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8/2026
2026년 8월 23일 한결교회 주일예배
창세기 22:1~14
하나님을 경외하는 아브라함(1)
성경의 여러 이야기 중 얼른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물론이고, 자칫하면 하나님과 믿음의 사람에 대해 오해하기 쉬운 이야기가 바로 본문의 사건이다. 왜냐하면, 아버지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 올라 제물처럼 바치는 모양새가, 사람을 산채로 제물로 바쳐 신의 진노를 풀거나 복을 얻으려는 의식인 ‘인신공양(人身供養)’과 매우 흡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문명화된 사회에서는 그런 의식 자체를 법으로 엄격하게 규제하여 허용하지 않을뿐더러, 더군다나 부모가 제 자식을 해코지하거나 살해하는 짓은 감히 상상하기도 힘들 만큼 부도덕하고 잔인한 짓거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고대문헌 정도로 취급하는 성경은 ‘인신제사. 혹은, 인신공양’을 권장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구약의 율법은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짓을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범죄’로 규정하여 단호히 금지하고, 더불어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그런 행위는 나와 상관이 없고, 도리어 나는 그런 짓을 혐오한다.” 하고 분명히 선을 그으셨다. 그에 관한 내용을 율법과 예언에서 한 가지씩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레 18:21) 너는 결단코 자녀를 몰렉에게 주어 불로 통과하게 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렘 19:5) 또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산당을 건축하고 자기 아들들을 바알에게 번제로 불살라 드렸나니 이는 내가 명령하거나 말하거나 내 마음에 생각지도 아니한 바니라
물론, 고대 시대의 종교적 관습에 익숙하고 그것을 신봉했던 이스라엘 백성 중에도, 그 추악하고 끔찍한 ‘인신공양’의 관습을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답시고 감행한 적이 있었는데, 사사기에 등장하는 사사(士師) 입다가 잘못된 맹세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딸을 제물로 바치는 짓을 저질렀었다(삿 11:39).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일도 아니고 모세의 율법이 명백하게 금지한 일인데도, 입다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섣불리 ‘인신공양’의 맹세를 남발했고, 심지어 그 끔찍한 맹세를 실제로 실행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오늘날도 비슷하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전쟁과 살인과 폭력과 불법도 서슴지 않는 오늘날 일부 개신교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딸을 잡아 죽였던 입다와 다른 게 하나도 없을뿐더러, 실상 그들은 ‘알라 신’의 이름으로 테러를 일삼는 과격파 회교도과 똑 닮은 이란성 쌍둥이에 불과하다. 그래서 창세기 22장의 이야기는 더더욱 꺼림칙스러울 따름이다. 당연하다. 아브라함이 일백 세에 기적을 통해 얻은 아들이 아닌가?
그런데 갑작스레 “(창 22:2. 표준새번역)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에게 일러주는 산에서 그를 번제물로 바쳐라.” 하는 명령을 그 누가 순순히 따를 수 있겠는가? 게다가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을 위해 사람을 제물로 바친 짓거리와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이런 종류이 이야기가, 아브라함에 관한 이야기 이전에는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을뿐더러, 하나님은 사람을 착취하거나 인생으로 장난치시는 분이 아니기에, 본문에 기록된 하나님의 명령은 더더욱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뿐만이 아니다. 본문의 주인공인 아브라함은 어떠하겠는가? 또한, 자식을 위해 목숨도 내놓을 수 있는 게 평범한 부모의 마음일 텐데, 이 명령은 기본적인 부모의 본성마저도 거스르지 않는가?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종교에 미쳐 아들을 제물로 바친 끔찍한 사건”으로 흘러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셨고, 더불어 이것이 애초부터 “아브라함을 시험하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된 일임을 분명히 피력하셨다. 즉,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게 이 명령의 목표와 목적이 아니었다. 오히려 아브라함이 당신을 얼마만큼 신뢰하고 사랑했을지 가늠하고 확인하기 위한, 그야말로 거대한 테스트(test)이자 혹독한 트레이닝(training)이었던 셈이다. 이쯤에서 ‘시험’이 무슨 의미인지 생각해 보라. 국어사전은 “시험(試驗)”을 “재능·실력·지식 따위의 수준이나 정도를 일정한 절차에 따라 알아봄.”으로 정의했는데, 대개 시험은 두 가지 목적과 효과를 지닌 거로 볼 수 있다. 즉, 시험은 피시험자의 수준과 실력을 가늠하고 판단하는 것이 일차적인 목표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피시험자의 성장과 성숙을 위해 시행하는 것이다. 본문의 시험도 마찬가지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어떻게 신뢰하고 얼마나 사랑하는지. 또한, 그 믿음의 수준과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아브라함이 이 사건을 통해 자신의 믿음을 가늠해봄과 동시에, 그의 믿음을 단련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 기획하신 일이었다. 그래서 성경은 독자들의 오해를 차단하기 위해 1절 서두부터 “이 사건은 일종의 ‘시험’이다.” 하는 전제를 깔았고, 도리어 아브라함과 이삭을 아끼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더욱 부각되는 결론으로 마무리된다. 1절과 12절을 보라.
(창 22: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창 22:12)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그러므로 본문에 기록된 하나님의 시험은, 아브라함이 자신의 믿음과 그 내면의 상태를 가늠해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함과 동시에, 성경의 독자들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에 관한 구체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은 이 사건을 통해 어떤 양상(樣相)으로 나타나고 증명됐는가?
첫째,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 – 말씀에 대한 순종과 충성으로 증명됨
이 이야기의 핵심 중 하나는 이것이다. “아브라함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에도 기어코 순종했다.” 이 부분을 유념하라. 아무 생각 없이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광신적인 행태는 제외할지라도, 믿음의 여부와 그 수준을 판별하는 근거 중 하나는 “말씀에 대한 순종”이다. 그리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로 믿음을 판가름하기는 쉽지 않지만, 본문과 같은 명령은 얼른 이해하기도 힘들고 순종하기는 더더욱 어려운 까닭에, 변별력을 높이기에는 이만큼 적절한 게 없을 정도다. 이쯤에서 순종에 관한 내용을 성경에서 떠올려 보라. 홍해를 향해 지팡이를 내미는 일. 성막을 세우고 법궤를 매는 일. 만나와 메추라기로 일용한 양식을 삼는 일 등등. 이 정도의 명령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만, 아들의 생사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본문의 명령은 “어렵다.” 하는 말조차도 시시하게 여겨질 정도다. 그러나 예수께서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오.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 5:46).” 하신 가르침처럼, 복종과 순종의 가치는 실천하기가 어려울수록 빛을 발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순종하기가 어려운 명령인데도 기어코 실천하고 따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크게 두 가지다. 명령을 내린 당사자를 지극히 사랑하든지 혹은, 그를 너무나 두려워하든지. 둘 중 하나거나 둘 다 포함할 때 그런 순종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실천하기가 쉽지 않은 일을 순종함으로써 증명되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인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은 그분을 향한 사랑과 두려움을 다 동반하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함으로써 믿는 게 아니라, 믿음으로 순종한 뒤에 이해하는 원리”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즉, 이해하여 순종하는 게 아니라, 순종을 통해 이해하는 경우에 해당하는데, 이런 종류의 순종도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사랑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본문의 아브라함이 그러했다. 아브라함이 겪었을 치열한 갈등과 속앓이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이 명령에 쉽게 순종했을 거로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테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이 명령에도 아브라함은 끝내 순종했는데, 여호와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사랑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본문은 또 다른 국면에서 순종한 아브라함의 모습도 기록했는데, 이미 순종하기로 마음먹고 모리아 산꼭대기에서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했더니,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급히 중단하도록 명령하시는 게 아닌가(10~11절). 사흘 내내 고민하고 갈등한 끝에 슬픔과 분노와 실망을 초월하여 아들을 향해 칼을 들었더니, 갑자기 뜯어말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아브라함은 어쩌면 ‘장난치시는가?’ 하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이 명령조차도 순종하여 기꺼이 칼을 내려놓기에 이른다. 그러므로 기억하라. 때때로 자기만의 확고한 신념과 철학. 또는, 일평생 지킨 철칙조차도 내려놓거나 포기할 줄 아는 것이 참된 순종이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사건이 성전 건축을 위해 매진했던 다윗의 이야기에도 고스란히 재연된다. 다윗은 하나님을 더더욱 극진히 모시고 싶은 마음에 성전 건축을 계획했고, 나단 선지자도 그의 선한 중심에 맞장구를 치며 무작정 동조했지만, 정작 하나님께서는 “성전 건축은 다윗의 아들에게 맡기겠다.” 하고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 훗날 이에 대해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회고하며 남긴 말을 보라.
(대하 6:8~9) 여호와께서 내 아버지 다윗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으니 이 마음이 네게 있는 것이 좋도다 그러나 너는 그 성전을 건축하지 못할 것이요 네 허리에서 나올 네 아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리라 하시더니
“너는 성전을 건축하지 마라.” 하신 말씀을 전해들은 다윗의 심정을 헤아려 보라. 우리가 그 입장이라면 “하나님, 당신을 위한 저의 선한 의도와 지극한 정성을 무시하십니까?” 하고 대들었을 것 같다. 아브라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기껏 제 심장을 도려내는 것 같은 희생을 감수하고, 끝내 모리아 산에 올라 아들을 향해 칼을 들었더니, 천신만고 끝에 들어 올린 칼을 이번에는 “얼른 거둬라!” 하고 뜯어 말리시는 게 아닌가?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명령마저도 순종했고, 성전 건축을 작정했던 다윗도 마찬가지였다. 기억하라. 성경의 가르침은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관을 담고 있지만, 얼른 이해하거나 납득하기 어려운 교훈도 적잖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용감히 순종했던 신자들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에 따라 선택하거나 움직였던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그분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을 철저히 사모하는 믿음이 있었기에, 당장 헤아리기가 어렵고 심지어 손해와 희생이 불가피할지라도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계명에 대한 순종”을 따로 분리하지 않는다.
(신 8:6)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고, 그 길을 따라가는 것.” 성경은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방법이다.” 하고 가르친다. 말씀 순종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의 특징이다. 다시금 생각해 보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해하기가 어렵고 도저히 따르기 힘든 명령이었지만, 그런데도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칼을 집어 들었고, 더불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칼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고, 그 믿음은 말씀의 명령에 대한 순종으로 분명히 증명됐다. 그뿐만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은 믿음의 또 다른 얼굴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둘째,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 – 하나님을 향한 만족과 기쁨으로 증명됨
아브라함이 백세에 낳은 금쪽같은 아들마저 하나님께 내어드렸던 이유는 무엇인가? 아무리 제 목숨만큼이나 소중한 자식새끼이고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큰 기쁨을 안겨줬을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의 목숨보다 더 귀한 분이었기 때문이다. 즉, 아브라함은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아들 이삭과 내 목숨보다 더 귀한 분이고, 내 전부와 전체를 다 드려도 그분 앞에는 부족할 뿐입니다.” 하고 고백한 것이다. 물론, 그가 아들 이삭을 무가치하게 여긴 거로 생각하지 마라. 다만, 아브라함은 너무나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아들일지라도 “하나님만이 저의 전부이자 모든 것이 되십니다.” 하는 믿음으로 모리아 산을 향했던 게 틀림없다. 다시 말해, 모리아 산에 올라가 이삭을 바칠 뻔한 사건은, 아브라함이 무엇을 가장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인지 분명하게 보여준다. 또한, 이 사건은 “하나님이 없으면 모든 것을 가졌어도 무의미하고, 모든 것을 잃었어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그것으로 충분하고 만족합니다.” 하는 믿음을, 한 편의 드라마처럼 생생하면서도 역동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아브라함과 욥처럼 극단적인 경우는 아닐지언정, 신실한 신자들은 다른 어떤 것보다 하나님과 그 은혜를 가장 소중히 여겼을뿐더러, 하나님을 따르고 섬기기 위해 자신의 소유는 물론이고 자기 자신까지 기꺼이 희생하는 공통점이 있다. 엘가나의 아내 한나는 아들을 출산하는 게 일생일대의 목표였지만, 기도의 응답으로 얻은 네 살배기 아들 사무엘을 서원대로 엘리 제사장에게 떠나보냈다. 또한, 어부였던 베드로와 안드레와 요한과 야고보는 잡은 물고기와 배를 몽땅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으며, 모세는 평생 꿈꾸던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고도 주의 명령에 따라 모압 땅의 느보 산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자신의 전 재산과도 같은 두 렙돈을 성전에 바친 여인과 값비싼 항유를 한꺼번에 부어드린 여인 등등.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가장 소중한 분으로 생각했던 까닭에, 소유한 재산이나 명예는 물론이고 평생 꿈꾸던 소망과 목숨 걸고 신념마저 기꺼이 내려놓을 수 있었다. 거기서 더 나아가 그들은 하나님을 가장 큰 기쁨과 만족의 대상으로 따랐던 까닭에, 세상이 베푸는 기쁨과 만족에 굳이 연연하지 않을 수 있었다. 기억하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깊어지고 짙어질수록, 그분에 대한 기쁨과 만족도 깊어지고 진해지기 마련이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은 그분을 향한 기쁨과 만족으로 나타나고 증명되는 것이, 영적인 원리이자 불변하는 진리다.
(시 34:9)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이것은 그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만 고백할 수 있는 말이다.
이 부분을 명심하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크고 깊게. 또한, 힘 있게” 내면에 자리매김한 사람은, 하나님의 임재와 그 은혜로 충분함과 만족함을 느낀다. 이해하기가 어려우면, 이렇게 생각해 보라. 수백수천 명의 사람이 중요한 게 아니다. 나를 진심으로 아껴주고 사랑하는 한 사람 때문에 기쁨과 만족과 평안을 누리는 것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은 그와 같은 영적 효력을 나타낸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소유한 신자는 하나님과 그 은혜만으로 충족감을 누릴뿐더러, 실제로 하나님은 우리가 만족하는 다른 모든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충분한 은혜와 찬란한 영광’을 지니신다.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을 처음 부르셨던 하나님은, 그가 갈 바를 알지 못하던 그때부터 말씀으로 인도하시고 애굽에서 복을 베푸셨으며, 전쟁에서 승리하고 약속대로 아들을 낳게 하신 등의 모든 과정을 통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자라도록 도우셨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게 아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를 감당하지 못할 시험의 불구덩이 속에 집어넣어 괴롭히는 분이 아니시다(고전 10:13). 물론, 본문의 시험이 손쉽게 지나갈 정도로 가벼운 시험은 아니었지만, 그 시험을 극복할 만큼의 믿음과 실력이 그에게 있음을 이미 아셨기에, 그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서 시험하신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말씀에 대한 순종과 충성”은 물론이고, 하나님을 “가장 큰 만족과 기쁨”으로 고백하며 이 시험을 통과했다. 성경이 다윗을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행 13:22)”으로 칭찬한 이유 중 하나는 이것이다.
(시 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목숨만큼이나 소중한 아들이지만, 하나님은 그 아들보다 더 소중한 분이셨기에 그는 자신의 아들마저 드릴 수 있었고, 그것은 아브라함 자신의 생명을 바친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자식을 잃는 일은 부모에게는 제 목숨을 끊는 일과 진배없기 때문이다. 설교자가 그 심정을 직접 체험한 당사자이므로 믿어주기를 바란다. 어쨌든, 타락한 죄인의 욕심은 끝이 없는 탓에 밑바닥을 알 수 없는 공허한 마음을 온전히 채울 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사람보다 세상의 부귀영화를 실컷 누렸던 솔로몬조차도 이렇게 고백했다.
(전 5:10)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세상에서 제일 쓸 만하고 가치 있는 게 돈으로써, 전능하신 하나님과 견줄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돈 아닌가? 그러나 “인간의 공허한 마음은 돈으로 채울 수 없다.” 하는 솔로몬의 고백은, 뱃속 편한 작자의 허튼 소리가 아니라 분명한 진실임을 명심하라.
설교를 마무리하자. 성경은 “인간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참된 만족과 기쁨을 얻는다.” 하고 가르치며, 신실한 신자들은 그 은혜와 영적 원리를 직접 체험했던 사람들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할 수 있었다.
(고후 3:5)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진정한 만족과 기쁨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그래서 하나님만이 인간의 진정한 만족과 기쁨이 되신다. 무엇보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장 기뻐하고 그 은혜로 충분함을 누릴 때, 하나님은 심히 기뻐하시고 가장 크게 영광을 받으신다. 당장 이해하기 어려운 명령이었으나 순종하여 모리아 산에 올랐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이었으나 칼을 들었던 아브라함.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모습이다. 또한, 하나님은 이 이야기를 접하는 사람들이 그 믿음으로 서 있기를 바라셨기에, 당신이 사랑하고 신뢰하는 아브라함에게 이 어려운 시험을 감당하게끔 사명을 맡기셨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을 경외한다.” 하는 말만 내뱉지 마라. 하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순종하라. 또한, 가장 큰 기쁨과 만족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라. 그리고 아직 그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거나 그 은혜를 맛본 적이 없다면,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처럼 “겸손히, 그리고 간절히” 그 은혜를 간구하라(막 9:24). 그러면 얼마든지, 그리고 누구든지 그 은혜를 맛보게 될 줄로 믿는다. 그 믿음이 은혜 안에서 우리 모두에게 자리매김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영상 타임라인]00:00 - 시작 / 성경봉독03:08 - 서론(1)06:56 - 서론(2)11:18 - 본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