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튼한인교회 - Moncton Korean Church

몽튼한인교회 - Moncton Korean Church 하나님께서 2006년 3월 12일 몽튼에 세운 최초의 한인 교회입니다.
오후 4시

04/12/2024

2024.4.12
로마서 14:13-16
본질과 비 본질 사이에서

13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
14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노니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15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16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14절의 ‘스스로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다’라는 이 고백이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들의 모습을 잠시 돌아보게 합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초대하며 그에게 보여주셨던 하나님의 환상을 다시 한번 생각나게 합니다. 베드로의 눈에 이방인의 집에 가는 것도 그리고 그 집에 초대를 받아 함께 식사를 하는 것도 모두가 속된 것으로 여겨졌으나, 하나님께서 속되지 않은 것을 속되게 한 것에 대해서 환상을 통해 가르침을 주었던 그 상황이 생각이 납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들은 우리 스스로가 자신이 자라온 신앙적인 배경이나 배움과 가르침에 의해서, 많은 부분들을 속되다고 결정하며 틀린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로마교회의 교인들이 서로의 다름에 대해서 비판하는 주제는, 사실 음식에 대한 문제였던 것이 컸던 것으로 보여집니다(15절 전반 절). 로마의 황제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느냐 마느냐,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 교제를 하느냐 마느냐, 이러한 주제들은 주님의 교회가 포커스를 두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길을 걸어가는데 아주 중요한 문제는 사실 아님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할 수도 없는 주제입니다.

구원받은 신자와 교회에게 있어서 본질의 삶과 비 본질의 삶을 구분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들의 길의 모양과 길의 방향과 목적을 정해주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으로서 비본질적인(세상)것을 통해 본질(복음)을 얻기 원하기 때문에, 사실 우리는 때론 세상의 타락속에도 존재하고 어두움과 어지러움을 그리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속에 계시며 세상속에 있는 비 본질의 삶을 본질의 삶으로 이끄셨듯이, 우리는 그렇게 빛을 들고 세상속에 존재하는 교회임이 분명해 보입니다.

사실 이 문제에 대한 정답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오늘 중요한 사실 하나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본질을 향하는 가운데 비본질적인 상황속에서 피차에 거리낌을 두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것입니다(13,15절). 비판하는 그것에 주목하기보다도, 우리들의 의도가 아무리 좋고 아름답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인해 형제들이 근심하게 되는 그곳에 주목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하다고 여겼던 그 말과 행함으로 인해 우리들의 형제가 만약 근심하게 된다면, 우리는 이것을 넒은 의미에서 사랑이라고 확정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니라는 것입니다(15절). 사도 바울은 그러한 모습은 사랑으로 행하지 않는 것임을 결정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아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는 우리들이 행하는 모든 말들과 행함들은, 결코 모든 부분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구원받았음이 그것을 보증해주지는 않습니다. 그리스도안의 형제들을 위하는 것이라고 했지만 그것으로 형제가 근심하게 된다면, 그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사 우리들의 의도가 선한 것이라 할지라도, 비방을 받지 않도록 지혜롭게 상황 앞에 서야 함을 사도 바울은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쉬운 것 같아 보이면서도 어려운 것은, 위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옆으로는 형제를 바라보며 더 멀리는 이방인들을 바라보며 길을 걸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늘의 지혜를 구하는 것이 우선이며, 또한 함께 걸어가야 할 이들 앞에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을 두지 않도록 주의하며 걷는 것도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모든 민족이 구원에 이르도록 때론 세상속에 존재해야 하기에, 오늘의 묵상은 정확한 정답을 제공하기보다는 여전히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태도를 말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도 성령으로 충만하세요! 그리고 승리하세요!

기도문)
주님.감사합니다.
혹 매일의 감사의 마음이 없는 형식으로 존재하려는 우리들의 모습이 있다면 .다시 감사함을 회복하게 하소서.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길을 걷어가게 하소서. 주님께 더 가까이 우리들을 이끄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찬양: 주님 곁으로 날 이끄소서

04/11/2024

2024.4.11
로마서 14:10-12
형제를 비판하는 자리는

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11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12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사도 바울은 로마서 14장을 통해 비판의 시선을 가지고 형제를 비판하는 신자들을 향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1절부터 23절까지의 내용을 가만히 묵상하고 살펴보면, 우리는 사도 바울이 교회안에서 그리고 교회밖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신자들의 입술이 비판에 얼마나 적합하고 익숙하고 있는지를 설명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비난'은 남을 평가하고 나쁘게 바라보는 것이고, '비판'은 옳고 그름을 자신이 판단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사실 비판이라는 말 자체는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멀어져야만 하는 그런 단어만은 아닌 것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비판이 목적이 아니고 소망을 향하는 과정이 될 때, 때론 잃어버린 의미를 다시 재발견하게 되어지는 힘을 지니고 있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비판은 비난으로 이어지고, 그 비난은 결국 사람을 살리는 하나님의 목적 보다는, 죽이는 것에 목적이 있는 어두움에 속해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 우리가 형제를 비판한다는 것은, 곧 형제를 업신여기는 것임을 결정하고 있습니다(10절 전반 절). 나보다 남을 더 낮게 여기는 사람이 비판할 수 있고, 비판에 대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기에 비판은 분명 상대방을 높이는 사람이 아닌 낮추는 사람만이 가능합니다. 여전히 내가 왕의 자리에 있다는 것이 비로소 증명되는 자리가 바로 비판의 자리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이유던지 비판하는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임을 경고하고 있음을 우리는 바라보게 됩니다(10절 후반 절).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게 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양과 염소를 구분하신다고 하셨습니다(마태복음 25:31-46절). 그런데 그 심판대에 서게 되는 이유가 엄청나게 악한 행위를 해서가 아니라 단지 남을 비판하는 업신여김으로 인해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한다면, 도대체 형제를 비판하는 것 그 자체가 얼마나 큰 죄인지를 우리는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11-12절은 사도 바울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지 완전히 이해가 되지 않아 새 번역 버전을 보니 좀 더 쉽게 설명합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하신다. 내가 살아 있으니, 모든 무릎이 내 앞에 꿇을 것이요, 모든 입이 나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다."그러므로 우리는 각각 자기 일을 하나님께 사실대로 아뢰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의 입술의 기능은 찬양의 기능이지, 비판의 기능을 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후에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서게 될 때가 반드시 있는데, 그때 우리는 우리의 입술이 바른 기능을 했는지를 반드시 하나님 앞에 고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정말 우리는 그가 누구이던지, 모두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왜냐하면 어느새 우리는 신랄하게 우리들의 입술로 누군가를 비판하는데 익숙해져 있으며, 그것 조차도 스스로 보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다시 나의 입술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공간속으로 들어가기를 선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기자도 우리의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간절하게 선포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오늘 이 시간은 우리가 하나를 만들어가기 위해 하나님 찬양하는 것에 나의 입술을 드리고 있는지 묵상해보면 좋겠습니다. 혹 우리의 입술이 어느새 재기능하는 것을 망각하여 남을 비판하므로 나를 방어하고, 남을 업신여기므로 나를 높이려고 하지는 않는지 오늘 다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섭니다.

오늘도 성령으로 충만하세요! 그리고 승리하세요!

기도문)
주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이 하루를 허락하심을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라고 주신 입술이 어느새 재기능에서 많이 벗어나고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저 나를 방어하고, 나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 비판하고 정죄하며, 남을 낮추는 어두운 곳에 쓰이고 있는 것을 바라봅니다. 고요하게 주의 음성 앞에 주님이 말하시는 말을 따라, 주님이 기뻐하시는 입술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찬양: 주의 말씀 앞에선

04/10/2024

2024.4.10
로마서 14:5-9
주를 위하여 사는 삶

5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6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하나님을 알기 전 우리는, 왜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고 있는지에 대한 분명한 목적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 우리는, 왜 우리가 그토록 구원이라는 것을 받아야만 하는지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습니다. 또한 성령님을 알기 전 우리는, 왜 그토록 우리의 마음이 정하고 원하는 대로만 길을 걸어가고 있는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을 입으로 시인하며 믿어지게 되면서 우리는, 이제는 무지하여 모르는 존재가 아닌, 아는 존재로 바뀌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해서 내 마음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우리는 내 마음이 정하고 확정된 것을 고집합니다(5절). 조금 다른 것이 있다면 그 마음을 주장하는 것이 예전에는 나의 정욕이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뜻과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제는 주어진 모든 날, 먹고 마시며 살아가는 모든 것들, 때론 먹지 못하고 죽게 되는 모든 것들을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6-8절). 오늘 사도 바울이 고백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제는 내 정욕대로의 삶으로 내 마음을 주장하는 삶이 아닌, 주를 위하는 삶으로 내 마음이 주장되어지는 삶을 사는 진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7절의 고백은 잠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금은 자기를 위하여 살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자기 중심적인 삶에 익숙해진 삶이 현 세대를 대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지금 고백하고 있는 고백은 믿는 자들을 향한 고백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믿는 자들은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주를 위함이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를 위하여 산다는 것’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고백하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주의 것임을 인정하며 주님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그분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걸어가는 삶을 말합니다. 내 자신의 나의 주인이며 그리고 내 삶의 주인이 나라고 생각한다면, 내가 주인이 되고 왕이 되어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내 자신과 내 삶의 통치권이 내가 아닌 그분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나의 생각과 뜻을 묻는 일에 익숙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삶이 그분에 의해 조정되어지고 뜻하여 짐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이 이루시고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길은 우리가 걸어가야 하는 주의 길이 어떤 길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분이 걸으셨던 모든 길목들은 살아 있을 때든지, 죽을 때든지 모두 하나님을 위하는 길이었습니다(9절). 하나님의 구원을 위해 주님은 길을 걸어가셨고 때론 선택하셨으며,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매달려 고난을 받고 죽음을 선택하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생각과 뜻과 결정들이 나에게 머무르지 않고, 오직 주님의 손에 의해 주를 위하는 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주를 위하는 척하며 나를 위하는 삶이 아닌, 정말 주를 위하는 삶이 되기를 소망해봅니다.

오늘도 성령으로 충만하세요! 그리고 승리하세요!

기도문)
주님 감사합니다
주를 위하여 산다고 하면서, 우리들은 주를 방패삼아 우리들의 마음대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주여. 우리들의 생각과 결정과 길에 완전하게 개입 하소서. 그리고 주를 위하는 길인지 기도하며 묻게 하소서. 만약 그것이 주를 위하는 길이라면, 내가 사는 길인지 죽는 길인지를 판단하기보다는 그저 믿음으로 그 길을 걷게 하소서. 그러나 주의 길이 아니라면 내가 사는 것 같아 보이는 길일지라도 멈출 수 있게 하소서. 그런 주를 위하는 삶에 익숙해지는 우리들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찬양: 사나 죽으나

04/09/2024

2024.4.9
로마서 14:1-4
나에겐 당신을 비판할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1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2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3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4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우리 속담 중에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때론 가벼운 상황에서 쓰여지는 별 대수롭지 않은 말 같아 보일수도 있겠지만, 사실 이 속담속에는 인생의 중요한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특별히 원죄를 가지고 있는 인간의 속성, 곧 연약한 인간의 심리가 어떤 것인지를 우리에게 잘 알려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신자로서 우리가 그런 연약한 우리들의 심리를 주의하며,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을 걸어갈 것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갑자기 개구리가 될 수 없는 것은, 올챙이라는 시작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이 둘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사이 시간’은 누구도 부인해서도 안 되는 값지고 소중한 시간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공동체안에서 믿음이 연약한 자를 대하는 이들의 태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그들 앞에 서 있는 자의 자세는 비판의 자세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1절). 우리 중에 말도 잘 하지 못하고 잘 걷지도 못하는 아이를 바라보며 그가 조금 부족하고 잘못된 행동을 한다고 해서, 그 아이의 잘못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오늘 사도 바울이 고백하는 바에 따르면, 그가 아직은 채소만 먹을 수 있는 상태속에 있는 연약한 신자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2절).

모든 공동체가 그렇지만 교회 공동체속에서도 여러 단계의 신앙인들이 존재합니다. 우리가 어린아이와 같든, 혹은 청년이든 어른이든 사실 그것조차도 우리 스스로가 결정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서로가 말 하지 않을 뿐 그 사람의 걷는 발걸음을 통해 희미하게나마 알고 있습니다. 신앙의 단계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은 강한 자가 연약한 자 앞에서 군림하며 자랑하며 더 나은 의로움을 내세우라고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연약한자를 받아야 하는 것이 교회 공동체를 더욱 건강함으로 세우는 원칙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받는다는 것’은 주님의 지체로 우리가 함께 연결되었음을 믿고 세워 나가는 데 힘쓰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먹을 만한 사람’이라는 의미는, 오랜 시간을 통해서 이런 저런 여러가지의 시행착오를 경험하며 여기까지 온 사람입니다. 그 순간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며 지금도 여전히 말씀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자신보다 낮게 여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비판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3절 전반 절). 왜냐하면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곧 그를 교회의 주인 되게 하신 하나님께서 그를 이미 존귀한 자로 받으셨기 때문입니다(3절 후반 절).

같은 공간속에서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떤 사람은 항상 누군가를 비판하고 정죄하고 판단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간혹 그런 경험을 합니다. 그 사람이 언제나 그랬듯이 누군가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가장 낮은 곳으로 그를 끌고 가고 있는데, 정의의 사도 같은 존재가 나타나 그 사람을 변호하는 겁니다. 한 사람은 누군가의 연약함과 부족함만 보는데, 다른 한 사람은 그 사실 자체를 부인하기 보다는 그 너머에 존재하는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그를 바라보는 겁니다. 물론 비판에 최적화된 삶의 습관속에 있는 그 사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그를 나락으로 향하게 만들려 하지만, 저는 정의의 사도를 통해 어느 정도의 충격을 받고 수그러지는 장면들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우리는 그 정의의 사도, 곧 은혜의 사도가 되어 연약한 자를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곁에 존재하는 이들은 그가 어떤 신앙을 가졌던,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주인이라고 이미 결정한 존귀한 사람입니다(4절). 그분이 택하셨고 부르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가 일어서든 넘어지든, 그가 모든 것을 먹든 채소만 먹을 수 있든,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그분의 때에 따라 그를 세워 나가실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런 존귀한 자를 향하는 우리들의 자세는 비판이 아닌, 존귀하게 여겨주며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비판과 정죄를 통해 하나님의 존귀한 지체가 세워지지 못하게 되어지는 실수를 하지 않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도 성령으로 충만하세요! 그리고 승리하세요!

기도문)
주님 감사합니다.
오늘 소망으로 아침을 시작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곁에는 아직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 있어, 하루를 소망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들도 있습니다. 나의 삶에 보여지는 소망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들의 소망이 되어 주시기에 소망을 갖게 되는 단단한 믿음이 우리들의 믿음이 되게 하소서.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나의 시선이 아닌, 주님의 시선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찬양: 하나님께서 당신을 통해

04/08/2024

2024.4.8
로마서 13:11-14
구원의 거울 앞에선 그 모습 그대로 오늘을 살자

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사도 바울이 믿고 있는 구원이라는 것은 점진적인 성격을 가진 것인 동시에, 또한 최종적인 종착지가 있는 구원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신자의 길은 이미 얻은 구원을 향하는 길인 동시에, 아직 도달하지 못한 구원을 향하는 길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아직 얻지 못한 그 구원의 길을 가는 신자의 태도는 어떠한 태도여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먼저 사도 바울은 완전한 구원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11절 전반 절). 신자는 성경을 통해 제시하고 있는 여러 현상들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을 바라보며 그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때론 세월이 흘러가는 가운데, 함께 세월을 맞이하고 있는 자신의 육체를 바라보며 그것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것은 곧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더욱 더 가까워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11절 후반 절)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신자들은, 여전히 밤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로 밤에 속한 삶의 습관에 매여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12절).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공로로 인해 어두움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두움의 일을 입고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여전히 어두움의 갑옷을 입고 어두움속에서 방탕하게 살아갑니다. 술 취한 사람 같은 음란하고 호색하는 삶에 익숙해져 있고, 다투고 시기하는 삶을 그리 경계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발견합니다(13절). 구원을 얻고 구원을 향하는 신자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이기까지 합니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는 것 같아 보이까지 합니다.

왜 이럴까요? 사도 바울은 그 이유를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는 것에 대해 그리 힘쓰지 않는 태도에서 찾고 있습니다(12절 후반 절). 자신이 어떤 옷을 입고 있는지를 망각하며, 어울리지 않는 삶을 살고 있는 것에 대해서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이 사랑하는 아들 요셉에게 입혀주었던 채색 옷, 그 구원의 옷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입혀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옷을 입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고 살아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옷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살아내지 못하는 사람의 삶의 결국은, 육신의 일을 도모하는 삶이라고 사도 바울은 결정하고 있습니다(14절 후반 절). 육신의 일을 행하는 개인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그 일에 함께 동참하자고 도모하며 공동의 악을 형성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것만큼 악한 일이 또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우리 자신일지라도, 언제든지 이런 육신의 일을 도모하는 어두움에 일을 여전히 입고 어두움의 갑옷을 입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 또한 이것이 두렵고 떨리는 일 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어두움에 거할 자신의 모습에 대해 두려워하거나 떠는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입혀 주신 구원의 옷, 곧 빛의 갑옷은 어두움의 일을 벗게 하고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않게 우리들의 걸음을 정지하게 만들어 주는 우리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 옷에 걸 맞는 태도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아침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입혀 주시는 가장 순결하고 아름다운 그 옷을 입고 살아가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성령으로 충만하세요! 그리고 승리하세요!

기도문)
주님 감사합니다.
현재를 살아갈 수 있는 구원의 확신을 주시고, 암울하기만 했던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생명과 구원의 확신을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러나 때론 현실을 살아내느냐,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늘 잊고 살아가는 것이 어느새 익숙해져 버렸습니다. 아침마다 거울 앞에서 흐트러진 옷맵시를 정돈하고, 오늘도 이러한 반듯함으로 살아야지 했던 그 각오와 결심이 무너지는 것이 어느새 일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오늘 다시 구원의 거울 앞에 서서 우리를 바라보며 하루를 시작하려 합니다. 오늘 하루 빛에 거하는 하루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찬양: 내게 주어진 하루를

04/05/2024

2024.4.5
로마서 13:8-10
사랑의 빚을 주고 가신 길에서 함께 걷기

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은, 궁극적으로는 율법을 완성케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율법의 모든 획들을 파하기 위함이 아닌, 그 율법을 완성하는 길에 예수님이 증거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율법의 핵심이 바로 사랑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지금까지 주어진 모든 율법의 핵심입니다(9절). 이것이 기준이 되는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율법이 자연스럽게 완성이 되는 연속된 삶이 지속되어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특별히 ‘이웃 사랑’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베푸는 사랑에 대해서 ‘빚’이라는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음을 이야기합니다(8절 전반 절). 왜냐하면 오늘 사도 바울은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주석은 이 본문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첫째는 성도들이 살아가는데 있어 갚지 않고 남겨두는 빚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둘째는 성도들이 지불해야 하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빚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것은 ‘다 갚음’이 없는 영원한 부채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사랑을 가만히 살펴봅시다. 그분은 누군가에게 갚아야 할 빚을 가지고 있는 채무자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조건 없는 무한한 사랑으로 우리에게 오히려 사랑의 빚을 주는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빚은 시간이 되는 데로 그리고 우리의 조건이 되는 데로 빨리 갚아야 하는 것으로 남겨두지 않으시고, 그저 영원한 부채로 남겨 주신 것입니다.

8절의 후반절에 보면 이런 고백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8절 후반 절). 이 문장의 핵심이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로 보일수도 있겠지만, 진짜 핵심은 ‘사랑하는 자’입니다. 사랑하는 자만이 율법을 이루고, 사랑하는 자만이 누군가에게 사랑의 빛을 기꺼이 지불하고, 다 갚음이 없어서도 되는 영원한 부채로 남겨주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부채를 갚는 분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실 것임은, 그리스도인의 길을 걷는 우리에게는 너무나 자명한 일인 것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안에 갇혀서 율법을 이루는 삶의 행위로 인해, 자신의 의로움을 결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로마교회를 포함한 소아시아와 유럽의 여러 교회들에는 이미 흩어진 유대인들로 인해 그러한 율법주의적인 신앙이 팽배해져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행위는 있는데 사랑이라는 마음의 중심을 잃어버린 신앙의 길을 걷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주님의 사랑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랑의 빚을 내어 주기보다는, 오히려 이웃에게 사랑의 빚을 주는 길을 걷는다고 하면서 실상은 악을 행하는 삶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10절).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사랑의 빚을 잠시 묵상해 보시지는 않으시겠습니까? 자신이 받을 부채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걸으셨던 그분의 사랑의 길을 잠시 묵상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아울러 우리들이 행하시고 있는 사랑에는 정말 이런 예수님의 사랑의 길이 존재하고 있는지 묵상하면서, 다시 주님이 걸어가신 사랑의 빚을 기꺼이 헌신하는 길을 걸어가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도 성령으로 충만하세요! 그리고 승리하세요!

기도문)
주님 감사합니다.
사랑의 빚을 주시며 기꺼이 사랑하는 삶을 선택하신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합니다. 어느새 조건 없는 헌신과 섬김의 모습보다는, 모든 것에 수많은 조건이 예정되어져야 하는 삶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들입니다. 오늘 로마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고백을 통해, 다시 한번 이 땅에서 사랑의 빚으로 헌신하고 섬기기로 결정하고 다짐합니다. 받은 사랑에 은혜를 늘 기억하며 살아가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찬양: 마음의 예배

04/04/2024

2024.3.4
로마서 13:6-7
교회와 국가는 다르지?

6 너희가 조세를 바치는 것도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7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로마에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유대인이든지 헬라인이든지,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가 세금을 내고 있었습니다. 로마 국가가 부과한 일정양의 세금을 내며, 그들은 로마라는 국가공동체속에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로마가 로마의 시민들에게 요구하는 세금은 크게 노예 해방세. 상속세. 관세, 매상세였으며, 속주민들은 속주세, 관세, 매상세가 그들이 납입하는 세금이었습니다. 그러니 적어도 로마안에 있는 이들은 각각의 주어진 자리에서, 국가가 정해 놓은 세금이라는 명목으로 일정금의 적지 않은 금액을 지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이런 세금의 문제를 그리스도인은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말해줍니다. 그도 그럴 것이 로마교회안에는 속주민들인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로마의 시민이기도 한 여러 헬라인들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좋다고 하는 어떤 이들은 이런 생각까지도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힘겹게 번 이 물질을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내는 것은 아깝지 않지만, 도대체 어디로 쓰여 명확하지 않은 국가에 세금에 내는 것이 합당한 것인가? 도대체 이렇게 많은 세금을 걷어가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이며 과연 우리가 낸 것만큼 우리에게 주어지는 혜택은 있기는 한 것일까?

캐나다는 다른 나라들보다도 국가에 내는 세금이 많은 나라가운데 하나입니다. 크게는 연방 정부와 주 정부 세금이 있고, 많게는 수입의 15%까지도 내는 주도 있으니 적지 않은 금액입니다. 그 밖에도 특별히 더 많이 벌수록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하니, 어떤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불합리해 보여지는 국가로 보여지기까지 합니다. 그러니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도 자신이 낸 만큼 과연 혜택들이 주어질지를 믿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들이 취하는 자세는 뻔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합니다. 수입을 줄이거나 그래서 세금 낼 돈을 줄이고, 그것에 대한 이득으로 차라리 삶을 좀더 풍성하게 살거나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거나 구제를 하는 편이 더 나았을 거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이들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던 사도 바울은 세금을 바치는 문제에 대해서 오늘 분명하게 고백합니다. 이것 또한 하나님께서 세우신 국가적 질서이며, 그들(권세자들)은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이 일을 힘쓰는 존재라고 결정합니다(6절). 국가와 교회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공간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질서들은, 권세를 세우신 하나님이 주장하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거짓없는 세금을 내는 것 또한 하나님의 질서를 행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세임을 우리는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주는 것,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는 것 말입니다(7절 전반절).

그래서 하나님은 7절의 후반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세금을 내는 이유가, 닥쳐올 불이익에 대한 두려움이 되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내는 것에 비해서 자신에게 주어지는 혜택의 빈약함에 대한 염려나 불신이 되어서도 더욱 안 되었습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라는 것을 믿고, 질서에 순종하는 의미에서의 두려움과 존경의 마음을 품어야 했던 것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의 도적적이고 윤리적인 부분에 대해서 절대로 간과하지 않습니다. 대충 넘어가 주지 않습니다. 신앙이라는 이름과 도덕과 윤리라는 이 부분이 자연스럽게 같은 길을 가는 이들을 향해 ‘하나님의 사람들’, 곧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으로 부름 받기에 합당함을 강조합니다. 물론 우리는 그래도 여전히 연약하여 자신의 고집스러운 정욕의 길을 향할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오늘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 찔림이 되고 새롭게 펼쳐질 회복된 길이 될 것을 소망해 봅니다.

오늘도 성령으로 충만하세요! 그리고 승리하세요!

기도문)
주님 감사합니다.
주신분도 하나님이시며 거두어 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이며 계획하심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그 믿음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부여되고 있는 모든 세금에 대해서도 묶여 있는 자세가 아닌, 자유한 자세가 되게 하소서.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하기에 자유해지는 이상한 자유함이 아닌, 모든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행함을 이루고 있기에 그것에서 자유한 그리스도인들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찬양: 주 이름 찬양

04/03/2024

2024.4.2
로마서 13:3-5
권세들 앞에 선 그리스도인의 자세 2

3 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4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
5 그러므로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진노 때문에 할 것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할 것이라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권세들 앞에 선 그리스도인의 자세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세상의 권세들을 향해서 ‘다스리는 자’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한 공동체를 다스리는 자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공동체안에서 다스리는 이러한 사람을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을 언급합니다, 하나의 시선은 악의 시선이며 또 하나는 선의 시선입니다(3절). 어떤 사람들을 ‘악’의 개념으로 권세를 바라보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선’의 개념으로 권세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니까 한 공동체속에 존재하고 있는 리더십을 바라보는 관점이 누구나 다를 수 있음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은혜 받은 존재들이라고 한다면, 권세를 두려워하거나 악으로 규정하는 입장보다는 선을 행하며 그에게 칭찬받는 입장에 설 것을 사도 바울은 고백하고 있습니다(3절 후반절). 사도 바울이 로마교회를 향해서 이렇게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어쩌면 그들이 속한 공동체들 속에서 권세자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질서가 명확하게 형성되어가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계속해서 사도 바울은 권세들, 곧 다스리는 자들에 대해서 또 다른 이름으로 명칭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들을 어떠한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할지를 명확하게 알려주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사역자”입니다(4절 전반절). Niv version에서는 ‘God's servant’로 번역하고, 다른 한글버전에서는 ‘하나님의 일꾼’ 또는 ‘심부름꾼’으로 번역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들을 악이라는 이름으로 두려움이라는 이름 앞에 서 있던, 선이라는 이름 앞에 서 있던,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내가 속한 나의 공간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더욱이 사도바울은 다스리는 자들은 칼을 가지고 있음을 부연 설명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선하고 공평한 일들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권한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권세를 가진 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악한 일이 아닌 선한 일을 향해서 이 칼을 사용해야 하는 것이며, 권세 앞에 있는 자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보응하시기에 복종해야 함을 말합니다(4절 중반절). 하나님의 진노하심 때문이 아니라, 우리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양심에 따라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4절 후반절).

사도 바울은 어제에 이어 권세들 앞에 그리스도인이 취해야 할 자세에 대해서 부연 설명하며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오늘의 고백을 묵상하며 살펴본다면, 권세가 주어진 자들의 자리가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자리인지를 새삼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남들보다 더 나은 존재이기 때문에 그 공간에 부름받은 것이 아니라, 그저 하나님의 필요에 따라 무조건적인 그분의 은혜로 우리를 하나님의 일꾼 된 심부름꾼으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곳은 내가 바라보는 눈이 아닌,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눈이 필요한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누군가를 다스리는 자리에 모두 서 있습니다. 가정에서 그리고 교회와 직장에서 또한 삶의 모든 공간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심부름꾼입니다. 말하기를 속히 하라고 하면 하고 더디 하라면 그렇게 하는 것이, 가라고 해야 가는 것이고 서라고 하는 서는 것이 하나님의 아름다운 질서를 이루어가는 시작인 것입니다. 우리들의 이러한 모습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회복되고 완성이 되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도 성령으로 충만하세요! 그리고 승리하세요!

기도문)
주님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도 누군가에게는 권세자로 누군가에게는 권세 앞에 서 있는 자로 우리들은 존재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속한 공간속에 나를 위해 보내주신 사람임을 깨닫게 하소서. 특별히 우리가 누군가를 다스리는 공간에 있을 때 이 자리가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자리인지를 기억하고 주님께 더 가까이 가고 주님의 마음을 소유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찬양: 보소서 주님 선한 것 하나 없습니다.

04/02/2024

2024.4.2
로마서 13:1-2
권세들 앞에 선 그리스도인의 자세 1

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2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로마서 1-11장까지가 기독교 교리의 기본적인 내용인 '이신칭의'(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게 여기신다)에 대한 언급을 했다고 한다면, 12-16장까지의 내용은 그렇게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과연 어떠한 삶을 살게 되는지에 대한 자연스러운 결과론적인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세상속에 주어진 ‘권세’라는 질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권세는 ‘권위’라고도 할 수 있고, 권위를 가지고 있는 세력들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Niv 성경을 보니 ‘authority’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어떠한 제도권안에 있는 지위나 영향력을 가진 주도 세력들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도 세력이 아닌 이들이 이 세력들을 바라볼 때, 사실 '평등이라는 가치'속에서 전혀 평등하지 않다고 여기는 존재들이 어쩌면 권세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통해서 그들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각 사람은 위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1절 전반 절). 그리고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서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1절 후반 절). 그러니까 그 어떤 필요에 따라서 세워진 모든 조직들에게 세워진 권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출발되어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가 도저히 납득될 수 없는 권세 앞에 서 있다고 한다면, 이 고백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그리 쉬워 보이지는 않습니다. 더욱이 권세를 거스리는 것이 하나님의 명을 거스리는 것과 동일시하고 있으니, 이 말씀을 행한다는 것은 전혀 가능해 보이지 않습니다. 적어도 우리가 만나는 공동체속에서 불공평하고 불공정한 권세 앞에 있거나, 때론 악한 권세 앞에 서 있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이 곳에서 사도 바울이 고백하는 권세라는 대상들은, 우리가 흔하지 않게 만나는 악한 권세까지도 다 아울러서 이야기하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악한 것에 대해서는 대적하고 가까이 하지 않으셨듯이, 이곳에서 고백하고 있는 권세는 악하기보다는 '나와 다른 가치와 생각과 결정을 가지고 있는 권세'를 말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로마의 교회안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권세자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또한 누군가를 권세자로 두고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교회라는 공동체속에서 그리고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삶의 현장속에서 그들은 특별히 권세자들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니 때론 그들이 태도나 모습 그리고 결정들이 못 마땅하고 때론 가소로워 보이기까지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그런 이들을 섬겨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겨웠을 지 상상이 되고도 남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1-11장까지 설명되어진 우리들이 붙들어야 할 교리는, 우리들이 삶속에서 실천되어질 때서야 비로소 온전한 교리가 될 수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교리와 삶이 따로 존재하는 삶에는. 그 어떤 회복도 권능의 능력도 일어나지 않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교리의 능력은 조금은 힘겨울지라도, 순종함으로 길을 걸어갈 때서야 비로소 나타내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앞에 서 있는 모든 권세자들을 하나님께서 세우셨다고 믿는다면,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듯 그렇게 섬기며 살아갈 수 있다면, 신자로서의 우리들의 삶은 이전보다 많이 풍성해질 것임을 확신합니다.

오늘도 성령으로 충만하세요! 그리고 승리하세요!

기도문)
주님 감사합니다.
수많은 권세자들을 만나고 때론 나와는 너무나 다른 이들을 만날 때, 우리의 태도와 반응들은 어떠했는지 돌아봅니다.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기 보다는 내 입장만이 가장 소중했으며, 심판하고 정죄하는 것에 익숙했던 나의 모습이 있었음을 회개합니다. 그러기에 복음의 능력으로 풍성해져야 할 나의 삶이 그렇지 못했음을 고백합니다. 악함이 아닌 부족함과 연약함이라고 한다면, 언제든지 주님이 세우신 권세 앞에 순종으로 행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찬양: 평안을 너에게 주노라

04/01/2024

2024.4.1
로마서 12:18-21
하나님은 심판으로, 그리고 우리는 선으로 악을 이긴다

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때론 ‘바보처럼 살라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성경은 마치 자신의 것을 누군가에게 항상 내어주며 양보해야 하고, 이기는 것보다는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찌 보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은 지는 것에 익숙하고 고개 숙이는 것에 익숙하며, 친절을 베풀어야 한다는 강박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삶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사도 바울은 로마의 교인들에게 적어도 악에게 만큼은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지 말고 양보하지 말라고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여느 가르침과는 다르게 반드시 이겨야 하는 상대임을 강조합니다.

도대체 로마교회안에 무슨 악이 있었기에 이토록 사도 바울은 악과 싸워 이겨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고 있는 걸까요? 아마도 이것은 사단의 탈을 쓴 어떤 이단자들을 의미하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성도와 교회를 무너뜨릴 계획을 하고 작정을 하고 달려드는 이들을 의미할지도 모릅니다. 또는 잠시 하나님의 영의 통치속에서 살아가서가 다시 육신의 통치속에 거하게 된 이들을 말하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사울에게 쓰였던 그 악신이 어떤 출발선에서 이들에게 제공되었던지 간에, 현재 그들은 하나님편에서 볼 때는 반대편에 있는 이들입니다.

이런 이들을 향한 사도 바울에게 주신 하나님의 메세지는, 그 악에 대해서 원수를 갚으려고 하지 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특별히 악을 악으로 갚는 실수를 범하지 말하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따라 심판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19절).

우리는 간혹 우리 자신이 심판의 영역까지도 우리에게 주어진 줄 알고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무엇이 죄인지 그리고 그 죄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단호하게 결정하고 판단하며 정죄하는데 익숙해져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의 눈과 귀가 어두워져 잠시 어두움이 우리를 장악한다 했을 때, 그래서 나의 모습에 악신에 쓰인 사울의 모습이 있을 때 누군가 우리들을 정죄만하고 심판하는 데 급급하다면 여러분들의 마음은 어떠신가요? 우리를 정죄할 수 있는 분도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내일을 보여 주실 분도 하나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의 역할은 심판이 아닌, 하나님의 선을 잃지 않는 것임을 사도 바울은 강조하고 있습니다(20-21절).

‘오늘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과 화목하라’고 하는 이 말씀속에는 원수들도 포함되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18절).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 화목을 이루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심판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고 우리는 선으로 그 앞에 서는 것입니다. 그러고보니 저 또한 하나님의 영이 아닌 사람의 영이 더욱 충만하여 하나님을 가로막았던 적이 종종 있었습니다. 그럴 때 누군가 저를 심판하고 정죄하기보다도 선으로 나의 악 앞에 다가왔을 때, 그 악이 자연스럽게 떠나는 것을 경험한적이 여러 번 있었던 것으로 기억이 됩니다.

누군가의 고백처럼 사람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장악하고 있는 그것이 악한 것임이 분명합니다. 부활절을 지나며 그 모든 세력을 장악하신 예수님께 그 자리를 양도하며, 이제는 성령으로 충만하기를 위해 내 속을 성령의 것들로 채워 나가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도 성령으로 충만하세요! 그리고 승리하세요!

기도문)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의 부활이 곧 우리들의 부활이 됨을 믿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으로 인해 완전한 새로움을 입은 저희들의 모습속에 날마다의 더욱 충만한 새로움이 넘치게 하소서. 나를 장악하는 것이 육신의 옛 것들이 아닌, 영혼의 새로운 것들이 되게 하소서. 내가 누군가의 원수가 되고 악이 될 때가 있었듯이, 우리는 누구에게는 원수 같은 존재로 악 같은 존재로 보여질 때가 있습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그저 서로에게 선을 베풀게 하소서. 그것으로 신실하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찬양: 가시나무 새

03/29/2024

2024.3.29
누가복음 23:46
여섯째날은 고난이 극에 달한 날입니다.

46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오늘은 성금요일입니다. 기독교 국가인 북미에서는 ‘Good Friday’라고 해서 휴일로 제정하고 있을 정도로, 이 날은 거룩한 날인 동이시에 좋은(?)날입니다. 이 날이 좋은 날인 이유는 한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죄가 우리의 삶에 왕 노릇하는 존재로 오랫동안 우리를 장악하고 있었지만, 또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더 이상 죄가 아닌 의가 우리의 삶에 왕 노릇하는 삶의 장악가운데로 우리를 초청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어린양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 지시기 위해서 죽음이라는 고난을 향했던 고귀하고 순결하며 거룩한 날인 것입니다. 이 날 예수님의 행적을 보면 그분은 새벽에 붙잡히시어,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십자가에 못박힌 채로 계셨습니다. 마지막 숨이 끊어질 때까지 그분은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그곳에서 내려올 수 있는 기회도 있었고 언제든지 이 고난이 멈출 수 있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그분은 고난이 극에 달하는 이 시간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왜 예수님은 그렇게 해야만 했을까요? 오늘 읽은 짧은 본문은 ‘가상 칠언’, 즉 십자가위에서 예수님이 고백했던 일곱문장의 말씀가운데 마지막 말씀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을 묵상하노라면 우리는 그 고통이 얼마나 힘겨웠는지, 그리고 무엇을 위해서 그토록 그렇게 해야만 했는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잠시 가상칠언을 묵상해보겠습니다.

제1언의 말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눅33:34)”
제2언의 말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제3언의 말씀: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다. 보라 네 어머니라(요19:26~27)”
제4언의 말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마27:46)”
제5언의 말씀: “내가 목마르다(요19:28)”
제6언의 말씀:”다 이루었다(요19:30)”
제7언의 말씀:”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

이 말씀 가운데 마지막 7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고난의 극치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던 비결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영혼이 아버지의 손에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과 우리들의 영원한 영혼의 기쁨을 위하여, 잠시 썩어지는 육신을 사랑하는 이를 위해 언제라도 내어놓을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분이 이 고난의 극치를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보여지고 있는 땅이 아닌, 믿음으로만 보여지는 영원한 하늘을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그런 생각이 듭니다. 나의 영혼을 위해 자신의 육신을 버리신 예수님처럼 나도 누군가의 영혼을 위해 내 것을 포기하며 6시간의 고난의 극치의 순간을 버틸 수 있는 힘이 있을까? 그 힘이 하늘의 소망이어야 한다고 하는데, 나는 정말 하늘을 소망하며 그 곳을 절실하게 느끼게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오늘 하루 예수님으로부터 되찾게 되어진 하늘의 소망을 좀더 묵상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성령으로 충만하세요! 그리고 승리하세요!

기도문)
주님 감사합니다
우리를 위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시고, 끝까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그런 시간으로 인해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을 때론 가볍게 여기고, 다시 죄에 매여 사는 우리들을 용서 하소서. 더 이상 죄에 묶이지 않게 하늘의 힘을 주시고, 오직 하늘의 소망을 두고 주어진 육신의 고난들을 잘 감당하게 하소서. 잠시 사라질 육신의 것을 위해 영원한 영혼을 소홀히 여기지 않고 살아가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찬양: 하늘의 것을 구하며 산다

03/28/2024

2024.3.28
마가복음 14:32-40
오늘은 결정을 확신하는 날입니다.

32 그들이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3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34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35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36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37 돌아오사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38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39 다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40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심히 피곤함이라 그들이 예수께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하더라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인 고난주간 다섯째날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세족식을 거행하셨고 성만찬과 고별설교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겟세마네에 올라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흘러내리듯이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분은 결국 잡혀가게 됩니다. 오늘은 이 날 일어난 세 가지의 사건가운데 ‘겟세마네의 기도’ 대한 내용을 묵상하려 합니다.

이 날은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너무나 중요한 날이었습니다. 십자가라는 목적에 이끌려 살아온 그에게 있어서 이 날은, 그의 결정이 더욱 확고하게 확신 되어져야 하는 날인 동시에 어쩌면 가장 두려운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들의 삶의 과정속에서도 우리는 이러한 결정의 날을 앞두고 있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내일로 다가온 결정 앞에서 기대와 확신과 더불어 두려움과 초조함이 몰려오는 그런 순간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예수님이 선택한 장소는 겟세마네 동산이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은 예수님께서 자주 말씀을 전하시거나 기도하셨던 공간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바쁘고 분주한 사역을 가능하게 해주었던 출발선이자 반환점이었으며 또한 종착역이었습니다. 그곳은 인간의 연약함을 입은 예수님의 연약함이 강건해지고, 다시 하나님의 아들로 재탄생 되어지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 그리고 목적의 방향을 잃고 있거나 확신이 들지 않을 때, 언제나 찾아갈 수 있는 답이 기다리고 있는 그분 만의 영적 동굴이었던 것입니다. 영적 재중전의 장소였던 것입니다.

사실 죽음을 앞두고 있었던 예수님의 고민이 작지 않았음을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은 어찌 보면 십자가를 져야 할지 말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으로도 비추어질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인간의 몸을 취한 예수님의 인간적인 두려움과 초조함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결정하고 확신한 것에 대해 아이러니하게도 두려움 또한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향해 우리는 ‘분명한 확신이 결여되었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확신을 얻기를 원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두려움과는 전혀 다른. 기대와 소망으로 가득한 확신이 주어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겟세마네를 찾아온 것입니다. 야곱이 벧엘을 찾고 모세가 시내산을 찾으며 엘리야가 호렙산(시내산)을 찾으며 두려움 없는 확신을 발견했듯이, 이곳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곳에서 그런 예수님과는 다르게 제자들이 잠에 빠져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들의 이러한 모습은 여전히 예수님의 목적과 자신의 목적이 일치되지 않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분과 일치되지 않으니 당연히 그들이 예수님처럼 확신을 가져야 할 일이 필요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아직까지 하나님 나라에 있어서는 외부인이었던 것입니다.

오늘은 그런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라는 목적을 향해서 길을 가시는 예수님의 길과 나의 길은 어떤 '같음'이 있고 '다름' 있는 걸까? 혹시 오늘 제자들의 모습처럼 같은 길을 걷고 있는 것 같지만, 같은 곳이 아닌 전혀 다른 곳을 향하고 가는 것은 아닐까? 같은 마음으로 같은 목적을 향한다고 한다면, 우리들 또한 목적이 희미해지고 두려움이 엄습할 때 자신들만의 겟세마네를 찾아가야 하지 않을까? 그럴 때 우리가 자주 찾게 되는 곳은 어디인지 생각해보며 다시 겟세마네로 향하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겟세마네와 멀어지지 않는 삶, 그런 삶이 하나님 나라를 함께 이루어가는 삶임을 다시 한번 배우게 됩니다.

오늘도 성령으로 충만하세요! 그리고 승리하세요!

기도문)
주님 감사합니다.
이제 예수님이 결정한 것을 이루는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기대와 소망도 있었지만 분명 두려움과 초조함도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더 명확한 확신가운데 서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길을 선택하는 모습을 바라봅니다. 이 확신이 인류의 구원을 이루었음을 바라보면서, 우리들에게도 확신을 주소서. 겟세마네에 올라 그곳에서 명확한 확신이 주어지게 하소서. 나의 겟세마네를 그리워하고 찾아가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찬양: 내가 꿈꾸는 그곳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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