. 모세가 “구스” 즉, 에티오피아 출신의 여자와 재혼한 일로 인해, 친형제인 아론과 미리암이 트집을 잡으며 마구 비난했던 일이 있었는데, 민수기의 저자는 그 일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민 12:1~2)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친형제이자 동역자인 두 사람이 모세의 재혼을 못마땅하게 여긴 일 자체는 큰 문제로 볼 수 없다. 그러나 그 정도에서 그치지 않은 게 문제였다. 두 사람이 이 일을 빌미로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권위마저 부정하는 짓을 저질렀던 것이다. 즉, “하나님이 우리한테도 말씀하시므로, 우리도 지도자로서 대접하라.” 하는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각자에게 주어진 직책에 충실하면 그만인데, 두 사람은 모세의 지위와 명망만을 동경했을 뿐, 그가 짊어진 부담과 책임은 등한시했던 게 틀림없다.

게다가 모세는 왕과 같은 지도자가 아니었기에, 특권이나 특혜는 누려본 적도 없다. 하늘의 만나가 그에게 더 많이 내렸는가? 가마나 말을 타고 편하게 광야를 지났는가? 아니다. 오죽하면 히브리서는 그를 가리켜 “하나님의 집에서 충실하게 일한 종(히 3:2, 5)”으로 불렀겠는가. 그러나 미리암과 아론은 모세의 지위와 권위를 탐냈고, 그 욕심에 사로잡혀 “나도 한몫 잡아 보자.” 하며 동생을 비난했는데, ‘모세의 온유함’을 칭찬한 말씀은 바로 이 이야기 중에 삽입된 구절이다. 결과는 어떠했을까? 모세의 누이 미리암은 얼마 후 나병에 걸리고 마는데, 하나님은 두 사람의 비난을 악한 일로 간주하고 단호히 징계하셨던 것이다. 그렇다면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편들어 주신 일로 승리감에 도취하여 의기양양했을까? 또한, 얄미운 누이의 교만과 얍삽한 형의 탐욕은 완전히 박살났기에, 두 사람을 향한 징계를 통쾌하게 여겨 손뼉을 치고 기뻐했을까?
(민 12:13)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하나님이여 원하건대 그를 고쳐 주옵소서
기뻐하기는커녕 모세는 나병에 걸려 괴로워하는 미리암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즉, 민수기 본문은 “모세는 온유한 사람이다.” 하고 제시한 다음에, 그 사실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제시함으로써 그의 온유함을 증명했다. 다시 말해, 모세는 자신을 대적하고 무시했던 자들을 위해 기도할 만큼 온유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신자들은 모세를 “큰 사람. 위대한 인물”로 평가하는데, 그가 거대한 임무를 맡고 큰 무리를 거느려서가 아니다. 불평분자들이 수두룩했던 이 백성과 함께 광야 40년을 떠돌며 연단을 받았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온유하신 성품을 쏙 빼닮은 사람으로 변화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백성을 지키시고 인도하신 가장 큰 원동력과 관건은 하나님과 그 은혜였지만, 하나님께서 모세의 온유함을 통해 그 일을 성취하신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물론, 그가 처음부터 온유한 사람은 아니었다. 동족이 괴롭힘 당하는 모습에 분개하여 살인까지 저질렀던 사람 아닌가? 따라서 40세의 모세가 민수기 12장의 사건을 맞닥뜨렸다면, 나병에 걸린 미리함을 불쌍히 여겨 치료해 주십사 기도하기는커녕, 그의 손에 움켜쥔 지팡이로 흠씬 두들겨 팼을 것 같다. 이처럼 출애굽기 2장의 모세와 민수기 12장의 모세는 딴 사람처럼 보일 정도다. 왜냐하면, 광야 40년의 여정은 이스라엘 백성의 연단을 위해 필요한 과정이었고, 그들의 지도자이자 우두머리인 모세도 예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세도 ‘광야’의 공간과 ‘40년’의 시간을 통해 더욱 하나님의 사람답게 다듬어졌고, 더불어 자신과 이 백성을 오래 참고 품어주신 하나님을 닮아갈 수 있었기에, 그는 죽는 날까지 단 한 평의 땅도 소유하지 않았지만, 그 대신 이스라엘 자손의 마음을 얻고 생애를 마칠 수 있었다. 신명기 34장을 보라.
(신 34:8)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평지에서 모세를 위하여 애곡하는 기간이 끝나도록 모세를 위하여 삼십 일을 애곡하니라
이스라엘 백성은 한 달 동안 모세의 죽음을 애도하며 울었다. 이처럼 모세는 40년 광야 여정의 종착지이자 목적지인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으나, 이스라엘 백성과 우리 같은 믿는 자들의 마음을 기업으로 얻는 복을 누린 인물이다.

성경에는 사람의 마음을 땅과 밭으로 빗대어 표현한 내용이 무수히 등장한다. 물론, 사람과 사람의 마음을 죄다 땅으로 비유한 것은 아니지만, 온유한 자에게 허락된 그 땅은 ‘하나님 나라’와 ‘사람’을 빗대어 표현한 말로 봐도 무방하다. 특히, 신약성경에 기록된 사도들의 편지에는 “서로 온유하게 대하라.” 하고 가르치는 내용이 자주 등장하는데, 온유한 성품에 관한 교훈은 “타인과 맺는 관계”에 관한 내용으로 대부분 이어진다. 그 대표적인 교훈이 디모데후서에 기록됐다.
(딤후 2:24~25)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모든 사람에 대해 참으며, 거역하는 자들도 온유하게 대하라.” 하는 권면의 목적은 무엇인가? 상대방에게 돌이킬 여지와 회개의 가능성을 남겨두기 위해서다. 즉, 상대방이 복음의 진리를 접할 기회와 하나님 앞에 돌이키는 기회를, 주의 종들은 그에게 “더 많이, 더 자주” 제공하기 위해, 가급적 그 사람을 오래 참고 온유한 태도로 관계를 맺게끔 권면하는 말씀이다. 그래서 온유한 마음은 다른 사람을 세우는 좋은 토대가 될 뿐더러, 그가 다시금 일어설 수 있는 기회와 동기를 제공한다. 그러므로 “나와 맞지 않는다. 나와 다르다.” 하는 이유로 다 끊어내면, 함께하는 신앙은커녕 함께하는 삶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다. 물론, 고객확보를 위해 갖은 수단을 다 쓰는 영업사원처럼, 더 많은 사람을 교인으로 만들기 위해 “온유”를 강조하는 것은 잘못이다. 다만, 우리가 타인의 허물과 약점을 끌어안고 상대방을 온유한 태도로 이해하기 위해 힘쓸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며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는 더더욱 하나님을 닮아갈 수 있기에, 믿음의 사람은 온유의 열매를 맺기 위해 힘쓰고 애써야 마땅하다. 그래서 바울은 제자이자 교회의 지도자인 디모데에게 “주의 종은 모든 사람을 온유하게 대하라.” 하고 권면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불법과 불의를 모른 채 하고 옳은 일을 포기하면서까지 그러하라는 뜻은 아니다. 사랑을 위한 온유함과 제 이익을 위한 비겁함은,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할지언정 그 본질과 열매는 완전히 다르다. 그러므로 “오래 참음. 낮아짐. 겸손. 온유함” 등을 굴종이나 비겁한 타협쯤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생각해 보라. 바울 사도가 비겁한 적이 있었는가? 무엇보다 온유하신 예수님이 당신의 이익을 위해 비겁하게 타협하거나, 힘 있는 자들 앞에 굴종하신 적이 있으신가? 게다가 온유의 성격 중에 굴종과 비겁함과 방관 등이 끼여 있다면, 바울은 아래와 같이 고백하지 못했을 것이다.
(고후 10:1)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형제들을 향해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여러분을 대하는 중입니다.” 하고 고백했다. 그런데 신랄한 비판의 메시지를 가장 많이 다룬 편지가, 흥미롭게도 고린도교회에 보낸 두 번의 편지임을 명심하라.

따라서 바울이 언급한 온유와 관용을 “비굴하게 아첨하는 방법. 사람의 환심을 사기 위한 얄팍한 수단” 쯤으로 생각하지 마라. 오히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높은 자가 낮은 자를, 큰 자가 작은 자에게 베푸는 아량(雅量) 즉, 너그럽고 속 깊은 마음이 바로 온유와 관용의 마음이다. 그래서 온유함은 진리 견고함과 성령 충만의 나무에서 길게 뻗은 가지와 무성한 잎사귀와 같은 까닭에, 그것은 쉴 만한 그늘과 충분한 열매를 누구에게나 제공할 수 있는 마음인 셈이다. 기억하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편에 서서 옳은 일에 목숨을 거는 사역자였지만, 그렇다고 냉정한 이론가나 냉혹한 심판자는 아니었다. 그는 형제들 앞에 온유한 목자이자 하나님 앞에 겸손한 종이었다. 또한, 정의와 공의의 중심으로 사역했고, 더 많은 사람을 더 깊이 품기 위해 온유한 마음으로 섬겼던 사도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의 사람들과 그들의 마음을 “땅의 기업”으로 얻은 하나님의 종이었기에, 그의 자랑과 기쁨은 돈이나 명예가 아니라 그가 제 자식처럼 마음에 품었던 사람들이었다. 그에 관한 고백이 데살로니가전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됐다.
(살전 2:19)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바울의 가장 큰 기쁨과 자랑은 예수 그리스도시고, 그다음으로는 바로 그가 사랑하고 양육했던 사람들이었다. 믿음으로 함께하는 교우들은 물론이고, 구원과 거듭남이 필요한 사람들까지. 그들이 바울의 가장 큰 기쁨이자 자랑이고 기업이자 보상이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모세처럼 단 한 평의 땅도 소유하지 못했을뿐더러, 세상의 부귀영화와는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온유한 마음으로 한 영혼의 가치를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고 품었던 까닭에, 하나님 나라와 사람을 기업으로 소유하는 복을 모세와 똑같이 누렸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고 심지어 대적하는 자들마저 온유하게 품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온유하신 예수님의 본보기를 따르고 그분을 닮기 위해 부단히 애썼기 때문이다. 아마도 바울은 예수님의 이 교훈을 일평생 떠올리며 살았을 것 같다. 마태복음 11장을 보라.
(마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괴팍하고 사사건건 시비 걸기를 좋아하는 예수님. 남을 쉽게 비난하고 불안감과 공포감을 조성하기 일쑤인 예수님을 상상해 보라. 그런 사람이 진리를 주야장천 외친들, 어느 누가 순순히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겠는가?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으로서, 죄에 빠진 인생을 십자가를 참으시기까지 온유하게 품어주신 분이시기에, 아버지의 나라와 아버지의 사람들을 당신의 완전한 기업으로 삼으셨던 것이다.

설교를 마무리하자. 온유하신 예수님을 닮아 온유한 마음을 품기 위해 힘쓰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고,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는 온유한 자들의 모임으로 서 있어야 마땅하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는 온유한 자들의 나라로써, 믿음으로 거듭난 자들은 온유함을 품은 사람들이고, 온유한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물려받은 사람들이다. 따라서 서로를 온유한 마음으로 용납하고 품어주는 곳. 그곳이 바로 작은 천국이자 하나님 나라를 예행 연습하는 곳이다. 그러나 이기적인 태도와 포악한 성품을, 기질이나 성격 탓하며 핑계 대지 마라. 그것은 미성숙한 태도에 불과하다. 하나님과 그 나라를 기업으로 받은 그리스도인이 틀림없다면, 온유한 마음의 크기와 부피는 제각각 다를지언정, 그 사람은 누군가를 품을 만한 넉넉한 가슴을 반드시 지니기 마련이다. 그래서 이중표 목사는 온유한 마음에 관해 이렇게 설교했다. “차갑고 굳은 것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에 생명력이 넘치는 법입니다. 생명 없는 광물질은 차고 딱딱하지만 살아있는 모든 것은 따뜻하고 부드럽습니다. 너무도 껍질이 두꺼워지고 딱딱해지면 죽어가는 고목이 됩니다. 부드럽고 연한 가지에서 푸른 잎이 움트며, 아름다운 꽃과 열매가 맺힙니다(”하늘을 품은 마음“ 이중표 목사).” 기독교작가이자 신학자인 백소영 교수도 비슷한 맥락에서 ‘온유의 마음’과 그로 인해 얻게 되는 ‘땅’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온유한 자가 차지하는 땅은 폭력이나 강압이 아닌, 하나님의 뜻 안에서 묵묵히 이웃과 생명을 사랑하고 섬기며 가꾸어가는 부드러운 힘의 공간을 의미합니다. 이는 자기 성질을 내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대할 때 진정한 관계의 땅을 얻게 됩니다.” 우리와 우리 교회가 온유의 복을 충만히 받아 누림으로써, 하나님 나라와 뭇 사람의 마음을 기업으로 누릴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팔복(八福)연속설교(13) - 온유의 복을 받은 자가 얻을 땅(2) / 마태복음 5:1~12 / 한결교회 주일설교 최승찬 목사

아모스29 / 암 7:14~17 / 이제 너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니라14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서  15  양 떼를 ...
24/04/2026

아모스29 / 암 7:14~17 / 이제 너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니라

14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서 15 양 떼를 따를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나니 16 이제 너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니라 네가 이르기를 이스라엘에 대하여 예언하지 말며 이삭의 집을 향하여 경고하지 말라 하므로 17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네 아내는 성읍 가운데서 창녀가 될 것이요 네 자녀들은 칼에 엎드러지며 네 땅은 측량하여 나누어질 것이며 너는 더러운 땅에서 죽을 것이요 이스라엘은 반드시 사로잡혀 그의 땅에서 떠나리라 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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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엘의 제사장인 아마샤는 여호보암 2세에게 빌붙어 먹던 ‘어용(御用) 종교인’으로서, 북이스라엘 왕의 불신앙과 불의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아모스 선지자의 행보에 분개했고, 더불어 이 일을 계기로 더더욱 왕의 환심을 사서 제 이익을 얻기 위해, 아모스가 전한 하나님의 계시를 악의적으로 각색하여 왕에게 일러바쳤던 것이다. 거기 더하여 남유다 출신인 아모스의 이력까지 들먹이며 지역감정을 유발하는 짓을 서슴지 않았고, 심지어 그를 ‘북이스라엘 나라를 좀 먹는 존재’처럼 호도하며 악마화하기까지 했다. 이처럼 정치권력에 빌붙어 제 이익만 도모하는 종교인들의 비열함과 추악함은, 여로보암에게 기생하던 아모스 시대나 오늘날이나 달라진 게 하나도 없어 보인다. 아무튼, 아모스는 아마샤의 음해와 고소로 인해 큰 위기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는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고 도리어 제사장 아마샤에게 다음과 같이 응수했다.

“(암 7:14~15. 표준새번역)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집짐승을 먹이며, 돌무화과를 가꾸는 사람이다. 그러나 주께서 나를 양 떼를 몰던 곳에서 붙잡아 내셔서,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로 가서 예언하라고 명하셨다.” 무슨 뜻인가? 이 구절을 좀 더 쉽게 의역하여 풀어보면 이렇게 쓸 수 있을 것 같다. “여보시오. 아마샤 제사장! 나는 원래 농부와 목동에 불과한 사람이었소. 다만, 하나님께서 나 같은 사람을 끄집어내셔서 이 사명을 감당할 따름이오. 게다가 이전에는 제사장이나 선지자 같은 직책은 꿈도 꾼 적이 없소이다. 그런데 당신 같은 작자가 제사장이랍시고 꺼드럭대며 왕에게 아첨하는 꼬락서니를 보고 있자니, 나 같은 사람을 선지자로 세우신 하나님의 심정을 좀 더 이해하게 됐소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두 사람의 뒷배가 무엇인지. 즉, 진정으로 의지하는 바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드러난다.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그분의 뜻을 전하기 위해 생계와 생명까지도 내놓은 아모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의 제사장이랍시고 유세를 떨지만, 정작은 불의한 왕에게 빌붙어 그를 보위(保衛)하기 위한 소리만 내뱉을 뿐인 아마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평범한 교인들은 그렇다 손치더라도, 소위 ‘부르심을 받았다.’ 하고 자처하는 사역자들이 개인의 이해관계(利害關係)에 얽혀 공의와 정의를 저버릴뿐더러, 엄연히 일어나는 사실과 현실조차 부정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거기 더하여 권력자들의 입맛에 맞춰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고, 오히려 그들의 불의를 정당화하는 짓까지도 서슴지 않는다. 우크라이나 침공의 원흉인 푸틴을 옹호했던 러시아 정교회 수장. 현재 중동전쟁의 원흉인 트럼프에게 안수했던 복음주의 목사들. 전범인 네타냐후의 폭력적 정책을 70%이상 지지하는 이스라엘 국민 등등. 겉으로는 죄다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우는 작자들이지만, 실상은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마귀의 후예에 불과하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17절과 같은 심판이 임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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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스28 / 암 7:10~13 / 사실을 양념으로 가짜뉴스로 호도하는 아마샤10  때에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가 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에게 보내어 이르되 이스라엘 족속 중에 아모스가 왕을 모반하나니 그 모든 말을 이...
23/04/2026

아모스28 / 암 7:10~13 / 사실을 양념으로 가짜뉴스로 호도하는 아마샤

10 때에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가 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에게 보내어 이르되 이스라엘 족속 중에 아모스가 왕을 모반하나니 그 모든 말을 이 땅이 견딜 수 없나이다 11 아모스가 말하기를 여로보암은 칼에 죽겠고 이스라엘은 반드시 사로잡혀 그 땅에서 떠나겠다 하나이다 12 아마샤가 또 아모스에게 이르되 선견자야 너는 유다 땅으로 도망하여 가서 거기에서나 떡을 먹으며 거기에서나 예언하고 13 다시는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 이는 왕의 성소요 나라의 궁궐임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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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온 사방이 메뚜기 떼로 인해 황폐화됨과 동시에, 모든 농작물과 소출이 불 같은 가뭄으로 인해 말라비틀어지는 환상.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다림줄을 들고 서 계신 모습으로 나타나 심판의 불가피성을 계시하신 세 번째 환상. 아모스서 7장은 하나님께서 세 가지 환상으로 당신의 뜻을 아모스에게 계시하신 극적인 장면과 함께, 하나님과 선지자가 긴밀히 소통하며 서로의 마음을 더더욱 깊이 헤아리는 과정을, 1절부터 9절까지 극적이면서도 감동적으로 기록한 게 특징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아모스 선지자의 출연과 활약은 10절 이하에도 계속 이어지는데, 여기서도 아모스는 누군가의 말에 반응하며 또다시 서로 주고받는 형식으로 등장한다. 물론, 앞서 하나님과 아모스 선지자가 합을 맞춰 서로를 더욱 깊이 헤아리고, 종국에는 하나님의 인격적인 설득과 아모스의 순종으로 아름답게 마무리됐던 모습과 달리, 제사장 아마샤와 선지자 아모스의 등장은 날선 대립과 피비린내 나는 공방으로 계속 이어진다.

무슨 일인가?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가 여호보암 2세에게 다음과 같은 말로 아모스 선지자를 고소한 것이다. “(암 7:10~11. 공동번역) 아모스라는 자가 우리 이스라엘 한가운데 들어와 임금님께 반란을 일으키려고 합니다. 그자는 이 나라를 망칠 소리만 하고 있습니다. 임금님께서는 칼에 맞아 돌아가시겠고, 이스라엘 백성은 사로잡혀 포로의 신세가 되어 이 땅을 떠나리라고 떠들어댑니다.” 한 번 생각해 보라. 아마샤 제사장이 고소한 내용은 사실인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우선, 여보로암 2세와 북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다림줄 환상’을 통해 이미 경고하신 말씀으로써, 아모스는 그 심판의 말씀을 북이스라엘 왕과 백성에게 있는 그대로 용감히 전했고, 아마샤와 같은 ‘어용(御用) 제사장’의 귀에도 들어가 시빗거리를 제공했던 게 틀림없다. 그러나 10절에 기록된 그의 주장은 그저 지극히 개인적인 해석이자 일종의 ‘가짜 뉴스’에 불과하다.

즉, 아마샤가 아모스 선지자에 대해 고발한 내용은, 그야말로 아모스를 음해하고 해코지하기 위해 제 입맛에 맞게 각색한 이야기일 따름이다. 거기 더하여 아마샤는 아모스의 출신까지 들먹이며 비난의 수위를 높였을 뿐만 아니라, 여로보암 2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정치적으로 철저히 계산된 말을 내뱉기에 이른다. “(암 7:12~13. 표준새번역) 유다 땅으로 도망가서, 거기에서나 예언을 하면서, 밥을 빌어먹어라. 다시는 베델에 나타나서 예언을 하지 마라. 이 곳은 임금님의 성소요, 왕실이다.” 가짜 뉴스로 대중을 호도하고 선동하는 방식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다량의 거짓을 진실인 것처럼 호도하기 위해 일부의 진실을 양념처럼 조금 가미하는 행태. 또한,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단순한 이분법적 사고방식으로 세상과 사람을 재단하고, 나와 다른 상대방을 ‘악마화’하거나 없애버릴 ‘적’으로 쉽게 규정하는 방식. 거기 더하여 “하나님은 내 편. 나는 하나님 편에 선 사람”이란 확신까지 더해지면 더는 답이 없다. 그래서 트럼프 같은 인간을 ‘트황’으로 부르며 예수님처럼 섬기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아모스28 / 암 7:10~13 / 사실을 양념으로 가짜뉴스로 호도하는 아마샤

마가복음 연속설교(44) 한결교회 주중설교                  마가복음 11:1~11나귀를 탄 왕과 이상한 행차(行次)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공생애를 중점적으로 다룬 복음서로써, 총 16장으로 구성되어 예...
22/04/2026

마가복음 연속설교(44) 한결교회 주중설교
마가복음 11:1~11

나귀를 탄 왕과 이상한 행차(行次)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공생애를 중점적으로 다룬 복음서로써, 총 16장으로 구성되어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을 기록했는데, 그중에서도 11장부터 16장까지 기록된 내용은 예루살렘에서 일주일 동안 벌어진 이야기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마지막 행적에 관한 일주일간의 기록이, 마가복음 전체 분량 중에서 1/3 이상을 차지하고, 그 내용은 대부분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 주로 초점을 맞췄는데, 이런 특징은 마가복음만 아니라 모든 복음서의 공통적인 특징 중 하나다. 다시 말해, 복음서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 관한 내용을 가장 중요하게 다루고, 그만큼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기록했는데, 그 이유는 분명하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또한, 다시 살아나신 부활 사건이 성경의 핵심이자 기독교 신앙의 관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복음서는 예수님의 생애와 행적 중에서도, 주님의 고난과 죽음에 관련한 이야기를 주로 기록했던 것이다. 그리고 마가복음도 마찬가지다. 어쨌든, 11장의 서두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안으로 이제 막 들어가실 때 벌어졌던 일에 관한 기록이고, 이 이야기 안에는 조금 뜬금없어 보이는 장면이 몇 개 등장한다. 우선, 예루살렘에 들어가기 직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귀 새끼 한 마리를 빌려오게끔 지시하셨는데, 당시 사람들에게 나귀는 상당한 재산 가치를 지닌 가축이었던 까닭에, 낯모르는 사람에게 손쉽게 빌려줄 수 없었을뿐더러, 더군다나 남의 가축을 빌려 쓰는 일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고로 제자들도 처음에는 망설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께서 지시하신 대로 나귀의 주인에게 부탁을 했고, 그는 자신의 나귀를 순순히 내어주는 게 아닌가? 그리고 예수님은 그 나귀 새끼를 타고 백성의 환대를 받으며 예루살렘으로 별 탈 없이 들어가실 수 있었다. 참으로 순탄하고 훈훈한 이야기처럼 보인다. 나귀의 주인은 군말 없이 자신의 나귀를 내어줬고, 예루살렘 백성은 왕을 모시듯이 예수님을 극진히 영접했다. 그래서 어떤 신자들은 이 이야기를 흐뭇한 마음으로 읽고 넘겨버리기 쉽지만, 사실 이 이야기에 담긴 내용은 마냥 즐거워하기에는 무리가 있을뿐더러, 매우 깊은 영적 의미를 담고 있기에 쉬이 지나쳐서도 안 된다. 그렇다면 예루살렘으로 입성(入城)하시는 예수님에 관한 이 기록은, 우리 같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와 교훈을 제공하는지 살펴보자.

이쯤에서 먼저 생각할 것이 있다. 우선,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일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라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해마다 최소한 세 번은 예루살렘의 성전을 방문하여 명절을 보냈고, 예수님도 다른 유대인들의 전례를 따라 분명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을 텐데, 그래서 누가복음에는 예수께서 태어난 지 8일 만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일은 물론이고(눅 2:21~22), 예루살렘 성전에서 율법학자들과 토론하느라 부모와 떨어졌던 이야기도 함께 등장한다(눅 2:41~50). 그러므로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사람들의 시선이나 환영 따위 기대하지 않은 채, 제자들과 함께 평범한 모양새로 성문을 지나 걸어 들어가시면 그만이다. 또한, 예루살렘의 주민들도 마찬가지다. 소 닭 쳐다보듯이, 늘 오가는 나사렛 출신의 청년 랍비를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그러나 본문을 보라. 예루살렘 주민들이 예수님의 입성을 대대적으로 환영할 뿐만 아니라, 주님이 나귀를 타고 가는 길에는 자기들의 겉옷을 깔거나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펼쳐 놓는 게 아닌가? 마치 귀빈을 극진하게 모시기 위해 레드카펫(red carpet)을 깔아놓은 모양새와 비슷하다. 거기 모인 무리가 대부분 서민이었던 탓에 나름대로 예우하느라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방문한 일이 처음은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명절을 지키느라 정기적으로 오갔고, 심지어 공생애 기간 중에도 여러 번 방문했었다(요한복음 2장 5장 등등). 그런데 이 마지막 방문길이 유독 요란법석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을까? 예수님을 미워하고 대적하는 이들이 늘 존재했지만, 적잖은 백성은 주님에게 호감을 갖고 지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몰렸는데, 그럴수록 예수님에 대한 정치적 기대도 커질 수밖에 없었고, 그 기대는 주님의 예루살렘 방문으로 인해 더더욱 고조됐던 것이다. 그 사실을 방증하는 내용이 본문에 기록됐다.
(막 11:9~10)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예루살렘 주민들은 예수님을 향해 “호산나(Hosanna, Ὡσαννὰ)”하고 찬양했는데, 이 단어는 “이제(제발), 구원하소서(시118:25).” 하는 뜻의 히브리어 ‘호쉬아나’에서 파생한 말로써,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시는 주님을 향해 “호산나” 하고 부른 것은, 모인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원하실 하나님”으로 생각했다는 뜻이다. 게다가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가 오리라.” 하고 외친 말은 더더욱 직접적이다. 즉, 그들은 “다윗이 통치하던 시기의 영광이, 예수님을 통해 이뤄지기를 바랍니다.” 하는 마음으로 “호산나”를 외쳤던 것이다. 바꿔 말해, 예수님을 다윗 왕의 권위와 영광을 지닌 분으로 여기고 찬양한 셈이다.

그동안 예수께서 일으켰던 무수한 기적과 이적. 폭군인 헤롯을 비롯한 위정자들은 물론이고 음흉한 종교지도자들 앞에 아첨하기는커녕, 그들의 위선과 부조리를 용감하게 비판하고 저항했던 모습. 게다가 군중의 인기에 영합(迎合)하거나 타협하지도 않고 당신의 소신대로 행동하는 모양새가, 많은 백성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와 닿았던 게 틀림없다. 나사렛 출신의 청년 예수를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로 여겨서 찬양하고 환대했던 이유가 거기에 있다. 물론, 그들이 기대했던 메시아는 인간의 죄와 저주를 대신 짊어지시고 구원하실 분이 아니다. 로마제국의 압제와 지배에서 유대 민족을 해방시키고, 다윗 왕국 시대의 영광을 재현할 자. 그가 바로 그들이 기대하는 ‘메시아 상(像)’이다. 본문에서 예수님을 환대하고 찬양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그 ‘메시아 관(觀)’을 신봉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예수께서 몇 번이고 진지하게 가르치신 고난과 죽음에 관한 말씀은, 정작 한 귀로 흘려듣거나 꺼려서 귀를 닫아버렸을 뿐이고, 그저 예루살렘에서 왕위에 오르실 예수님의 덕이나 볼 생각으로 가득했을 따름이다. 즉, 예수께서 당신의 고난과 죽음에 관해 말씀하신 내용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누가 더 위대하고 괜찮은 사람인지 다툰 적도 있었고(막 9:34), 왕위에 오르실 때 더 좋은 자리를 내주십사 청탁하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막 10:37). 그런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예수님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했을 리가 없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을 “민족의 해방자. 강력한 군주”로 여겨 환대했던 백성과 다를 바 없이, 소풍 가는 아이들처럼 부푼 가슴을 안고 예루살렘으로 향했을 뿐이다. 따라서 대대적인 환영인파를 목격한 제자들은, 머잖아 예수님 곁에서 한 자리 차지할 생각에 의기양양했을 것이다. 다시금 정리하자. 제자들과 유대 백성이 생각하는 구원은 무엇인가? 유대 민족의 해방과 독립. 또한, 이스라엘이 로마제국을 제압할 만큼 강력한 나라로 서는 것. 더 나아가 그로 인해 개인의 풍요와 안락을 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메시아”는 그 일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자(使者)인 것이다. 즉, 제자들과 뭇 백성은 예수님을 그런 메시아로 여겨 환대하고 의지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주님을 미워하고 대적했던 종교지도자들과 정치지도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생각했던 것은 아니지만, 자기들의 밥그릇과 권세를 위협할 만한 정적(政敵)으로 간주하고 끊임없이 시비를 걸었으며, 나중에는 ‘대중을 선동한 정치범. 신성모독을 저지른 이단자’로 내몰아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다. 무엇보다 위정자들과 종교인들이 이토록 잔인하고 사악한 일을 오랜 시간에 걸쳐 매우 치밀하게 준비한 것은, 예수님을 단지 유명한 웅변가나 명망 높은 선생 정도로 여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그러니까 예루살렘 입성 당시에 대부분 사람은, 예수님을 유대민족의 오랜 갈망을 이뤄 줄 메시아나 임금으로 여겼던 게 틀림없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무수한 환영 인파와 엄청난 환대에 의기양양했던 제자들은, 그 확신을 긍정적인 반응으로 드러낸 사람들이라면, 종교지도자들과 정치 권력자들은 그 믿음을 부정적인 반응으로 나타낸 자들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의 중심을 꿰뚫어 보는 분이시기에, 유대인들의 어긋난 신앙관과 제자들의 뒤틀어진 욕구를 다 알고 계셨던 게 분명하다. 그래서 설교자가 예수님의 입장이었다면, 둘 중 하나를 선택했을 것이다. 먼저는, 예루살렘 사람들의 잘못된 기대와 제자들의 사사로운 욕망을 애초부터 깨뜨리기 위해, 나귀 새끼를 타고 가기는커녕 복면을 뒤집어쓰고 아무도 모르게 예루살렘을 들어갔거나, 환영하는 인파를 향해 “정신 차려라!” 하고 나무라며 찬물을 끼얹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사람들의 기대와 바람을 이루기 위해 오신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램프의 요정처럼 당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기대에 전혀 부응(副應)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본문을 보라.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향하셨던 예수님은, 이번은 평소와 다르게 특별한 일을 준비하셨다. 즉, 그전과 별반 다르지 않게 제자들과 함께 걸어가셨던 길을, 굳이 어린 나귀를 타고 성에 들어가셨다. 게다가 당신을 “메시아”와 “왕”으로 외치며 환대하는 사람들을 책망하지 않으셨고, 도리어 그들이 “호산나!” 하며 찬양하는 소리를 그냥 내버려 두셨다. 심지어 같은 이야기를 기록한 누가복음에서는, 예수께서 당신을 “주(主)와 왕”으로 찬양하는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표시하는 바리새인들을, 오히려 단호히 꾸짖으며 정면으로 반박하시는 말씀이 등장한다.
(눅 19:40)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무슨 뜻인가? “만일 너희가 나를 찬송하는 사람들의 입을 막는다면, 내가 돌들이라도 찬송하게 만들 것이다.” 하는 의미로써, 당신을 향한 이 백성의 찬송 자체가 잘못된 게 아님을 단언하신 말씀이다. 물론, 제자들과 예루살렘 사람들이 잘못된 시선으로 예수님을 바라본 것은 문제지만, 당신을 “그리스도 메시아와 왕 중의 왕”으로 찬송한 말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제자들과 백성이 잘못된 중심으로 찬송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즉, 예수님은 구원하실 메시아와 진정한 왕으로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의 불손한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오신 분은 아니시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절충점(Trade-off)으로 어린 나귀를 타셨던 것이다.

이쯤에서 어린 나귀를 타고 가신 일이 얼마나 어이없는 퍼포먼스인지 생각해 보라. 왕의 행차(行次)치고는 너무나 격식에 맞지 않고 심지어 볼품도 없다. 거대한 규모의 행렬과 수많은 수행원. 왕과 귀족들을 모신 휘황찬란한 마차와 가마. 오금이 저릴 정도로 위압적인 호위무사들. 감히 쳐다보기도 어려울 만큼 위엄 있게 서 있는 왕의 모습 등등. 그러나 진정한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의 행차에는, 이런 요소들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즉, 화려함과 찬란함과 웅장함과 위압감 등은 아예 보이지도 않고, 왕의 행차는커녕 초등학교 반장의 행차보다도 못한 모습이다. 게다가 올라타고 가신 짐승이 왕자가 탄 백마 정도는 아닐지라도, 최소한 노쇠한 말이라도 타고 가시는 게 낫지 않았을까? 그러나 예수님은 고작 짐을 싣거나 농사짓는 데 주로 사용하는 나귀를 타셨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사람을 태워본 적도 없는 어린 나귀를 타고 왕의 행차를 흉내 내셨다. 이처럼 예수님은 굳이 그 볼품없는 짐승을 골라 왕의 행차에 사용하셨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몸을 특별하게 치장하거나 별다르게 움직이지도 않으셨다. 늘 입고 다니던 대로 입으셨고, 늘 신고 다니던 샌들을 신으셨을 터이며, 늘 따르던 사람들과 함께 늘 하던 모습 그대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셨다. 평상시와 다른 점 하나는, 오로지 어린 나귀를 타고 가신 것밖에 없다. 그러니까 당신 나름대로 “내가 너희의 왕이다!”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의도하신 유일한 장치가, 바로 어린 나귀에 올라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것이다. 다시금 정리해 보자. 예수님은 구원하실 메시아이자 진정한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셨다. 그래서 뭇 백성이 당신을 “메시아와 왕”으로 여겨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고 찬송할 때, 금지하거나 불쾌하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기꺼운 마음으로 들으셨다. 오히려 그들의 찬송을 불쾌하게 여겨 뜯어 말렸던 바리새인들을 꾸짖고 정죄하셨다. 그러나 죄인들의 욕망과 제자들의 야심을 이뤄주는 메시아나 왕은 아니셨기에, 예수님은 돈과 지위와 힘을 과시하는 왕의 행차를 단호히 거절하셨다. 왜냐하면, 당신은 세상의 권력자들처럼 돈과 폭력을 바탕으로 세워진 왕이 아닐뿐더러, 그것으로 사람들을 압제하여 군림하는 세상의 통치자와 전혀 다른 왕이시기 때문이다.

고대로부터 오늘날까지, 개인의 지위와 권력에 따라 이동수단이나 교통수단의 수준은 달라지기 마련 아닌가? 그래서 지위가 높고 돈이 많으며 힘이 셀수록, 더 크고 든든하고 화려하며 값비싼 이동수단을 이용했는데, 심지어 옛날에는 임금이 탄 것과 똑같은 것을 타면 역적(逆賊)으로 내몰릴 정도였다. 요즘은 별다른가? 똑같다. 사람들은 값비싼 승용차를 타는 누군가를 보면 “최소한 저 사람은 뭔가 있겠구나.” 하고 생각하기 일쑤다. 그래서 타고 다니는 차의 가격으로 그 사람의 가치를 매기는 짓도 서슴지 않는다. 영업과 홍보를 담당하는 사람들이 일부러 외제차를 모는 것도 그 이미지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린 나귀를 타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바로 그 “어린 나귀와 별반 다르지 않은 수준의 인물”이란 뜻이 그 모습에 담겼고, 더 나아가 “가난하고 약하고 모자라고 낮은 자들과 함께하시는 분. 그리고 그런 자들의 왕”이란 의미가, 바로 어린 나귀를 타신 예수님의 모습에 담긴 것이다! 즉,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가난한 자들의 왕. 낮고 천한 자들의 임금. 겸손한 자들의 왕”임을 나타내신 셈이다. 이처럼 “섬김을 받으러 온 분이 아니라 죄인들을 섬기려고 오신 왕”임을 증명하신 일이, 바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사건이다! 오래전 스가랴 선지자는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실 메시아에 관해 예언했었고, 예수님은 이 일을 통해 그 예언을 온전히 성취하셨다.
(슥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시온의 딸, 예루살렘의 딸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실 분.” 여성은 고대 사회에서 약자를 대표하는 부류로써, 약하고 천대받는 여성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분이라면, 그분이야말로 모든 사람을 구원할 만한 메시아임이 분명하다. 너무 높은 곳에 있느라 오르지 못할 나무처럼 서 있는 세상의 왕들. 거대한 힘으로 윽박지르느라 감히 범접할 수조차 없는 제국의 군주들과는 전혀 다른 왕. 겸손의 왕으로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 분. 그래서 누구든지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고 어떤 사람이든 만날 수 있는 왕. 낮고 천한 자들의 눈높이에 맞추시려고 기꺼이 자신의 몸을 낮추시는 분. 무엇보다 약한 자들과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서기 위해, 저 스스로 약하고 가난한 모습으로 오신 분. 그분이 바로 우리 예수님이시다.

설교를 마무리하자. 그렇다면 어린 나귀를 타신 겸손의 왕을 따르는 사람은 누구인가? 누가 어린 나귀를 타고 행차하신 왕의 행렬에 참여하는 사람인가? 우리는 그 힌트를 다시금 바디매오의 사례에서 찾을 수 있다. 무엇보다 마가복음이 바디매오의 이야기를 예루살렘 입성 직전에 배치한 의도가 여기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막 10: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그가 예수를 따르니라.” 하고 기록된 말씀을 보면, 바디매오도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길에 동행했을 가능성이 크다. 거지이자 시각장애인이었던 바디매오처럼 작고 가난하고 약하고 비천한 자들이, 바로 어린 나귀를 타고 들어가신 겸손의 왕에게 가장 걸맞은 백성이다. 즉, 가련하고 애통하고 굶주리며 연약한 죄인임을 알고 자신을 낮춘 자들. 그들이야말로 나귀를 타신 왕이 다스리는 나라에 딱 어울리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돈과 힘을 자랑하며 저 잘난 맛에 사는 사람. 천박한 우월감에 사로잡혀 목에 깁스(Gips)한 사람. 그들은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 예수님을 환대할 리가 없고, 예수님의 섬김을 통해 얻는 생명과 구원에 관해서도 관심조차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가난과 약함으로 마냥 낙심하지 말자. 왜냐하면, 그때가 도리어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 왕을 따르기에 가장 적합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겸손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겸손히 의지하고 섬김으로써, 그 은혜 안에 누리는 생명과 능력으로 충만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마가복음 연속설교(44) - 나귀를 탄 왕과 이상한 행차(行次) / 한결교회 주중설교 최승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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