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1/2013
작성자: 황희상 / 푸른아카데미 교사
1.21. 미팅하우스 개혁주의 세미나 발표내용 요약입니다. 세미나 후 반성회에서 내용 정리를 제가 하는 것이 좋겠다는 여론에 따라, 제가 정리해서 올립니다. 엇나간 포인트나 부족한 부분은 전적으로 제 잘못입니다. ^^
1강. 김진국 목사 (네덜란드 아펠도른 교회사 교회법)
"웨스트민스터 총회와 스코틀랜드 총대(길레스피)의 장로교 교회정치와 직분론"
김진국 목사는 중세후기 카톨릭이 오염시킨 직분론이 루터 이후 비텐베르그와 제네바의 개혁을 거쳐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이르기까지 개혁되어 온 역사를 짚어보며, 그 과정에서 주요 역할을 했던 1~4세대 개혁자들에 대해 소개했다.
특히 웨스트민스터 당시의 직분론을 언급하기 위해서는 16, 17세기의 신학자들과 그들의 자료에 대한 선이해가 필수적이어야 함을 아주 강조했다.
이어서, 주로 조지 길레스피의 개혁교회에 대한 이해를 문헌과 저서들을 통해 살펴본 결과를 소개하되, 그가 폭넓게 인용했던 장르를 넘어서는 다양한 자료에 대해 정직한 각주들과 함께 소개하였다. (교리서, 신학 단행본들, 주석서들, 신앙고백서, 교회규정집, 치리서, 요리문답, 설교들, 교부들의 글, 다양한 성경역본 등등)
이러한 풍성한 연구들이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주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시각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다.
계속해서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직분론적 공통 인식이 어떠하였는지를 발표자의 직관적 이해에 따라 소개했는데, 부정적인 면(5개 항)과 긍정적인 면(7개 항)으로 구분하여 청중의 이해를 도왔고, 당시의 주요 논쟁들을 정리하여 소개하고 평가했다. (직분론, 지교회와 노회, 직분자와 회중과의 관계, 교회정치와 회들의 종류, 임직 등)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최종적으로는 웨스트민스터 교회정치와 신앙고백서의 비교를 통해 관점을 정리했다.
(아울러, 발표에서는 가볍게 넘어갔으나 본문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장로교회의 직분자론에 대한 실제 적용에 대한 코멘트는, 그 내용이 매우 유익했으나 발표자의 의중을 존중하여 이 글에서 정리하지는 않는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를 제대로 그리고 풍성히 이해하기 위해 16, 17세기 중반까지의 개혁된 교회사적 중요 사항을 이해해야 함을 다시금 강조하고 그 당시의 문서들에 대한 연구가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이를 위해 공통의 연구와 공유를 위한 용어 통일의 필요성과, 그에 따른 신학사전이나 용어사전의 필요성도 제안하였다.
팩트에 근거한 충실한 자료와 이를 발표하는 과정에서 조화와 통일과 안정을 추구하는 발표자의 세심한 배려가 돋보이는 발표였다.
2. 이남규 교수 (네벌란드 아펠도른 / 서울성경신학대학원 조직신학)
"카스파르 올레비아누스와 개혁 교회법의 정착"
올레비아누스는 제네바에서 칼빈에게 배우고 고향 트리어에서 개혁작업을 하다가, 핍박을 받아 하이델베르크로 옮겨서 그곳에서의 개혁작업에 역할을 하였으나, 루터주의가 세력을 잡았을 때 다시 쫓겨나 헤르보른에서 죽기까지 봉사한 인물이다.
이남규 교수는 이러한 올레비아누스의 인생을 크게 둘로 나누어, 첫째는 팔츠에서의 역할을, 둘째는 훗날 헤르보른에서의 사역을 집중 조명하였다.
먼저 팔츠에서는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의 개혁작업에 파트너로 부름을 받아 우르시누스와 함께 사역하되, 우르시누스는 주로 요리문답 작성에, 올레비아누스는 주로 교회법 작성에 힘을 썼음을 밝히면서, 특히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과 교회법이 함께 간다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교리의 가르침이 교회법의 실행을 통해 교회 안에서 실천되어야 한다는 것이 개혁자들의 의도였음을 주장했다.
그리고 올레비아누스에게 칼빈과 제네바 교회법이 끼친 영향을 풍부한 자료로 설명하였고, 그러면서 제네바 교회법보다 오히려 더욱 개혁된 (ex. 성찬의 횟수) 사례도 소개하였다.
한편 제네바 교회법에서 영향을 받은 것 중에서, 오늘날 심방과는 달리, 권징(훈육: 긍정적 의미)의 개념이 담긴 "심사"의 시행은 우리에게 시사점을 준다고 강조했다.
또한 권징 논쟁에 있어서, 치리장로의 역할을 강조하고, 정교분리라는 용어가 권징 때문에 나온 것임을 밝히면서, 이것이 교회의회(Kirchenrat: -rat는 관청을 의미)의 주요 역할이었다고 소개하고, 이어서 에라스투스와의 논쟁을 소개했다.
10여분을 쉬고 두 번째 파트에서는, 1586년 헤르보른 총회에서의 올레비아누스의 역할을 소개했는데, 이 부분은 그동안 우리가 접하기 힘들었던 내용이라 생각한다.
프리드리히 3세의 죽음 이후 올레비아누스는 말하고 가르치고 쓰는 일을 금지당하여, 베를레부르크로 피하게 되는데, 얼마 후 나사우의 요한 6세와 비트겐슈타인의 루드비히가 의기투합하여 자기들의 지역에 칼빈주의를 뿌리내리고자 하면서 올레비아누스를 초청하게 되는 바, 그 때의 핵심 사업은 헤르보른에 학교(호헤 슐레)를 세우는 것이었고, 결과적으로 이 학교에서의 사역과 출판사업 등은 당대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소개했다.
이곳에서의 올레비아누스의 큰 사역 중 하나는 헤르보른의 총회 참석인데, 이 때의 교회법 개혁은 오고 오는 독일의 다른 교회법에 영향을 기쳤고 (발표문에서는 강조되지 않았지만) 훗날 도르트 총회로 이어지고 계속해서 웨스트민스터 총회로 이어짐으로써 우리에게 중요하고 의미깊은 사역이 된다.
총회 때 논의/결정된 교회 치리에 대한 법규들의 상세한 내용은 이 글에서는 정리하지 않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