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스턴 한인 성당 Kingston Korean Catholic Church

킹스턴 한인 성당 Kingston Korean Catholic Church St. Mary Cathedral 본당 뒷편에 있는 St. James Chapel 에서 매주 주일 오전 9시에 한국인 신부님 집전하에 미사있습니다.

08/20/2022

킹스턴 한인성당은 피터보로 한인순교자성당 산하 킹스턴구역입니다.

킹스턴 한인성당에서는 신앙공동체의 믿음성장과 기도생활의 성숙을 위해 행해지는 정규모임이 있습니다.

1. 매달 진행되는 모임

- 기도모임
일시: 매달 첫번째 화요일 저녁 7시
장소: 그 상황에 맞춰서 정한다
내용: 묵주기도와 복음독서및 나눔, 의논과 의견나눔 등등

- 구역미사
일시: 매달 세번째 어느요일(신부님과 논의) 저녁 7시
장소: 한 가정
내용: 신부님 모시고 하는 가정미사및 함께 음식나눔과 친교

2. 매해 진행되는 모임

- 킹스턴 야외미사
일시: 매해 5월 빅토리아데이 오후 12시
장소: Rotary Park (추후 장소안내)
내용: 신부님 집전하에 야외에서 미사진행, 함께 음식과 친교나눔 등등

3. 합동미사및 행사

피터보로 한인 순교자성당의 한 구역으로써 *주변 모든 구역 식구들이 본당에 함께 모여 진행하는 미사와 행사입니다.

*주변 모든구역은 대략 킹스턴과 광역토론토전까지의 소도시에 소재하는 피터보로 한인 순교자성당의 구역들을 의미합니다.

매해 본당에서 배부하는 연중행사표를 참고합니다.

04/04/2022

● 보편 지향 기도'는 에 나온 대로 하면 되나요?

전례에 참여한 교우들이 공동으로 바치는 기도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보편 지향 기도 (신자들의 기도)'입니다.

보편 지향 기도는 세상 구원에 대한 사명을 지닌 공동체의 간청이기에 말 그대로 모든 사람을 위한 폭넓은 기도여야 합니다.

보편 지향 기도는 '나' 중심의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넓은 지평으로 눈을 돌리게 해 주고, 인류와 전체 교회의 거대한 원의에 대한 책임을 일깨워 줍니다.

보편 지향 기도는 모임의 공동 기도이며, 그곳에 모인 사람들과 관계가 있는 구체적인 기도입니다. 이 기도의 지향 순서는 모든 교회, 전 인류와 같은 보다 폭넓은 개념의 공동체를 위한 기도로 시작하여, 자신이 속해 있는 공동체를 위한 기도로 이어집니다. 그 지향은 여러 차원의 공동체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첫째 부분에서는 모든 교회를 위해 기도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란 그리스도의 몸인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이므로, 하느님 백성이 된 사람, 즉 모든 교우, 교회 전체, 세계의 모든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둘째 부분에서는 시야를 넓혀 전 인류, 즉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 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합니다.
셋째 부분에서는 긴급하고 필요한 일을 위해 기도하는데, 그것은 모든 차원의 공동체를 위한 아주 구체적인 내용이면 됩니다.
넷째 부분에서는 우리 공동체, 예를 들어 본당이나 지역 공동체 또는 각종 단체 등에 속해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합니다.

이처럼 깊은 의미를 가진 보편 지향 기도를 바치는데 있어, 많은 공동체가 등의 소책자에 제시된 것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예문에 불과하기 때문에 각 공동체 실정에 맞게 언제나 새롭게 만들어 바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또한 새롭게 기도문을 작성할 때는 되도록 간결하게 해 공동체 전체가 기도의 핵심을 쉽게 알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04/04/2022

◈ 주일 미사 독서는 어떻게 정해지나요?

말씀 전례는 하느님 말씀과 인간의 말로 이루어집니다. 이는 하느님 말씀을 듣고 인간이 이에 화답하는 대화 형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드리기 위한 것이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 봉독'입니다.

제2차 바티간 공의회 이후 말씀 전례가 강조되어 성찬 전례와 함께 중요한 요소로 부각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성경의 주요 부분을 교우가 많이 모이는 주일에 다 듣도록 13년 주기로 배정하였습니다.

주일 미사 독서는 먼저 그리스도의 구원 행적과 가르침을 복음에서 택하고 그것과 어울리는 내용을 구약성서에서 택합니다. 그리고 그 복음 말씀을 어떻게 생활화할 것인가에 대한 사도들의 가르침을 사도들의 서간에서 택합니다.

교회는 이처럼 주일 미사를 위한 독서로 제1독서는 구약성경, 제2독서는 사도들의 서간, 제3독서는 복음을 봉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해, 나해, 다해의 3년 주기로 나누어, 복음에 있어서는 공관 복음을 중심으로 가해에는 마태오 복음, 나해에는 마르코 복음, 다해에는 루카 복음을 봉독하여 묵상합니다. 요한 복음은 특별 시기, 즉 대림, 성탄, 사순, 부활시기 등에 주로 봉독하게 됩니다.

이처럼 교회가 교우들이 하느님 말씀을 음미하며 그리스도의 구원 신비를 잘 살 수 있도록 주일 미사를 위한 3년 주기의 독서를 배정해 놓았으므로, 우리는 그 주일의 독서 부분을 소중히 여기고 그 말씀을 음미하면서 매일의 생활에서 활기를 얻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04/04/2022

♡ 가족 세미나 ♡
- 이서원 프란치스코

제일 가까운 사람이면서 가장 먼 사람은 누구일까요? 답은 가족입니다. 늘 가까이 있어서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남보다 더 모르는 사람이 가족일 수 있습니다.

어느 해, 가족들끼리 세미나를 해보면 어떨까 싶었습니다. 형제들에게 온 가족이 모여 세미나를 하면 어떻겠냐고 의견을 물었더니 다들 반응이 시큰둥했습니다. 굳이 할 필요가 있겠냐는 눈치였습니다.
이번에는 10대와 20 대였던 조카들에게 가족 세미나를 하면 참석하고 싶냐고 물었습니다. 조카들이 가장 먼저 보인 반응은 호기심이었습니다. 그게 뭐냐는 거였습니다.
“응, 가족들이 다 모여서 너희들이 발표하고 삼촌이나 고모들이 질문하는 거야.”
“야, 재미있겠다. 해요 삼촌.”
조카들의 호기심과 응원 덕분에 엄마, 아빠 들이 동의하여 첫 번째 가족 세미나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가족 세미나의 주제를 '나의 꿈, 나의 미래 (My dream. My future)'로 정해 조카들이 발표를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 발표자로 나온 조카는 뉴질랜드로 가서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죽고 싶은 생각이 여러 번 들었다는 이야기로 부모는 물론 할머니와 다른 가족들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방학에 집에 왔을 때마다 아이에게 그저 잘 있다는 말만 들어오던 가족으로서 여간 놀라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이가 눈물을 흘릴 때 가족들이 같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저 깊은 마음 속 사정을 모르고 있었구나!' 반성이 되었습니다.
조카는 장래 꿈이 디즈니 같은 회사에서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그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 발표자로 나온 조카는 온 세상의 땅을 발로 밟아보는 게 꿈이라고 했습니다. 고모부가 물었습니다. “돈은 어떻게 할 거야.” 그 말에 조카가 대답했습니다. “네, 그것만 문제인데요.” 온 가족이 뒤집어졌습니다.
그 뒤 세 명의 조카도 자기 속마음과 꿈을 이야기했습니다. 부모와 가족들은 늘 알고 있던 자식, 조카가 아니라 마치 처음 만난 모르는 사람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아 계속 입이 벌어졌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던 아이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 아이들은 부모와 가족이 모르는 많은 고민을 하고 있었고, 때론 황당하기까지 한 미래에 대한 꿈을 꾸며 그 꿈을 향해 외롭게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걸 왜 쓸데없이 하냐고 하시던 할머니는 가족 세미나를 마치고, 몇 번이나 이런 가족 모임을 만들어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했습니다.
저런 마음으로 아이들이 자라고 있는 줄 모르고, 그저 몸 건강하고 헤헤거리며 잘 지내는 줄만 알았다는 거지요.

가족 세미나 후에 많은 변화가 우리 가족에게 찾아왔습니다. 아이들은 꿈을 하나씩 이루어나가고, 있고, 그것을 아는 가족들은 격려와 도움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진짜 가족이 된 것입니다.

어느 신학대 학생이 자신의 장점은 예수님을 아는 것이고, 단점은 잘 알지는 못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가족도 그런 게 아닐까요.

가족을 잘 알고 하느님도 잘 아는 그런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가족 세미나 한번 해보시면 어떨까요.

04/04/2022

♡ 간섭 없는 세상이 천국♡
- 이서원 프란치스코

3대가 한집에 살며 다툼 한번 없이 평화롭게 사는 집이 있습니다. 제가 26년째 상담을 배우고 있는 이근후 선생님 댁입니다.
선생님께 비결을 묻자 한마디로 대답하셨습니다. “우리 집에는 서로 간섭이 없다.”

선생님은 처음 자녀들이 집을 짓고, 3대가 모두 함께 모여서 살고 싶다고 했을 때 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예티의 집 헌장'을 만들었습니다.
평생 네팔 의료봉사를 해오신 선생님은 히말라야에 산다는 전설의 설인 예티의 이름을 따서 예티의 집이라고 함께 살 집 이름으로 지으시고 지킬 규칙을 헌장으로 만드신 거지요.

헌장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간섭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한 건물에 층을 달리해 같이 사는데, 인터폰으로 서로 연락을 합니다.
이유는 부모라고 시도 때도 없이 문 열고 들어가는 건 되도록 자제하기 위해서입니다. 전화해서 지금 올라가도 되는가를 물어보고, 좋다고 하면 갑니다.

선생님이 '간섭하지 않기'를 3대 공존의 핵심으로 삼게 된 것은 정신과 의사로서 평생에 걸쳐 경험하며 깨달은 바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문제 가정이 그렇게 된 원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지나친 간섭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간섭은 침해이며 ' 무례이기에 아무리 가까운 가족도 견딜 수 없어 정신적인 문제로 드러난다는 것을 수없이 확인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간섭은 사실은 따뜻한 관심과 사랑에서 나옵니다. 관심이 없다면 간섭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쨌든 관심과 애정이 있으니 간섭을 하게 되는 것이죠.
문제는 방법에 있습니다.

열심히 하는 것과 잘하는 것은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것과 사랑하는 방법은 다릅니다. 간섭은 사랑하는 마음이 문제가 아니라 사랑하는 방법이 문제인 겁니다.

우리는 옛날 옹기종기 모여 살던 마을에서 남의 집 숟가락 숫자까지 알려고 하던 마음의 습관이 남아, 조금만 누구와 친해지면 속속들이 모든 걸 알려고 합니다. 그리고 간섭을 시작합니다. 나에게는 애정의 표현이 상대에게는 참견과 간섭이 되는 것을 모릅니다.

얼마 전 한 여자와 두 번째 결혼을 한 남자를 상담한 적이 있습니다. 이혼했다가 같은 여자와 다시 함께 사는 남자였습니다. 남자는 요즘 새로 결혼한 것 같이 너무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이유를 묻자 이근후 선생님과 글자 하나 다르지 않은 대답을 했습니다.
이제 저희는 간섭이 없습니다.”
조금만 수가 틀리면 이혼을 다시 해야 하기에 일체 참견이나 간섭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자 집이 날마다 천국이 되더라고 했습니다.

집을 천국으로 만들고 싶다면 간섭부터 없앨 일입니다.

03/22/2022



● 제대에 왜 절을 하나요?

제대는 교회의 원천이요 머리요 중심이신 그리스도의 신비의 표지입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그리스도 없이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제대 없이 그리스도를 언급할 수 없다" 라고 데살로니카의 시메온은 말했습니다.

이처럼 제대는 전례 거행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신학적으로도 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고린토 1서 10장 21절에서 사도 바오로가 언급한 것처럼 그리스도교의 제대는 '주님의 식탁'입니다. 제대는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가 자신의 사제직을 통하여 인간 구원과 하느님과 인간의 화해를 이루는 데 필요한 희생 제사를 재현하는 식탁인 것입니다.

따라서 제대는 하느님과 하느님 백성 사이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중심점이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놀라운 교환이 이루어지는 곳도 제대입니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전례 거행 중 가장 중심이 되는 곳은 제대이며, 교회는 그리스도의 상징으로서 제대에 대해 깊은 존경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제는 미사 입당 때나 퇴장 때 제대에 대한 존경으로 제대 앞에 나아가 정중히 절을 합니다. 때로는 제대에 분향을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사제는 복음 봉독 전에도 제대 앞에 나아가 고개를 숙이고 "전능하신 하느님, 제 마음과 입을 깨끗하게 하시어, 합당하게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게 하소서" 하고 기도합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교우도 제대 앞을 지나갈 때면 고개 숙여 존경을 표시합니다.

03/22/2022

즐겁게 기다려 주시는 하느님♡

- 이서원 프란치스코(한국 분노 관리 연구소장)


삶은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지금은 보스턴에서 공부하고 있는 신부님을 처음 만난 건 기다림을 통해서였습니다. 신부님은 수도자로서 신학대학원 상담심리학 수업을 듣는 저의 제자였습니다. 우연히 보게 된, 신부님이 찍은 사진 한 장이 제 눈길을 사로잡았습 니다.

뉘엿뉘엿 해가 넘어가는 시간, 중년의 한 남자가 오래된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모습을 담은 사진이었습니다.

신부님은 그 사진 한 장을 찍기 위해 긴 시간 카메라를 들고 기다렸다고 합니다. 그 사진을 본 계기로 신부님과 도서 "보이는 마음" 의 공동 저자로서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수도자가 되기 전 사진작가였다는 신부님은 사진은 기다리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원하는 장면을 카메라 앵글에 담기 위해 올지 안 올지도 모를 순간을 한없이 기다리는 일이라는 거지요. 기다린다는 말이 제 마음에 콕 박혔습니다.

그 후 저도 신부님의 사진을 기다려 사진에 제 글을 담기 시작했습니다.
자전거를 탄 중년 남자의 사진에는 '달리는 것은 바퀴인가, 자유인가'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신부님에게 그렇게 기다리면 힘들지 않느냐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신부님은 원하는 한 장의 사진을 위해 기약 없이 기다리는 일은 괴로움이 아니라 즐거움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닮은 삶을 살아가기를 기다리는 일도 기약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기다림은 괴로움이 아니라 즐거움일 것입니다.

누군가의 재촉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어려움과 고통을 뚫고 하느님을 내 안에 받아들이고 살아가기를 하느님께서 말없이 기다리신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신부님과 사진 에세이를 함께 써나가면서였습니다.

신부님의 사진 말에 제 글말을 다 합한 후에도 책으로 내줄 출판사를 기다려야 했고, 출판사가 정해진 후에도 출간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으며 출간된 후에도 독자들을 만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이 늘 즐거웠습니다.

신부님이 기다리는 일은 즐거운 일이라는 것을 알려준 덕분이었습니다. 이 신부님과 만난 이후로 인생이란 기다림의 연속이라는 것이 보였습니다.

아이를 임신한 엄마는 아이가 나오기를 기다리고요. 세상에 나오면 앉기를 기다리고, 앉으면 서기를 기다립니다. 그러다 학교에 가기를 기다리고, 취업하기를 기다리고, 좋은 배우자를 만나기를 기다립니다.

그런데 돌아보니 그간 제 기다림은 늘 초조함과 불안으로 쌓여 있었습니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즐겁게 기다릴 수 있었을 텐데 싶습니다.

요즘 저는 저를 즐겁게 기다립니다.

하느님 닮은 좋은 삶을 살아가는 저를 즐겁게 기다리고, 가족들과 성가정을 이루는 저를 즐겁게 기다립니다.

앞으로도 기다리는 일은 늘 즐거운 일이 될 것 같습니다. 제 속과 제 밖의 참 좋은 세상을 즐겁게 기다립니다.

2020,3,25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이사야 7,10-14; 8,10ㄷ히브리 10,4-10루카 1,26-38존재 자체로 순례 하는 우리들에게 확실한 희망과 위로의 표지가 되어주시는 성모님!가브리엘 천사가 전해준 하...
03/25/2020

2020,3,25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이사야 7,10-14; 8,10ㄷ
히브리 10,4-10
루카 1,26-38

존재 자체로 순례 하는 우리들에게 확실한 희망과 위로의 표지가 되어주시는 성모님!

가브리엘 천사가 전해준 하느님 측의 메시지 ‘주님 탄생 예고’ 앞에 보여준
나자렛의 마리아의 모습이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놀랍고 은혜로운 초대, 그러나 부담스럽고 두려운 초대 앞에 마리아는
즉각적이고 호의적으로 응답합니다.
나자렛 소녀의 응답의 말씀이 참으로 기특하고 갸륵하며 사랑스럽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카 복음 1장 38절)

단순하면서도 겸손한, 그러나 단호한 결기로 가득한 마리아의 응답 앞에서
하느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시고 흐뭇해 하셨을 것입니다.
하느님 입장에서 그녀를 각별히 사랑하시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럴 때 어울리는 표현이 아마도 총애(寵愛)가 아닐까 싶습니다.

나자렛의 마리아에 앞서 이스라엘 역사 안에는 수많은 위인들과 예언자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그들이 보인 반응들을 보면 제각각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왜 하필 저입니까?”하고 하느님께 따졌습니다.
어떤 예언자는 “죽어도 못합니다?”라며 도망가버렸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런 저런 핑계를 댔습니다.
“저는 이미 나이가 너무 많습니다. 이제 곧 세상을 하직할 나이라 죄송합니다!”
“제 나이 이제 열 여섯입니다. 도저히 자신이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마리아께서 보인 응답은 참으로 각별합니다.
예라고 응답했을 경우 자신에게 닥쳐올 고통과 시련이 엄청날 것임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주님께서 저를 원하시니, 주님께서 저를 선택하셨으니, 주님께서 저를 초대하시니,
앞뒤 돌아보지 않고 예! 라고 응답하신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다양한 형태로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많은 경우 우리의 귀, 영적인 귀, 마음의 귀가 제대로 열리지 못한 관계로,
초대의 말씀을 미처 듣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매일의 다양한 사건들,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서 말입니다.

다양한 음성을 통해 매일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느님의 초대,
하느님의 음성을 나자렛의 마리아처럼 잘 경청할 수 있는 은혜를 청해야겠습니다.

하느님의 초대 앞에 망설인다거나 뒤로 물러서지 말고 기쁘게, 즉각적으로
순명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영성생활이란 다른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음성,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인간측의 적극적인 호응과 응답과 협력,
그것이 참된 영성 생활이 아닐까요?
그런 면에서 나자렛의 마리아는 가장 충실하고 모범적인 영성생활의 길잡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마리아는 존재 자체로 순례 하는 하느님 백성인 우리들에게 확실한 희망과
위로의 표지가 되어주시니, 기쁨에 찬 감사와 공경을 드려야 마땅하겠습니다.
척박한 산골 나자렛에서 태어나신 마리아께서 평생에 걸친 순명과 기도,
각고의 노력 끝에 영광스럽게도 하느님의 어머님이 되셨습니다.
성모님의 생애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각자에게도 큰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한없이 부족한 우리들이지만 우리도 노력하고 또 노력하면 하느님의 큰 영광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오늘 우리는 기억해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가톨릭 사랑방 catholicsb

++++++++++++

2020,3,25 가해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이사야 7,10-14; 8,10ㄷ
히브리 10,4-10
루카 1,26-38

나를 낮추는 말보다 나를 높이는 말이 믿기 더 어렵다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은 커다란 믿음의 시험을 받습니다.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으니까, 하느님의 어머니가 된다는 믿음의 도전입니다.

어찌 보면 그냥 “아멘!”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을 낮추는 말보다 높이는 말을 더 믿기 어려워합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 마리아께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라고 인사했습니다. 만약 누가 “나는 네가 어젯밤에 한 일을 알고 있다.”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섬뜩할까요?

이것이 나를 높여주시려는 하느님의 뜻을 믿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높아지면 그 높은 수준의 삶을 살기가 부담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끊임없이 ‘자신의 가치에 대한 믿음’을 낮추려 합니다.
즈카르야는 예언자의 아버지가 된다는 말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가 된다는 말도 믿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어머니로서 수행해야 하는 소명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래서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신체적 장애를 남과 다른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 ‘영국의 살아있는 비너스, 앨리슨 래퍼’의
이야기입니다.

래퍼는 두 팔이 없고 기형적으로 짧은 다리를 지니고 태어나 생후 6주 만에 거리에 버려져
19년 동안 복지시설에서 자랐습니다.
스물한 살 때 결혼했지만 남편의 폭력 때문에 9개월 만에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이후 주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장애인의 몸으로 혼자서 아들 패리스를 낳았습니다.
그녀는 이런 상황에서도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입과 발로 그림을 그리는 구족화가 겸
사진작가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불편한 자신의 몸을 숨기지 않고 작품의 소재로 삼는 등
적극적인 방식으로 장애를 극복했으며, 2003년에 스페인 ‘올해의 여성상’과
영국 왕실에서 수여하는 ‘대영제국 국민훈장’을 받았습니다.
2005년에는 ‘세계 여성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장애를 갖고 태어났지만 행복하다. 장애인을 일컫는 ‘disable’이란 말은
사회에서 만들어 낸 것이지 앨리슨, 나 자신에 의해 만들어진 게 아닙니다.
나는 그저 남들과 조금 다를 뿐입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전혀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

래퍼는 작품 활동을 할 때마다 장애인의 몸이 정상인과 다르다는 것은 문제 되지 않으며,
오히려 그 다름이 내 몸을 특별하고 아름답게 만든다는 것을 깨닫는다고 합니다.

그녀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장애인으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사랑했으며,
나아가서 자부심마저 느꼈다고 말합니다.

[출처: ‘안식일학교; 교과토의 자료, 제9과 자존감, 다음 카페]

사람의 삶의 질은 ‘자신이 어느 만큼 귀중한 존재이냐는 믿음’에 의해 결정됩니다.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까지 믿으셨습니다.

사실 우리도 교회라는 가브리엘 천사를 만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는 나도 예수님과 한 몸이 되어 하느님을 모신 성전이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말에 “아멘!” 하며 예수님을 우리 안에 모십니다.
이제는 우리가 사람의 수준이 아니라 하느님의 수준까지 올라가게 된 것입니다.
교리서는 “교회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단순히 그리스도인이 된 것뿐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 자신이 된 것”
이라고 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의 머리로 보내 주신 이 은혜를 이해하십니까-
놀라고 기뻐하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가 된 것입니다.
사실 그분은 우리의 머리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지체이기 때문에
그분과 우리는 온전히 한 인간입니다.”(795)

정말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이면, 그분의 뜻을 따라주기는 해야겠지만,
하느님의 유일한 자녀와 한 몸으로서 두려울 것이 없어야 합니다.

하느님이 누구를 두려워하고, 무엇을 걱정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 믿음을 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하느님은 성모 마리아에게서처럼 우리에게도 이 믿음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믿음이 나의 정체성이 되고, 나의 정체성만큼 변한 삶을 살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핵심이 담긴 교리를 하나 더 보도록 하겠습니다.
“‘말씀’은 우리를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2베드 1,4) 하시려고 사람이 되셨다.
‘바로 이 때문에 ‘말씀’은 인간이 되시고, 하느님의 아들은 사람의 아들이 되셨다.

인간이 ‘하느님의 말씀’과 친교를 맺고, 자녀 됨을 받아들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려고
성자께서 인간이 되셨다.’
‘그분은 우리를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고 인간이 되셨다.’
‘하느님의 외아들은 당신 신성에 우리를 참여시키시려고 우리의 인성을 취하셨으며,
인간을 신으로 만들기 위하여 인간이 되셨다.’”(460)

하느님께서 저희를 하느님이 되게 하셨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하느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된 것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한 것입니다.

그 사람 안에서 하느님의 본성인 ‘사랑’이 나와 분명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고 있을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신다는 것까지 믿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들어 높여주시려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있습니까?
하느님이 된다는 것까지 믿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성모 마리아의 믿음을 닮으신 것입니다.

* 공지: 유튜브 강론을 보시려면 유튜브 검색창에 “삼용 묵상”만 치시면 됩니다.
그리고 해당하는 날짜의 강론을 찾아 클릭하시면 됩니다.
묵상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전날 저녁 6시에 올리기로 하겠습니다.
동영상을 통해 여러분을 더 가까이 만나 뵐 수 있게 되어서 기쁘고 감사드립니다.
https://youtu.be/tUmWNYzk4IQ
(유튜브 묵상 동영상)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가톨릭 사랑방 catholicsb

바티칸 시각으로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인 오는 25일 정오토론토는 25일 아침 7시한국시각으로는 25일 저녁 8시입니다
03/24/2020

바티칸 시각으로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인 오는 25일 정오

토론토는 25일 아침 7시

한국시각으로는 25일 저녁 8시입니다

▲ 프란치스코 교황 22일 사도궁 도서관에서 주일 삼종기도후 메시지를 발표하고 있다. (바티칸 미디어 캡처)프란치스코 교황이 코로나19 사태의 극복을 위해 전 세계 모든 그리...

03/13/2020

♡ 만남 ♡
- 고 준석 토마스 데 아퀴노 신부

손수건 같은 만남이 있다. 상대가 슬플 때 눈물을 닦아 주고 그의 기쁨이 내 기쁨인 양 축하하고, 힘들 때는 땀도 닦아 주며 언제나 함께 하는 만남을 말한다.

수십 년을 함께 산 부부와 같은 만남이요, 한 번의 만남으로 삶 자체가 바뀔 수 있는 운명적인 만남이다. 같은 만남이 있다. 오늘 복음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과의 만남이다.

한 여인이 있었다. 이 여인은 남편도 자녀도 없었다. 사는 것이 답답하고 허무하고 우울했다. 여인의 마음 한구석에는 채우려 해도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이 있기 때문이다. 그 목마름은 육체적인 목마름이 아니라 영적인 목마름이었다.

이제 여인은 육적인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 우물가로 물을 길으러 간다. 그곳에서 여인은 운명적인 만남을 갖는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지방 한 마을을 지나가시다가 갈증을 느끼셔서 우물을 찾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 목마른 여인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요한 4, 14)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이리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요한 4, 15) 육적인 갈증을 해결할 우물가의 물이 아닌 영적인 목마름을 해결할 물을 찾던 여인의 간절한 외침이다.

이제 여인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그분이 누구신지 서서히 알아가고 자신의 채울 수 없는 목마름을 해결해 주실 분이 바로 자기 앞에 앉아 계신 예수님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사람들에게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니실까요?”(요한 4, 29)라는 말을 하게 된다.

사마리아 여인의 모습은 많은 문제를 안고 살아 가는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그렇듯이 우리 모두는 각자 나름대로의 목마름을 가지고 있다. 특히 우리는 참된 삶에 목말라하고 있다. 그 목마름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이런 면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이다.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분은 아무리 퍼내도 마르지 않는 영원한 구원의 샘이시기 때문이다.

03/06/2020

♡ 일상 안에서 겪는 떠남과 포기의 여정 ♡ - 박준양 세례자요한 신부

오늘의 제1독서는 사순 시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들로 하여금 다시 한번 마음 자세를 가다듬게끔 촉구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을 부르시며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이라는 안정된 현실과 결별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대안으로 제시하시는 것은 아직은 볼 수 없는 ‘장차 보여줄 땅’일 뿐입니다. 아브람은 “미지의 땅, 확실한 보장이 없는 미래를 위해서 자신의 현실적 기반을 송두리째 포기해야 하는가?”라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던지셨던 것과 똑같은 도전을 우리에게도 던지고 계십니다. 우리의 모든 기득권과 심리적인 안정성마저도 모두 포기하고 새로운 땅으로 떠날 것을 요구하십니다. 내 생활을 지탱시켜주는 그 모든 것, 이를테면 나의 재산, 권력, 재능, 인맥 등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이 정도로 살면 흠잡을데가 없겠지”, “이 정도 신앙생활이면 하느님도 만족하실 거야”라는 자족감으로부터도 떠나야 합니다.

소유의 정도에 따라서 사람의 가치가 평가되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아브람처럼 자신의 모든 기반을 포기하고 떠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지도 모릅니다. 흠잡을데 없는 듯한 자신의 사회생활, 신앙생활에 대한 자부심과 자족감마저 버리라는 것은 지나친 자기 비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 어떠한 것, 이것이 없어진다면 나의 현실적인 존재 가치가 그야말로 송두리째 파괴되고 말 그것이라 하더라도, 거기에 대한 우리의 집착이 남아 있는 한 우리는 결코 하느님의 뜻을 알아 볼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람처럼 모든 것을 포기하고 떠나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고 하느님께서 보여주실 땅에 도달할 수 있는 법입니다.

우리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이러한 떠남과 포기가 결코 일회적일 수 없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일상의 매순간 안에서 떠남과 포기의 여정을 지루하게 겪어야만 합니다. 내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는 자기 포기의 결단이 내 삶 안에서 순간순간 연속성을 이룰 때 우리는 참으로 아무 것도 갖지 않는 ‘빈 손’과 ‘빈 마음’의 상태가 될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빈 손’과 ‘빈 마음’의 상태에서만이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부활을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아멘.

Address

279 Johnson Street
Kingston, ON

Website

Alerts

Be the first to know and let us send you an email when 킹스턴 한인 성당 Kingston Korean Catholic Church posts news and promotions.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used for any other purpose, and you can unsubscribe at any time.

Share